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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이후’(post-growth)라는 말이 있다. 20세기 후반의 전 지구적 산업문명은 국내총생산(GDP)으로 측정되는 경제성장을 지상명령으로 최고의 조직원리로 삼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기후 위기, 극심한 불평등, 인구 위기, 사회 해체 등으로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원리로 경제와 사회를 조직해야 한다. 그 새로운 대안적인 원리는 무한성장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좋은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안에 담긴 함축된 내용이다.
이렇게 말하면 단박에 현실을 조금도 모르는 낭만적 이상주의자라는 비웃음이 쏟아져나온다. 경제성장 없이 어떻게 산업사회의 조직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좋은 삶’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려면 마음 맞는 몽상가들끼리 모여서 공동체나 만들어서 조용히 살 일이지 떠들어대지 마라. 우리는 경제성장의 엔진을 힘차게 돌릴 것이다 등등.
나는 반대로 묻고 싶다. 이상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바로 그 ‘현실’에 대한 질문이다
[홍기빈의 클로징] 성장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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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이야. 다시 써봐.” 오랜 지인이 등단을 했다. 국문과 졸업한 지 15년이 훌쩍 넘었으니 그동안 집필의 끈을 놓지 않은 의지만으로도 존경의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술기운이 적당히 오른 축하 술자리, 지인은 대학 시절 내가 자신의 글을 보고 했던 ‘엉망진창’이란 한마디가 갑자기 떠오른다며 불쑥 술잔을 내밀었다. 묵은 응어리를 푸는 회포의 잔도, 나의 건방지고 못된 말에 자극받아 계속 글을 쓸 수 있었다는 훈훈한 성공담도 아니다. 그냥 문득 지금 그 말이 떠올랐다며, “네가 비평을 업으로 삼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해맑게 웃는 그의 모습에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는 내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은 것 같다고 했지만 실은 매 순간 번민의 늪 속을 허우적거린다. 이 걸작들을, 벅차오르는 순간을, 감히 이렇게 몇마디 조악한 단어들로 정리해도 좋은 것인가. 내가 뭐라고. 뭘 얼마나 안다고. 악의 없는 그의 미소가 안겨준 자괴감을 음미하며,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면서도 이 짓을 계속하는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애매한 재능을 견디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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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과학자다. 모든 관심은 사회에서 시작하고 모든 고찰은 사회를 개선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한국과 세계가 실로 대격변을 겪던 1980년대 후반, 고등학교 시절에 이 길을 걷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 결정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결국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사회 안에서만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내게 이 사회는 영원한 숙제이다. 나는 사회과학을 사랑한다. 우리가 사회를 지어 살아가는 한 사회에 대한 탐색과 질문 그리고 해답 찾기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사회는 이런 사회과학의 느린 몸짓을 비웃으며 저 멀리 달아나고 있다. 미국 사회과학은 왜 트럼프가 멀쩡히 살아 돌아와 기세등등하게 유권자를 후리고 다닐 수 있는지 해명하지 못한다. 유럽 사회과학은 홀로코스트의 비극 이후 영원히 묻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던 극우의 발호를 눈뜬 채 방임하고만 있다. 한국 사회과학은 우리 민주화 과정이 왜 이런 대통령과
[정준희의 클로징] 어느 부끄러운 사회과학자의 소심한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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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산처럼 높은 파도의 위용보다 하얗게 부서진 포말이 더 깊은 여운과 잔향으로 기억된다. 좋은 드라마도 마지막 페이지의 결과보다 과정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완성되는 법이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열풍이 남긴 후일담을 들으며 어느덧 우리도 맹목적인 결과지상주의의 터널을 지나 과정을 즐길 정도의 여유가 생겼음을 실감했다. 우승의 영광은 나폴리 맛피아에게 돌아갔지만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좀더 마음을 울리는 드라마를 써내려간 쪽은 아무래도 에드워드 리 셰프였던 것 같다.
다듬어지지 않은 애정은 간혹 차별과 공격의 언어를 동반하기도 한다. 에드워드 리의 서사를 응원하는 이들 중 일부는 호텔에 머물며 연습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그가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다며 공정성 문제를 지적했다. 이에 대한 에드워드 리의 화답은 그가 만든 어떤 요리보다 깊고 진한 맛을 전한다. “주방이란 무엇인가요? 주방은 화려한 장비나 고급 식재료뿐 아니라 열정과 사랑, 창의력을 발휘하는 곳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곧은 말, 너른 삶. 굽은 말, 부박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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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것은 본능 아닌가요?” 최근 북토크에서 받은 질문이다. <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의 저자로서 여러 독자들을 대상으로 북토크를 해왔지만 여자 고등학생들만 모인 자리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은 여자의 본능,’ 아름답게 꾸민 여성이 등장하는 수많은 뷰티 제품 및 패션 광고가 전해온 메시지다.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 반대여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 책을 읽은 어떤 독자에게도 이 질문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날 깨달았다.
이 반가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새들과 춤을>이라는 다큐멘터리영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컷의 눈에 들기 위해 춤을 추고 또 추는 수컷 새들을 실컷 볼 수 있는 영화. 배에 노란 깃털이 가득한 어떤 수컷 새는 머리에 달린 몸 전체보다 긴 깃털을 사방으로 흔들어대고, 까만 몸통에 쨍한 파란색 깃털로 포인트를 준 또 다른 수컷 새는 나무 끝에 간신히 몸을 기대고 ‘폴
[임소연의 클로징] 아름다워지고 싶은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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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종이에 쓴 기록처럼 ‘정보’의 속성을 지닌 반면 추억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새겨진 가 아닐까 싶다. 이제 10월 초의 부산은 예전만큼 쌀쌀하지 않흔적을 더듬는 ‘감각’에 가깝다. 내 경우엔 가을바람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조건반사처럼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가 생각난다. 기분 좋게 선선한 바람으론 부족하다. 얇은 겉옷 사이로 바람이 뚫고 들어와, ‘겨울옷을 꺼내야 하나?’ 살짝 고민이 될 정도가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부산영화제와 관련해 잊히지 않는 경험, 몸에 새겨진 기억 중 하나는 대형 스크린이 마련된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덜덜 떨어가며 봤던 야외 상영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고생하며 봐야 하나 싶었지만 막상 영화가 끝난 후, 더할 나위 없는 충만감으로 가득했던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제목을 밝히기 곤란한) 그때 그 영화를 얼마 전 우연히 다시 보았는데 너무 엉망이고 재미가 없어 깜짝 놀랐다. 그 시절의 나는 무엇에 그렇게 취하고 반했던 걸까.
영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부산 밤바다, 그 날씨에 담긴 BIFF의 추억. 그리고 새로운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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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 첫 번째 미국 대선은 1992년이다. TV 뉴스에 민주당 후보군이 소개되었을 때 후반부에 나온 한 젊은 후보를 보고 “대통령처럼 생겼네”라고 중얼거렸다. 이 비과학적 예언은 적중했다. 4년 뒤 맞이한 미국 대선은 ‘인생 선거’였다. 공화당 밥 돌 후보의 작은 정부론과 감세안이 복지국가의 원칙을 거스른다고 판단했고 이는 내 정책 체계의 1층에 자리 잡았다. 역대 미국 대선에서 줄곧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 미국 민주당은 유럽의 좌파 정당에 비하면 보수적이지만 적어도 조세와 노동, 성평등과 소수자 권리를 ‘나중에’ 논하자며 뒷걸음질치는 정당은 아니다.
2020년 한국에는 자신이 진보라면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혐오 정치의 세계화에 무딜 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에 대한 식견도 좁다. 트럼프의 모험이 북미 관계의 미래를 미리 보여준 측면은 있으나 거기서 끝이었다. 체계적이지 못한 이벤트식 접근 때문에 북미 대화가 중단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어차피
[김수민의 클로징] 게임 체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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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코끼리만 생각나는 것처럼 언어의 거울에는 종종 속내가 거꾸로 투영된다. 소리 높여 정의를 부르짖는 자들이 대체로 불의에 길들여 있고, 애국과 전쟁을 말하는 이들이 제일 먼저 줄행랑을 치는 법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9월26일 화상 기자회견에서 “1편의 반응이 2편에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겠지만 의식해서 만들진 않았다”고
말할 때부터 어딘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커: 폴리 아 되>는 전작 <조커>를 둘러싼 부정적 평가와 우려에 대한 화답 같은 영화였다.
자기반성은 대체로 건강함의 증거지만 창작의 영역에선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속편이니까 전작에서 이어지는 답변을 내어놓는 게 당연하지만 뭐든 과하면 곤란하다. 걱정 가득한 반성문은 (전작의 위험성을 지적했던 이들의) 눈치를 보다 길을 잃은 건지 점점 수다스러워지더니 어느새 (보편타당하고 안전한) 올바름에 안착해 (지적)각성을 강요한다. 그렇게 카메라 초점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의미와 재미 사이, 속편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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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이미 1958년에 능력주의(meritocracy) 사회가 어떤 디스토피아로 이어질 것인지를 절절히 경고했다. 부와 권력과 명예 등 사람들이 원하는 것의 분배가 철저히 각 개인이 가진 ‘능력’에 비례하여 돌아가도록 하자는 것이 능력주의 사회의 이상이다. ‘공정한’ 사회일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행복한 사회는 아닐 것이다. 이제부터 ‘없는 자들’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없어서 서러운 것에 끝나는 게 아니라 그 꼴로 사는 책임은 모조리 자신이 못난 탓이라는 모욕까지 뒤집어쓰게 되기 때문이다. 게임과 경쟁에서 밀렸으니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더더욱 불만이 쌓여간다. 마이클 영의 이야기는 결국 이 ‘없는 자들’의 폭동으로 사회가 무너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오래전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술집 지하 화장실에서 본 맥주 광고 포스터는 아직도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 문구는 ‘맥주의 미덕: 못생긴 사람들도 섹스를 할 수 있도록 해준다’였다. 누구나 알고 있지
[홍기빈의 클로징] 능력주의를 이야기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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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에 봤던 신기한 영상이 요즘도 종종 생각난다. ‘딥페이크의 긍정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영상에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활짝 웃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늘 엄숙하고 어딘가 경직된 표정으로 기억되던 독립유공자들의 (상상 속) 미소를 보니 오랜 지인의 새로운 면모를 마주한 것처럼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날 이후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면 딱딱한 얼굴보다는 수줍은 미소가 먼저 떠오른다. 마음 한구석에 온기가 퍼진다.
살아 움직이는 영상은 이토록 강력하다. 물론 그게 항상 좋은 쪽으로만 작동한다는 보장은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2013) 개봉 후 배우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목소리가 링컨의 목소리로 기억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링컨 대통령의 육성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가 재현한 링컨의 목소리, 동작, 표정은 현실을 덮어씌울 만한 강력한 힘이 있다. 중요한 건 정보의 진위가 아니다. 그걸 진짜라고 느낄 만한 감각이 때론 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얼굴의 스펙터클,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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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한가위다. 두 단어로만 이뤄진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내 연식과 문화적 배경이 드러날 테다. ‘바야흐로’라는, 시의적절한 뉘앙스에 발음마저 유려한 이 단어는 구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문어체로도 잘 쓰이지 않는다. 한가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여름을 끝내고 가을걷이에 들어간 시절의 풍요와 여유가 배어 있는 이 아름다운 우리말을, 진정성 있게 사용하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전통의 고아함을 품지 못하면서도 그 무렵이면 늘 그런 표현을 별 생각 없이 가져다 쓰는,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의 게으른 관습 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더 진부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더 피하게 되는 악순환이다.
말이란 시대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라는 말이 제아무리 예쁘고 여전히 대체할 수 없는 적확한 표현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 시대 언중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결국 쓸쓸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가위’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더이상 농촌 기반 사회에 살고 있지
[정준희의 클로징] 상실의 시대가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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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쓸 때 ‘배우의 존재감으로 성립하는…’ 따위의 수사를 간혹 사용한다. 실은 부끄러울 만큼 게으른 표현이다. 영화 글쓰기에서 가능한 한 피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같은 표현을 다른 영화에 썼을 때 위화감이 없다면 그건 실패한 글쓰기다. 속된 말로 영화 안 보고도 쓸 수 있는 표현. 소심하게 항변하자면 때로 그런 표현들은 불가항력을 마주한 일종의 항복 선언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실체를 포착하지 못하는 대상은 언어로도 포획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대상이 다름 아닌 배우다.
영화의 서사나 구성, 감독의 연출이나 의도 바깥에서 기이한 활력을 뿜어내는 존재들이 있다. 찍을 수는 있지만 의미를 고정할 수 없는 대상들. 배우의 몸짓, 배우의 동선, 배우의 실루엣, 배우의 육체, 무엇보다 배우의 얼굴이 거기에 해당한다. 어쩌면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가르는 기준은 필름이 아니라 배우의 유무일지도 모르겠다. 배우는 통제 불가능한 대상인 동시에 영화의 물질적 기반이다. 그 어떤 스펙터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얼굴의 스펙터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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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인공지능으로 생성한 이미지를 전시하는 인터넷 게시물에 유독 ‘대유쾌 마운틴’이라는 밈이 자주 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로봇공학 분야의 오래된 이론인 ‘언캐니 밸리(불쾌한 골짜기) 가설’에 따르면 인공물은 어설프게 인간을 닮으면 오히려 불쾌감을 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가상인간의 이미지가 실제 인간의 사진처럼 보일 정도로 잘 만들어져서 더이상 불쾌감을 주지 않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의미에서 그 표현을 사용했다. 깊은 골짜기를 빠져나와 드디어 산 정상에 도착한 이들의 쾌감과 흥분이 느껴졌다.
신나 하는 사람들을 보며 괴로웠었다. 그들이 인공지능으로 만든 이미지 속 인간은 거의 대부분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연령대, 얼굴과 표정, 몸짓, 그리고 복장 등 모든 것이 비슷비슷한 여성들. 그곳에는 쇼트커트를 한 여자도, 주름진 얼굴로 흰머리를 쓸어 올리는 여자도, 정장 차림을 한 여자도, 땀 흘리며 달리는 여자도, 기골이 장대한 여자도, 중장비를 운전하는 여
[임소연의 클로징] 딥페이크 딥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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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란 걸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 깨달았다. 일요일 아침마다 숙제처럼 찾아오는 중요한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 아침 8시에 하는 <디즈니 만화동산>을 볼 것이냐, 아니면 조금 더 늦잠을 잘 것이냐를 두고 매번 흔들렸다. 사실 뭘 골라도 상관없었다. <디즈니 만화동산>을 선택한 날은 “이번주는 별로네, 잠이나 더 잘걸”이라며 후회했고 늦잠을 택한 날은 놓친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시무룩해지는, 예정된 아쉬움의 반복이었다.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던 건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어느 쪽을 골라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 먼저 떠오르는 ‘후회형 인간’인 나는 지나온 길을 곱씹고 되돌아보는 습관을 기본값으로 장착했다.
간혹 왜 그런 식으로 인생을 낭비하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언해주는 이들도 있다(특히 명절 때만 보는 먼 친척들). 솔직히 고백하자면 걱정해주시는 것만큼 상황이 나쁘진 않다. 스무살 무렵에는 질척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소년 시절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