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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위어의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마주했던 가짜 세계는 완벽하게 통제된 거대한 스튜디오 세트장이었다. 그러나 김덕중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트루먼의 사랑>에서 인물들이 마주하는 거짓 세계는 잘 꾸며진 스튜디오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숨 쉬고 부대끼는 일상 그 자체다. 영화의 출발점은 대단히 기이하면서도 명징하다. 지연은 어느 날부터 세계가 멈추고 사람들이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정형행동처럼 기계적 반복에 갇히는 ‘에러’와 ‘프리즈’ 현상을 목격한다. 타인들은 시스템의 부속품인 ‘라이어’ 혹은 고장 난 인형처럼 굳어버리지만, 오직 자신만은 그 시간에서 자유로운 유일한 ‘트루먼’이라는 자각이다. 이 SF적인 설정은 단순한 장르적 쾌감을 넘어 오늘날 청년세대가 체감하는 사회적 지형도를 투사한다.
아무리 스펙을 쌓고 자기 계발에 매달려도 계층이동의 사다리는 끊어졌고 사회 전체는 정지된 화면처럼 마비되어 있다. 이 무력감 속에서 개인은 인지부조화와 고립에 직면한다
[비평] 범속한 구원의 자리, 박윤희 평론가의 <트루먼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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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서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비인간 존재는 대개 두 갈래의 서사적 계보 위에서 구체화되어왔다. 하나는 문명의 과오나 역사적 트라우마를 대변하는 알레고리적 괴수다. 혼다 이시로의 <고질라>(1954)가 핵실험의 공포를 형상화하고 봉준호의 <괴물>(2006)이 사회시스템의 모순을 체현했듯, 여기에서 괴수는 인간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거울로 기능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1993) 역시 마찬가지다. 호박 속 모기의 혈액에서 DNA를 추출한다는 과학적 가설과 태고의 생명을 테마파크로 길들이려던 인간의 오만은 고생물이 현대 스크린에 불려나와야 하는 인과를 구성했다. 이때 공룡은 관객에게 경이를 안기는 동시에 통제력을 과신한 문명에 대한 경고로 소비되었으며, 인간의 기술적 과오라는 인과율 안에서 설명되고 수용되었다. 또 다른 하나의 축은 지략과 적의(敵意)를 품고 인간을 위협하는 의지적 침입자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2005)이나 리들리 스콧의 &
[비평] 기어코 도래한 재난, 최재혁 평론가의 <오크 스트리트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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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타이베이는 빠르게 팽창하는 도시였다. 경제성장과 함께 새 건물이 올라가고 집값은 급등했다. 주택은 거주 공간인 동시에 시세차익을 기대하는 투자자산이 됐다. 실거주 수요와 주택 공급 사이에 간극이 생겨 완공된 뒤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도시 곳곳에 발생했다. 차이밍량 감독은 그 빈집 하나를 골라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주인공 세 사람이 드나드는 고급 아파트다. 주인이 정해지지 않아 비어 있는 장소. 영화는 그 공간에 사람의 몸부터 집어넣는다. 세 주인공은 그곳에서 자고 씻고 쉬고 사랑을 나누며 생활한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현재의 시공간과 행동만을 보여줄 뿐.
느림으로긴박함을 만드는 방식
1980년대 대만 뉴시네마를 이끈 허우샤오셴과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보면 개인의 삶이 가족과 역사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과정을 중요하게 다룬다. 인물을 보여줄 때 그가 통과해온 시간도 함께 들어온다는 뜻이다. 허우샤오셴의 인물 뒤에는 가족사와 대만 현대사가
[비평] 극도의 현재 몰입과 초근거리 미래, 최선 평론가의 <애정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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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번기를 맞이한 홍천군 화촌면의 농부들은 모를 심고, 벼가 잘 자라길 기다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린다. 최승우 감독은 그 기다림의 자세로 카메라를 들었다고 말한다. 농촌의 실제 삶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것이며, 잠시 농사를 지어봤다고 그 시간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이 겸허함은 연출자의 태도를 넘어 <지난 여름>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 자체를 규정한다. 카메라는 사건을 만들지 않는다. 사건이 일어날 자리를 마련해두고, 그저 지켜본다.
영화는 논픽션과 픽션을 교차시킨다. 이 교차는 서로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감각으로 흐른다. 감독이 영화 전반에 담고 싶었던 것은 생사의 순환이라는 진실이었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듯 다큐멘터리로 다가갈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관찰의 시간으로는 붙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기다려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픽션 파트를 들여, 그 안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마련했다. 이는 베르그송
[비평] 자연의 순리에서 찾은 생명의 얼굴, 박윤희 평론가의 <지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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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 시퀀스에는 생략된 원전의 내용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이름을 묻는 폴리페모스에게 ‘아무도 아니다’(Nobody)라는 뜻의 이름을 거짓으로 지어낸다.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의 눈을 찔렀을 때 거인이 우레와 같은 비명을 지르며 발을 구르자 다른 외눈박이 거인들이 몰려와 이유를 묻는다. 폴리페모스는 ‘아무도 아니다가 나를 죽이려 한다’라고 대답한다. 아무도 죽이려 하지 않는데 고통스러워하는 폴리페모스의 답을 듣고 필시 제우스가 내린 병을 앓는다고 여긴 거인들은 이내 그의 동굴을 떠난다.
‘아무도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Nobody is killing me)의 올바른 번역과 오디세우스의 장난으로 의미가 비틀린 ‘아무도 아니다가 나를 죽이려 한다’의 문장처럼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의 플롯은 문장의 시제와 서법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맷 데이먼)의 귀환을 기다리는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와 텔레마코스(톰 홀랜드)의 위기, 갈등, 해
[비평] 아무도 아닌 자가 간절히 귀향을 원하여, 유선아 평론가의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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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노 도모아키의 <어떻게 해야 했을까?>는 조현병을 앓는 감독의 누나와 그 부모의 모습을 2001년부터 20년간 기록한 사적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2000년대 초 일본의 열악한 정신의학 체계와 질병을 수치로 여기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 가족이 외부와 담을 쌓은 채 삼켜야 했던 오랜 마모의 시간을 담아낸다.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GV에서 감독은 수십 년간 이어진 갈등 끝에 누군가를 책망하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밝히며, 특정 대상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방향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감독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영화는 한 가족이 겪은 고통의 처절함을 가식 없이 보여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지만, 책임 모색의 포기라는 연출적 선택에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이 현상의 맥락을 성찰하기보다 더 이상의 탐구를 멈춰 세우는 닫힌 수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멈춰 선 자리
영화는 오프닝 자막을 통해 질병의
[비평] 체념으로 봉인된 비극, 최재혁 평론가의 <어떻게 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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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km에 달하는 인공 장벽 안에 갇힌 미래의 통일 대한민국을 영화의 시공간으로 상정한 박세영 감독의 <지느러미>는 핏빛으로 얼룩진, 인간과 돌연변이 오메가, 두 종간의 혐오로 오염된 사회를 관측한다. 이는 과거의 원폭 피해와 패전의 기억을 꿈의 형식으로 치환하여 미래로 투사했던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을 불러들인다. 여섯 번째 꿈 ‘붉은 후지산’에서 인간은 지난날의 과오를 고스란히 돌려받은 채 비극을 맞이한다. 후지산과 핵발전소가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붉게 물든 상공 아래 사이렌과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인다.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란, 물결치는 바다 위로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일곱 번째 꿈 ‘귀곡’은 재난 이후의 상황을 제시한다. 핵 오염으로 인해 출현한 돌연변이 도깨비는 인간의 탐욕이 자신들의 탄생 기원임을 알린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비극을 초래하며, 스스로 지은 과오의 죗값을 치르는 운명 속에 있는 것일까.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대다수의 영
[비평] 부표의 꿈, 문주화 영화평론가의 <지느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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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 슈프림>의 도입부, 신발 창고 좁은 틈에서 유부녀인 레이첼과 관계를 나누는 마티 마우저의 얼굴 위로 1984년에 발표된 알파빌의 노래 <Forever Young>이 흐른다. 그가 거짓말을 속삭이며 야만스럽게 사정하면 꿈틀거리는 정자의 행렬이 보이고 한 마리의 정자가 동그란 난자와 수정한다. 조쉬 사프디는 1952년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의 도입부에 80년대에 나온 음악을 삽입한다. 도입부에서만이 아니다. 정신없는 속도감으로 채워진 이 영화의 화면 위로 80년대 라디오에서 유행한 트랙들이 여러 차례 흘러나온다. 그 시작을 알리는 곡의 제목은 ‘영원한 젊음’이다. 위대한 젊음. 늙지도 부식되지도 않는 절대적인 젊음의 세계. 사프디는 미국영화의 황금기였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뒤 할리우드 고전주의의 영화적 유산을 발굴해 고스란히 감싸 안는다. 그것은 탄생도 끝도 없는 영원한 젊음의 시간이다. 이는 <마티 슈프림>이라는 영화에게 있어 거부할 수 없는 축
[비평] 할리우드의 오래된 유산 - 김병규 평론가의 <디스클로저 데이> <마티 슈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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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놓친 것이 무엇일까. 첫 번째 소년. 엄마를 기다리는 소년. 두달이나 엄마는 집에 오지 않는다. 오늘 온다고 해서 저녁을 준비한다. 하지만 소년이 모르는 건 엄마는 오늘 저녁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마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소년. 소년의 친구. 얼굴을 숨기고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고 캣피싱을 하는 ‘넷카마’ 소년은 오늘 밤에도 여왕벌처럼 욕정에 사로잡힌 남자들을 꼬드긴다. 하지만 언젠가는 발각당할 것이다. 다만 그때가 오늘이 아닐 뿐이다. 그다음, 한 소녀. ‘나비 약’이라고 불리는 다이어트 알약 펜터민을 먹으면서 화장실 변기에 토하고 또 토한다. 살이 찌면 안돼. 하지만 소녀는 이미 앙상해 보인다. 게다가 부작용으로 원숭이처럼 털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저 그게 눈앞이 아니라 등 뒤 척추뼈를 타고 자라나는 게 다행이랄까. 하지만 “아빠처럼 키도 크고 게다가 힘이 세서
[비평] 세계 종말 앞에서의 질풍노도 - 정성일 평론가의 <충충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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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색 탁구공은 맥거핀이었을까? <마티 슈프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디온이 창문 밖으로 주황색 탁구공을 쏟아내는 순간이다. 혼란이 극에 달한 가운데, 플라스틱 공이 폭포처럼 떨어져 거리 위로 튄다. 모두가 내내 말을 멈추지 않는 이 시끄러운 영화에서 이 장면은 안식처럼 느껴진다. 마티 마우저의 이름을 새긴 공은 조용히 탁탁거리며 흩어진다.
그런데 주황색 탁구공 이야기는 영화 속 주인공에게 영감을 준 실존 인물 마티 라이스먼의 삶과 관련이 없다. 실제 역사에서 유색 탁구공 도입은 1960년대 후반 독일의 스포츠교육자 마틴 스클로르츠가 브라운슈바이크공과대학교에서 진행한 시인성 연구와 연결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영화는 가상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선구자적 기질을 지닌 마티가 주황색 공을 발명했지만, 시대를 앞서간 이 공로는 영원히 묻혔다는 식의 이야기다.
이 설정은 서사 전략 측면에서 꽤 영리하기도 하다. 탁구에 문외한인 관객이라도 탁구공에 흰색과 주황색 두 종류가 있
[비평] 허풍선이 선수의 모험 - 이병현 평론가의 <마티 슈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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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배우 W. C. 필즈에게 흔히 귀속되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나 동물과는 절대 함께 작업하지 말라.” 이 말은 주로 아이와 동물은 연출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격언의 더 흥미로운 함의는 따로 있다. 아이와 동물은 스크린에서 ‘시선을 빼앗아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들은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고, 대개 어른 배우보다 더 생생하게 화면을 장악한다.
카를라 시몬은 데뷔 이후 줄곧 이 격언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듯한 영화를 만들었다. <프리다의 그해 여름>과 <알카라스의 여름>에서 아이와 동물은 통제해야 할 변수가 아니라 세계를 살아 있게 만드는 주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로메리아>는 흥미로운 전환점이다. 이 영화에도 여전히 동물이 등장하지만, 처음으로 아이가 아닌 갓 성인의 문턱을 넘어선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일종의 자전적 가족 3부작으로 구성된 시몬의 영화에서 마지막 작품이 유년기를 벗어나 성인기의 문턱에 선 인물을 주인공
[비평] 이상한 나라의 마리나, 이병현 평론가의 <로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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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체>를 보고 나오며 마음이 쓰렸다. <군체>가 훌륭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항간에 떠도는 비판에도 찬동하지 않는다. 왜 속이 쓰라렸는지 더 면밀히 복기하기 위해, 통상적 비판들의 엇나간 영점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 비판 여론은 크게 두 종류다. 첫째, 연상호 감독이 게을리 자가복제를 한다는 이야기다. <부산행> <반도>에 이어 또 좀비물을 내놓았으니 지겹다는 논리인데, 장르영화 감독이 장르물을 만들어 문제란 논리는 딱히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장철이 무협영화를 많이 찍었다고 비판한다거나, 마이클 만에게 누아르를 그만두라고 채찍질할 순 없다. ‘특정 장르의 반복’이라는 양상을 꼬집고 싶다면 장르라는 틀의 반복이 아니라 작품의 속내에 어떠한 변화나 타성이 깃들었는지 논해야 마땅하다.
둘째, <군체>가 다른 작품들의 요소를 이것저것 섞어 만들었으니 진부하다는 비판이다. 불완전한 소통 체계를 극복하려 인류의 정신을 하나로 뭉치겠
[비평] 얼굴 없는 반쪽짜리 승리, 이우빈 기자의 <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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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철(구교환)의 웃음이다. 영화 후반부 고도화된 인공지능과 같은 능력을 얻은 영철의 웃음이, 진짜 웃음이 나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짓는 웃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영화의 오프닝에서 본인의 테러 행위를 ‘실험’으로 규정하며 경찰에 예고하는 것부터 의심스럽다. 빌런 영철은 인간 모두를 군체로 감염시키기 위해 힘을 집중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가끔은 테러 그 자체가 아닌 보여주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소 허무하고 예상되는 결론을 맺은 이 영화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당신의 본심은 정말로 좀비에 있는 것이 맞는가. 사실 인간에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사실 <군체>뿐만이 아닌 감독 연상호의 장르영화들에 가닿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는 여러 의미로 한결같다. 장르영화의 측면에선 늘 비슷한 아쉬움의 피드백이 나온다. 등장인물들은 평면적이고, 극의 전개는 모범적이
[비평] 정의와 속도, 김철홍 평론가의 <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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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돌아온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속편은 개봉 전부터 하나의 사건처럼 소비됐다. 흥행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레거시 시퀄(Legacy Sequel)이라는 형식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흥미로운 실패 사례다. 관객이 영화관을 찾은 것은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리프)와 앤디 삭스(앤 해서웨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긴 시간을 통과한 인물들과 그들이 몸담은 업계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어떤 욕망은 닳았을 것이고 어떤 권력은 이동했을 것이며 어떤 감각은 새롭게 변했으리라는 기대. 문제는 영화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어야 할 재료인 ‘20년이라는 시간’을 충분히 영화화하지 못했다는 데서 발생한다.
레거시 시퀄은 일반적인 속편과 다르다. 이 형식은 2010년대 이후 할리우드 산업구조와 함께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제작비는 커지고 글로벌 시장 의존도는 높아지며 극장산업은 더 안정적인 브랜드가 필요해졌다. 이미 인정받은 세계와
[비평] 세룰리안블루 스웨터를 다시 꺼내 입고서, 최선 평론가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