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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Civil War)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깝다. 한반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심각한 내전을 겪었고, 그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냉전적 내전’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마치 다른 국가인 양 살아온 지 너무 오래다 보니, 하루빨리 이 내전을 끝내고 하나의 국가를 복구해야 한다는 당위도 그럴 수 있다는 희망도 엷어져버렸다. 내전의 종식은 고사하고, 그냥 외국으로서 맞대어 살 뿐, 전쟁만 안 났으면 좋겠다는 (실은 설마 전쟁이 날까 하는) 생각으로 산다.
한국전쟁이라는 예외적 상황을 제하고, 근대적 의미에서의 내전을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의 집단기억은 그래서 다소 어리벙벙한 감각으로 내전을 대하곤 한다. 그런데 내전은 의외로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대단히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이다. 민족, 인종, 종교, 기타 이해관계 등에 의한 가파른 대립을 경험했던 나라들이 내전 상태에 처했던
[정준희의 클로징] 내란을 내전으로 바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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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그 자체는 고통이 아니지만 변화에 저항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다.” 알다가도 모를 알고리즘의 세계, 첫 번째. 요즘 계속 마음을 다스리는, 특히 불교 관련 명언들이 SNS 상단에 뜬다. 왜 그런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치 관련 영상과 게시물을 자주 봤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도처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몰상식한 저항이 충돌 중이다. 시민의 목소리를 수렴하는 민주주의는 원래 느린 법이라 변화의 과정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어떤 논객은 불안해할 이들을 달랠 신경안정제를 자처하고, 또 다른 논객은 북받쳐오는 감정에 눈물을 터트리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답답한 소식이 뉴스를 도배하는 시기인 만큼 해독제가 되어줄 지혜의 한마디가 절실한데, 그걸 또 유튜브나 SNS 등의 알고리즘이 귀신같이 캐치해서 정치 관련 이슈에 종교·인문학적 격언을 세트 메뉴처럼 묶어놓았다. 뜻밖의 감사.
“늙었어. 자넨 늙었어~!” 알다가도 모를 알고리즘의 세계, 두 번째. 드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새해 단상. 견디는 힘과 참는 근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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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이 사람을 죽이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일까.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에서 총기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전자를, 반대로 총기 사용의 자유를 옹호하는 이들은 후자를 택한다. 총이 사람을 죽인다는 주장은 총 자체가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용도로 사용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말에서 총은 단순한 도구로 간주되어 칼이나 다른 흉기로 대체 가능한 것이 된다. 양쪽 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나로서는 총구가 사람을 향해 겨누어지고 총알이 발사되는 것 외에 총이 다르게 사용될 일이 있을까 싶어 전자에 마음이 갔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기술학자인 브뤼노 라투르는 이 문제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총과 사람 중 어떤 쪽도 사람을 죽이는 본질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총과 사람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달려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 혹은 ‘사람이 방아쇠를 당긴 총’
[임소연의 클로징] 총과 여자 그리고 20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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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달력 교체하는 날이다. 매년 새해가 오면 이렇게 되뇌어왔다. 지난 1년의 후회와 다가올 새해에 대한 부담감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주문. 한해의 끝자락에 설 때마다 매번 우울감에 취한다. 1년 동안 해놓은 일을 정리하다 보면 살짝 초라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내년엔 뭔가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도 싫었다. 그래서 종종 냉소주의의 주문을 되뇐다. 1년의 끝과 시작이란 그저 숫자일 뿐, 괜한 의미 부여하지 말자. 자책도 부담도 내려놓자. 아무것도 아니다.
올해는 그런 주문을 되뇔 필요가 없었다. 일상이 무너진 탓에 연말연시 준비된 여러 순간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매년 소소한 우울감에 시달렸는데 막상 자책할 기회조차 빼앗기고 보니 그게 얼마나 소중하고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2024년 12월 이후 이어진 거대한 상실 앞에서 한국 사회는 일제히 얼어붙었다. 숨쉬기가 어렵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몸이 아프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최선의 최선, 30주년을 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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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일찍 누워 태블릿을 접으려는 순간 한줄 속보가 떴다. CBS 라디오 손명회 PD가 긴급 출연을 요청했다. 근래 정권에 더 깊이 찍힌 CBS에서 나는 그날 오후 6시30분경 일정을 마쳤었다. 귀갓길에 마주친 기자들에게 “혹시 윤석열, 도청을 피해 군인들 만나려고 골프장에 갔던 거 아니냐”라고 했다. 도로 한강을 건너면서 김용현이 떠올랐다. 대선 직후 그가 게스트로 나온 프로그램에서 나는 “대통령실 이전에 예비비 쓰지 말고 국회 심의를 받으라”며 친윤 논객 모씨와 언쟁을 벌였었다. ‘용산 국방부로 옮긴 것도, 대통령실 이전의 지휘자가 대통령 경호처장을 거쳐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 것도, 다 계엄이나 전쟁을 준비한 것이었나.’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마이크 앞에 앉자마자 박재홍 앵커의 제의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경찰의 국회 봉쇄 소식에 불법 판정부터 내렸다. “닫혀 있는 국회도 열도록 되어 있는 게 계엄법입니다.” 이준규 기자가 있었고, 권영철 대기자가 합류했다. 5·1
[김수민의 클로징] 굿나잇 앤 굿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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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극장가는 ‘기후 위기’다. 금방 지나갈 줄 알았던 겨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023년 말 <서울의 봄>에 이어 2024년 <파묘>와 <범죄도시4>가 연이어 천만 관객을 달성했을 때까지만 해도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싹텄다. 하지만 여름 시장의 침체 등 기존의 공식과 패턴을 벗어난 흐름이 보였고 결국 2024년 연말을 정리해보니 코로나 직전인 2019년 같은 기간보다 9400만명이나 감소한 수치에 그쳤다. 요컨대 코로나 이후 마주했던 비상한 위기가 이제 극장가의 기본값이 되어버렸다. 유럽, 일본, 동남아시아는 진즉 코로나 이전 수치를 회복했고, 북미의 경우에도 어렵다곤 하지만 80%가량 회복한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한국 영화시장만 아직 한겨울이다. 경고가 반복됐지만 무시당했고,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기후변화가 현실이 되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높아진 티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얼어붙은 극장가에 부치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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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의 사상가 루이스 멈퍼드는 현대의 권력 체제를 ‘기계’라고 했다.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피라미드를 세운 고대 이집트와 대규모 인신 희생을 행했던 은나라 같은 고대 제국들은 사람들을 마치 시계의 부품처럼 지배자의 뜻대로 줄 세우고 일거수일투족을 명령하는 기계였다고 한다. 그리고 과거에 사라졌던 이 ‘거대 기계’가 현대에 와서 근대국가의 형태로 되살아났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민주주의가 이 기계에 맞서려면 선거와 투표만으론 부족하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기계 부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법률과 규범을 깊이 숙지하고 자신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말은 쉽지만, 이는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서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다. 기계의 부활을 꿈꾸는 독재자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비웃는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열흘 남짓한 동안 우리를 기계 부품으로 여기려 했던 오만한 전제군주를 탄핵하는 데 성공했다.
첫째
[홍기빈의 클로징] 우리가 기계를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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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마지막엔 항상 감사할 일이 생겨.” 점점 잠들기 싫어하는 아이를 겨우 재운 뒤 식탁에 앉아 한숨 돌린다.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 따뜻한 물 한잔과 함께 정적을 음미하던 아내가 입을 뗐다. “그래서, 요즘 좀 행복한 것 같아.” 잠든 아이들은 천사다. 꿈나라로 떠난 아이의 평화로운 얼굴을 지켜보다 절로 나온 감탄사겠거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그래, 잘됐네. 나도 기뻐.”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한 답변 앞에서도 아내는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당신도 밤마다 너무 걱정 말고, 지금 눈앞의 좋은 것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문득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니 세상 심각한 표정의 우울한 사내가 물끄러미 이쪽을 보고 있다. 그렇게 한주 동안, 딱딱하게 굳은 얼굴 가죽 밑으로 따뜻한 말 한마디를 품은 채 지냈다. 출퇴근길 인파에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의식의 끝자락은 질문 하나를 붙잡고 곱씹는다. 행복이 뭘까.
클레어 키건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영화 헤아리는 밤, 이처럼 사소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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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더 현실 같을 때가 있고, 현실이 더 영화 같을 때도 있다. 만약 이 ‘때’가 동일하다면 한 문장 안에 묶인 이 두 명제는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이 그렇다. 모순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참으로 역설적인 때다. 2023년 최고 흥행 영화는 <서울의 봄>이었다. 그리고 2024년은 <파묘>가 될 게 확실하다. 둘 다 과거에 태어난 망령이 오늘을 배회하게 한다. 이제는 옛것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군사반란 이야기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호응을 할지 몰랐다. 또 우리나라에서 오컬트 장르가 이토록 많은 대중을 불러 모은 적도 처음이다. 하나는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에 바탕을 둔 허구임에도, 지금 현실 속의 무언가를 강하게 지목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감이다. 여기서 ‘이미 보았던 것 같은 감각’을 유발하는 건 지금 현실이기도 하고 영화 속 과거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가, 상상과 실제가, 영화와 현실이 이토록 기막히게
[정준희의 클로징] 폭력과 주술이 이길까, 시민과 헌법이 이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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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코리아에서 주간지는 괴롭다. 대체로 실시간, 일간보단 사유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지만 때때로 극한 직업이 된다. 12월12일 목요일 아침 어느덧 네 번째 버전의 ‘편집장의 말’을 쓰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글이 오늘 마감 끝날 때까지 온전히 유지될 거란 자신이 없다.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에 맞춰 새로 글을 쓰는 중이다. 목요일 마감날 다 정리된 뒤 쓰면 되지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냐고 묻는다면,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서 도저히 뭐라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12월7일 토요일, 대통령 탄핵 표결이 무산된 이후 분노와 슬픔에 잠겨 첫 글을 썼다. 돌이켜보니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역동성을 간과한 어리석음의 결과다.
계엄, 내란, 탄핵 정국의 격변 속에 한주를 버티며 주간지 호흡이나마 시국을 따라가고자 예정된 기획기사를 변경했고 긴급하게 현장취재도 시도했다.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것 같았던 11일 수요일, 윤석열 퇴진을 촉구하는 영화인들의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니가 앞으로 뭘 하든, 하지 마라”(영화 <넘버 3>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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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제 시상식에서 유명 남자배우가 자신의 아이를 책임지겠다는 당연한 말을 하고 박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그 당연한 말을 토크쇼나 유튜브 채널이 아닌 영화인들의 축제 자리에서 비장하게 내뱉기까지 자신의 아이임에도 책임지지 않았던 무대 뒤 수많은 남성들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어차피 결혼으로 묶인 남녀 중 자녀양육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방해가 되는 쪽이 남편이라면 남편이 아니면서 자녀에게 책임을 지는 아버지가 차라리 낫다는 논리도 같은 현실을 전제로 한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는 걸까. 직접 출산과 양육을 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에 대해 이미 책임을 지고 있는 여성들보다 책임을 지겠다는 선언만 했을 뿐인 남성이 ‘비혼출산’의 선구자가 되고 있는 현실에 나는 오늘도 어리둥절하다.
이 어리둥절함이 낯설지 않아 기억을 더듬다가 <그 남자에겐 1,000명의 자식이 있다>는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고 말았다. 다큐멘터리에는 아이를 낳고 키
[임소연의 클로징] 그 남자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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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상이 멈췄다. 태어나서 처음 이 상황을 맞닥뜨린 이들부터 한국사의 계엄령을 모두 경험했다는 어르신까지, 45년 만의 계엄령 선포는 국민 모두에게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단 6시간 동안의 악몽으로 마무리됐지만 중요한 건 시간의 양이 아니다. 아니,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더이상 2024년 12월4일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정의나 민주주의 같은 거창한 담론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게 변하는 중이다. 크고 작은 행사를 비롯하여 당장 12월에 예정된 많은 일정들이 변경됐다. 사소하게는 지금 여기 쓰는 편집장의 말조차 원래는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준비 중이었지만 국가수반이 국회와 국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민낯이 드러난 마당에 다른 이야기를 할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2024년 겨울, 한국 사회는 여유와 신뢰를 강탈당했다. 거창한 담론, 시끄러운 정치, 남의 이야기로 치부했던 것들이 계엄과 탄핵 국면을 맞아 모두 공론의 장으로 쏟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서울의 밤과 해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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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첩자라는 건가?” 2021년 10월 윤석열과 이재명 때문에 빵 터지고 말았다. 윤석열의 망언 퍼레이드가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에 이르렀을 때 나는 묘한 맥락에 주목했다. 발단은 고발 사주 의혹이었다. 당내 경쟁자들까지 추궁에 나서자 그는 “이런 정신머리부터 바꾸지 않으면 우리 당은 없어지는 것이 맞다”고 화를 냈고, 이는 정체성 논란으로 번졌다. “스파이 노릇 그만하자. 문재인 대통령을 지키려고 우리 당에 온 거 아니냐.”(유승민) 전두환 옹호는 5일 뒤 부산에서 나왔다. ‘멤버 유지’를 위한 안간힘? (그러더니 당 후보가 된 다음 순천에 가서는 “부득이하게 입당했다”.)
그즈음 이재명은 대장동 게이트를 ‘국민의힘 게이트’라 했다. 친박근혜 정치인 곽상도의 아들이 퇴직금 50억원을 챙긴 게 드러났다. 이재명과 곽상도는 (최소한 결과적으로는) 한통속이다. 곽상도 전 국회의원의 가족은 이재명 성남시장이 사기업의 초과이익 환수 규정을 빼놓은 판에서 이권을 챙겼다. 이런 새
[김수민의 클로징] 무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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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밤엔 왠지 좋은 글이 나올 것 같은 착각에 젖어든다. 아직 한 문장도 쓰지 않았건만 소리를 먹는 새하얀 고요 안에서 이미 명문이 완성된 양 취해 있다. 김훈 작가는 <칼의 노래>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쓸 때 ‘꽃은’과 ‘꽃이’를 두고 담배 한갑을 다 피우며 고심했다고 한다. 작가에 빙의하여 나도 ‘첫눈이’라고 할지 그냥 ‘첫눈은’이라고 쓸지 고민해본다. 너무 빨리 쓰면 안될 것 같아 ‘내린다’와 ‘내렸다’ 사이에서도 괜히 한번 서성인다. <설국>의 저 유명한 첫 문장과 비견될 법한 문장이 나와버리면 어쩌나. 설레발로 점철된 도취의 밤을 지나 마침내 완성된 첫 문장의 꼴. ‘첫눈이 내린다.’ 짧았던 밤이 끝나고 현실로 복귀한다. 훈훈하게 데워두었던 방바닥도 어느새 차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명문장은 단지 하나의 문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작품의 총화를 묶어서 응축된 깊이를 가졌을 때 비로소 위대한 한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첫눈, 첫 문장, 겨울의 첫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