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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의 은행나무는 각기 다른 세 시대를 사는 인물의 삶을 지켜보는 말 없는 목격자다. 일디코 에네디 감독의 <침묵의 친구>는 삶의 주변부를 풍성하게 감싸고 있는 식물이라는 실제를 뇌신경학과 식물학, 식물 실험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사실과 엮어 서사에 뒤섞는다. 비인간 피사체가 카메라 프레임 안에 지속적으로 유의미한 자리에 놓일 때 나무는 하나의 인물처럼 기능할 뿐만 아니라 지속되는 숏 안에서 감정에 감응하는 주체로 보이거나 정념을 품은 존재로 지각되기 시작한다.
식물의 정동(情動)
<침묵의 친구>가 이를 의식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영화가 비인간 존재를 다루는 방식에서 유사하게 알베르 라모리스의 1956년작 <빨간 풍선>을 향한 비판과 옹호를 떠올릴 수 있다. 무생물인 풍선을 동물화, 의인화하는 이 영화에서 풍선은 소년 파스칼과 우정 어린 관계를 맺으며 생명성을 띤 존재처럼 제시된다. 잘 알려져 있듯 이에 대해서 무생물에 기계적인 연출로 인
[비평] 거시적 정(靜)에서 미시적 동(動)으로, 유선아 평론가의 <침묵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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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영화를 길지 않은 시기에 자주 접한다. 2024년 <노 베어스>, 2025년 <신성한 나무의 씨앗>과 <그저 사고였을 뿐>에 이어 이번 <두 검사>까지. 인권을 중시하고 예술은 응당 핍박받는 쪽에 서서 헌신해야 한다는 기치를 내세운 여러 유명 영화제가 특별히 주목한 일도 닮았다. 물론 앞선 세 작품은 이란의 엄혹한 상황을 그리고 <두 검사>는 스탈린의 대숙청 공포 기간을 다뤄 배경이 다르다. 하지만 억압적 구조 아래 고통을 겪는 존재의 구도는 같다. 표면적으로는 현실을 고발하고 반성을 유도해 각성을 노린다는 점에서 일종의 장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두 검사> 마지막, 검사 코르녜프(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가 자신의 패착을 깨닫고 절망스러운 눈빛을 비추며 얇게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보고선 더 말해야 할 게 있다고 느낀다.
젊음은 정의에 쉬이 현혹되는가
영화 말미 시스템 설계자로 위장한 비밀경찰국 요원은
[비평] 견뎌야 하는 절망, 김성찬 평론가의 <두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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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 질런홀 감독의 <브라이드!>를 보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이야기보다 이미지다. 사건의 흐름이 한데 모이지 않고 줄거리도 손쉽게 뽑아내기 어렵다.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어떤 갈등이 이어졌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관을 나와도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다시 소환된 신화 같은 캐릭터들, 농밀한 공기와 색채, 음악이 만들어낸 볼륨, 집요하게 클로즈업되는 얼굴, 그리고 춤이라 해도 될 만한 몸의 움직임과 힙한 코스튬. 마치 이야기를 이해하지 않아도 좋으니 장면을 체험하고 즐기도록 유도하는 듯하다. 관객은 서사를 따라가다 말고 감각의 흐름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 지점에서 플라스틱 시네마(Plastic Cinema)라는 개념을 불러와 이름 붙여 볼까 한다. 일상언어에서 플라스틱이라는 말은 흔히 인공적인 재료를 의미하지만, 원래는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뜻에 가깝다. 미학의 역사에서 이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왔는데 그리스어 플라세인(plassein)에서 유래한
[비평] 플라스틱 시네마, 최선 평론가의 <브라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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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4분이다. 제리 시장이 연못을 메우고 고속도로를 설비하면서 인간이 얻을 이득은 4분간의 이동시간 절약이다. 그가 이 짧은 시간에 목맨 이유는 오직 대중으로부터 환호받고 싶어서다. 그의 재임 여부는 사람들의 호불호에 달려 있다. 연못에서 인생 절반을 느리게 보내며 많은 생명체의 존재를 목격해온 19살 소녀 메이블은 터무니없는 시장의 욕망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든다. 도시개발이냐 자연보호냐. 산업화 이래로 오랫동안 인간사를 뒤따라온 첨예한 논쟁이 이번엔 디즈니·픽사를 찾았다. 여기까지 보면 전체관람가 애니메이션의 보편적 문법에 따라 다음 전개가 무리 없이 예측된다. 아마도 제리 시장은 탐욕에 찬 음모를 꾸려 자연을 죄책감 없이 파괴하고 도시행정으로 사리사욕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용감한 주인공 소녀는 빌런을 처치하고 동물들과 힘을 합쳐 다 함께 공생하는 유토피아를 구해낼 것이다. 하지만 <호퍼스>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개척해 걷는다.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의 오래된
[비평] 극우화 시대의 청소년 환경운동가와 비혼주의 비버 왕, 이자연 기자의 <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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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레이(구로사키 기리카)에게 오빠 히로키(오다 신이치로)와 아버지(쓰루다 고조)는 “학교는?”이라고 묻는다. 레이는 “끝났다”라고 대답하며 겨울방학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방학은 학기와 학기 틈 사이에 자리한 시간이다. 또한 방학의 시작은 학기의 중단으로부터 기인하는, 말하자면 학교의 시간들을 일시정지하고 획득한 무좌표의 시간이다. 학교의 수업, 친구들, 등하굣길, 일상이라 믿었던 시간들이 잠시 멈추는 나날들. 그리고 학기 중의 시간을 통솔했을 시간표마저 제 몫을 다하고 만기되어 사라진다. 레이는 겨울방학을 맞이하면서, 일시정지된 시간 속에 머문다. 엄마는 할머니의 병간호로 집을 비우고 있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만나기가 쉽지 않다. 레이는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운동하기를 멈춘 것 같은 따분한 세계 안으로 홀로 농구공을 튀기며 말을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이방인이자 여행자인 규리(정주은)는 도쿄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그
[비평] 빛에서 빛으로, 문주화 평론가의 <레이의 겨울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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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박정민)은 마지막에 살 방도를 묻는다. 관객은 그 유언을 조 과장(조인성)을 통해 전해 듣는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지인이 이 대목을 두고 재미난 해석을 하나 건넸다. 요지는 이렇다. 박건의 말이 채선화(신세경)와 함께 더 살고 싶어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공포에 떠밀려 그저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을 내뱉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총에 잔뜩 맞았으니 아프기도 할 테고….” 그 자리에서는 다들 피식 웃고 넘겼다. 나도 웃었다. 너무 단순하고, 그래서 더 엉뚱하게 들렸으니까.
그런데 웃음이 가라앉고 나니 질문이 바뀌었다. 이 해석은 왜 즉각 ‘말이 안된다’고 치부되었을까. 동시에 왜 누군가는 하필 그런 가설을 떠올렸을까. 어쩌면 <휴민트>가 그런 엉뚱함을 허용할 만큼, 한 가지 장르 규칙으로는 단단히 묶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대사 하나가 아니라, 영화 전체가 어떤 야심으로 장르를 끌어다 섞었고
[비평] 블라디보스토크, 잃어버린 편도 티켓, 이병현 평론가의 <휴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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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이하 <플루리부스>)는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으로 가득한 드라마다. 그렇지만 정체불명의 외계 신호가 인간의 기술을 매개로 바이러스 형태로 전파되어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의 고유한 의식을 하나의 단일한 네트워크로 통합하는 와중에 어째선지 세상 성격 더러운 우리의 주인공 캐롤만이 이런 시도에 면역이 있어 참으로 불행하게도 혼자서만 깨어 있게 되었다는 설정 자체에는 솔직히 말해 별로 특별하다 할 만한 구석이 없다. 아무리 캐롤이 헤테로 로맨스 판타지 소설로 돈을 버는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백인 중년 레즈비언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짧은 설명에서조차 우리는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오는 하위 장르의 친척 참조를 쉽게 발견한다. 이를테면 <플루 리부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장 많이 끼쳤다고 언급되는 고전 신체 강탈 영화 <우주의 침입자>나 인간 종의 ‘진화’를 다룬 정전 반열에 오른 SF소설 <유년기의 끝>
[비평] 세계냐 여자냐, 이연숙(리타) 평론가의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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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물의 연대기>를 말하기 전 원작을, 정확히는 이 회고록이 ‘아닌 것’을 언급하는 편이 좋겠다. 극복과 성공으로 귀결되는 전기가 아니다. 고백이나 고발, ‘친족성폭력 트라우마를 지닌 여성 A의 사례’가 아니다. 통상적인 연대기와도 거리가 멀다. 당사자이자 화자인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장면(이 글에서 일컫는 ‘장면’은 기억 속 상을 의미한다)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지 않았고, 주인공인 자신을 보편적으로 수용될 만한 인물로 다듬지 않았다. 유크나비치의 글은 몸과 밀착한, 몸의 리듬을 따르는 글이다. 이러한 원작의 속성을 일부 공유하는 영화는 사건을 재현하기보단 기억 소화 과정을 육화한다.
16mm 필름에 촬영한 이유를 설명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문장 가운데에는 “영화가 조각나야 했기 때문”(2025년 5월18일, <인디와이어>)이라는 표현이 있다. 필름을 물리적으로 쪼개 다시 붙이고 포갠 결과물은 이음새를 드러내는 유동성을 지닌다. 자르고 기운 부위는 신체
[비평] 습기를 머금은 몸들에 관해, 김연우 평론가의 <물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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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은 초반 영화의 흐름상 중요한 대상처럼 인식되었다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되며 사라지는 매개다. 달리 말해 맥거핀은 관객의 망각을 전제로 기능한다. 작은 사건은 영화에서 강조되는 더 큰 사건 속에 묻히며, 이에 종속된 대상들은 무의식중에 선택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1941) 속 ‘로즈버드’는 맥거핀을 연상시키되 맥거핀은 아닌 독특한 대상이다. 로즈버드는 케인이 죽기 직전 유언처럼 남긴 마지막 말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기자 톰슨이 케인의 주변인을 찾아다니며 로즈버드의 의미를 탐문한다. 로즈버드를 찾는 과정은 주변 인물들의 기억 속에 남은 케인의 조각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치환된다. 결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로즈버드가 일종의 미끼이고, 케인의 상을 그리는 것이 영화의 핵심처럼 보인다. 로즈버드의 의미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그가 잃어버린 어떤 것’일 거라고 두루뭉술하게 정리된 채 사라지지만, 관객은 마침내
[비평] 동시대의 로즈버드, 회귀하는 맥거핀, 김소희 평론가의 <슈퍼 해피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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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지만 동시에 가장 나중에 말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누구나 파더나 마더, 시스터-브러더를 우선 말하느라, 그 앞에 툭 튀어나와 있는 이 장면은 나중에 언급되거나 영영 잊힌다. 신이라기보단 토막 영상에 가까운 이 순간은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그리고 앞장과 뒷장의 사이를 잇는 막간에 짤막하게 등장한다.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배경으로 빨간색, 초록색을 띤 빛 입자들이 깜빡거린다. 묘사부터 어렵기에 더욱 기억하기 힘든 이 트랜지션 토막 자체가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에서 큰 특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만큼은 다르게 느껴지는 건, 여기서 이 토막들이 독립적인 세개의 이야기를 단절시키기보단 잇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세편의 단편을 이어서 볼 때 느낄 수 있는 총체적인 감각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그보다 더 크게
[비평] 길을 잇는 빛의 리듬, 김철홍 평론가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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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첫 장편영화를 발표한 해인 1997년에 아오야마 신지는 <누벨바그 선언, 혹은 나는 어떻게 필립 가렐의 사도가 되었는가>(이하 <누벨바그 선언>)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 일본판에 발표된 이 글은 누벨바그의 다음 세대로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필립 가렐의 과업을 되짚으며 동시대 일본에서 새로운 영화가 나오는 데 필요한 조건을 집요하게 캐묻는다. 이 글에서 아오야마가 검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일본영화의 풍경이라는 문제다. 그는 현대 일본영화가 타자를 흡수하여 개인을 말살하는 공간이라 지적하고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는다. “개인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데 필요한 주체를 무시하는 것은 현대 일본영화의 담론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암묵적 전제이다. (...) 그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상의 ‘일본적 자연’ 속에서 밤낮으로 놀며 자신의 천박함을 눈치채지 못한다.”
아오야마는 ‘가상의 일본적 자연’이란 표현을 빌려 1990년대 일본영
[비평]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해 있다, 김병규 평론가의 <여행과 나날>과 <슈퍼 해피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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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가장 급진적이었던 기술적 선택에서 <아바타: 불과 재>(이하 <불과 재>)는 한 걸음 물러난다. 어떤 장면에서도 생성형 AI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강조하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말이 격세지감 속 낯선 선언처럼 들리고 만 이유는 최첨단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의 결실이었던 2009년의 <아바타>가 2025년의 <불과 재>에 이르러 또 다른 최첨단 기술의 생성형 AI 이미지와 대적하려는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지형의 판도라 행성은 실체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영화 기술의 진화와 실재하는 이미지 퇴행의 시대에 그 자체로 상징적 장소가 되어버렸다.
월드와이드웹에 반(反)하여
돌이켜보면 디지털영화 시대에 접어들어 등장한 <아바타>는 디지털네트워크의 미래가 아닌 디지털 이전의 직접 연결성으로 돌아가기를 상상했다. 문자 그대로 드넓게 펼쳐진 망(網)을 상상케 하는 월드와이드웹(WWW)은 다대다 동시접속이 가능한 디
[비평] 파격은 다시 새롭게 정의되는가, 유선아 평론가의 <아바타: 불과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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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 것. 우리가 상실한 것을 망각하지 말 것.’ 언젠가부터 일본 동시대 영화들이 수행하고 있는 이 거대한 캠페인의 지층 하부에는 도호쿠 대지진이라는 불가침의 콘크리트가 자리하고 있다. 캠페인의 주창자인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의 후반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운전기사 미사키(미우라 도코)를 끌어안으며 했던 말.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그게 계속되지’는 외화면의 전세계 관객들과 하마구치 이후의 영화감독들에게 이물 없이 각인되었다. 사자(死者)들을 위무하는 제의의 영화. 이는 사회적 책무와 시대적 윤리의식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예술영화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한 일본 감독들의 고유한 특권이자 누려 마땅한 성취일 것이다. 이가라시 고헤이의 전작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은 이러한 캠페인에 흠집을 내는 반가운 변수이다. 6살의 타카라는 어시장으로 출근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낯선 길을 나선다. 장
[비평] 유실물 센터로서의 영화, 문주화 평론가의 <슈퍼 해피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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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바움백의 영화 속 인물은 미완의 상태에 있다. 관계는 뒤죽박죽이고 감정은 넘쳐흐르며 인물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간다. 각자 말하고 동시에 말하며 휴대전화로 말한다. 바움백의 영화가 수다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물이 성장하고 완성돼가는 과정을 말로 보여주어서다. 말하는 동안 인물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확인하고 더 많은 말을 쏟아내며 관계를 회복하려 시도한다. 바움백의 세계에서 말은 미완의 인물들이 사용하는 성장 도구다.
<제이 켈리>는 이 익숙한 구조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성장의 현장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성장 서사가 끝난 이후, 즉 이미 성공한 인물을 내세운다. 바움백 영화 세계에서 만나는 새로운 유형, 사후(事後) 인물이다. 성장 서사가 종료된 이후의 인간, 변화가 중심 사건이 되지 않는 인물을 뜻한다.
제이 켈리(조지 클루니)는 성공한 영화배우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미 완성된 인물이므로 자신의 직업적 위치와 사회에서의 역할
[비평] 성장 이후의 인간, 최선 평론가의 <제이 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