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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4분이다. 제리 시장이 연못을 메우고 고속도로를 설비하면서 인간이 얻을 이득은 4분간의 이동시간 절약이다. 그가 이 짧은 시간에 목맨 이유는 오직 대중으로부터 환호받고 싶어서다. 그의 재임 여부는 사람들의 호불호에 달려 있다. 연못에서 인생 절반을 느리게 보내며 많은 생명체의 존재를 목격해온 19살 소녀 메이블은 터무니없는 시장의 욕망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든다. 도시개발이냐 자연보호냐. 산업화 이래로 오랫동안 인간사를 뒤따라온 첨예한 논쟁이 이번엔 디즈니·픽사를 찾았다. 여기까지 보면 전체관람가 애니메이션의 보편적 문법에 따라 다음 전개가 무리 없이 예측된다. 아마도 제리 시장은 탐욕에 찬 음모를 꾸려 자연을 죄책감 없이 파괴하고 도시행정으로 사리사욕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용감한 주인공 소녀는 빌런을 처치하고 동물들과 힘을 합쳐 다 함께 공생하는 유토피아를 구해낼 것이다. 하지만 <호퍼스>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개척해 걷는다.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의 오래된
[비평] 극우화 시대의 청소년 환경운동가와 비혼주의 비버 왕, 이자연 기자의 <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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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레이(구로사키 기리카)에게 오빠 히로키(오다 신이치로)와 아버지(쓰루다 고조)는 “학교는?”이라고 묻는다. 레이는 “끝났다”라고 대답하며 겨울방학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방학은 학기와 학기 틈 사이에 자리한 시간이다. 또한 방학의 시작은 학기의 중단으로부터 기인하는, 말하자면 학교의 시간들을 일시정지하고 획득한 무좌표의 시간이다. 학교의 수업, 친구들, 등하굣길, 일상이라 믿었던 시간들이 잠시 멈추는 나날들. 그리고 학기 중의 시간을 통솔했을 시간표마저 제 몫을 다하고 만기되어 사라진다. 레이는 겨울방학을 맞이하면서, 일시정지된 시간 속에 머문다. 엄마는 할머니의 병간호로 집을 비우고 있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만나기가 쉽지 않다. 레이는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운동하기를 멈춘 것 같은 따분한 세계 안으로 홀로 농구공을 튀기며 말을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이방인이자 여행자인 규리(정주은)는 도쿄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그
[비평] 빛에서 빛으로, 문주화 평론가의 <레이의 겨울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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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박정민)은 마지막에 살 방도를 묻는다. 관객은 그 유언을 조 과장(조인성)을 통해 전해 듣는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지인이 이 대목을 두고 재미난 해석을 하나 건넸다. 요지는 이렇다. 박건의 말이 채선화(신세경)와 함께 더 살고 싶어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공포에 떠밀려 그저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을 내뱉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총에 잔뜩 맞았으니 아프기도 할 테고….” 그 자리에서는 다들 피식 웃고 넘겼다. 나도 웃었다. 너무 단순하고, 그래서 더 엉뚱하게 들렸으니까.
그런데 웃음이 가라앉고 나니 질문이 바뀌었다. 이 해석은 왜 즉각 ‘말이 안된다’고 치부되었을까. 동시에 왜 누군가는 하필 그런 가설을 떠올렸을까. 어쩌면 <휴민트>가 그런 엉뚱함을 허용할 만큼, 한 가지 장르 규칙으로는 단단히 묶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대사 하나가 아니라, 영화 전체가 어떤 야심으로 장르를 끌어다 섞었고
[비평] 블라디보스토크, 잃어버린 편도 티켓, 이병현 평론가의 <휴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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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이하 <플루리부스>)는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으로 가득한 드라마다. 그렇지만 정체불명의 외계 신호가 인간의 기술을 매개로 바이러스 형태로 전파되어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의 고유한 의식을 하나의 단일한 네트워크로 통합하는 와중에 어째선지 세상 성격 더러운 우리의 주인공 캐롤만이 이런 시도에 면역이 있어 참으로 불행하게도 혼자서만 깨어 있게 되었다는 설정 자체에는 솔직히 말해 별로 특별하다 할 만한 구석이 없다. 아무리 캐롤이 헤테로 로맨스 판타지 소설로 돈을 버는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백인 중년 레즈비언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짧은 설명에서조차 우리는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오는 하위 장르의 친척 참조를 쉽게 발견한다. 이를테면 <플루 리부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장 많이 끼쳤다고 언급되는 고전 신체 강탈 영화 <우주의 침입자>나 인간 종의 ‘진화’를 다룬 정전 반열에 오른 SF소설 <유년기의 끝>
[비평] 세계냐 여자냐, 이연숙(리타) 평론가의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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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물의 연대기>를 말하기 전 원작을, 정확히는 이 회고록이 ‘아닌 것’을 언급하는 편이 좋겠다. 극복과 성공으로 귀결되는 전기가 아니다. 고백이나 고발, ‘친족성폭력 트라우마를 지닌 여성 A의 사례’가 아니다. 통상적인 연대기와도 거리가 멀다. 당사자이자 화자인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장면(이 글에서 일컫는 ‘장면’은 기억 속 상을 의미한다)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지 않았고, 주인공인 자신을 보편적으로 수용될 만한 인물로 다듬지 않았다. 유크나비치의 글은 몸과 밀착한, 몸의 리듬을 따르는 글이다. 이러한 원작의 속성을 일부 공유하는 영화는 사건을 재현하기보단 기억 소화 과정을 육화한다.
16mm 필름에 촬영한 이유를 설명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문장 가운데에는 “영화가 조각나야 했기 때문”(2025년 5월18일, <인디와이어>)이라는 표현이 있다. 필름을 물리적으로 쪼개 다시 붙이고 포갠 결과물은 이음새를 드러내는 유동성을 지닌다. 자르고 기운 부위는 신체
[비평] 습기를 머금은 몸들에 관해, 김연우 평론가의 <물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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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은 초반 영화의 흐름상 중요한 대상처럼 인식되었다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되며 사라지는 매개다. 달리 말해 맥거핀은 관객의 망각을 전제로 기능한다. 작은 사건은 영화에서 강조되는 더 큰 사건 속에 묻히며, 이에 종속된 대상들은 무의식중에 선택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1941) 속 ‘로즈버드’는 맥거핀을 연상시키되 맥거핀은 아닌 독특한 대상이다. 로즈버드는 케인이 죽기 직전 유언처럼 남긴 마지막 말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기자 톰슨이 케인의 주변인을 찾아다니며 로즈버드의 의미를 탐문한다. 로즈버드를 찾는 과정은 주변 인물들의 기억 속에 남은 케인의 조각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치환된다. 결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로즈버드가 일종의 미끼이고, 케인의 상을 그리는 것이 영화의 핵심처럼 보인다. 로즈버드의 의미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그가 잃어버린 어떤 것’일 거라고 두루뭉술하게 정리된 채 사라지지만, 관객은 마침내
[비평] 동시대의 로즈버드, 회귀하는 맥거핀, 김소희 평론가의 <슈퍼 해피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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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지만 동시에 가장 나중에 말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누구나 파더나 마더, 시스터-브러더를 우선 말하느라, 그 앞에 툭 튀어나와 있는 이 장면은 나중에 언급되거나 영영 잊힌다. 신이라기보단 토막 영상에 가까운 이 순간은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그리고 앞장과 뒷장의 사이를 잇는 막간에 짤막하게 등장한다.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배경으로 빨간색, 초록색을 띤 빛 입자들이 깜빡거린다. 묘사부터 어렵기에 더욱 기억하기 힘든 이 트랜지션 토막 자체가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에서 큰 특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만큼은 다르게 느껴지는 건, 여기서 이 토막들이 독립적인 세개의 이야기를 단절시키기보단 잇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세편의 단편을 이어서 볼 때 느낄 수 있는 총체적인 감각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그보다 더 크게
[비평] 길을 잇는 빛의 리듬, 김철홍 평론가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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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첫 장편영화를 발표한 해인 1997년에 아오야마 신지는 <누벨바그 선언, 혹은 나는 어떻게 필립 가렐의 사도가 되었는가>(이하 <누벨바그 선언>)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 일본판에 발표된 이 글은 누벨바그의 다음 세대로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필립 가렐의 과업을 되짚으며 동시대 일본에서 새로운 영화가 나오는 데 필요한 조건을 집요하게 캐묻는다. 아오야마는 현대 일본영화가 타자를 흡수하여 개인을 말살하는 공간이라 지적하고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는다. “개인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데 필요한 주체를 무시하는 것은 현대 일본영화의 담론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암묵적 전제이다. (...) 그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상의 ‘일본적 자연’ 속에서 밤낮으로 놀며 자신의 천박함을 눈치채지 못한다.”
아오야마는 ‘가상의 일본적 자연’이란 표현을 빌려 1990년대 일본영화에 나타난 풍경을 비판적으로 규정한다. 서사를 견인하고 끝맺는 극적 장치
[비평]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해 있다, 김병규 평론가의 <여행과 나날>과 <슈퍼 해피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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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가장 급진적이었던 기술적 선택에서 <아바타: 불과 재>(이하 <불과 재>)는 한 걸음 물러난다. 어떤 장면에서도 생성형 AI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강조하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말이 격세지감 속 낯선 선언처럼 들리고 만 이유는 최첨단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의 결실이었던 2009년의 <아바타>가 2025년의 <불과 재>에 이르러 또 다른 최첨단 기술의 생성형 AI 이미지와 대적하려는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지형의 판도라 행성은 실체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영화 기술의 진화와 실재하는 이미지 퇴행의 시대에 그 자체로 상징적 장소가 되어버렸다.
월드와이드웹에 반(反)하여
돌이켜보면 디지털영화 시대에 접어들어 등장한 <아바타>는 디지털네트워크의 미래가 아닌 디지털 이전의 직접 연결성으로 돌아가기를 상상했다. 문자 그대로 드넓게 펼쳐진 망(網)을 상상케 하는 월드와이드웹(WWW)은 다대다 동시접속이 가능한 디
[비평] 파격은 다시 새롭게 정의되는가, 유선아 평론가의 <아바타: 불과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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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 것. 우리가 상실한 것을 망각하지 말 것.’ 언젠가부터 일본 동시대 영화들이 수행하고 있는 이 거대한 캠페인의 지층 하부에는 도호쿠 대지진이라는 불가침의 콘크리트가 자리하고 있다. 캠페인의 주창자인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의 후반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운전기사 미사키(미우라 도코)를 끌어안으며 했던 말.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그게 계속되지’는 외화면의 전세계 관객들과 하마구치 이후의 영화감독들에게 이물 없이 각인되었다. 사자(死者)들을 위무하는 제의의 영화. 이는 사회적 책무와 시대적 윤리의식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예술영화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한 일본 감독들의 고유한 특권이자 누려 마땅한 성취일 것이다. 이가라시 고헤이의 전작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은 이러한 캠페인에 흠집을 내는 반가운 변수이다. 6살의 타카라는 어시장으로 출근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낯선 길을 나선다. 장
[비평] 유실물 센터로서의 영화, 문주화 평론가의 <슈퍼 해피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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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바움백의 영화 속 인물은 미완의 상태에 있다. 관계는 뒤죽박죽이고 감정은 넘쳐흐르며 인물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간다. 각자 말하고 동시에 말하며 휴대전화로 말한다. 바움백의 영화가 수다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물이 성장하고 완성돼가는 과정을 말로 보여주어서다. 말하는 동안 인물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확인하고 더 많은 말을 쏟아내며 관계를 회복하려 시도한다. 바움백의 세계에서 말은 미완의 인물들이 사용하는 성장 도구다.
<제이 켈리>는 이 익숙한 구조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성장의 현장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성장 서사가 끝난 이후, 즉 이미 성공한 인물을 내세운다. 바움백 영화 세계에서 만나는 새로운 유형, 사후(事後) 인물이다. 성장 서사가 종료된 이후의 인간, 변화가 중심 사건이 되지 않는 인물을 뜻한다.
제이 켈리(조지 클루니)는 성공한 영화배우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미 완성된 인물이므로 자신의 직업적 위치와 사회에서의 역할
[비평] 성장 이후의 인간, 최선 평론가의 <제이 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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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 주데는 신작 <콘티넨탈 ’25>(이하 <콘티넨탈>)의 참조점으로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유로파 51>(이하 <유로파>)과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를 언급한다. 편의적으로 구분할 때 전자는 내용의 측면에서, 후자는 구성의 측면에서 닮았는데, 가령 노숙자 이온이 난방기에 목을 매달고 죽은 후 그를 담당한 퇴거 집행인 오르솔리아가 사람들을 만나 고민을 나눈다는 줄거리는 <유로파>에서 어린 아들의 자살 이후 이레네가 도시를 거닐며 빈곤과 노동 실태를 마주하는 이야기와 느슨히 연관된다. 또 초반부에서 이온을 따라가던 영화가 그의 죽음 이후 오르솔리아로 주인공을 재설정한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관객으로 하여금 갑작스럽게 이입의 주체를 이양시키는 <싸이코>의 구성이 환기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로셀리니의 근심, 주데의 냉소
로셀리니의 근심은 반세기를 훌쩍 지나 주데의 냉소로 전환된 듯 보인다. 그런데 냉소는 실
[비평] 목격하는 개체, 이보라 평론가의 <콘티넨탈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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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보>에 나오는 첫 가부키 <세키노토>(국경의 관문). <세키노토>는 눈 덮인 오사카 산의 관문과 기묘하게 만개한 한 그루 벚나무를 배경으로 한 도키와즈(常磐津) 무용극이다. 무대를 벗어난 두 배우가 복도에서 연기를 이어갈 때 절묘하게도 그 후경엔 눈이 내리고 있다. 마치 가상의 이야기 속 무대가 현실에 확장 구현된 듯한 이 눈은 분명 아름답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 키쿠오 역시 아버지의 죽음을 이 눈과 함께 뇌리에 새길 테지만, 그리고 훗날 만키쿠의 무대에서 흩날리는 종이 눈을 보고 ‘처음 보는 풍경’을 쫓기 시작할 테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 눈은 그저 눈이다. 관객은 투명한 문 너머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세키노토>와 느슨하게 연결해 바라볼 뿐이다.
아직 아무런 의미도 덧붙여지지 않은 이 새하얀 눈이야말로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라면 이상한 말일까? 우리는 이후 자연에서 내리는 이와 같은 순수한 눈을 보지 못하며, 영화에
[비평] 박제가 되어버린 국보, 이병현 평론가의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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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로미(니콜 키드먼)와 그의 섹슈얼리티가 있다. 그는 명문대를 나온 백인 여성 CEO이며, 남편과의 성관계 후엔 몰래 포르노를 보며 자위한다. <베이비걸>은 로미의 전사를 서술하되 정신분석에 사용하지는 않는다. 컬트 공동체에서 보낸 성장기의 잔상은 로미가 자신의 욕망을 비정상이라 여겨 그 실마리를 과거에서 찾으려 했기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전사와 회사 내 지위가 로미의 욕망과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대디”가 나오는 포르노를 보는 원인이 모종의 과거사에 있으리란 법은 없고, 회사에서 지시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상대가 침대에서 복종하길 원하는 건 아니다. 섹슈얼리티는 특정한 인과로 설명되지 않고 누군가의 ‘유일한 진짜’도 아니다. 더불어 짚으면, ‘남성적 시선에 의해 여성의 마조히즘이 왜곡된 형태로 재현되곤 했다’는 식의 비판적 분석과 ‘여성의 마조히즘은 남성 판타지’라는 단정은 다르다. 납작한 일반화가 통용되는 시대는 지났다. 영화는 이를 인지
[비평] 유동하는 날숨의 감각, 김연우 평론가의 <베이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