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은 장학사업을 하고 있다. 베트남, 캄보디아, 네팔에서 여학생들의 고등교육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장학사업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우선 내가 장학생들을 만나러 가지 못한 것이다. 원래 5월에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가서 장학금과 물품 수여식을 하고, 장학생들과 라포(정서적 친밀감과 신뢰) 형성을 한다. 혹시나 해서 일정을 잡았지만 역시나 행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대신 편지를 쓰고 선물을 준비했지만, 방역 때문에 보낼 수 없었다. 이동을 초기부터 통제한 베트남에서는 고등학교는 휴교하고 대학교는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했다. 캄보디아의 장학생들은 수업도 받고 봉사활동도 하고 축제도 하고 있었다. 네팔의 고등학교도 휴교를 했다. 휴교를 한 나라나 하지 않은 나라나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특히 장학생들의 통학시간이 긴 네팔이 걱정이었다. 네팔에는 장학생이 다섯명 있는데, 카트만두 시내에 사는 장학생은 한명뿐이고 나머지는 고산지대에서 온다. 5월 말경, 네팔 현지 활동가로부터 장학생들과 한달 넘게 연락이 안돼 집에 찾아가보겠다는 연락이 왔다. 장학생들을 학교에 보낸 것은 고등교육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인신매매를 비롯한 각종 위험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학교가 문을 닫아 등하교가 없어졌고, 그래서 장학생들의 거취가 확인되지 않으니 불안했다. 그나마 소수민족이던 장학생 한명이 2019년에 시민권을 취득해 모두 국적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다행히 장학생들은 모두 자기 집에 있었다. 센터에 찾아오지 않았던 것은 그저 지난 학기 성적이 좋지 않아 부끄러워서였다고 했다. 코로나19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10대 여자아이의 마음을 알겠기에 나무랄 수 없었다. 나는 제발 사라지지만 말라고 당부했다. 공부를 잘 못해도 괜찮아. 사라지는(disappear) 게 실망시키는(disappointing) 일이야. 그새 잠깐 문을 열었던 학교는 다시 문을 닫았다. 8월 초순이라던 기말시험은 지금까지 계속 연기되고 있지만, 장학생들은 이제 착실히 현지 활동가에게 연락하고 있다.
그사이 캄보디아도 원격수업으로 전환되었다. 대학교 옆 보다 기숙사에 있던 장학생들이 본가로 돌아갔다. 곧 우려했던 사태가 발생했다. 집으로 돌아간 딸들이 공부가 아니라 살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탕수수를 베고 동네 잔치에 가고 동생들 밥 차리는 사진이 페이스북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학교 3학년까지 보낸 장학생 한명은 이렁저렁하다 동네 스포츠용품점에 취업을 하고 말았다. 나는 실망했다거나 이 시국에 무슨 스포츠용품점이냐고 하지 않았다.
베트남의 장학생들은 9월에 새 학기를 시작했다. 대학은 전면 오프라인 수업이라고 한다. 고등학생들은 거리두기를 하며 개학했다. 나는 각국에 일정대로 내년 장학금을 보냈다. 이 장학금은 계획대로 학비로 쓰이게 될까, 생존자금이 될까. 내년에는 몇명이나 학교에남아 있을까.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 그저 이 불확실한 시대에 바라는 것은, 한명도 사라지지 않는 것. 한명도 잃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