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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낭만에 대하여
설 즈음, 오랜 친구가 밤에 불쑥 전화를 했다. “방 청소를 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문집을 발견했는데, 네가 아주 변태같은 글을 써놔서 네 생각이 났다”는 전화였다. 그렇다. 그는 나의 좁은 인간관계에서 악우(惡友)라는 농이 어울리는 귀한 친구다. 나는 또 나대로 그 말에 흥미가 동해, 문집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그는 얼마 후, 정말 문집에
글: 정소연 │
일러스트레이션: 다나 │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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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답 없는 생활
“강박이 좀 있으신 것 같군요. 정확히는 강박으로 인한 불안이에요.” 정신과의사는 내 불안의 원인이 강박이라고했다. 특히 의사소통에 있어서 완벽하게 전달하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와 강박은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나는 미역국을 먹고도 시험을 볼 수 있고, 심지어 짝짝이 양말을 신고도 외출을 할 수 있는
글: 이동은 │
일러스트레이션: 박지연 │
2020-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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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나쁜 전통과 ‘끊어진 팔’
1940년 1월, 조선어로 쓰이는 몇 안 남은 문예지인 <문장>에 ‘문학의 제諸 문제’라는 흥미로운 좌담 기록이 실린다. 대표적인 조선 문인들이 총출동한 이 좌담에서 ‘문학상’은 뜨거운 화두였다. 일본 문학계가 ‘조선예술상’을 제정해 조선문학을 오키나와문학·규슈문학 같은 ‘지방문학’으로 흡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태준이 “상의 명예
글: 오혜진 │
일러스트레이션: 다나 │
2020-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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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완성의 역설
음악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두개의 사운드트랙이 등장한다. 에이드리언 챈들러와 라 세레니시마가 연주한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이 하나고, 영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찬트가 다른 하나다. 여인들 각자가 완전히 다른 음을 내어 만들어낸 불협화음은 이내 화음을 이루는 3개의 음으로 수렴
글: 김겨울 │
일러스트레이션: 박지연 │
20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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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죽음과 마주하기
나는 사람이 죽는 이야기를 잘 보지 못한다.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다. 대부분의 픽션이 이에 해당한다. 이야기가 생사를 다루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을지 모른다. 생사는 중요한 화두니까. 당장 이렇게 말하는 나만 해도 죽음을 다룬 소설을 몇 편 썼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죽음을 꺼린다. 죽음에 대한 묘사를 꺼리고, 불필요한 죽음을 꺼린다.
글: 정소연 │
일러스트레이션: 다나 │
20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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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학생인데요
“학생, 나 이것 좀 도와줘.” 종로3가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는데 한 어르신이 제법 무거워 보이는 짐을 들어 보이며 도움을 청했다. 어르신의 말에 민망했던 건 내가 짐을 들어주기에 적당한 근력을 지니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학생”이라는 호칭 때문이었다. 어르신, 저는 결혼해서 자녀를 두었다면 그 아이가 학생 소리를 들을 나이인데 학생이라니요. 누가 들
글: 이동은 │
일러스트레이션: 박지연 │
2020-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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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2020년대의 인간성
새해가 시작된 지 한주가 지났건만 2와 0이 규칙적으로 두번 반복되는 ‘2020’이라는 숫자가 여전히 생경하고 상서롭기만 하다. 조지 오웰에게는 1984년이, 노스트라다무스에게는 1999년이 인류에게 파멸을 선사할 적기(適期)로 여겨졌고, 스탠리 큐브릭이 1968년에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만들 때만 해도 인간이 진짜 달에 갈 줄
글: 오혜진 │
일러스트레이션: 다나 │
2020-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