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라이즈>(1995)를 다시 봤다. 제시와 셀린이 나눈 수많은 말들, 아름다운 단어들이 마치 별처럼 흩어져 스크린에 박힌다. 하지만 결국 제시와 셀린의 욕망은 하나로 귀결된다. 너를 온전히 알고 싶다는 것. 두 사람은 그 실현 불가능한 기적을 위해 빈에서 꿈결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제시는 말한다.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지. 너를 알고 싶다고.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스스로를 아는 것도 힘들어. 나는 항상 변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걸 알려줄 수 있겠어?” 셀린은 답한다. “이 세상에 어떤 마법이 있다면 그건 누군가를 이해하고 함께하려는 시도일 거야. 설사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야.” 그리하여 영화는 셀린의 입을 빌려 진실을 전한다. “있잖아,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것은 너나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영화의 신 있다면 그 역시 한편의 영화로 강림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주는 영화와 영화 사이에 깃든 에너지를 목격한 일주일이었다. 한국영화의 침체와 위기 소식이 이젠 기본값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윤가은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고 안심이 됐다. 약간 설레발을 치자면 연말에 올해의 영화로 꼽을 작품이 확보됐다. 침체와 부재가 입버릇이 되어버린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음에 감사한다. 변성현 감독의 <굿뉴스>도 마찬가지다. 또 설레발을 치자면, 이 영화는 감히 변성현의 최고작이다. 재기 넘치는 신예로 평가받던 그 재능이 마침내 이 영화를 통해 만개하여, 확고부동한 존재감을 증명했다.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은 극장에서 만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이런 감독들이 한국영화의 허리를 받치고 있다면 극장가 상황이 아무리 좋지 않아지더라도 낙담하지 않을 수 있다. 버팀목을 확인하고 희망을 품는다.
다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한국영화에 불어닥친 매서운 한파 속에서도 수면 아래 심상치 않은 에너지들이 약동하고 있다. 봉준호, 박찬욱 감독의 귀환에 이어 윤가은, 변성현 감의 존재감을 확인한 다음 이어질 젊은 영화들을, 올해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마주한다. 이 젊은 감독들의 에너지들도 곧 만개할 것이다. 그리하여 크고 풍성한 꽃 한 송이에 기대지 않더라도, 한국영화라는 화단은 더욱 다채로워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만 그 개화의 시기가 너무 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문득 10월을 돌아보니 독립영화만 꼽아봐도 <3학년 2학기> <만남의 집> <양양> <사람과 고기> <바얌섬> 등 요즘만큼 좋은 영화들로 넘쳐 났던 적이 또 있었나 싶기도 하다. 좋은 영화가 없는 게 아니라 잘 알려지거나 아직 제대로 만날 장소와 기회를 얹지 못했을 뿐이다. 부족하나마 이번 주도 만남의 장을 마련하는 일에 작은 보탬이 되길 희망하며 잡지 한 권을 만든다.
무언가를 만드는 이들은 모두 무언가에 매료된 사람들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을 보며 새삼 이 당연한 진리를 실감한다. 너무 많이 사랑한 죄는 끝내 아름다움으로 번지는 걸까. 무언가에 매혹된 이들이 꾸준히 선보인 결과물에 우리가 다시 매혹 되는 행복한 시간이 이어진다. 기쁘지만 동시에 불안감을 감추기 힘들다. 불안하기에 매혹은 더 강렬해진다. 만약 영화의 신이 있다면 영화와 영화 사이, 불안을 마주하는 시간에 깃들지 않을까. 이 달콤한 순환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ps. 요네즈 켄시와 우타다 히카루의 엔딩곡 <JANE DOE>를 무한반복 듣는 중인데, 이 빠져나오기 힘든 매혹과 만난 것에 감사하며 이번주와 다음주, 2주간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의 포스터를 뒤표지로 독자 여러분에게 전한다. 어떤 한 순간에 매료된 1인이 준비한 작은 선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