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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과잉수사는 사법부에 의해 제동이 걸리기라도 한다. 반면 검찰이 사건에서 손을 떼버리면 돌이킬 방법이 없다. “네 관대함은 더 더럽고 비열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추락의 해부>) 검찰이 또 스스로 추락했다. 한국은 사람을 6시간 감금해도 범인이 국회의원이면 벌금형에 그치는 나라가 됐다. 2019년 ‘패스트트랙 사건’ 당시, 국민의힘은 폭력으로 국회 회의 진행을 방해했고 일부는 다른 당의 한 의원을 감금했다. 1심 재판은 관계자들 모두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세운 기준에 따르면 감금죄 하나만 해도 기본이 최저 ‘징역 6월’이고, 다수인이 위력을 행사한 경우는 형량이 가중된다. 그런데도 검찰은 항소를 포기해 피고인 전원의 벌금형을 굳혔다. 그 이전에는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가 있었다. 1심 재판부는 공소사실의 주요 내용을 인정했다. 개발이익 4천억~5천억원을 예측했으면서도 1822억원만 공공에 배분하기로 한 업무상 배임은 물론, 사업자들이 정진상
[김수민의 클로징] 추락의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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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암살>의 밀정 염석진(이정재)은 왜 동지를 팔았는지 다그치는 안옥윤(전지현)에게 호소한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덧붙인 팩션(fact+fiction)이지만 이 장면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염석진의 억울함에는 바로 엊그제 뉴스에서 들었던 것 같은 기이한 실감이 묻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도 염석진의 발언이 현재진행형의 변명이기 때문인 것 같다.
2025년 대한민국에서도 무수히 많은 염석진들을 마주한다. 이들은 대단히 사악하거나 비겁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 합리적인 범주에 속하며 주위의 인정을 받는 유능한 인재에 가깝다. 일제강점기 ‘염석진’과 2025년의 ‘염석진’을 잇는 공통점이 있다면 단연 적응력이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상황에 빠르게 순응하며 변화하는 생존의 기술이라고 해도 좋겠다.
한때는 그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달라졌다. 부끄러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다른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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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른 줄에 들어선 1990년대에만 해도 우리는 스스로를 중년이라고 여겼으며, 20대 초반 대학생들의 술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눈치 보며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다. 믿기지 않는다면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옛날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라. 다림(심은하)이 정원(한석규)에게 당돌하게 나이를 물어본다. 정원은 이미 몇년 전, 30대의 새해가 밝아오기 전날 밤, 같은 나이 친구들과 청춘이 끝나는 것을 애통해하며 술 먹고 죽자고 밤새워 통음(痛飮)을 행한 적이 있었다. 정원은 말을 더듬으며 20대 후반이라고 에둘러치지만 다림은 확인 사살을 행한다. “30대구나. 완전 아저씨네.” 그런데 세기가 바뀌자 우리나라에서는 청년의 범위가 30대까지 확장되었다. 나는 좀 황당했다. 유엔의 기준에서 ‘youth’, 즉 청년이라 하면 15살에서 25살 사이를 이야기하며, 미국과 대부분의 유럽 나라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지만 내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다른 나라보다 더 급속하게
[홍기빈의 클로징] 기대수명 연장의 성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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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에 인색한 편이다. 스스로는 잘 웃는 편이라 생각하는데 주변에서 볼 때마다 ‘요즘 힘드냐’는 걱정을 하니 변명할 도리가 없다. 아내는 말한다. 당신은 가만히 있으면 뭔가 화난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이니 가급적 표정을 밝게 하고 있으라고. 고마운 조언이지만 한편으론 그냥 힘을 풀고 편하게 있는 것뿐인데 왜 이리 피곤하게 표정까지 지어야 하는 걸까 싶은 반항심이 슬며시 고개를 치켜든다.
돌이켜보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너는 늘 한결같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별명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었던 적도 있다. 좋든 싫든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지 않고 무덤덤하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누군가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표정이 항상 똑같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때조차 같은 표정인 사람. 그 모든 면이, 평가들의 합이 곧 ‘나’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에게나 희로애락이 있다. 평온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나 역시 속은 거친 격랑에 나풀거리는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순간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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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조만간 12·3 계엄 1주년을 맞는다. 그때쯤이면 필경 계엄 이후의 우리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나 특집이 나올 법도 하여, 미리 당겨 쓴다는 다소 비겁한 마음을 품고 이 글을 적는다. 나는 12·3 계엄 이후로 변했다. 그 전과 그 후가 과연 얼마만큼 달라진 건지, 나의 본질에 해당하는 어떤 성향이나 행태가 현격하게 바뀐 거냐 하면 그건 아니다. 회개, 갱생, 부활, 뭐 그런 것과는 다르다. 이미 서서히 바뀌고 있던 것의 속도만 더 빨라졌을 수도 있고, 인생의 진로가 적잖이 변경됐을 수도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꽤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게 느낀다. 그것이 무얼까, 이번 기회에 짚어보기로 했다. 우선 내 주장, 좀더 이 바닥에서 흔히 쓰는 말로 하자면 이른바 ‘성향’ 혹은 ‘정치색’을 드러내는 데 거의 아무런 주저함이 없게 되었다. 과거에는 주저함이 있었느냐 하면 어느 정도는 그렇다. 지상파방송에서 가장 유력한 토론 프로그램(들)의 진행자였다는
[정준희의 클로징] 12월3일이 바꿔놓은 나, 그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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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한장의 이미지, 한 소절의 음악이 영화 전체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본 뒤 계속 떠오른 이미지는 태권도장 벽의 그을음이다. 관장님(이대연)은 미도(고민시)가 태권도장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사고 친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얼핏 상처와 흔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도식적인 상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내내 잊히지 않은 이유는 관장님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마도 관장님은 미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일인 양 호들갑 떨지 않고 덤덤히 기다린다. 참 좋은 어른이다. 대개 이해와 공감은 실과 바늘처럼 세트로 따라오지만 실은 꼭 연결되어야 할 필요조건도, 인과관계도 아니다. 상대의 사정을 꼭 다 알지 않아도 마음을 나누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일일이 캐묻지 않고, 입을 닫고, 그저 그럴 수 있다고 기다려주는 걸로도 충분하다. 때론 침묵하는 다정함이 느리지만 더 은근한 온기로 우리를 감싼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다정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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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성 셋이 치킨집에서 ‘러브 샷’ 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한다고? 어안이 벙벙했다. 부자 아저씨들 세분이 만나서 고른 메뉴가 치맥이라니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은 의도가 읽힌다. 그런데 러브 샷? 러어브으샤앗?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건 금수저 재벌 2세건 미국 이민자 출신 테크기업 대표이건 러브 샷은 러브 샷이지 않나. 언제부터 러브 샷을 이렇게 정겹게 봐줬나 싶지만 아무래도 맥주잔에 써 있는 ‘GPU 26만장’이 내게만 안 보였던 모양이다. ‘치느님’이 보우하신 덕분인지 올해 경주에서 열렸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다. 특히 ‘APEC AI 이니셔티브’는 정부가 ‘APEC 역사상 최초의 인공지능 공동 비전’으로 내세우는 주요 성과 중 하나다. 엔비디아 대표 젠슨 황은 APEC 특별세션에서 “한국은 가장 많은 인공지능 인프라 보유국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인프라’는 APEC AI 이니셔티브에서 세 번째로
[임소연의 클로징] AI와 함께 러브 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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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일어난 일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애쓴다.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신경이 쓰이고, 계속 눈에 밟히고, 결국 징크스가 되기 때문이다. 2년 전 편집장을 맡을 무렵 LoL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 결승이 열렸고 페이커가 왕의 길 위로 귀환했다. 전설의 현재 증명에 덩달아 취해 영화잡지 지면에 프로게이머를 향한 존경과 헌사의 말들을 쏟아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챔피언십은 매년 같은 시기 열린다. 2024년 T1의 2연속 우승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제야 비로소 1년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이후 롤드컵은 내게 ‘코끼리를 의식하지 마’가 되어버렸다. 이젠 날씨가 쌀쌀해지면 왠지 모를 초조함이 엄습한다. 어느새 롤드컵은 ‘T1과 페이커의 계절’이란 이름의 징크스가 되어버렸다.
한번 스치면 우연이고 두번 스치면 인연이지만 세번은 운명이다. 올해 롤드컵은 시작부터 긴장과 환희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이젠 본인들도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T1의 팀 컬러는 누가 뭐라 해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진짜 광기와 도파민 폭탄, 위태로워 찬란한 선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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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년에 종종 나갔던 한 모임이 있다. 대화의 주제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 ‘딴나라당’, ‘쥐명박’, ‘닭근혜’ 욕이었다. 취기가 오르면 <한겨레><경향신문>을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좀더 어울리며 기다리다 보면 풀뿌리 운동을 같이할 수 있겠거니 했지만, 2012년 총선과 대선이 다가오자 선거 궁리밖에 없었다. 그즈음 발길을 끊었다. 그해 선거들은 그들의 적(이자 나의 적)이 이겼다. 일차적으로는 정치인들이 책임질 일이겠으나, 이기는 데 필요한 일을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했던 욕을 또 한다고 해서 적의 지지율이 깎이지는 않는다. 지지 진영이 없는 시민들을 만나지도 않았으니 우군을 늘릴 수도 없다. 때마침 출현한 뉴미디어로 인해서 모임은 더 활기를 띠고 신규 참여자도 들어왔겠지만, 이미 모인 사람들의 동질성이 더 강화되고, 원래 성향이 흡사한 사람들이 더 모이고, 늘 하던 말의 열기만 더 오른 것에 불과하다. 그때
[김수민의 클로징] 파이트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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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만남의 장소다. 그저 사람을 만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요즘은 영화를 ‘본다’라기보다는 차라리 ‘만난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영화를 만날 때 극장의 분위기와 상황, 이른바 극장의 ‘공기’까지 포함하여 유일한 형태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나의 첫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떠올릴 때 이 영화를 만났던 부영극장의 추억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남포동 극장가 초입에 있던 부영극장은 부산에서 가장 좌석수가 많았던 초대형 극장으로 스크린 사이즈도 당시 최대였다. 돌이켜보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잔잔한 영화를 굳이 그 극장에서 볼 필요는 없었지만 덕분에 아직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얼굴의 깊게 팬 주름까지 선명하게 기억난다. 정확히는 부영극장에서 보지 않았다면 이스트우드의 구겨진 얼굴이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 않았을 것 같다. 부영극장은 2000년 무렵에 결국 문을 닫고 없어졌는데, 그 이후로는 당시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기분이다. 이젠 그날의 공기가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영화가 사랑한 우리들: 극장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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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AGI, 즉 인공일반지능이 10년 안에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했지만, 최근 들어 회의론이 대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AGI는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며, 대신 특정 기능에서 큰 능력을 발휘하는 쪽으로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는 쪽이 낫다는 견해도 많이 나온다. 이러한 논쟁을 보면서 애초에 AGI, 나아가 ASI, 즉 인간을 훌쩍 능가하는 인공초지능의 개발에 몰두하는 흐름은 일종의 ‘의인관의 오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미국의 경제사상가 소스타인 베블런이 산업혁명 이후 생산의 주역으로 새로이 나타난 기계를 두고 사람들이 범해온 그릇된 이해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은 놀라운 효율성과 힘으로 엄청난 생산성을 발휘하는 기계라는 존재를 두고서 이것이 인간의 신체 작동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의인관’(anthropomorphism)의 관점을 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블런에 의하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난 기계는 그
[홍기빈의 클로징] AGI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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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한번 정리할게요. 거대한 혜성이 지구로 오고 있어요. 에베레스트만 한 혜성이 지구로 오는 일이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우리끼리 최소한 합의도 못하고 있으면 대체 정신이 어떻게 된 거예요? 아니, 지금 서로 대화가 되기는 해요? 어디가 망가진 거예요? 어떻게 고치죠?… (중략)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두렵고, 똑같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저도 제발, 제발 정부가 생각이 있고, 국민을 생각하는 거면 정말 좋겠는데, 진실은 이 빌어먹을 정부는 완전히 미친 것들 같아요! 그리고 우린! 전부 다! 죽을 거예요!!”
갑자기 유튜브 알고리즘에 <돈 룩 업>(2021)이 계속 떠서 다시 보는 중이다. 확실히 이 영화는 과소평가됐다. 지금 와서 보니 이건 거의 예언서에 가깝다. 랜들 박사(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핏대를 올리며 인류 멸망의 경고를 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혜성 충돌을 며칠 앞두고 토크쇼 카메라 앞에서 절규하는 랜들 박사, 아니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영화로 혁명하기 1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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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서일까.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커진다.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에도 그랬으니까 나이 탓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런데 이 말 자체에 이미 문제가 있다. 일단 나이가 ‘탓’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걸 갖고도 스스로를 위로할 이유도 없다. 뭔가 방어적이다. 이를테면 나이가 든 ‘덕분’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비로소’ 더 잘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라 ‘자부’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해놓고도 뭔가 ‘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굳이 그런 것에 대해 발끈하며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가는 것 역시 다분히 방어적이라 느껴지기 때문일 테다. 아무래도 근본은 ‘아쉬움’에 있는 것 같다. 아쉬움은 무력감의 표현이고, 무력감이란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좌절에 의한 것이고, 이 경우의 좌절은 아무래도 나이가 너무 ‘어려서’보다는 ‘많아져버려서’에 기인하는 듯하니 말이다. 꽤 유서 깊은 동네의 밥집이자 술집이 장사를 접는 모습을 보며
[정준희의 클로징] 당신의 은퇴를 향해 보내는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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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1995)를 다시 봤다. 제시와 셀린이 나눈 수많은 말들, 아름다운 단어들이 마치 별처럼 흩어져 스크린에 박힌다. 하지만 결국 제시와 셀린의 욕망은 하나로 귀결된다. 너를 온전히 알고 싶다는 것. 두 사람은 그 실현 불가능한 기적을 위해 빈에서 꿈결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제시는 말한다.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지. 너를 알고 싶다고.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스스로를 아는 것도 힘들어. 나는 항상 변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걸 알려줄 수 있겠어?” 셀린은 답한다. “이 세상에 어떤 마법이 있다면 그건 누군가를 이해하고 함께하려는 시도일 거야. 설사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야.” 그리하여 영화는 셀린의 입을 빌려 진실을 전한다. “있잖아,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것은 너나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영화의 신 있다면 그 역시 한편의 영화로 강림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주는 영화와 영화 사이에 깃든 에너지를 목격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영화의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