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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로미(니콜 키드먼)와 그의 섹슈얼리티가 있다. 그는 명문대를 나온 백인 여성 CEO이며, 남편과의 성관계 후엔 몰래 포르노를 보며 자위한다. <베이비걸>은 로미의 전사를 서술하되 정신분석에 사용하지는 않는다. 컬트 공동체에서 보낸 성장기의 잔상은 로미가 자신의 욕망을 비정상이라 여겨 그 실마리를 과거에서 찾으려 했기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전사와 회사 내 지위가 로미의 욕망과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대디”가 나오는 포르노를 보는 원인이 모종의 과거사에 있으리란 법은 없고, 회사에서 지시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상대가 침대에서 복종하길 원하는 건 아니다. 섹슈얼리티는 특정한 인과로 설명되지 않고 누군가의 ‘유일한 진짜’도 아니다. 더불어 짚으면, ‘남성적 시선에 의해 여성의 마조히즘이 왜곡된 형태로 재현되곤 했다’는 식의 비판적 분석과 ‘여성의 마조히즘은 남성 판타지’라는 단정은 다르다. 납작한 일반화가 통용되는 시대는 지났다. 영화는 이를 인지
[비평] 유동하는 날숨의 감각, 김연우 평론가의 <베이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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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는 영화의 영원한 숙제다. 최근 탈출에 관한 흥미로운 영화 두편이 개봉했다. 하나는 <8번 출구>다. 이 영화는 탈출의 방법보다는 ‘무엇’으로부터 탈출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관객은 뫼비우스의띠 같은 지하철 복도를 같이 걸으며 탈출할 방법을 주인공과 함께 익힌다. 하지만 게임은 허울에 불과할 뿐 주인공이 탈출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주인공이 미로에 갇힌 것은 인생을 재고해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영화는 8번 출구 밖을 구경시켜주지 않는다. 다시 첫 장면과 비슷한 상황에 주인공을 데려다놓고 그의 변화된 행동을 지켜본다. 이상 현상으로 복도 바깥을 비추는 장면 역시 주인공의 과거나 미래에 해당하는 것이다. 결국 <8번 출구>는 탈출극을 표방하지만 심리극의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김유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바얌섬>이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인물들이 탈출할 의지가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때는 조선
[비평] 불가항력의 섬, 오진우 평론가의 <바얌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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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삶을 흔히 생의 마무리라 포장하지만, 영화 속 노인들에겐 버티기일 뿐이다. 마무리를 할 만큼 생의 과정이 정연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끝을 설계할 만큼 삶을 꾸미며 살지 않았다. 폐지를 줍고 노상에서 채소를 팔며 생을 이어가는 세명의 노인은 법과 제도의 보호망 밖에 있다.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고기를 먹고 도망치는 이들의 행위는 사회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존재가 현실의 질서 안으로 잠시 침투하는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영화에서 범죄를 다룰 때 종종 명확한 판단을 요구하지만, 이 영화는 그 판단을 미루게 한다. ‘노인들이 잘못한 건 알겠는데, 왜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 없나.’ 관객은 무전취식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분노보다 혼란을 느낀다. 세 노인의 삶이 이미 사회의 손이 닿지 않는 구역에 놓여 있다는 걸 알아서다. 영화는 도덕의 내용보다 도덕이 의미 없어지는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관객은 그들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대신 자신의 판단이 어떤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주시한
[비평] 살아 있는 척하기, 최선 평론가의 <사람과 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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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립영화계의 두드러진 경향 중 하나는 여성의 사라진 서사를 다시 쓰는 일이다. 미처 쓰지 못한, 시간에 파묻혀버린 이야기. 그래서 이런 시도는 대개 선대의 여성을 향한다. <양양>은 이런 조류 위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양양>을 ‘선대 여성 서사 쓰기’ 카테고리 속 하나로 심상하게 분류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가족 내부에서 지워진 고모를 가족 안에서부터 다시 찾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특별한 영화의 성취를 오롯이 인정하면서도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건 <양양>뿐 아니라 여성 서사의 복구를 시도하는 작품들에 함께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말해지지 않던 것을 말하는 작업
술에 취한 아버지의 한마디 고백으로부터 <양양>은 시작된다. 나에게 고모가 있었다고? 초반에 영화를 추동하는 것은 가족의 역사에서 사라진 고모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그녀와 나 나이의 ‘닮음’이 이끄는
[비평] 침묵 깨기의 어려움, 홍수정 평론가의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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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수(이병헌)와 그의 잠재적 경쟁자들은 장인에 근접한 숙련 노동자들이며 관리직이다. 특수 제지 생산 라인을 관리한다. 그들이 제지 생산 마지막 단계에서 막대기로 종이를 두들기는 행위는 종이의 밀도, 결, 수분 함량을 확인하는 기술이다. 손과 귀, 막대기의 반향만으로 그들은 종이의 상태를 진단한다. 종이는 두드림 속에서, 악기가 연주자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듯, 숙련공만이 이해하는 리듬, 소리를 전달한다. 이때 두들김은 종이를 “죽은 물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으로 다루는 몸짓이다. 막대기는 단순한 검사 도구가 아니라, 세대를 이어온 장인 문화의 매개, 촉각과 청각을 타격, 확장하는 감각의 연장, 보철이 된다. 25년간 “종이 밥”을 먹는 것은, 이 감각들을 동시에 극대화하는 일이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지난 25년간의 노동문화가 양생한 이들의 감각에 미학적으로 전력을 다해 반응하고 감응한다. 영화의 작가론은 영화산업의 요구와 어느 정도 불화하며 성취하는 감독의
[비평] 사라져가는 제지 공장의 장인과 영화 공장의 작가 감독, 김소영 평론가의 <어쩔수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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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하 <레제편>) 은 시네마다. 단순히 <레제편>이 서사의 완결성이나 매력적인 캐릭터의 구성으로 획득한 감흥을 두고 영화적이란 수사를 표하는 것은 아니다. 으레 ‘영화’로 불리는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차이야 명백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현실의 풍경을 오려낸 조각이고, 곤 사토시 감독의 말마따나 애니메이션은 “모든 화면이 의도로 가득 채워지는” 세계의 전체에 가깝다. 21세기 전후 급격히 발전한 3D CG, 모션 캡처 등으로 인해 실사와 그래픽의 경계가 흐려졌다 해도 두 매체를 다루는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실사영화의 카메라가 담는 현실의 우연성과 사건성을 영화 고유의 가치로 설파하는 연출가들이 지지를 얻고 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다만 <레제편>은 이제 정말, 영화만이 가졌던 ‘물리적인 카메라’의 성질이 비로소 ‘관념적 촬영’의 영역과 구분 불가능할 정도로 뒤섞인 것
[비평] 레제는 시네마다, 이우빈 기자의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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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일종의 오해야, 오해.” 연상호의 <얼굴>은 눈이 보이지 않는 전각 명인 임영규(권해효)의 이 첫마디로 시작한다. 사건의 핵심을 직접 드러내는 대사는 아니지만, 작품 전체의 운명을 짧게 예고한다. 오해라는 말은 잘못 인식했다는 뜻을 넘어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의미한다. 얼굴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감추고, 왜곡하고, 전혀 다른 이미지를 덧씌우려 하니까. 그동안 연상호는 개인의 얼굴보다는 집단 폭력과 희생의 굴레를 탐구해왔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앞세운 <부산행>부터 지옥의 심판대에 인간을 떨어뜨린 <지옥>, 종말 서사로 인간 군상을 해부한 <계시록>까지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넘나들며 확장해온 그의 세계는 언제나 집단 폭력, 군중의 광기, 제도화된 공포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에 속한 개인은 집단의 운명을 짊어진 채 대표성을 띤 기호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얼굴
[비평] 프레임의 죽음을 희망하며, 최선 평론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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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희 감독의 첫 번째 장편 <휴가>에서 재복(이봉하)은 끝이 보이지 않는 농성을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휴가를 내어준다. 그의 휴가는 밀린 집안일, 딸들의 대학 등록 예치금과 패딩 점퍼를 마련하기 위한 노동으로 부지런히 채워진다. <3학년 2학기>는 중소기업 실습생으로 이른 취직을 하면서,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학기를 누리지 못하는 창우(유이하)의 이야기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휴가>에는 휴가가 없으며, <3학년 2학기>는 학창 시절의 한 학기가 삭제된 영화다. 일견 감독의 영화들은 제목이 지칭하는 시간을 소유하지 못하는 허구적 인물들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표출하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노동을 다루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작품들이 간혹 저지르는 과오. 이를테면 육체노동을 그저 곤란한 것으로 격하하거나 노동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성급하게 재단하여 이들의 불행을 지나치게 전시하려는 시도들처럼 말이다. 지아장커의 <무용>,
[비평] 기록되지 않는 것을 기록하기, 문주화 평론가의 <3학년 2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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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몸속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바로 약국을 찾았고, 소화제 한알을 삼키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어글리 시스터>(2025)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영화 <기생충>(2019)의 타이틀이 떠올랐다. 알레고리로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생충’이라는 세 글자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하얗고 기다란 생명체, 이 물질에 대해 영화는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다. 원치 않는 상태에서 관객들의 내부로 그것을 주입시키려는 것 같다. 그 일그러진 형체, 어쩌면 이 물체는 성공 혹은 해피 엔딩을 향한 모티프를 닮았다. 대다수 영화에서 형이상학적으로 드러내는 주제를 이 작품은 몹시 물리적으로 다루고 있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와 닮았다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잔혹 동화의 공포 버전이라고 전했다. 모두의 의견에 동의하며 <어글리 시스터>가 전달하는 끔찍함의 강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도발과 농담의 경계를 오
[비평] 심리적인 쾌감의 부재 - 이지현 평론가의 <어글리 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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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의 <너는 나를 불태워>는 일단 극영화다.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와 신화 속 님프 브리토마르티스의 대화로 이루어진 체사레 파베세의 희곡 <바다 거품(파도 거품)>의 각색이지만, 두 배우가 마주보고 연기하는 형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원작의 대화가 영화 전체에 걸쳐 재생되는 가운데 여러 인용과 서술, 책 페이지를 비롯한 각종 요소가 나뉘고 섞이고 겹친다. 전부 분리해 재조립하려는 듯한 연출의 초점은 파편들의 연결에 있어 보인다. 조희영 감독의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서도 분리 후 재구성이 발견되는데, 그 조각은 인물이 현존하거나 기억하는 시공간의 덩어리들이다. 현장에서 감각되지 않는 것은 해석이 불가한 것으로 남고, 가시화된 균열은 메워지지 않는다. 이토록 다른 두 영화의 유사성을 짚어내 범주화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 글쓰기는 양쪽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시도다.
조각냄으로써 잇다
<바다 거품>은 각자의 이야기에
[비평] 경계의 연결, 균열의 응시, 김연우 평론가의 <너는 나를 불태워>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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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웃기는데 난데없어 더 웃긴 <THE 자연인> 앞에서 냉정해지기란 쉽지 않다. 아니, 개인의 취향에 따라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호불호가 나뉘리라 짐작하면서도 <THE 자연인>이 아주 제대로 노는 코미디영화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 영화와 함께 놀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허들이 높진 않다. 얼마간 비위가 강해야 하고 망측한 장면에서도 의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정도만 충족되면 취향 타는 영화를 보는 데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든 노영석은 웃음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는 폭소든 실소든 풍자로든 여러모로 관객을 웃기는 데 재능이 있다. 우리는 그의 저력을 데뷔작 <낮술>(2008)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기도 하다.
누군가는 <THE 자연인>을 ‘병맛’ 코미디라고 칭하고 B급영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풍부한 코미디의 결을 다 살리지 못하는 듯해 살짝 석연치 않지만, 이 영화의 성격상 부인하기 어렵다.
[비평] 한판 신나게 놀아젖히는 영화, 홍은미 평론가의 < THE 자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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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에 대한 숱한 오독(誤讀) 가운데 흔한 사례는 ‘감시와 처벌’과 관련한 그의 담론을 권력에 관한 크리틱으로만 읽는 것이다. 이같은 오해는 전공 연구자들에게서조차 종종 발견되다 2000년대 들어 그의 강의록과 에세이가 사후 출간되면서 차츰 바로잡혀가는 분위기다. 푸코는 사망 2년 전인 1982년 에세이 <주체와 권력>(The Subject and Power)에서 “지난 20년간 내 연구의 주된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라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 논지를 거칠게나마 정리하자면 파놉티콘 꼭대기에 감시 권력이 있으므로, 문제는 저 위의 권력이기도 하지만, 언제 어디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겠는 피감시자들이 스스로를 통제하고 규율하면서 ‘만들어지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감시하는 권력과 감시당하는 주체 중 어느 한쪽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세계의 실체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며,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
[비평] 권력과 주체, 송형국 평론가의 <전지적 독자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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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기로디 감독의 <미세리코르디아>가 제빵사의 장례식에서 이어진 그 아들의 실종-살인 사건과 이방인 제레미를 둘러싼 치정을 여러 인물이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면, 장병기 감독의 <여름이 지나가면>은 먼저 세상을 조금 더 알아버린 한 소년이 그 여름의 진실을 뒤늦게 깨닫게 될 다른 소년의 등장과 퇴장을 지켜보는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앎과 모름 사이에서 파생되는 신경증적 긴장과 아연함이며, 떠남을 지켜보는 어린 두 형제에게 남은 아릿한 슬픔이다. 앎과 모름은 무지의 단순한 경계 안팎이 아니라 자기 삶을 등에 업고 보이는 것만을 볼 수 있는 파편적 실체, 아무래도 저편에서 바라볼 수 없는 진실의 비가역성을 드러낸다. 시학에서 비극의 요소는 공포와 애련을 불러온다고 했던가. 앎의 격차는 삶에서도, 서사에서도 비극을 야기한다. 신은 영웅의 운명을 알지만 영웅은 그 앞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알지만 그들은 모른다. 당신은 아는 이야기를 나는 여전히 모른다.
[비평] 앎과 모름 사이에서, 유선아 평론가의 <미세리코르디아> <여름이 지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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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리코르디아>에서 가장 기이하면서도 욱신거리는 정념마저 불러일으키는 장면. 그것은 아마도 임무를 완수한 듯 만족스러운 표정의 미망인 마르틴(카트린 프로)과 손을 맞잡은 제레미(펠릭스 키실)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심연의 어둠으로 스며드는 엔딩 신일 것이다. 이때 화면 밖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사제 필리프(자크 드블레)는 매장되어 있던 뱅상(장바티스트 뒤랑)의 시신과 단둘이 있기를 간청한 후, 역시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설프게 매장되었던 뱅상은 완전한 죽음에 이를 것이며, 보잘것없는 증거였던 버섯도 숲속에서 불쑥 솟아오르기를 멈추고 이제 침묵할 것이다. 마르틴이 침대 위 조명을 소등하는 순간, 오롯한 암흑만이 조용한 마을과 프레임을 잠식한다. 스스로 불가지론자임을 밝히며, 신에 대한 인간의 복종과 같은 개념을 거부한다고 했던 알랭 기로디의 선언(<필로> 42호)을 증명이라도 하듯, 영화는 유일하게 르상티망을 가졌던 예언자 뱅상을 삭제
[비평] 구원을 비웃는 무위의 공동체, 문주화 평론가의 <미세리코르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