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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화제다. 화두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화제가 이미 타오르고 있는 불이라면 화두는 성냥이다. 담론 내에서 현재 활발히 이야기되고 있는 주제가 화제라면 화두는 그 이전 단계, 사유와 성찰을 촉발하는 물음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들었으므로 이제는 질문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몇몇 글을 보고 처음엔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그 ‘질문’이 인공지능을 다루기 위한 도구적인 조건문이라는 내용을 보고 갑갑해졌다. 원하는 결과를 빠르고 정확하게 도출하기 위해 던지는 물음은 까탈스러운 계약서의 세부 항목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을 다루기 위해 질문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은 사유의 빛을 기꺼이 등진다.
지난 몇년간, 자기 소개문을 작성할 때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사랑과 질문”이라는 문장을 써왔다. 이 선물에는 인공지능을 잘 길들이는 능력도 포함될까? 질문은 ‘나’와 세상을 향해 던져야 하는 것이지 화면 안 알고리즘의 부품으로 구축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전승민의 클로징] 질문에 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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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씨네21> 입사 전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좋고 싫고, 또는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그 언어의 울타리 안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다. 몇 가지 그럴듯한 핑계가 있지만, 돌이켜보니 가장 큰 이유는 보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게 홍상수 영화는, 늘 직접 보는 것보다 정교한 언어로 주석을 달아놓은 글들을 보며 읽는 쪽이 더 흥미로웠다.
홍상수 영화를 둘러싼 비평의 언어가 흥미로웠던 건 특별히 고결하거나 심도 있는 통찰 때문은 아니다. 홍상수 영화에 화답하는 글들은 (그 영화와 닮아서) 모두 어딘가 꼬여 있다. 아니면 헤매거나. 때때로 조롱과 혐오가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 보잘것없음이 불편하고 불쾌할지라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계속 흘끔거릴 수밖에 없도록 유혹한다. 거칠게 말해 먹물들의, 혹은 먹물이 되고 싶은 이들의 혐관(혐오 관계)이라고 해도 좋겠다. 2000년대 홍상수 영화는 확실히 지식인(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홍상수 영화’라는 덩어리, 불가항력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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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본 것’만이 영화다. 한번 보고 만 것은 영화가 아니다. 그건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목격하게 된 교통사고와 같은 것.”(장정일) 내게는 한번 보고 만 인생 영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하비 밀크를 그린 <밀크>다. 2010년 기초의원 선거를 준비할 무렵 개봉했다. 2009년 말 나는 고향인 구미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울에 있어봤자 취업 전망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서울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 “내년에 진보진영 선거를 거들겠다”고 했다.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너 같은 놈이 해야 하는데.” 나는 정치 지망생이 아니었다. 당시 구미는 모두 2인선거구였기에 승산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사정과 배경이 나를 이끌었다. ‘어차피 기회는 이번뿐이다. 내 20대의 정치 활동을 결산하자. 져도 괜찮다. 이기면 4년만 조금 다르게 살자.’ 그런데 그 직후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구미에 3인선거구가 네 군데 생겼다. 지역 진보진영은 출마자 기근이었고, 그중 한 군데가
[김수민의 클로징] 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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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부분이 전체의 합보다 크다. 스토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도, 아니 희미해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대사들이 있다. 드라마 <미생>의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지금도 필요할 때 종종 꺼내 보는 조언은 ‘체력을 기르라’는 말이다.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길러라. (중략)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도 떨어지고, 그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성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이 올바른 말이 뇌리에 박힌 건 현명한 통찰이 담긴 내용 때문만은 아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승부 따윈 상관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표현이 와닿아서 좋았다. 따끔한 일침을 듣고 새긴 지금도 여전히, 운동 안 하고 넘어갈 핑계를 찾는 쪽으로 몸이 기울어진다. 오늘도 어김없이, 승부 따윈 상관없는 지경에 방치된 몸뚱이를 끌고 허덕이다가 자기 전에 다짐한다. 내일은 꼭 운동 시작해야지.
<나의 아저씨> <나의 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그래봤자 영화, 그래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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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거대 데이터 기업 팔란티어가 22개 항목의 선언문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AI 무기화는 불가피하니 더 속도를 올려라” “서양 문명의 우월성을 지켜내야 한다” “징병제 부활이 살 길이다” “실리콘밸리는 이제 국방부의 일부이다” 등. 노골적이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많은 이들이 이를 “파시즘”이라고 몰아붙인다. 피터 틸과 알렉산더 카프와 같은 자칭 천재 기업가들의 본색이 드러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는 더욱 불편한 질문이 하나 있다. 만약 이러한 “기술 파시즘”이라는 것이 일부 인사들의 일탈적인 과대망상을 넘어서서 현대의 산업 자체에 내재한 역사적 경향이라면?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파시즘은 민족주의, 군국주의, 인종주의, 보수주의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러한 산업문명에 본질적으로 장착된 필연적 “혁명”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사실 대의제민주주의도 자유시장경제도 18세기 계몽주의에서 시작된 것들이라서 19세기 이후의 산업문명과는 기묘
[홍기빈의 클로징] ‘팔란티어 선언’을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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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봤다. 이자연 기자가 무려 14번 관람한 끝에 이벤트로 서프라이즈 박스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이 일어 부랴부랴 극장을 찾았다. 영화 보는 일이 업이지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같은 영화를 두번 이상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거의 없다. 두 번째 볼 때부터는 진짜 ‘일’처럼 느껴지는 탓에 아무리 좋은 영화도 왠지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마음이 같은 영화를 저렇게 여러 번 볼 수 있도록 이끄는 걸까.
요즘은 대체로 글을 통해 영화를 먼저 접하다 보니, 보지 않았음에도 이미 여러 번 봤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도 그중 하나였다. 이미 원작 소설까지 읽었을 뿐 아니라 장면 하나하나까지 구체적으로 스포일러를 당한 상태라 어쩐지 심드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극장에서 직접 확인한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확실히 달랐다. 아마도 온도 때문인 것 같다. 올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보고 또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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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트럼프란 인물이 대통령이 됐을 때부터 한마디로 미국은 우스꽝스러워졌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약해졌다는 게 아니라 우스워졌다는 거다. 거의 모든 면에서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지만 그런 강함에 대한 경외라든가 공포를 품게 하지 않는다. 좋든 싫든, 존경하든 무서워하든, 어떻게든 신경을 쓰거나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송능한 감독의 1997년 영화 <넘버 3>의 송강호 배우가 맡았던 불사파 두목 조필을 떠올리면 된다. 조금 고쳐 말하자면, 그런 조필이 거대 조직의 두목이 되어 있다고, 거대 조직이 그런 조필을 두목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처한 셈이라고 여기면 적절할 것 같다.
<넘버 3>의 조필에게는 힘이 있다. 딱히 반기를 든 것도 아닌 그저 자기 자존심을 조금 상하게 했을 뿐인 부하를 흠씬 두들겨패도 누구 하나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지배력 말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정준희의 클로징] 웃기고 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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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를 켰다, 껐다. 이걸 잘해야 오래 간다. 슬픔엔 역치가 있는 법이라 주변이 온통 괴롭고 어려운 소식뿐이라도 내내 괴로워만 하면서 살 순 없다. 전쟁의 화마 속 매일 불의, 부당, 부조리한 뉴스로 넘쳐나지만 다들 묵묵히 오늘을 살아간다. 그 앞에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하게’ 따위의 말을 쉽게 붙이는 건 무례하고 둔감한 짓일 것이다. 슬픔이 자신을 완전 집어삼키기 전에 치열한 마음으로 스위치를 끄고, 일상을 버티고 있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버틴다’는 선택을 한 모든 이들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무너져가는 세상 또한 그렇게 모인 일상의 힘을 기둥 삼아 간신히 꼴을 유지한 채 버티는 중이다.
다들 스위치를 끄는 신호나 의식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최근 내가 택한 방식은 출퇴근길에 음악을 크게 듣는 거다. 너무 멀다고 투덜거렸지만 습관이 된 뒤엔 하루 2시간 남짓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랜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스위치를 켜고 끄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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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담벼락을 신나게 뛰어넘은 노란 개나리가 무색하다. 제주 4·3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현재를 잠식하는 과거다. 귀향한 참전군인이 겪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대표적인 증상은 그들이 여전히 전쟁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고 착각하는 환상 속으로 호출되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시간의 흐름과 영원히 불화하기를 택한 과거라면, 역사적 참사를 잊지 말자고 외치는 구호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될까? ‘기억하자’는 네 글자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실천이고 그것은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자는 말인 동시에 참사에 관한 공동의 서사를 창안하여 함께 ‘기억’하자는 말이다. 그러니까 ‘기억’은 두 가지의 실천을 선행조건으로 삼는다. 정확한 사실의 발굴,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회적 서사의 작성이다.
사회학자 제프리 C. 알렉산더는 사건의 발생 자체가 트라우마를 직접 촉발하는 것이 아니며 사건 전후를 둘러싼 맥락과 사실의 재구성, 사건에
[전승민의 클로징] 비극은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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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영화의 운명을 결정짓는 건 당도하는 장소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검사>를 보았을 땐 솔직히 별반 기억에 남지 않았다. 물론 전체주의가 인간을 집어삼키는 보편적 메커니즘을 우화로 승화시킨 훌륭한 영화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정제된 형식이 주는 거리감에 밀려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마 전 개봉한 <두 검사>를 (타의에 의해) 극장에서 다시 봤을 때, 전혀 다른 무언가로 다가왔다. 느리지만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연출, 침묵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연기, 규칙을 따른 자가 파멸에 이르는 결말까지. 무엇보다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 대한 경고가 귓가를 때렸다.
<두 검사>는 인내의 영화다. 느리고, 엄격하고, 카타르시스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말에 이르러 의도적으로 관객을 좌절시킨다. 모든 숏을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하여 프레임 자체를 감옥으로 만들고, 아카데미 비율의 좁은 화면과 탈색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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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잦은 수사 개시는 오랫동안 폐해를 불러왔다. 해법은 검찰의 수사 개입을 차단하는 걸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검찰 전통이 미약한 나라를 뺀 34개국 검찰에는 수사권이 있다. 엔론 사태(미국), 록히드 사건(일본), 디젤 게이트(독일), 사르코지 정치자금(프랑스) 등은 검찰이 수사했다. 권력이나 자본이 연루된 사건은 법률가가 수사하고 수사 당사자가 공소 유지까지 하는 게 낫다(한국 역대 특검이 다 그랬다). 물론 선진국에서 검찰의 수사 개시는 일상적이지 않지만, 적어도 ‘수사 지휘’는 검사의 주업이다. 골키퍼가 골문만 지키는 게 아니라 앞의 선수들을 지휘하듯, 검사에게 기소와 재판을 대비한 수사 점검은 필수적이다. (준)사법적 통제가 약하면 정치권력이 수사를 끌고 갈 위험도 커진다. 검찰의 여러 권한을 다 줄이거나 없앨 것이 아니라, 청산할 것과 집중할 것을 분별해야 한다. 2005년 법학자 A가 낸 논문이다. “우리 경찰 수사의 현실에서, 공소의 책임자이
[김수민의 클로징] 춤추는 대수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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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아니 표현이 다소 과했다. 거의 모른다. 1년에 1번. 잡지의 창간 기념을 맞아 크고 작은 개편을 한다. 코너를 바꾸고, 새로운 필자도 모시고, 디자인도 이래저래 다듬어본다. 매주 마감하는 주간지의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 짬짬이 틈을 내어 회의하고, 시안을 만들고, 다시 엎는 등 추가 노동력을 투입해서 진행 중이다. 하지만 사실은 딱히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일이다. 물론 연속성을 알아봐주는 정기 구독자도 적지 않지만 매주 이슈와 필요에 따라 잡지를 보는 독자 입장에서는 한권 한권이 독립적이다. 게다가 연중 소폭의 개편과 변화를 주면서 다듬어나가는 편이라 내용의 조정은 충분히 갈음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개편은 일종의 가욋일, 속된 말로 고생을 사서 하는 작업인 셈이다. 그럼에도, 굳이 때맞춰 개편을 거르지 않는 건 일종의 의식에 가깝다. 현재 우리의 위치와 형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점검이라고 해도 좋겠다.
편집장을 맡고 세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세 번째 개편을 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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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본인이 휴전 협상을 언급하면서 이란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트럼프 꼴좋다, 미국 꼴좋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워낙 전 지구적으로 비호감이 된 트럼프이니 이런 반응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 사태를 트럼프의 황당한 변덕으로 시작된 전쟁이 한심한 실패로 끝났다고 바라보는 “꼴 좋다” 서사는 중요한 몇 가지 지점들을 놓치고 있다.
첫째, 미국의 이란 공격은 트럼프 개인이 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전쟁 계획 자체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존재했고, 미국의 오바마 시절부터 준비되어 바이든 시절까지 군사적 능력 구축으로 준비되어왔던 것이다. 이란의 포르도 핵 시설 설계도 조사는 2009년에 시작되었고 바이든 정부 말기인 2024년 중반 미국과 이스라엘은 주요 시설 파괴를 위한 미사일 공격의 실전 훈련도 치른 바 있다. 물론 전쟁 계획과 준비는 여러 시나리오의 준비에 불과하며 그것을 트럼프처럼 실행으로 옮긴 것은 다른
[홍기빈의 클로징] “꼴좋다”가 놓치고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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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지난 3월15일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즌바움이 쓴 글의 제목에서 어떤 결기가 감지된다. 83살의 노논객은 “몇년간 직장을 잃은 평론가 수를 보면 죽음에 접어든 직업임을 알 수 있다”면서도 “30살 이하인 사람에게 물어보면 황금기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며 환경 변화에 따른 세대간 인식 차를 날카롭게 통찰했다. <시카고 리더>의 칼럼으로 기획된 이 글은 모종의 이유로 지면에서 반려된 뒤 본인의 블로그에 올라갔는데, 덕분에 더 손쉽고 편하게 읽어볼 수 있어 한명의 독자로선 좋았지만 또 다른 지면의 데스크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선 생각이 많아졌다. 오늘날 정형화된 지면들은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반대로 새롭게 등장한 플랫폼들은 폭넓은 사유와 토론의 장을 제대로 제공하고 있는가.
거창하게 ‘영화비평에 대한 정의’까지 살필 것도 없다. 지금 당장 궁금한 건 하나다. 영화는 여전히 ‘감상과 비평’이라는 리액션을 필요로 하는가. 독자가 사라지고 필자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공포와 환희 사이 잡지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