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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린다. 가벼운 졸음이 눈꺼풀 위로 살짝 내린다. 포근하고 촉촉한 습기가 반가우면서도, 전국을 삼킨 산불을 진정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란 양이라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이 못내 야속하다. 헌법재판소 판결은 여전히 나올 줄 모르고 어수선한 정국 따라 마음도 번잡스러워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어본다). 따뜻하고, 나른하고, 심란하고, 마음이 고된 3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이 그렇게 지나가는 중이다. 맥 빠지는 상황에 잠시 넋을 놓은 듯. 적어도 겉보기엔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이 흘러간다.
이른 아침 출근길. 10년 만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는 불현듯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며 수줍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침묵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그 시절 소소한 추억들을 꺼내며 낄낄거렸다. 신나고 재미난 일이 참 많았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대부분 기억이 흐릿했다. 어색하고 아쉬운 통화를 마친 뒤 잠시 혼자 걷다가 문득 그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어느 평범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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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곳적, 여신 여와(女媧)는 사람을 만들어내기로 했다. 처음에는 한 사람 한 사람 정성 들여 진흙으로 빚고 숨을 불어넣어서 만들었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느리고 복잡했다. 싫증도 나고 마음도 조급해진 여와는 결국 다른 방법을 택했다. 항아리에 진흙과 밧줄을 함께 쑤셔넣은 뒤 밧줄을 확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방에 흩뿌려진 진흙 덩어리들이 저마다 꿈틀거리며 저절로 사람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땅은 금세 사람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하지만 여와가 직접 손으로 만들어낸 사람들과 항아리에서 한꺼번에 만들어진 사람들이 동일할 수는 없었다. 전자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귀족들이 되었고 후자는 평생 흙을 파고 갈아먹고사는 서민들이 되었다. 중국에서 내려오는 창조신화의 한 대목이다. 고대인들 또한 계급사회라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반쯤은 체념으로 반쯤은 슬픔으로 ‘한땀 한땀’ 정성 들여 만든 ‘수제’ 인간들과 항아리와 밧줄을 사용하여 ‘대충 만들어진’ 인간들의 차이로 설명하려고 했던
[홍기빈의 클로징] 태초의 ‘진흙 덩어리’와 미래의 ‘미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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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민 살아진다. 화제작 <폭싹 속았수다>의 여섯 번째 에피소드 제목이 가슴에 콕 박혔다. 내용 자체가 눈물샘 터지는 사연이기도 했지만 슬픔을 덮고 일상을 이어가기 위한 다짐 같은 말이라 더 가슴이 아렸다. 한탄의 말인지, 한숨의 모양인지, 그도 아니면 살고 싶은 해녀의 숨비소리인지 헷갈리는 저 무덤덤한 한마디. 그 아래로 눈물이 스며들어 고여 있다. 족히 바다를 메울 만한 양이다.
때때로 삶이 잔혹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운명이 교통사고처럼 우리를 들이받는 건 버틸 수 있다. 문제는 슬픔의 자리가 그 순간에만 머물지 않고 주변으로, 내일로 번진다는 거다. 삶은 픽션과 다르기에, 비극적인 사건이 지나가고 난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채 이어진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괴로워도 밥숟가락은 들어야 하고, 바닥에 잠길 듯 몸이 무거워도 일어나 일터로 나가야 한다. 온전히 슬픔에 잠길 쉼표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강퍅한 시간의 파도가 냉혹하게 우리를 떠민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살민 살아진다 이어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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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실로 명언에 가깝다고 늘 생각하는 속담이다. 한길이 평균적인 사람 키에 해당하니 열길이면 15m가 넘는 깊이다. 아무리 맑은 물이라 해도 그 정도 깊이면 그냥 수면 위에서 들여다본다고 알 수는 없다. 물 안으로 들어가보거나 그 물길을 수십년은 노 저어 본 경험이 있어야 알 법하다. 쉽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 속은 더 어렵다. 자연과학이 알아내고자 하는 게 ‘열길 물속’이라면 ‘한길 사람 속’은 심리학의 몫이다. 심리학은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학적 통찰에 의지한다. 사회과학이 그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 인지 대체로 심리학은 사회과학에 속하는 걸로 간주된다. 최근 뇌과학이 거두고 있는 엄청난 성과에서 보듯 사회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저울추는 인문학적 통찰보다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훨씬 더 기울어 있다. ‘열길 물속’을 알아내는 수단에 의존하여 ‘한길 사람 속’도 알아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뇌를 들여다볼
[정준희의 클로징] 미디어와 대중(2) - 그들은 정말로 대중적 취향이 뭔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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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오프닝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을 때 불현듯 위화감에 휩싸였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왠지 모르게 개운할 때 엄습하는 불안감과 비슷한 감각이라고 할까. 모든 게 제자리에 있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 뭔가 비어 있는 기분. 평소와 무엇이 달라진 건지 찬찬히 살펴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3주 만에 처음으로 <미키 17> 관련 원고가 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꾸로 말하자면 그제야 (미리 준비한 기간까지 합쳐) 거의 지난 두달 가까이 온통 ‘봉준호’에 둘러싸여 살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가 실렸던 1495호 <미키 17> 특집을 시작으로, 1496호에는 스티븐 연 배우 커버 인터뷰와 <미키 17> 비평, 1497호에는 세 가지 질문으로 풀어본 <미키 17> 기획 기사가 <씨네21>에 실렸다. 미리 자백하자면 이번주만 쉬어갈 뿐 다음주는 물론 그 뒤에도 <미키 17>과 봉준호 감독 관련한 지면은 계속 이어질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봉준호 되기>를 읽으며 생각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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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시를 보고 왔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꼽자면 단연 장파 작가의 <여성/형상: Mama 연작>이다. 붉은색의 살덩어리에 눈이 최소한 3개 이상인 괴물을 그린 그림이다. 다리에 엉덩이와 가슴만 달린 형상의 작은 드로잉도 눈에 띈다. 작가 이름을 검색해보니 다른 작품들도 괴물 천지다. 대개 붉은색이고 가슴과 눈, 이빨, 생식기 등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 낯익은 느낌은 뭐지? 바로 <서브스턴스>의 ‘몬스트로 엘리자수’다! 수(마거릿 퀄리)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의 욕망이 탄생시킨 괴물 말이다. 영화 마지막에 하늘색 드레스에 몸을 구겨넣은 채 가면을 쓰고 기어코 무대 위로 올라가 관객들에게 피를 뿜어대던 그 미끈미끈한 괴물과 장파 작가의 작품들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수와 엘리자베스의 살벌한 난투극을 지켜보면서도 둘이 서로 화해하거나 타협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던 내 앞에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떡하니
[임소연의 클로징] 같은 괴물, 다른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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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선택하러 여기 온 게 아니야. 이미 선택은 했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여기 온 거야.”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예언자 오라클을 만난 네오는 묻는다. 당신이 미래를 이미 알고 있다면,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라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 선문답이 근래 종종 떠오른다. 자칭 신중한, 타칭 우유부단한 성격의 나는 현대인이 모두 일정 정도의 선택불가 증후군을 앓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고 주장 중이다. 너무 많은 정보와 선택지가 주어지면 때때로 그냥 멈추고 주저앉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OTT에 접속한 뒤 메뉴만 살피다 지쳐 결국 작품은 보지 않기’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좀처럼 결정을 못 내리는 건 팔할 이상이 환경 탓이라고 소심하게 변명해본다.
어른이 되면 선택에 대한 확신이 들까 막연한 기대를 한 적도 있다. 나이 들고 보니 그건 단호함이 아니라 후회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선택에서 이해까지 납득에 이르는 경로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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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를 일으킨 이후 복귀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했던 한 배우의 부음을 접하며 또 한번 생각했다. ‘정치는 악당의 도피처’라고. 몇몇 정치인은 사회 일각에 자신이 무죄인 세계를 건설했다. 아직 다수 대중이 범죄자 정치인의 무죄를 믿는 경우는 없지만, 30% 이상의 대통령 탄핵 반대율은 불길한 징후다. 다른 죄도 아닌 내란이고, 다중이 범행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나.
그래도 가끔 웃을 수 있는 건 윤석열이 흥미롭도록 가소로워서이다. 여의치 않으면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가 튀어나온다. 더이상 체포를 피할 수 없게 되자 “자진 출석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부정선거의 근거는 대지 못하고 “음모론 제기가 아니라 팩트 확인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전직 육군첩보부대(HID)도 진상 규명에 나서는 팩트 체크의 강국인가. 바꿔친 카드도 있다. “경고성 계엄이었다”를 접고 “국민에게 호소한 것”이라 밝혔다. ‘폭동: 다수인이 결합한 폭행과 협박’ 가운데 ‘협박’을 인정하는 꼴을 피하려는 것
[김수민의 클로징] 범죄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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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마자 느낌이 왔다. 아, 저 발언은 어떤 식으로든 당분간 회자되겠구나. 탄핵심판 내내 이어진 윤석열 변호인단의 장황하고 비논리적인 주장들은 마침내 최후 변론 한마디로 축약 수렴됐다. “저는 계몽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단호하고 겸손하며 확신에 찬, 시대착오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장소 착오적이라 해야 할까? 마치 뉴스에서 자주 봤던 북한이나 중국 소식과 묘한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다. 12·3 비상계엄 이후 무려 84일 동안 반복된 내란 수괴의 계엄 계몽론은 저 화룡점정의 문장을 통해 끝내 목적을 달성했다. (솔직히 ‘계몽되었다’는 참담한 고백조차 온전히 진심이라 믿기 어렵지만) 그래도 주변 몇명이라도 계몽에 성공하셨다니 함께 자리하신 그분께 심심한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고 외치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실은 ‘말’에는 죄가 없다. 다만 그것이 발화되는 방식과 장소, 상황과 맥락이 문제다. 돌이켜보면 익숙한 희극이 때론 비극처럼 느껴지고, 반대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앞으로도 계몽당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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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홍수를 이룬다. 아는 바가 없는 나로서는 모두 중요한 이야기로 여겨져 눈은 치켜뜨고 귀는 쫑긋. 그저 경청할 뿐이다. 그럼에도 거의 지적되지 않는 듯한 문제가 있어 무지를 무릅쓰고 약간의 말을 덧붙인다. 인공지능으로 인한 집단적인 인간 지성의 퇴화라는 문제다. 얼마 전 한 대학생이(대학원생이었는지도 모른다) 챗지피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중간’(mesotes)과 유학의 ‘중용’(中庸)을 비교해줘”라는 질문을 입력한 것을 보았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충격이 밀려왔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서양과 동양의 고대 철학 모두에 박식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이 많아야 하고 여러 복잡한 층위와 맥락에서 사유를 할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질문의 맥락에 따라서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챗지피티는 그 고유의 능력을 발휘하여 두 개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간명하게 개조식으로 정리해냈을 뿐만 아니라 무리한
[홍기빈의 클로징] 인공지능과 인간 지성의 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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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기자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직업적 사치 중 하나는 아마도 감독과의 인터뷰가 아닐까 싶다. 동시에, 영화를 사이에 두고 감독과 직접 대화를 나눈다는 건 여러모로 곤란해서 외면하고 싶은 작업이기도 하다. 어떤 감독님은 말을 너무 아끼거나 도무지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어 인터뷰가 이어질수록 우리를 미궁 속에 밀어넣는다. 반대로 너무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도 위험하다. 정작 영화에선 보이지 않던 것들마저 부연 설명을 통해 보충될 때 이것이 온전한 감상인지, 아니면 현란한 언어에 설득되어버린 건지 구분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셀로판지마냥 얇디얇은 귀를 지닌 나는 진정성 어린 감독들의 설명에 빠져 시큰둥했던 영화가 사랑스러워 보였던 기억이 적지 않다. 어느 쪽이든 영화를 향한 ‘말’은 애초부터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사족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은 매우 희귀한 케이스다. 자신의 영화를 해설하는 봉준호의 언어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대체로 딱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봉준호 감독을 만났습니다. from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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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쓰고 쉽게 말하라. 효과적인 소통의 필수조건이다. 나처럼 미디어에서 활동하며 종종 대중을 상대로 하는 강연에 불려나가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원칙이다. 여기서 ‘대중’은 소위 엘리트에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대중이지만은 않다. ‘불특정다수’로서의 대중이다. 내 말을 듣고 글을 읽는 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전문성과 요구를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태에서 말을 걸고 글을 적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들은 대개 이질적인 집단이다. 각자의 지식수준과 범위 그리고 취향까지 천차만별인 청중을 상대하려면 결국 짧게 쓰고 쉽게 말하는 게 최선의 방책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른바 ‘대중매체’ 시대에는 이 방책이 종종 “시청자가 중학교 2학년 수준이라고 전제하라”는 실천적 금언으로 표현되곤 했다. 비록 미디어 연구자이기는 해도, 또는 오히려 그래선지 나는 이 말이 무척 마음에 안 들었다. 시청자 가운데 하나인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였고, 평균 학력이나 지식수준이 과거에 비
[정준희의 클로징] 미디어와 대중(1) 그들은 여전히 ‘중2’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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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고 왔어. 어림짐작으로도 수천번은 건넸을 이 습관 같은 대답이 근래 전혀 다른 두께로 다가온다. 예전엔 영화 보고 오면 그 영화에 대한 것만 기억에 남았다. ‘영화’가 주인공이고 관람은 당연한 기본값이었다. 영화는 보는 매체니까. 최근엔 본 내용만큼이나 점점 ‘보았다’는 행위 자체가 기억에 남는다.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못지않게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그날의 분위기에 젖어든다. 그 영화와 만난 그날, 극장엔 몇명이 있었는지, 날씨는 추웠는지 더웠는지, 어떤 기분으로 극장에 들어갔는지에 따라 영화와 얽힌(혹은 영화로부터 물려받은) 기억마저 달라지는 것이다.
이번주는 두번 극장에 다녀왔다. 공교롭게 두편의 영화가 다 공간을 중심으로 기억과 존재를 쌓아나가는 작품이었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히어>는 한 장소에서 켜켜이 쌓이는 기억들을 축적하여, 삶의 의미를 꿰뚫고자 시도한다. 공간, 나아가 시점마저 고정시킨 채 세상을 관통하려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모험심은 새삼 ‘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극장에 다녀왔습니다 영화를 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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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하는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오는 2월24일부터 3월2일까지 진행된다. 이 행사가 처음 열렸던 해에 <삼키기 연습>의 박지니 작가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한다. 우리는 각각 섭식장애와 성형의 당사자이자 작가로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섭식장애와 성형 둘 다 주로 여성들이 경험하는 것이고 외모와 관련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갈수록 놀랍게도 다른 점이 많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했다. 어쨌거나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우리가 이렇게 다 해봤고 이만큼 가봤으니 당신들은 부디…!
그즈음 나는 ‘선망국’(先亡國)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다. 박 작가가 라이프 스토리 다이어리(Life Stories Diaries) 블로그에 쓴 글에서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신조어다. 검색하다보니 조한혜정 교수가 쓴 <선망국의 시간>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한국은 굉장히 앞서가는 선망국이죠.” 단박에 이해가 된다. 선진국(先進國)이 ‘먼저 발전한 나라’라는 뜻
[임소연의 클로징] 망하고 망해도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