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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흐르는 물처럼 시작된다. 수평 트래킹으로 담은 인도 뭄바이의 밤거리는 눈앞에서 쉴 새 없이 지나간다. 그러다 카메라는 때때로 속도를 늦춰 거리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바라본다. 이런 진행은 이 영화에 대해 붙는 수식어들, ‘몽환적’이라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담았다는 말을 불러오는 이유 중 하나다. 물 같이 흐르고 또 고이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 무렵, 성급한 판단을 멈춰 세우는 하나의 숏이 등장한다. 그것은 달리는 버스에 타고 있는 한 여인에 관한 숏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동공이다. 한곳을 부드럽게, 그러나 또렷하게 응시하며 형형하는 동공. 그것은 흔들리는 배를 붙드는 단단한 바위처럼 영화를 이곳에 정박시킨다. 그 눈이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물결처럼 우아하게 넘실대는, 그래서 몸을 내맡겼다가 영영 빠져버릴 것만 같은 영화의 흐름 안에서, 그 눈만은 우리를 불러 세워 단단하게 붙든다는 점만은 일러
[비평] ‘빛’이 있는 그곳을 향하여,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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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밝히겠다. 나는 일본 문화의 열성적인 팬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사로잡혀 <사유리>를 보았고 흥미로웠다. 기대감과 데이터베이스가 없어서 그렇게 봤을 수도 있다. 이 글은 무지로부터 출발한다. <사유리>는 이질적인 두개의 장르를 꽤 잘 어울리게 접목한 형태의 영화다. 두개의 장르 중 하나는 호러고, 다른 하나는 열혈물이다. 개인적으로 2부에 펼쳐지는 후자를 일본의 전통 장르라 부르기도 하고 ‘희망’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충분한 논의가 있기를 바라며 잠깐 적어보자면 일본의 현실 세계와 유리된 채 상당히 오랜 세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영화는 무모하리만치 희망을 품는다. 전후 폐허가 된 일본이 겪은 괴리를 픽션으로 극복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그때로부터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왜 이러한 양상이 진행 중인지에 대해 궁금하지만 내 몫은 아닌 것 같다.
<사유리>가 심리-액션 활극으로 변모하는 순간
다시 돌아와 <사유리
[비평] 희망의 본질에 대하여, <사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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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감독의 <로비>는 국책 지원사업을 따내려는 한 스타트업 회사의 작전기로 접대 골프라는 관행적 악습에 (영화의 대사를 빌려오자면) ‘명랑’한 접근을 시도한다. 이 영화에서 신선하게 여겨지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한국 누아르와 범죄영화에서 밀실로 변형되었던 전통 누아르의 암흑가를 골프장의 필드로, 부정함을 드러내는 부수적 수단으로 단 몇신에 불과했던 부당거래 장면을 100분 가까운 러닝타임으로 펼쳐내 장르의 요소를 영화 전체로 확장한다. 주 소재가 골프이기 때문에 전략 세우기와 심리전을 다룬 <1승>과 같은 스포츠영화의 변주로도 보인다. 일견 장르에 충실한 이 영화를 따르다 보면 갈등이 해소되기를 기대하는 시점에 놓이는데 서사가 봉합될 때 <로비>는 대체 어떤 연유로 장르영화의 기대에 반하는 선택을 내렸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그 첫째는 코미디에 덧입혀진 이 영화의 또 다른 장르 규범이 주인공의 도덕적 선택과 정면으로 충돌함에 있다. 여기에는
[비평] 전략과 각성의 딜레마,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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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 사이로 두 젊은 여성과 그 뒤에 손을 모으고 있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곧이어 “올파의 딸들의 이야기를 이 영화에 담으려고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 두 젊은 여성, 그 뒤로 포커스 아웃된 중년 여성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중년 여성의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이 이어지고 “올파의 네명의 딸 중 두명은 올파와 같이 살고 나머지 두딸은 늑대의 먹이가 되었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올파의 딸들>은 튀니지의 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가 2015년 튀니지 전역을 들썩이게 했던 고프란과 라흐마 자매의 이야기를, 실존 인물인 올파와 남은 두딸들이 심리치료극에 가까운 재연영화로 제작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아낸 영화다. 북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튀니지에 사는 올파는 딸만 있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가족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남장을 하고 운동을 하면서 관습적인 젠더를 거부하던 올파는 있으나 마나 한 무능
[비평] 실재와 허구, 경계의 틈에서 새 나오는 증언과 외침, <올파의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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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투어>를 곱씹으며 어쩐지 자연스럽게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을 떠올렸다. 아즈마가 특히 강조하는 개념인 ‘오배’는 전송의 오류를 뜻하지만 이러한 경험은 실상 관광객에게는 필수적이며 도리어 긍정적인 측면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가령 나의 근처라면 기웃거릴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을 곳을, 관광지에서는 필수로 방문하게 되는 역설 말이다. 오배의 경험은 오히려 단절되어 있던 역사에 관광객들의 산발적인 체험과 시선을 개입시킨다. 여행은 그러한 불확정성과 손을 잡음으로써 연대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드는 행위일 테다.
그러나 아무리 미시적 차원에서 발휘되는 여행의 효과를 긍정하더라도, 제국의 식민지 건설이 촉발한 관광의 포화가 낯선 땅에서의 고유한 미적 체험이나 미지와의 조우를 통한 성찰적 여정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그랜드 투어>가 드러내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랜드 투어는 제국의 (감각적, 문화적) 우월성을 재확인
[비평] 2부 혹은 제3인 것, <그랜드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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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수영 강사 영은(곽선영)이 딸 소현(기소유)의 살해 충동을 달래는 한편 스스로와 타인의 안전을 도모할 방편으로 소현에게 닭을 도살할 기회를 마련한 장면은 시각적이고 심리적인 면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준다. 자식의 성정을 두려워만 하지 않고 어떻게든 포용해보려는 심정은 불경해 보일 수 있으나 뱀파이어와 그에게 종속된 자들의 관계에 비견하지 못할 것은 없을 것 같다. 여러 참조물이 있겠지만 당장 생각나는 <렛 미 인>에 대입하면 소녀와 늙은 소년의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듯 뱀파이어에게 복종하는 건 그가 부리는 마력 때문일 텐데, 모성도 그 힘만큼은 이 마력에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은의 인내와 포용에는 특이한 구석이 있다. 미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범인의 친모는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저자이기도 한데, 거기서 사랑하는 아들이 총기난사범이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느낀 혼돈을 자주 풀
[비평] 망설임 두번, <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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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려져 있듯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크래쉬>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는 인터뷰에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 당시 코폴라가 강한 반감을 표했으며 직접 상패를 건네주는 것조차 거부했다고 회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1998년 국내에 검열본이 개봉했을 때 <크래쉬>의 홍보 팸플릿에는 코폴라의 평이 실려 있다. “<크래쉬>에 상을 주는 이유는 첫째, 대담하기 때문이고 둘째, 뻔뻔스럽기 때문이다.”(동숭씨네마텍 팸플릿) 코폴라의 사례가 보여주듯 <크래쉬>를 둘러싼 반응은 모순에 처해 있다. 영화의 인물들은 교통사고와 그로 인해 훼손된 신체를 페티시 삼고, 자동차가 으스러지는 순간에 절정에 달하려는 도착적인 행위를 반복적으로 추구한다. 그리고 <크래쉬>는 이 관능을 너무도 성공적으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욕망과 ‘거의’ 일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 관능에 몰입하는 것이 도덕적 거부감을 낳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비평] 속도를 높이되 도착하지 말 것: <크래쉬>라는 반복의 무대, <크래쉬: 디렉터스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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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전에 영화를 둘러싼 논란이 먼저 도착했다. 개봉을 앞둔 <에밀리아 페레즈>를 둘러싸고 영화 안팎으로 논란이 제기되었다. 주인공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이 과거 SNS에 남긴 문제적 발언을 둘러싼 논란을 비롯해 멕시코와 트랜스젠더 여성의 묘사 방식에 관한 비판 등 쟁점은 다양하다. 뮤지컬을 차용한 자크 오디아르의 가장 비현실적인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현실적인 논란에 직면했다.
여러 비판 가운데 핵심은 배우를 둘러싼 논란이다. 재현의 윤리 혹은 진정성과 관련된 부분은 실제 사건이나 지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반복해서 마주하는 논의에 속한다. <에밀리아 페레즈>가 이를 논하기에 가장 적절한 사례는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여기에서는 이를 반복하지 않겠다. 반면 영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배우를 둘러싼 논란은 영화가 지닌 특수성을 가리키기에 살펴볼 만하다. 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혼종적 형식과 클리셰가 작동하는 허구의 세계 안에서 현실성을 담보하는 거의
[비평] 통속성과 현실성은 서로를 구하는가, <에밀리아 페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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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벌거벗은 내 모습을 보여주었어. 그러자 남자들은 벌벌 떨었어.
내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지.
-마누엘 푸이그, <천사의 음부> 중에서
그들은 내 성기에 깊은 경외감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보통의 성기와는 달랐으니 더 강력할 수밖에 없겠지!
-키라 트리아, <파워, 오르가슴, 그리고 심리호르몬 연구실> 중에서
<콘클라베>는 이전에 교황 선거에 대해 다룬 영화(<두 교황>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등)가 교황 선거 자체를 주요 제재로 그리기보다는 몇몇 주요 등장인물의 심리를 그리기 위한 배경으로 다룬 것과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한다. 영화는 세계 최대 종교 종파의 수장을 뽑는 비밀 행사를 엿보는 듯한 호사가적 즐거움을 정면으로 제공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일반 대중은 교황 선거 기간에 굳게 잠긴 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가
[비평] 닫힌 문 뒤에서 반복되는 것, <콘클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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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달리 <히어>의 원작 그래픽노블에서 카메라는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서사가 있는 그림책’이라기보단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인 사진첩에 가깝다. 어떤 방법으로도 여기서 유의미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긴 어렵다. 그렇게 책의 마지막 장까지 도달해도 서사에 작가의 숨겨진 의도가 없다는 걸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된 독자는, 비로소 선형적 구조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을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반면 로버트 저메키스의 <히어>는 너무나 서사에 얽매여 있다. 후술할 엔딩과 더불어 <히어>는 독특한 형식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작위적이고 구시대적 감동 서사를 지닌 영화다. 스크린에 끊임없이 프레임을 열며 원작 고유의 실험을 이어가지만, 어떤 기교를 부려도 영화는 무엇보다 톰 행크스라는 스타의 장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는 결국 리처드(톰 행크스)와 마가렛(로빈 라이트)의 서사에 귀속되며, 둘의 시대가 아닌 시점에서 진행되는 나머지
[비평] ‘여기들’을 바라보는 저메키스의 카메라, <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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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영화를 향한 반응은 대체로 저널리즘 윤리를 끌고 들어온다. <9월 5일: 위험한 특종>(이하 <9월 5일>)은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현대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맥락 역시 중요한 영화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미디어 환경을 대입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ABC사 스포츠 중계팀은 저널리스트보다 콘텐츠 크리에이터와 더 닮았다. 이들은 연출자라는 이름으로 사건을 서사로 치부하며 드라마화한다. 사실을 엄정하게 전달하는 뉴스 브로드캐스팅 대신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현장을 카메라로 생중계한다는 내용은 현대의 포노 사피엔스를 다룬 이야기라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또 <9월 5일>은 현대 스릴러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디지털 신인류의 재현 양상의 한계를 환기한다. 그러니 이 영화가 저널리즘 윤리로 귀결되는 결론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전세계 최초의 테러 생중계라는 오명의 역사는 곧 현대 장르영화에서 무분별하게 반복되는 포노 사피엔스와 그 재
[비평] 생중계의 역사, 포노 사피엔스의 역사, <9월 5일: 위험한 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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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늘 어둡고 지저분한 밑바닥에서 사회의 폭력을 모조리 받아내는 인물이 나온다. 이들은 사슬처럼 물고 물리는 폭력 구조의 맨 하부에서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고통받기 일쑤다. 가령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탈락한 채로 지하실에 숨어드는 남자(<기생충>(2019))와 거대한 열차의 부품이 되어버린 아이(<설국열차>(2013)), 간편하고 맛 좋은 식품이 되기 위해 보금자리를 떠나는 돼지(<옥자>(2017))는 본질적으로 같다. 최근 개봉한 <미키 17>에서는 미키 17(로버트 패틴슨)이 이런 위치에 있다. 죽을 만큼 위험한 곳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이 임무인 남자. 그는 인류 발전에 필요한 위험을 홀로 감당한다.
이런 인물을 마주할 때 여태 나를 압도한 건 폭력의 잔혹함이었다. 그래서 정작 그 인물을 눈여겨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들 사이를 관통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 그것이 최근 들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
[비평] 비극의 작동 방식, <미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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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공포에 질린 조피아(래피 캐시디)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일그러진 얼굴 위로, 그녀의 희미한 얼굴이 한겹 더해진다. 중첩된 이미지이자 분열된 상. <브루탈리스트>는 대상이 온전한 상으로 스크린에 고착되는 것을 애써 우회하는 분열증적 영화이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서사와 이미지를 양분하여 세공하는 방식만이 이 영화를 창조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길이라 믿은 것 같다. 서사는 1, 2부로 쪼개져 있으며,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설계한 센터는 데칼코마니처럼 좌우대칭의 형상일 뿐만 아니라, 오전과 오후를 가르는 정오가 되어야만 건물의 틈으로 빛이 내리쬐는 것을 허락한다. 라즐로의 사촌 아틸라는 본명 위에 ‘밀러’라는 미국인스러운 가명을 덧씌워 생계를 이어 나가며, 미국의 뒤틀린 자화상을 표상하는 해리슨(가이 피어스)의 자녀들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이란성쌍둥이이다.
라즐로 토스와 라즐로 토스
에르제벳(펄리시티 존스)과 재회한 라즐
[비평] 창조적 분열, 분열적 창조, 문주화 평론가의 <브루탈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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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셈 싱 감독의 <더 폴: 디렉터스 컷>(이하 <더 폴>)도 한국에 부는 재개봉 광풍 대열에 합류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영화는 11만 관객을 돌파했고 뒤늦게 흥행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컬트영화를 벗어난 것은 아닐까? 고백하자면 최초 개봉했던 2008년 당시에 나는 이 영화를 몰랐고 재개봉한 지금 또한 지나칠 뻔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작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보다 이 영화의 ‘제작기’가 앞서 우리를 반기기 때문이다. NO CG, 판권 구입까지 15년, 총 28개국 로케이션, 장소 섭외에만 17년, 주인공을 찾는 데 7년, 실제 촬영 기간 4년 반. 감독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영화에 올인했다. 신화처럼 들리는 전무후무한 도박 같은 프로덕션이다. <더 폴>의 컬트화를 이끈 이유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때문에 영화가 겉만 번지르르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진실과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
타셈 싱
[비평] 죽음과 삶, 그리고 이야기, <더 폴: 디렉터스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