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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보통 2편은 존재감 없는 영화 취급을 당하지만 나는 <미션 임파서블2>(2000)도 나름 재미있게 봤다. 고백하자면 2편을 먼저 보고 나중에 화제가 됐던 1편을 찾아본 터라 나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오우삼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2>는 성공한 후속편이 범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지뢰를 성실히 밟아 터트린다. 오해할까봐 미리 밝혀두는데, 그 영화가 별로였다는 ‘평가’를 위해 이 말을 꺼낸게 아니다. 2편이야말로 속편과 시리즈를 중심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산업 모델의 본질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좋은 사례다.
오우삼의 <미션 임파서블2>는 스타일은 있되 야심이 없는 영화다. 1편과는 또 다른 위기가 등장하고 유능한 첩보요원이 사악한 악당의 음모를 분쇄한 뒤 사랑하는 사람까지 멋지게 구해낸다는, 안 보고도 쓸 수 있는 이야기. 평가는 시리즈 중 최악이었지만 성공한 1편의 속편인 만큼 흥행 성적은 좋았고(2000년 월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버스터 키턴을 향해 날아오른 사나이, 21세기에 불시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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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내란은 내란으로 불리지 못한다. 한국여성의전화는 2009년부터 매년 ‘분노의 게이지’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보도된 여성 살해 사건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간해왔다. 2024년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한해 동안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된 여성은 최소 181명이고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374명이었다. 최소 15.8시간마다 1명의 여성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이 처했다는 뜻이다. 지난 16년 동안 남편이나 애인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1560명에 이른다.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 또한 심각하다. 2024년 한해에만 처음 본 남성에게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했던 여성은 최소 179명이다. 거의 이틀에 한명꼴이다. 가장 충격적인 점은 여성 살해 범죄에 대한 정부의 공식 통계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언론이 모든 살해와 폭력 사건을 다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 여성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임소연의 클로징] 보노보 폴리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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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을 보며 21세기 초반을 지배한 이 위력적인 히어로 프랜차이즈를 떠나보낼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마블 영화와 작별을 고하는 마음으로 ‘나의 <보이후드>를 떠나보내며’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아 글도 썼다. 물론 그 후로도 마블 영화가 나오는 대로 직업적 의무감에 체크는 했지만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한 가지 예상 못했던 건 속도다. 예고된 몰락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을 줄은 몰랐다. 마치 잘못된 시대에 표류한 것 마냥 길을 잃은 행보를 보며 새삼 영화와 시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피어난다.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21세기 영화산업의 산물이다. 안정적인 속편을 갈망하는 할리우드 프랜차이즈는 CG라는 선택지를 만나 새로운 이야기 창고를 발굴하기에 이른다. 기존의 기술로 구현하기 힘들었던 만화적 상상력은 컴퓨터그래픽의 ‘그리는 영화’의 시대가 도래하여 비로소 빛을 얻었다. 이후 이 안정적인 모델이 예상하지 못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Not Super, Not Giving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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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요즘 대선주자들이 앞다퉈 가장 강조하는 단어다. ‘성장하다’(Grow)의 어원 ‘Growan’은 ‘녹색’(Green)의 앵글로색슨어이기도 하다. 풀이 우거지는 풍경은 녹색의 탄생이자 성장의 원형이다. 성장은 땅에서 피어난 것이다. 녹색은 단단하면서도 잘 파이는 땅의 양가성에 뿌리를 내리며 성장한다. 경제의 성장도 한동안 그랬다. 건물과 도로도 땅의 미덕 위에 세워지고 깔렸다. 하지만 땅이 지탱할 수 없는 존재가 하나 생겼으니, 땅을 쳐부수는 실력을 날로 키우면서도 땅이 언제까지나 끄떡없을 것이라 믿고 넘어가는 인간이다. 성장은 조화로운 번영에서 벗어나 파괴로 치달았고, 괴롭고 지친 땅은 무너져내리고 있다.
싱크홀의 원인 1위는 상하수관 누수다. 최근 5년간 벌어진 지반침하 사고의 원인 중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서울 지역만 해도 하수관로 가운데 30%인 3300km가 50년을 넘겼다. 관로 100km를 정비하는 사업에 드는 비용이 약 2천억원이다. 수도 요금이 싸디싸고 조세
[김수민의 클로징] 싱크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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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되면, 괜히 심술이 난다. 스마트폰에 고개 박고 걷는 게 습관이 된 탓에 칙칙했던 뒷산이 어느새 옅은 초록 옷으로 갈아입은 걸 뒤늦게 깨닫곤,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미세먼지로 매일 희뿌옇던 하늘이 어느 날, 쪽빛 물감을 뿌려놓은 듯 파랗게 개면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일주일 내내 흐리다가 단 하루, 햇살 묻은 바람에서 뽀송한 솜이불의 감촉이 느껴질 땐 (약간의 과장을 보태) 살아 있어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온몸으로 퍼지는 이 감각에 굳이 이름을 붙여보고 싶어, 얇디얇은 내 어휘사전을 뒤적이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행복’이라고 쓴다. 그래서, 심술이 난다. 나는 파란 하늘 아래 초록 내음을 맡는 것만으로 이렇게 꽉 찬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인데, 이놈의 세상이 나를 매일매일 강퍅한 인간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좀 살 만한가 싶어 방심하고 뉴스를 틀 때마다 환장할 소식에 속이 뒤집어진다. (오늘은 5월1일이다.) 행복을 표현할 기회와 방법이 매일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5월의 상태, 행복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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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소스타인 베블런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이다. 그런데 이 두 천재가 21세기 인류의 경제생활에 대해 완전히 엇갈리는 예견을 내놓은 지점이 있다. 여가와 소비 중 과연 어느 쪽이 늘어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케인스는 자본주의의 비약적인 생산력 증대에 착목했고, 그리하여 자신의 손자손녀 세대인 21세기가 되면 노동시간이 하루 서너 시간으로 단축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인류는 이제 먹고살기 위한 필요에서 해방돼 펑펑 남아도는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최고의 고민거리로 여기며 살아갈 것이라고 보았다. 최근의 경제학자들의 논평에 따르면 케인스가 예측한 자본주의의 생산력 증대는 대략 예측한 대로 들어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대다수의 근로 대중에게 있어 하루의 노동시간이 서너 시간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에 견주어볼 때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어째서 이런 괴리가 발생한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베블런
[홍기빈의 클로징] 케인스가 틀리고 베블런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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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인연’이란 단어를 입에 자주 올린다.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사람끼리의 관계를 일컫는 사전적 의미 너머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안과 밖의 연결로서의 인(因)과 연(緣)을 생각한다. 영화에도 인연이 있다. 어떤 영화인지 설명하는 내적분석만큼 중요한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그 영화를 접했는지, 바깥으로부터의 연결 과정이다. 어떤 이유로 그 영화를 보기로 결심하고, 어떤 상영관에서 언제 관람을 하고, 보고 나와서 피어난 생각들을 정리하기에 이르는 맥락들. 얽혀서 다다르는 경로가 결국 영화와 나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지난 4월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셨다는 뉴스를 접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콘클라베>가 떠올랐다. 곧이어 <씨네21> 1497호에 구본석 신부님이 써주신 <콘클라베>에 관한 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가 생각이 났다. 신부님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 글을 통해 또 다른 영화 <요한 23세>(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인과 연, 잇는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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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 흔히 쓰는 말이어서 굳이 우리말로 옮길 필요는 없겠지만, 직업적 전문성 정도의 뜻이다. 전문성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다른 영어 표현(specialist, expertise)도 많아서 앞에 직업적이란 수식어구를 붙였다.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기술이 뛰어나 능히 하나의 직업으로 삼을 만하다는 뜻도 되고, 특정 직업이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갖췄다는 뜻도 된다.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을 염두에 두어 ‘전문직주의’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ism’이 붙었다고 죄다 ‘-주의’로 옮기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튼 서두를 길게 끈 이유는 이렇다. 미디어에 요구되는 ‘프로페셔널리즘’이 무언지 고민하고 있어서다. 전에는 그럭저럭 뚜렷해 보였다. ‘기자’라고 하면 무엇보다 글을 바르고 간결하게 잘 써야 하고, 이를 뒷받침할 취재 역량이 중요하다. ‘피디‘라는 직종은 기자에 비해 좀더 복합적이어서, 좋은 아이디어를 내
[정준희의 클로징] 그 인기와 경쟁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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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경 STORY UP SHORTS 상영회에서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은 적이 있다. 2022
년 미쟝센단편영화제가 잠시 우리 곁을 떠나간 후, 한동안 단편영화를 접할 창구가 마땅치 않았던 터라 오랜만에 접한 작품 한편 한편이 신선하고 행복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작품, 이종훈 감독의 <건축가 A>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2023년 가톨릭영화제 대상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작품이니, 2024년 9월에 와서 이 작품을 좋다고 떠드는 건 영화잡지 편집장으로서 게으름을 고백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여기저기 추천하며 호들갑을 떨고 싶을 만큼 좋았다. 2024년 봤던 영화 목록을 전부 되돌아봐도 가장 오래, 마음 귀퉁이에 따뜻하게 둥지를 튼 한편이었다.
건축가 A는 지나온 삶의 궤적을 바탕으로 집을 짓는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기억을 재료 삼아 의뢰인에게 딱 맞는 집을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전개는 익숙하고 상투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짧은 영화, 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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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부터 SNS를 가득 채운 풍경이 있었다. 챗지피티가 만들어준 지브리 스타일의 사진들. 처음에는 누군가 올린 이미지를 보고 ‘오, 진짜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네’ 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그런데 어느새 타임라인에 지브리풍 이미지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다들 즐거워 보였다. 그들은 지브리풍의 따뜻한 색감 속에서 사랑스러운 인물로 다시 태어난 자신을 대체로 마음에 들어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라는 노래처럼,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한순간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되는 모습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네달 가깝게 이어진 현실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바라보는 지브리 세상은 유독 더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의문이었다. 도대체 왜? 왜 자기 사진을 AI에게 주고 바꿔 달라고 하고 그것을 SNS에 공유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브리 스타일을 좋아하는 걸까? 그러다가 질문이 바뀌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른 이들의 지브리 스타일
[임소연의 클로징] AI블루와 파면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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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길지만 한달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시간의 무상함을 읊조리는 관습적 표현인데, 요즘엔 거꾸로 써야 할 것 같다. 하루는 정신없이 지나가지만 이걸 한달 내내 반복하고 버티려니 너무 길다. 또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몰라 겁이 난다. 가깝게는 급변하는 정세에 ‘다이내믹 코리아!’를 외치지 않을 도리가 없고 멀리 둘러봐도 세계질서가 바뀌고 있는 순간이라는 게 피부에 와닿는 요즘이다. 좌와 우, 안과 밖, 망원경과 현미경, 과거와 미래까지 모든 것이 맹렬하게 진동 중이다. 다시 만난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
(매주 그렇듯) 목요일 마감 후 금요일 반나절 행복했다. 4월4일 금요일 윤석열씨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이제야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바로 다음날 (역사적으로 수차례 검증된) 이른바 ‘국회의장병’이 창궐하여 개헌 이야기로 속을 뒤집어놓는다. 내란 세력 척결 국면이 시간을 잘못 맞춘 개헌 논의에 흐려지면 어쩌나 걱정했더니, 곧이어 숨 쉴 때마다 위헌 중인 대통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그해 봄의 불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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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프랑스의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이하 <카이에>) 1호가 세상에 나왔다. 헤드라인 없이 스틸 사진 한장으로 장식된 30쪽짜리 노란 잡지가 영화의 역사를 바꾸어놓을 거라 짐작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120년 넘는 영화의 역사 속에 수많은 영화잡지들영화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이 명멸했지만 <카이에>의 등장만큼 깊고 묵직한 영향력을 미친 사건은 희귀하다. <카이에>에 완벽한 기사가 실려서가 아니다. <카이에>의 글이 영화산업 전체에 영향을 미치거나 흥행을 결정짓는 요소도 아니었을뿐더러 알려진 위상에 비해 많은 대중에게 읽히지도 못했다.
<카이에>가 영화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잡지로 기록되고 기억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카이에>는 질문하는 잡지였다. 주류의 가치관과 통념에 저항하고, 숨겨진 걸작들을 발굴하며, 영화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과감한 제언을 멈추지 않았다. 때때로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②] 우리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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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만한 아이템은 다 해봤다. 오래된 잡지의 난제 중 하나는 뭔가 새롭고 특별한 걸 시도해야 할 시기에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거다. 올해 내내 <씨네21> 30주년에 어울릴 기사를 준비하면서 머리를 싸맸다.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5주년, 10주년, 15주년, 20주년, 25주년 창간 기념호들을 쭉 돌아봤더니 오히려 선택지가 줄어 더 막막해졌다. 주변에서 너무 힘주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하라며 걱정 어린 조언을 건넸지만 막상 욕심을 내려놓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4월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영화기자가 된 뒤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매주 (사고 없이) 마감하는 특별한 요령이 있냐고. 처음엔 그런 건 없다고 했지만 요즘은 이렇게 답한다. 마감은 하는 게 아니라 당하는 거라고. 마감을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언제 하는지는 명확하게 안다고. 같은 마음가짐으로 복잡한 생각들을 지우고 몸이 기억하는 대로 30주년 창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①] 30주년, 이렇게 준비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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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사회주의가 실패한 시점은 언제인가. 소련 공산당에 향수가 있는 자들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지목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레닌 때는 좋았는데 스탈린이 파괴했다”고 한다. 김규항씨 같은 원칙적 사회주의자는 레닌 시절 이미 권력이 소비에트에서 공산당으로 넘어가면서 소련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짚었다. 여기에 얼마간 동조하면서도 내가 가리키는 시점은 다르다. “러시아혁명은 처음부터 망해 있었다.” 봉기한 인민들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은 혁명이었을 것이다. 다만 혁명 직전 러시아에 민주주의의 씨앗과 산업 기반이 부족했던 것은 혁명 이후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러시아가 자행하는 전쟁 범죄도 소련 시절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탓이다. 사건 이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사건 이후를 기속한다. 이 글을 쓰고 넘기기까지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점에 깔리고 인터넷에 걸리는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걱정하지는 않는다.
[김수민의 클로징] 서울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