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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존한다.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이다. 두개의 서로 반대 의미를 가진 모순적 문장들을 단순히 ‘그리고’로 연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으로서 일관된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게 헤겔의 의도였을 테다. 하지만 후대 철학가들은 앞 문장에 중점을 두어 뒤 문장을 포섭하거나, 거꾸로 뒤 문장을 주축으로 앞 문장을 해석하는 전략을 취했다. 보수주의적 성향을 띠는 전자를 헤겔 우파라고 부르며, 진보주의적 성향을 띠는 후자를 헤겔 좌파라고 지칭한다. 나 같은 학자들, 특히 의지가 투영되는 세상(수많은 의지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지고 굴러가는 세상)을 파악하고 해명하려는 학자들은 이 두축 사이에서 요동한다. 한편으론 벌어진 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보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납득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자신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늘 어딘가 부족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준희의 클로징] 12월3일이 바꿔놓은 나, 그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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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불과 재>(이하 <불과 재>)는 극장의 구세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배수진을 치고 돌아왔다는 <불과 재>는 이미 전작들을 통해 검증된 오락적인 재미만큼이나 둘러싼 상황이 흥미롭다. 극장 산업의 침체와 쇠퇴 속에 천문학적인 자본이 투입, 집약된 결과물은 (의도나 완성도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향후 산업의 향방을 가를 지렛대의 운명을 부여받았다. 이 시점에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불과 재>가 처한 상황을 마케팅에 활용하길 꺼리지 않는다. 기자시사에서 영화보다 먼저 상영된 제작진의 편지에서 감독은 자신 있게 선언한다. “AI 생성 이미지를 하나도 쓰지 않은 <불과 재>가 뉴시네마가 되어야 한다”고. <불과 재>에선 이제 ‘아바타’ 기술이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인공 신체로 의식을 옮긴다는 핵심 설정은 어느새 소품에 가까운 장치가 됐다. <아바타: 물의 길>에서는 행성 생태계의 창조에 더 집중했고, 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아바타: 불과 재>와 뉴시네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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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여자대학교 공학 전환을 둘러싼 그간의 과정을 지켜보며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래커를 사용한 학생들의 평화적인 의사 표현을 일부 언론은 왜 폭력이라고 부를까? 여대와 이해관계가 없어 보이는 남자들이 왜 유독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학생들을 비난할까? 학교는 학생 2889명과 교원 163명, 직원 124명의 의견을 1:1:1로 반영하는 것을 왜 ‘평등’이라고 말할까? 그러던 중 지난 12월3일 발표된 공학 전환 타당성에 관한 연구용역 결과를 전해 듣고 찾아본 50장짜리 슬라이드 자료는 충격적일 정도로 의문투성이였다. 공학 전환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이 자료에서 유일하게 제시된 객관적인 근거는 재정 안정화 시뮬레이션뿐이다. “유학생 증가, 대학 위상 향상에 따른 연구비, 재정지원사업 등 전입 및 기부수입이 매년 2%씩 상승한다고 가정할 경우, 2040년까지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을 보여주는 그래프가 포함된 슬라이드 한장이다. 나머지 공학 전환의 근거는 대부분이 추정일 뿐 실증적인 데이
[임소연의 클로징] 어떤 연구용역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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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예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삶의 여러 요소보다 예술을 우선한 적이 없습니다… 예술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예술을 통해 연결된 덕분에 나는 동료들과 같은 자리에 서서, 나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술은 사람들의 기쁨과 고통을 담아냄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매개체입니다.”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명사들의 통찰은 그 자체로도 빛나지만 어느 날 문득 내게 와닿아 의미가 되는, 연결의 순간이 있다. 요즘 연이어 터지는 사건, 사고를 마주하며 심란함에 빠져들 때, 잊고 있던 알베르 카뮈의 말이 희미한 손전등처럼 길을 비춘다.
‘어느 날 문득’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인생은 가까이서 볼 땐 우연의 연속이지만 긴 호흡으로 되돌아보면 그 모든 우연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필연 속에 있다. 뜬금없이 알베르 카뮈의 말이 떠올랐던 건 최근 연이어 만난 영화들 덕분이기도 하다. 미야케 쇼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감화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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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과잉수사는 사법부에 의해 제동이 걸리기라도 한다. 반면 검찰이 사건에서 손을 떼버리면 돌이킬 방법이 없다. “네 관대함은 더 더럽고 비열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추락의 해부>) 검찰이 또 스스로 추락했다. 한국은 사람을 6시간 감금해도 범인이 국회의원이면 벌금형에 그치는 나라가 됐다. 2019년 ‘패스트트랙 사건’ 당시, 국민의힘은 폭력으로 국회 회의 진행을 방해했고 일부는 다른 당의 한 의원을 감금했다. 1심 재판은 관계자들 모두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세운 기준에 따르면 감금죄 하나만 해도 기본이 최저 ‘징역 6월’이고, 다수인이 위력을 행사한 경우는 형량이 가중된다. 그런데도 검찰은 항소를 포기해 피고인 전원의 벌금형을 굳혔다. 그 이전에는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가 있었다. 1심 재판부는 공소사실의 주요 내용을 인정했다. 개발이익 4천억~5천억원을 예측했으면서도 1822억원만 공공에 배분하기로 한 업무상 배임은 물론, 사업자들이 정진상
[김수민의 클로징] 추락의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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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암살>의 밀정 염석진(이정재)은 왜 동지를 팔았는지 다그치는 안옥윤(전지현)에게 호소한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덧붙인 팩션(fact+fiction)이지만 이 장면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염석진의 억울함에는 바로 엊그제 뉴스에서 들었던 것 같은 기이한 실감이 묻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도 염석진의 발언이 현재진행형의 변명이기 때문인 것 같다.
2025년 대한민국에서도 무수히 많은 염석진들을 마주한다. 이들은 대단히 사악하거나 비겁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 합리적인 범주에 속하며 주위의 인정을 받는 유능한 인재에 가깝다. 일제강점기 ‘염석진’과 2025년의 ‘염석진’을 잇는 공통점이 있다면 단연 적응력이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상황에 빠르게 순응하며 변화하는 생존의 기술이라고 해도 좋겠다.
한때는 그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달라졌다. 부끄러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다른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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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른 줄에 들어선 1990년대에만 해도 우리는 스스로를 중년이라고 여겼으며, 20대 초반 대학생들의 술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눈치 보며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다. 믿기지 않는다면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옛날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라. 다림(심은하)이 정원(한석규)에게 당돌하게 나이를 물어본다. 정원은 이미 몇년 전, 30대의 새해가 밝아오기 전날 밤, 같은 나이 친구들과 청춘이 끝나는 것을 애통해하며 술 먹고 죽자고 밤새워 통음(痛飮)을 행한 적이 있었다. 정원은 말을 더듬으며 20대 후반이라고 에둘러치지만 다림은 확인 사살을 행한다. “30대구나. 완전 아저씨네.” 그런데 세기가 바뀌자 우리나라에서는 청년의 범위가 30대까지 확장되었다. 나는 좀 황당했다. 유엔의 기준에서 ‘youth’, 즉 청년이라 하면 15살에서 25살 사이를 이야기하며, 미국과 대부분의 유럽 나라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지만 내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다른 나라보다 더 급속하게
[홍기빈의 클로징] 기대수명 연장의 성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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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에 인색한 편이다. 스스로는 잘 웃는 편이라 생각하는데 주변에서 볼 때마다 ‘요즘 힘드냐’는 걱정을 하니 변명할 도리가 없다. 아내는 말한다. 당신은 가만히 있으면 뭔가 화난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이니 가급적 표정을 밝게 하고 있으라고. 고마운 조언이지만 한편으론 그냥 힘을 풀고 편하게 있는 것뿐인데 왜 이리 피곤하게 표정까지 지어야 하는 걸까 싶은 반항심이 슬며시 고개를 치켜든다.
돌이켜보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너는 늘 한결같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별명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었던 적도 있다. 좋든 싫든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지 않고 무덤덤하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누군가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표정이 항상 똑같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때조차 같은 표정인 사람. 그 모든 면이, 평가들의 합이 곧 ‘나’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에게나 희로애락이 있다. 평온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나 역시 속은 거친 격랑에 나풀거리는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순간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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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조만간 12·3 계엄 1주년을 맞는다. 그때쯤이면 필경 계엄 이후의 우리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나 특집이 나올 법도 하여, 미리 당겨 쓴다는 다소 비겁한 마음을 품고 이 글을 적는다. 나는 12·3 계엄 이후로 변했다. 그 전과 그 후가 과연 얼마만큼 달라진 건지, 나의 본질에 해당하는 어떤 성향이나 행태가 현격하게 바뀐 거냐 하면 그건 아니다. 회개, 갱생, 부활, 뭐 그런 것과는 다르다. 이미 서서히 바뀌고 있던 것의 속도만 더 빨라졌을 수도 있고, 인생의 진로가 적잖이 변경됐을 수도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꽤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게 느낀다. 그것이 무얼까, 이번 기회에 짚어보기로 했다. 우선 내 주장, 좀더 이 바닥에서 흔히 쓰는 말로 하자면 이른바 ‘성향’ 혹은 ‘정치색’을 드러내는 데 거의 아무런 주저함이 없게 되었다. 과거에는 주저함이 있었느냐 하면 어느 정도는 그렇다. 지상파방송에서 가장 유력한 토론 프로그램(들)의 진행자였다는
[정준희의 클로징] 12월3일이 바꿔놓은 나, 그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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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한장의 이미지, 한 소절의 음악이 영화 전체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본 뒤 계속 떠오른 이미지는 태권도장 벽의 그을음이다. 관장님(이대연)은 미도(고민시)가 태권도장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사고 친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얼핏 상처와 흔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도식적인 상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내내 잊히지 않은 이유는 관장님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마도 관장님은 미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일인 양 호들갑 떨지 않고 덤덤히 기다린다. 참 좋은 어른이다. 대개 이해와 공감은 실과 바늘처럼 세트로 따라오지만 실은 꼭 연결되어야 할 필요조건도, 인과관계도 아니다. 상대의 사정을 꼭 다 알지 않아도 마음을 나누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일일이 캐묻지 않고, 입을 닫고, 그저 그럴 수 있다고 기다려주는 걸로도 충분하다. 때론 침묵하는 다정함이 느리지만 더 은근한 온기로 우리를 감싼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다정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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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성 셋이 치킨집에서 ‘러브 샷’ 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한다고? 어안이 벙벙했다. 부자 아저씨들 세분이 만나서 고른 메뉴가 치맥이라니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은 의도가 읽힌다. 그런데 러브 샷? 러어브으샤앗?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건 금수저 재벌 2세건 미국 이민자 출신 테크기업 대표이건 러브 샷은 러브 샷이지 않나. 언제부터 러브 샷을 이렇게 정겹게 봐줬나 싶지만 아무래도 맥주잔에 써 있는 ‘GPU 26만장’이 내게만 안 보였던 모양이다. ‘치느님’이 보우하신 덕분인지 올해 경주에서 열렸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다. 특히 ‘APEC AI 이니셔티브’는 정부가 ‘APEC 역사상 최초의 인공지능 공동 비전’으로 내세우는 주요 성과 중 하나다. 엔비디아 대표 젠슨 황은 APEC 특별세션에서 “한국은 가장 많은 인공지능 인프라 보유국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인프라’는 APEC AI 이니셔티브에서 세 번째로
[임소연의 클로징] AI와 함께 러브 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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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일어난 일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애쓴다.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신경이 쓰이고, 계속 눈에 밟히고, 결국 징크스가 되기 때문이다. 2년 전 편집장을 맡을 무렵 LoL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 결승이 열렸고 페이커가 왕의 길 위로 귀환했다. 전설의 현재 증명에 덩달아 취해 영화잡지 지면에 프로게이머를 향한 존경과 헌사의 말들을 쏟아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챔피언십은 매년 같은 시기 열린다. 2024년 T1의 2연속 우승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제야 비로소 1년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이후 롤드컵은 내게 ‘코끼리를 의식하지 마’가 되어버렸다. 이젠 날씨가 쌀쌀해지면 왠지 모를 초조함이 엄습한다. 어느새 롤드컵은 ‘T1과 페이커의 계절’이란 이름의 징크스가 되어버렸다.
한번 스치면 우연이고 두번 스치면 인연이지만 세번은 운명이다. 올해 롤드컵은 시작부터 긴장과 환희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이젠 본인들도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T1의 팀 컬러는 누가 뭐라 해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진짜 광기와 도파민 폭탄, 위태로워 찬란한 선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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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년에 종종 나갔던 한 모임이 있다. 대화의 주제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 ‘딴나라당’, ‘쥐명박’, ‘닭근혜’ 욕이었다. 취기가 오르면 <한겨레><경향신문>을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좀더 어울리며 기다리다 보면 풀뿌리 운동을 같이할 수 있겠거니 했지만, 2012년 총선과 대선이 다가오자 선거 궁리밖에 없었다. 그즈음 발길을 끊었다. 그해 선거들은 그들의 적(이자 나의 적)이 이겼다. 일차적으로는 정치인들이 책임질 일이겠으나, 이기는 데 필요한 일을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했던 욕을 또 한다고 해서 적의 지지율이 깎이지는 않는다. 지지 진영이 없는 시민들을 만나지도 않았으니 우군을 늘릴 수도 없다. 때마침 출현한 뉴미디어로 인해서 모임은 더 활기를 띠고 신규 참여자도 들어왔겠지만, 이미 모인 사람들의 동질성이 더 강화되고, 원래 성향이 흡사한 사람들이 더 모이고, 늘 하던 말의 열기만 더 오른 것에 불과하다. 그때
[김수민의 클로징] 파이트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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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만남의 장소다. 그저 사람을 만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요즘은 영화를 ‘본다’라기보다는 차라리 ‘만난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영화를 만날 때 극장의 분위기와 상황, 이른바 극장의 ‘공기’까지 포함하여 유일한 형태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나의 첫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떠올릴 때 이 영화를 만났던 부영극장의 추억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남포동 극장가 초입에 있던 부영극장은 부산에서 가장 좌석수가 많았던 초대형 극장으로 스크린 사이즈도 당시 최대였다. 돌이켜보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잔잔한 영화를 굳이 그 극장에서 볼 필요는 없었지만 덕분에 아직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얼굴의 깊게 팬 주름까지 선명하게 기억난다. 정확히는 부영극장에서 보지 않았다면 이스트우드의 구겨진 얼굴이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 않았을 것 같다. 부영극장은 2000년 무렵에 결국 문을 닫고 없어졌는데, 그 이후로는 당시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기분이다. 이젠 그날의 공기가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영화가 사랑한 우리들: 극장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