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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영화를 향한 반응은 대체로 저널리즘 윤리를 끌고 들어온다. <9월 5일: 위험한 특종>(이하 <9월 5일>)은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현대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맥락 역시 중요한 영화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미디어 환경을 대입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ABC사 스포츠 중계팀은 저널리스트보다 콘텐츠 크리에이터와 더 닮았다. 이들은 연출자라는 이름으로 사건을 서사로 치부하며 드라마화한다. 사실을 엄정하게 전달하는 뉴스 브로드캐스팅 대신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현장을 카메라로 생중계한다는 내용은 현대의 포노 사피엔스를 다룬 이야기라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또 <9월 5일>은 현대 스릴러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디지털 신인류의 재현 양상의 한계를 환기한다. 그러니 이 영화가 저널리즘 윤리로 귀결되는 결론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전세계 최초의 테러 생중계라는 오명의 역사는 곧 현대 장르영화에서 무분별하게 반복되는 포노 사피엔스와 그 재
[비평] 생중계의 역사, 포노 사피엔스의 역사, <9월 5일: 위험한 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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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늘 어둡고 지저분한 밑바닥에서 사회의 폭력을 모조리 받아내는 인물이 나온다. 이들은 사슬처럼 물고 물리는 폭력 구조의 맨 하부에서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고통받기 일쑤다. 가령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탈락한 채로 지하실에 숨어드는 남자(<기생충>(2019))와 거대한 열차의 부품이 되어버린 아이(<설국열차>(2013)), 간편하고 맛 좋은 식품이 되기 위해 보금자리를 떠나는 돼지(<옥자>(2017))는 본질적으로 같다. 최근 개봉한 <미키 17>에서는 미키 17(로버트 패틴슨)이 이런 위치에 있다. 죽을 만큼 위험한 곳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이 임무인 남자. 그는 인류 발전에 필요한 위험을 홀로 감당한다.
이런 인물을 마주할 때 여태 나를 압도한 건 폭력의 잔혹함이었다. 그래서 정작 그 인물을 눈여겨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들 사이를 관통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 그것이 최근 들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
[비평] 비극의 작동 방식, <미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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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공포에 질린 조피아(래피 캐시디)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일그러진 얼굴 위로, 그녀의 희미한 얼굴이 한겹 더해진다. 중첩된 이미지이자 분열된 상. <브루탈리스트>는 대상이 온전한 상으로 스크린에 고착되는 것을 애써 우회하는 분열증적 영화이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서사와 이미지를 양분하여 세공하는 방식만이 이 영화를 창조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길이라 믿은 것 같다. 서사는 1, 2부로 쪼개져 있으며,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설계한 센터는 데칼코마니처럼 좌우대칭의 형상일 뿐만 아니라, 오전과 오후를 가르는 정오가 되어야만 건물의 틈으로 빛이 내리쬐는 것을 허락한다. 라즐로의 사촌 아틸라는 본명 위에 ‘밀러’라는 미국인스러운 가명을 덧씌워 생계를 이어 나가며, 미국의 뒤틀린 자화상을 표상하는 해리슨(가이 피어스)의 자녀들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이란성쌍둥이이다.
라즐로 토스와 라즐로 토스
에르제벳(펄리시티 존스)과 재회한 라즐
[비평] 창조적 분열, 분열적 창조, 문주화 평론가의 <브루탈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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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셈 싱 감독의 <더 폴: 디렉터스 컷>(이하 <더 폴>)도 한국에 부는 재개봉 광풍 대열에 합류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영화는 11만 관객을 돌파했고 뒤늦게 흥행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컬트영화를 벗어난 것은 아닐까? 고백하자면 최초 개봉했던 2008년 당시에 나는 이 영화를 몰랐고 재개봉한 지금 또한 지나칠 뻔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작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보다 이 영화의 ‘제작기’가 앞서 우리를 반기기 때문이다. NO CG, 판권 구입까지 15년, 총 28개국 로케이션, 장소 섭외에만 17년, 주인공을 찾는 데 7년, 실제 촬영 기간 4년 반. 감독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영화에 올인했다. 신화처럼 들리는 전무후무한 도박 같은 프로덕션이다. <더 폴>의 컬트화를 이끈 이유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때문에 영화가 겉만 번지르르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진실과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
타셈 싱
[비평] 죽음과 삶, 그리고 이야기, <더 폴: 디렉터스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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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간 우주의 희귀자원을 놓고 국정원들이 벌이는 전쟁 얘기나 또 하나의 지구 찾는 판타지가 아닌, 우주에서 사람 사는 얘기’를 그리겠다는 것이 <별들에게 물어봐>의 기획 의도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다수의 SF영화, 시리즈를 상기할 때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우주정거장에서의 생활기’라는 설정은 신선한 시도를 기대케 한다. 우주정거장에서의 무중력상태나 우주인들의 일상에 관한 묘사가 보다 정교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별들에게 물어봐>가 단조롭게 느껴진다. 단순히 우주인의 행보만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상 관제 센터의 전문가들과 우주인을 지켜보는 지구인들까지 극의 등장인물 모두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에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주와 글라스의 세계
산부인과 의사인 공룡(이민호)이 우주선에 오른 목적은 하나다. MZ그룹 며느리의 난자와 사망한 장손의 정자를 수정시켜 돌아오는 것. 성공한다면 공룡은 MZ그룹의 유일한 직계
[비평] 반복된 질문 끝에 남은 것, <별들에게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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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훈(이정재)이 깨어났다. <오징어 게임> 시즌1 게임의 최종 승자로 456억원의 상금을 수령한 기훈은 죽음의 게임을 아예 끝낼 목적으로 게임에 다시 참가한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게임 룰이 생겼다. 이 룰은 5~6개의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각 게임의 생존자들끼리 다음 게임의 진행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찬반 투표를 도입한다는 내용이다. 겉으로 보기엔 민주적 투표 절차에 따른 공정한 룰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번외 게임이다. 게임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참가자들은 반대표를 던질 사람들을 협박하고 심지어 목숨을 끊어놓아 투표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절하게 살인도구에 쓰일 포크도 나눠준다.
딱 한명의 선택을 두고 투표의 향방이 팽팽하게 갈리는 장면을 보면서 누군가는 정치 이념의 왜곡된 갈등이 선거철마다 펼쳐지는 51 대 49 선거 국면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상의 게임 속행 여부를 두고 대립하는 갈등 양상과 현실의 복잡미묘한 갈등을 단순
[비평] 성기훈은 오징어 게임을 끝낼 수 있을까?, <오징어 게임>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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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가두려는 걸까? 영화를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애니멀 킹덤> 속 프랑스의 수인 대책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이들은 마치 수인이 너무 위험해서 가둘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굴고 있다. 그러나 영화상 묘사에 따르면 수인은 인간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 한 굳이 인간을 찾아와 공격하진 않을뿐더러 인간이던 시절 깊은 교감을 쌓은 인물과는 어느 정도 소통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화감은 영화에서 ‘수인화’를 전염병처럼 다루기보다는 일종의 비감염성 질환처럼 다루고 있기에 더 크게 느껴진다. 작품 내에서는 아마도 수인화가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이 규명된 상태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노르웨이에서는 수인과 인간의 공존을 추구하고 있다”라는 대사가 나올 리 없고, 수인과 마스크 하나 쓰지 않고 만날 리가 없다. 즉 수인화는 코로나19, 독감, 수두 같은 것이 아니라 파킨슨병, 암, 백내장과 비슷한 무언가다. 최소한 아직 ‘수인’이 되지 않은 사람 처지에서는 그렇다. 비전염
[비평] 작은 나사와 도르래, <애니멀 킹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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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매캐한 매연과 천둥 같은 엔진 소리, 세상 쿨한 카레이서들의 목숨을 건 경주와 사업가들의 냉철한 비즈니스 담판…, 같은 것들보다 진정 즐거운 <페라리>의 순간은 바나나 한개에 있다. 페라리사의 명운을 건 1천 마일 레이스 ‘밀레 밀리아’ 도중 페라리사의 카레이서 피터(잭 오코넬)는 주유 지점에 내려 잠깐 쉬면서 바나나 한개를 까고 급히 한입, 두입 해치운다. 그리고 반쯤 남은 바나나를 엔초 페라리 회장(애덤 드라이버)에게 마치 버리듯 툭 건네준다. 평소 꽤 권위적인 엔초이지만 경주 중인 선수에겐 별다른 말도 못한다. 대신 엔초는 이 바나나를 자연스레 회사 직원에게, 직원은 정비공에게, 정비공은 카레이싱 구경 나온 동네 아이들에게 떠넘긴다. 130분짜리 <페라리>에 겨우 10초쯤 차지하는 이 웃긴 바나나 숏, 일련의 자그마한 몸짓들에 어떤 의미를 덧댈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거창한 의미나 상징을 이 바나나 자체엔 부
[비평] 장난질과 낙관,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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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그림 찾기. <리얼 페인>의 시작과 끝은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룬다. 카메라는 동일한 동선을 따라 뉴욕 공항 로비를 훑고 동일한 좌석에 앉아 있는 벤지(키런 컬킨)의 얼굴로 다가간다. 차이점은 셔츠 착의 유무, 가방의 위치, 쇼팽의 곡, 영화 타이틀의 위치 등이 있다. 여기에 추가할 것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다. 공항은 목적지를 둔 사람들의 설렘, 긴장감 그리고 피곤함이 교차하는 장소다. 사람들 자체가 계속해서 바뀌는 풍경으로 존재하는 이곳에서 벤지 혼자 멈춰 있다. 통유리창으로 내리는 햇볕 때문에 달라진 그의 낯빛에서 시간대가 달라졌음을 알 뿐이다. 원테이크로 촬영된 이 두개의 장면 중 무엇을 기준 삼아 ‘다름’을 판별할 수 있을까? 두 얼굴 사이에 놓인 것은 사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함께 떠난 폴란드 여행이다.
이토록 특이한 우울감
<리얼 페인>은 한국 시장을 겨냥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한국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MBTI적인 캐릭터로 두 인물
[비평] 타인의 고통, <리얼 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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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거사를 다룬 대작 <하얼빈>이 흥행 중이다. 뛰어난 영상미와 압도적인 화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명암 대비로 17세기 명화를 보는 듯한 장면들, 광활한 자연을 담은 아이맥스 화면, 부감숏 등 촬영이 훌륭하다. 그러나 단선적인 캐릭터와 연극적인 대사는 지적할 만하다. 가장 큰 문제는 서사이다. <하얼빈>은 안중근의 고결함에 집중하다 안중근이란 인물에게서 놓치지 말아야 할 주제인 ‘만국공법’과 ‘동양평화’를 고찰하지 못하고, 영상미에 도취되어버린 패착을 저질렀다.
하얼빈 총격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를 놓치다
<하얼빈>의 화면은 아름답지만, 배경용 걸개그림일 뿐 서사에 밀착하는 맛이 없다. 인물은 평면적이고 대사는 뮤지컬적이다. ‘거룩한 아이맥스!’랄까. 지나친 험구라고?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이런 식이다. 안중근(현빈)이 얼어붙은 강을 헤매다 동지들에게 돌아왔을 때, 첨예한 갈등이 오가는 장면이지만, 대사와 장면
[비평] 오늘날 안중근을 기린다는 것은, <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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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안은수)은 전과가 있다. 이 정보는 영화 초반부, 지각한 영진이 진현(윤혁진)에게 핀잔을 들은 뒤 밖으로 나가면 옆자리 이 과장의 빈정대는 대사(“전과 하는 애들은 다 이유가 있어”)로 전달된다. 이런 대사가 영화의 도입에 한번 기입되고 나면 관객은 그 내막을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움직임은 굼뜨고 말은 어눌하며 늘 무표정한 영진은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복지관장이 매일 캠코더를 들고 다니는 영진을 수상하게 여기며 ‘몰래카메라’를 연상하듯이, 자신을 변호하기는커녕 모든 종류의 오해와 왜곡에 스스로를 내놓는 이 미심쩍은 청년에게 혹시 험악한 폭력의 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는 내내 은밀하게 짐작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진현의 말마따나 “잡범”이었다. 텔레마케팅 일을 하던 친구의 작업대출에 연루되어 6개월간 징역을 살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행위는 공적인 언어로는 사기이고 불법이지만, 동시에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유감스러운 사태의 일면
[비평] 모눈을 벗어나는 얼음처럼, <부모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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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알레고리를 걷어내고 나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룸 넥스트 도어>는 곧 죽음을 맞이할 육신과 그 죽음 앞에 놓여 있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영화로 보인다. 여기에는 전장을 누비고 사랑을 나누며 펜을 쥐고 글을 쓰던 몸의 확실한 죽음이 있다. 마사(틸다 스윈턴)가 사후 세계의 유령처럼 보이는 순간이 몇초간 있다고 하더라도 <룸 넥스트 도어>에서의 죽음은 관념적 사유를 활보하던 한 존재와 그 세계의 끝이라기보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육신의 종언에 더 가깝게 그려진다.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필름영화에서 디지털영화로 전환되는 한 시절을 소환한다. 기억을 잃은 배우 훌리오(호세 코로나도)와 작품을 완성하는 데 실패한 영화감독 미겔(마놀로 솔로)이 저물어가는 필름영화 시대를 바라보며 이제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려거든 두눈을 감으라 요청한다.
디지털시네마 패키지 이전에 셀룰로이드 필름 릴은 오랜 세월 영화의 몸과도 같이 여겨졌으므로 <
[비평] 어느 육신의 죽음, <룸 넥스트 도어>와 <클로즈 유어 아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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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물었다.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요?”
달마 대사가 답했다. “알지 못합니다(不識).”(<벽암록> 제1칙)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14:9)
<알레고리>가 레오스 카락스를 ‘동굴의 비유’ 속 철인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내세워 짐짓 멋들어지게 예술가의 존재론을 설파하는 것과 달리 <잇츠 낫 미>는 상당히 정의 내리기 힘든 사적인 작품이다. 일단 이 영화의 제목부터가 엉뚱하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잇츠 낫 미>는 파리 퐁피두센터 요청에 따라 제작된 현대 미술작품으로, 본래 퐁피두센터가 ‘자화상’을 주제로 작품을 의뢰하며 던진 질문은 영화 초반에 나오다시피 “레오스 카락스, 어디 계신가요?”였다고 한다. 레오스 카락스는 이에 대해 “그건 내가 아니다”(It’s not me)라고 답하고 있는데, 보통 어디 있냐고 물으면 ‘여기 있다’고
[비평] 휘갈겨 쓴 작가 노트, 이병현 평론가의 <잇츠 낫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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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마음에 안정을 주는 짤”이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이미지를 자주 본다. 종류, 색상, 크기별로 잘 진열된 판매대나 오와 열을 맞춰 정돈된 서랍장 등이 그렇다. 또 같은 제목임에도 반어적으로 다른 이미지를 노출하기도 한다. 음료수 캔이 배출구 앞에서 막혀버린 자판기라거나 바닥에 빽빽하게 들어찬 타일 중 하나가 색깔이나 모양이 다르거나 해서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거스르는 이미지다. 엇나간 타일 조각을 볼 때 정말 그 타일만 제자리에 놓으면 마음이 정화될 것 같다. 그래도 <서브스턴스>에 등장하는 오디션 심사위원이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의 분신 격인 수(마거릿 퀄리)를 두고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건 지독하다.
<서브스턴스>를 미추 관념에 근거한 에이지즘과 루키즘 비판으로 독해하는 일도 옳다. 다만 미추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규격, 정연, 정돈, 통제, 지침 등의 개념이 주로 작동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서브
[비평] 규격과 파격, <서브스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