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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배우 W. C. 필즈에게 흔히 귀속되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나 동물과는 절대 함께 작업하지 말라.” 이 말은 주로 아이와 동물은 연출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격언의 더 흥미로운 함의는 따로 있다. 아이와 동물은 스크린에서 ‘시선을 빼앗아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들은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고, 대개 어른 배우보다 더 생생하게 화면을 장악한다.
카를라 시몬은 데뷔 이후 줄곧 이 격언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듯한 영화를 만들었다. <프리다의 그해 여름>과 <알카라스의 여름>에서 아이와 동물은 통제해야 할 변수가 아니라 세계를 살아 있게 만드는 주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로메리아>는 흥미로운 전환점이다. 이 영화에도 여전히 동물이 등장하지만, 처음으로 아이가 아닌 갓 성인의 문턱을 넘어선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일종의 자전적 가족 3부작으로 구성된 시몬의 영화에서 마지막 작품이 유년기를 벗어나 성인기의 문턱에 선 인물을 주인공
[비평] 이상한 나라의 마리나, 이병현 평론가의 <로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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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체>를 보고 나오며 마음이 쓰렸다. <군체>가 훌륭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항간에 떠도는 비판에도 찬동하지 않는다. 왜 속이 쓰라렸는지 더 면밀히 복기하기 위해, 통상적 비판들의 엇나간 영점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 비판 여론은 크게 두 종류다. 첫째, 연상호 감독이 게을리 자가복제를 한다는 이야기다. <부산행> <반도>에 이어 또 좀비물을 내놓았으니 지겹다는 논리인데, 장르영화 감독이 장르물을 만들어 문제란 논리는 딱히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장철이 무협영화를 많이 찍었다고 비판한다거나, 마이클 만에게 누아르를 그만두라고 채찍질할 순 없다. ‘특정 장르의 반복’이라는 양상을 꼬집고 싶다면 장르라는 틀의 반복이 아니라 작품의 속내에 어떠한 변화나 타성이 깃들었는지 논해야 마땅하다.
둘째, <군체>가 다른 작품들의 요소를 이것저것 섞어 만들었으니 진부하다는 비판이다. 불완전한 소통 체계를 극복하려 인류의 정신을 하나로 뭉치겠
[비평] 얼굴 없는 반쪽짜리 승리, 이우빈 기자의 <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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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철(구교환)의 웃음이다. 영화 후반부 고도화된 인공지능과 같은 능력을 얻은 영철의 웃음이, 진짜 웃음이 나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짓는 웃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영화의 오프닝에서 본인의 테러 행위를 ‘실험’으로 규정하며 경찰에 예고하는 것부터 의심스럽다. 빌런 영철은 인간 모두를 군체로 감염시키기 위해 힘을 집중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가끔은 테러 그 자체가 아닌 보여주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소 허무하고 예상되는 결론을 맺은 이 영화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당신의 본심은 정말로 좀비에 있는 것이 맞는가. 사실 인간에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사실 <군체>뿐만이 아닌 감독 연상호의 장르영화들에 가닿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는 여러 의미로 한결같다. 장르영화의 측면에선 늘 비슷한 아쉬움의 피드백이 나온다. 등장인물들은 평면적이고, 극의 전개는 모범적이
[비평] 정의와 속도, 김철홍 평론가의 <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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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돌아온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속편은 개봉 전부터 하나의 사건처럼 소비됐다. 흥행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레거시 시퀄(Legacy Sequel)이라는 형식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흥미로운 실패 사례다. 관객이 영화관을 찾은 것은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리프)와 앤디 삭스(앤 해서웨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긴 시간을 통과한 인물들과 그들이 몸담은 업계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어떤 욕망은 닳았을 것이고 어떤 권력은 이동했을 것이며 어떤 감각은 새롭게 변했으리라는 기대. 문제는 영화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어야 할 재료인 ‘20년이라는 시간’을 충분히 영화화하지 못했다는 데서 발생한다.
레거시 시퀄은 일반적인 속편과 다르다. 이 형식은 2010년대 이후 할리우드 산업구조와 함께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제작비는 커지고 글로벌 시장 의존도는 높아지며 극장산업은 더 안정적인 브랜드가 필요해졌다. 이미 인정받은 세계와
[비평] 세룰리안블루 스웨터를 다시 꺼내 입고서, 최선 평론가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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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송선미)는 밤인데 왜 커튼을 쳤을까? 눈이 안 좋다면 연기 연습실의 내부 조명을 꺼야 했다. 암흑 속에서 이들의 목소리만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실제 영화관에서 <그녀가 돌아온 날>의 5장에서 나는 눈을 잠시 감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정수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표정, 몸짓, 시선 등 다양한 비언어적 표현들이 흐릿한 숏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는 빛에 예민하게 반응했지만, 빛은 언제나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 크게는 홍상수 영화에서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 것일까?
<그녀가 돌아온 날>을 보기 전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 중인 ‘홍상수 전작전: 인트로덕션’에서 보았다. 30년의 간극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경(이응경)이 신문지를 깔고 베란다로 향하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엔딩은 여전히 강렬하고 미스터리하다. 하지만 이번
[비평] 말과 말과 말 그리고 이미지들, 오진우 평론가의 <그녀가 돌아온 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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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휴먼드라마의 대가를 꼽으라면 흔히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노희경 작가일 것이다. 노희경 작가는 감각적 영상 중심의 트렌디드라마 전성기이던 1990년대에 등장, 인간의 깊은 내면으로 극의 초점을 돌려놓으면서 일찌감치 한국 휴먼드라마 거장의 지위를 획득했다. 최근에 그 계보를 잇는 존재로 각인된 이름은 박해영 작가다. <올드미스 다이어리>(KBS), <청담동 살아요>(JTBC), <또! 오해영>(tvN) 등 시트콤, 로맨스 장르에서도 인간의 다양한 내적갈등에 주목했던 박해영 작가는, 2018년 방영작 <나의 아저씨>(tvN)부터 <나의 해방일지>(JTBC)를 거쳐 현재 방영 중인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JTBC, 이하 <모자무싸>)까지, 휴먼드라마 삼부작을 통해 한층 본격적인 인간탐구를 보여주고 있다.
두 작가의 휴먼드라마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소외, 결핍, 상처에 집중하지만 전개 방향에서는
[비평] 천개의 마음에 관하여, 김선영 평론가의 ‘박해영 휴먼드라마 삼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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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의 은행나무는 각기 다른 세 시대를 사는 인물의 삶을 지켜보는 말 없는 목격자다. 일디코 에네디 감독의 <침묵의 친구>는 삶의 주변부를 풍성하게 감싸고 있는 식물이라는 실제를 뇌신경학과 식물학, 식물 실험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사실과 엮어 서사에 뒤섞는다. 비인간 피사체가 카메라 프레임 안에 지속적으로 유의미한 자리에 놓일 때 나무는 하나의 인물처럼 기능할 뿐만 아니라 지속되는 숏 안에서 감정에 감응하는 주체로 보이거나 정념을 품은 존재로 지각되기 시작한다.
식물의 정동(情動)
<침묵의 친구>가 이를 의식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영화가 비인간 존재를 다루는 방식에서 유사하게 알베르 라모리스의 1956년작 <빨간 풍선>을 향한 비판과 옹호를 떠올릴 수 있다. 무생물인 풍선을 동물화, 의인화하는 이 영화에서 풍선은 소년 파스칼과 우정 어린 관계를 맺으며 생명성을 띤 존재처럼 제시된다. 잘 알려져 있듯 이에 대해서 무생물에 기계적인 연출로 인
[비평] 거시적 정(靜)에서 미시적 동(動)으로, 유선아 평론가의 <침묵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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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영화를 길지 않은 시기에 자주 접한다. 2024년 <노 베어스>, 2025년 <신성한 나무의 씨앗>과 <그저 사고였을 뿐>에 이어 이번 <두 검사>까지. 인권을 중시하고 예술은 응당 핍박받는 쪽에 서서 헌신해야 한다는 기치를 내세운 여러 유명 영화제가 특별히 주목한 일도 닮았다. 물론 앞선 세 작품은 이란의 엄혹한 상황을 그리고 <두 검사>는 스탈린의 대숙청 공포 기간을 다뤄 배경이 다르다. 하지만 억압적 구조 아래 고통을 겪는 존재의 구도는 같다. 표면적으로는 현실을 고발하고 반성을 유도해 각성을 노린다는 점에서 일종의 장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두 검사> 마지막, 검사 코르녜프(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가 자신의 패착을 깨닫고 절망스러운 눈빛을 비추며 얇게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보고선 더 말해야 할 게 있다고 느낀다.
젊음은 정의에 쉬이 현혹되는가
영화 말미 시스템 설계자로 위장한 비밀경찰국 요원은
[비평] 견뎌야 하는 절망, 김성찬 평론가의 <두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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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 질런홀 감독의 <브라이드!>를 보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이야기보다 이미지다. 사건의 흐름이 한데 모이지 않고 줄거리도 손쉽게 뽑아내기 어렵다.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어떤 갈등이 이어졌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관을 나와도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다시 소환된 신화 같은 캐릭터들, 농밀한 공기와 색채, 음악이 만들어낸 볼륨, 집요하게 클로즈업되는 얼굴, 그리고 춤이라 해도 될 만한 몸의 움직임과 힙한 코스튬. 마치 이야기를 이해하지 않아도 좋으니 장면을 체험하고 즐기도록 유도하는 듯하다. 관객은 서사를 따라가다 말고 감각의 흐름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 지점에서 플라스틱 시네마(Plastic Cinema)라는 개념을 불러와 이름 붙여 볼까 한다. 일상언어에서 플라스틱이라는 말은 흔히 인공적인 재료를 의미하지만, 원래는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뜻에 가깝다. 미학의 역사에서 이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왔는데 그리스어 플라세인(plassein)에서 유래한
[비평] 플라스틱 시네마, 최선 평론가의 <브라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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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4분이다. 제리 시장이 연못을 메우고 고속도로를 설비하면서 인간이 얻을 이득은 4분간의 이동시간 절약이다. 그가 이 짧은 시간에 목맨 이유는 오직 대중으로부터 환호받고 싶어서다. 그의 재임 여부는 사람들의 호불호에 달려 있다. 연못에서 인생 절반을 느리게 보내며 많은 생명체의 존재를 목격해온 19살 소녀 메이블은 터무니없는 시장의 욕망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든다. 도시개발이냐 자연보호냐. 산업화 이래로 오랫동안 인간사를 뒤따라온 첨예한 논쟁이 이번엔 디즈니·픽사를 찾았다. 여기까지 보면 전체관람가 애니메이션의 보편적 문법에 따라 다음 전개가 무리 없이 예측된다. 아마도 제리 시장은 탐욕에 찬 음모를 꾸려 자연을 죄책감 없이 파괴하고 도시행정으로 사리사욕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용감한 주인공 소녀는 빌런을 처치하고 동물들과 힘을 합쳐 다 함께 공생하는 유토피아를 구해낼 것이다. 하지만 <호퍼스>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개척해 걷는다.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의 오래된
[비평] 극우화 시대의 청소년 환경운동가와 비혼주의 비버 왕, 이자연 기자의 <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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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레이(구로사키 기리카)에게 오빠 히로키(오다 신이치로)와 아버지(쓰루다 고조)는 “학교는?”이라고 묻는다. 레이는 “끝났다”라고 대답하며 겨울방학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방학은 학기와 학기 틈 사이에 자리한 시간이다. 또한 방학의 시작은 학기의 중단으로부터 기인하는, 말하자면 학교의 시간들을 일시정지하고 획득한 무좌표의 시간이다. 학교의 수업, 친구들, 등하굣길, 일상이라 믿었던 시간들이 잠시 멈추는 나날들. 그리고 학기 중의 시간을 통솔했을 시간표마저 제 몫을 다하고 만기되어 사라진다. 레이는 겨울방학을 맞이하면서, 일시정지된 시간 속에 머문다. 엄마는 할머니의 병간호로 집을 비우고 있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만나기가 쉽지 않다. 레이는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운동하기를 멈춘 것 같은 따분한 세계 안으로 홀로 농구공을 튀기며 말을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이방인이자 여행자인 규리(정주은)는 도쿄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그
[비평] 빛에서 빛으로, 문주화 평론가의 <레이의 겨울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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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박정민)은 마지막에 살 방도를 묻는다. 관객은 그 유언을 조 과장(조인성)을 통해 전해 듣는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지인이 이 대목을 두고 재미난 해석을 하나 건넸다. 요지는 이렇다. 박건의 말이 채선화(신세경)와 함께 더 살고 싶어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공포에 떠밀려 그저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을 내뱉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총에 잔뜩 맞았으니 아프기도 할 테고….” 그 자리에서는 다들 피식 웃고 넘겼다. 나도 웃었다. 너무 단순하고, 그래서 더 엉뚱하게 들렸으니까.
그런데 웃음이 가라앉고 나니 질문이 바뀌었다. 이 해석은 왜 즉각 ‘말이 안된다’고 치부되었을까. 동시에 왜 누군가는 하필 그런 가설을 떠올렸을까. 어쩌면 <휴민트>가 그런 엉뚱함을 허용할 만큼, 한 가지 장르 규칙으로는 단단히 묶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대사 하나가 아니라, 영화 전체가 어떤 야심으로 장르를 끌어다 섞었고
[비평] 블라디보스토크, 잃어버린 편도 티켓, 이병현 평론가의 <휴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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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이하 <플루리부스>)는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으로 가득한 드라마다. 그렇지만 정체불명의 외계 신호가 인간의 기술을 매개로 바이러스 형태로 전파되어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의 고유한 의식을 하나의 단일한 네트워크로 통합하는 와중에 어째선지 세상 성격 더러운 우리의 주인공 캐롤만이 이런 시도에 면역이 있어 참으로 불행하게도 혼자서만 깨어 있게 되었다는 설정 자체에는 솔직히 말해 별로 특별하다 할 만한 구석이 없다. 아무리 캐롤이 헤테로 로맨스 판타지 소설로 돈을 버는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백인 중년 레즈비언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짧은 설명에서조차 우리는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오는 하위 장르의 친척 참조를 쉽게 발견한다. 이를테면 <플루 리부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장 많이 끼쳤다고 언급되는 고전 신체 강탈 영화 <우주의 침입자>나 인간 종의 ‘진화’를 다룬 정전 반열에 오른 SF소설 <유년기의 끝>
[비평] 세계냐 여자냐, 이연숙(리타) 평론가의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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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물의 연대기>를 말하기 전 원작을, 정확히는 이 회고록이 ‘아닌 것’을 언급하는 편이 좋겠다. 극복과 성공으로 귀결되는 전기가 아니다. 고백이나 고발, ‘친족성폭력 트라우마를 지닌 여성 A의 사례’가 아니다. 통상적인 연대기와도 거리가 멀다. 당사자이자 화자인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장면(이 글에서 일컫는 ‘장면’은 기억 속 상을 의미한다)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지 않았고, 주인공인 자신을 보편적으로 수용될 만한 인물로 다듬지 않았다. 유크나비치의 글은 몸과 밀착한, 몸의 리듬을 따르는 글이다. 이러한 원작의 속성을 일부 공유하는 영화는 사건을 재현하기보단 기억 소화 과정을 육화한다.
16mm 필름에 촬영한 이유를 설명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문장 가운데에는 “영화가 조각나야 했기 때문”(2025년 5월18일, <인디와이어>)이라는 표현이 있다. 필름을 물리적으로 쪼개 다시 붙이고 포갠 결과물은 이음새를 드러내는 유동성을 지닌다. 자르고 기운 부위는 신체
[비평] 습기를 머금은 몸들에 관해, 김연우 평론가의 <물의 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