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게 일종의 오해야, 오해.” 연상호의 <얼굴>은 눈이 보이지 않는 전각 명인 임영규(권해효)의 이 첫마디로 시작한다. 사건의 핵심을 직접 드러내는 대사는 아니지만, 작품 전체의 운명을 짧게 예고한다. 오해라는 말은 잘못 인식했다는 뜻을 넘어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의미한다. 얼굴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감추고, 왜곡하고, 전혀 다른 이미지를 덧씌우려 하니까. 그동안 연상호는 개인의 얼굴보다는 집단 폭력과 희생의 굴레를 탐구해왔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앞세운 <부산행>부터 지옥의 심판대에 인간을 떨어뜨린 <지옥>, 종말 서사로 인간 군상을 해부한 <계시록>까지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넘나들며 확장해온 그의 세계는 언제나 집단 폭력, 군중의 광기, 제도화된 공포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에 속한 개인은 집단의 운명을 짊어진 채 대표성을 띤 기호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얼굴
[비평] 프레임의 죽음을 희망하며, 최선 평론가의 <얼굴>
-
이란희 감독의 첫 번째 장편 <휴가>에서 재복(이봉하)은 끝이 보이지 않는 농성을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휴가를 내어준다. 그의 휴가는 밀린 집안일, 딸들의 대학 등록 예치금과 패딩 점퍼를 마련하기 위한 노동으로 부지런히 채워진다. <3학년 2학기>는 중소기업 실습생으로 이른 취직을 하면서,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학기를 누리지 못하는 창우(유이하)의 이야기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휴가>에는 휴가가 없으며, <3학년 2학기>는 학창 시절의 한 학기가 삭제된 영화다. 일견 감독의 영화들은 제목이 지칭하는 시간을 소유하지 못하는 허구적 인물들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표출하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노동을 다루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작품들이 간혹 저지르는 과오. 이를테면 육체노동을 그저 곤란한 것으로 격하하거나 노동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성급하게 재단하여 이들의 불행을 지나치게 전시하려는 시도들처럼 말이다. 지아장커의 <무용>,
[비평] 기록되지 않는 것을 기록하기, 문주화 평론가의 <3학년 2학기>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몸속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바로 약국을 찾았고, 소화제 한알을 삼키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어글리 시스터>(2025)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영화 <기생충>(2019)의 타이틀이 떠올랐다. 알레고리로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생충’이라는 세 글자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하얗고 기다란 생명체, 이 물질에 대해 영화는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다. 원치 않는 상태에서 관객들의 내부로 그것을 주입시키려는 것 같다. 그 일그러진 형체, 어쩌면 이 물체는 성공 혹은 해피 엔딩을 향한 모티프를 닮았다. 대다수 영화에서 형이상학적으로 드러내는 주제를 이 작품은 몹시 물리적으로 다루고 있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와 닮았다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잔혹 동화의 공포 버전이라고 전했다. 모두의 의견에 동의하며 <어글리 시스터>가 전달하는 끔찍함의 강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도발과 농담의 경계를 오
[비평] 심리적인 쾌감의 부재 - 이지현 평론가의 <어글리 시스터>
-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의 <너는 나를 불태워>는 일단 극영화다.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와 신화 속 님프 브리토마르티스의 대화로 이루어진 체사레 파베세의 희곡 <바다 거품(파도 거품)>의 각색이지만, 두 배우가 마주보고 연기하는 형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원작의 대화가 영화 전체에 걸쳐 재생되는 가운데 여러 인용과 서술, 책 페이지를 비롯한 각종 요소가 나뉘고 섞이고 겹친다. 전부 분리해 재조립하려는 듯한 연출의 초점은 파편들의 연결에 있어 보인다. 조희영 감독의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서도 분리 후 재구성이 발견되는데, 그 조각은 인물이 현존하거나 기억하는 시공간의 덩어리들이다. 현장에서 감각되지 않는 것은 해석이 불가한 것으로 남고, 가시화된 균열은 메워지지 않는다. 이토록 다른 두 영화의 유사성을 짚어내 범주화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 글쓰기는 양쪽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시도다.
조각냄으로써 잇다
<바다 거품>은 각자의 이야기에
[비평] 경계의 연결, 균열의 응시, 김연우 평론가의 <너는 나를 불태워>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
-
작정하고 웃기는데 난데없어 더 웃긴 <THE 자연인> 앞에서 냉정해지기란 쉽지 않다. 아니, 개인의 취향에 따라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호불호가 나뉘리라 짐작하면서도 <THE 자연인>이 아주 제대로 노는 코미디영화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 영화와 함께 놀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허들이 높진 않다. 얼마간 비위가 강해야 하고 망측한 장면에서도 의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정도만 충족되면 취향 타는 영화를 보는 데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든 노영석은 웃음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는 폭소든 실소든 풍자로든 여러모로 관객을 웃기는 데 재능이 있다. 우리는 그의 저력을 데뷔작 <낮술>(2008)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기도 하다.
누군가는 <THE 자연인>을 ‘병맛’ 코미디라고 칭하고 B급영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풍부한 코미디의 결을 다 살리지 못하는 듯해 살짝 석연치 않지만, 이 영화의 성격상 부인하기 어렵다.
[비평] 한판 신나게 놀아젖히는 영화, 홍은미 평론가의
-
미셸 푸코에 대한 숱한 오독(誤讀) 가운데 흔한 사례는 ‘감시와 처벌’과 관련한 그의 담론을 권력에 관한 크리틱으로만 읽는 것이다. 이같은 오해는 전공 연구자들에게서조차 종종 발견되다 2000년대 들어 그의 강의록과 에세이가 사후 출간되면서 차츰 바로잡혀가는 분위기다. 푸코는 사망 2년 전인 1982년 에세이 <주체와 권력>(The Subject and Power)에서 “지난 20년간 내 연구의 주된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라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 논지를 거칠게나마 정리하자면 파놉티콘 꼭대기에 감시 권력이 있으므로, 문제는 저 위의 권력이기도 하지만, 언제 어디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겠는 피감시자들이 스스로를 통제하고 규율하면서 ‘만들어지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감시하는 권력과 감시당하는 주체 중 어느 한쪽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세계의 실체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며,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
[비평] 권력과 주체, 송형국 평론가의 <전지적 독자 시점>
-
알랭 기로디 감독의 <미세리코르디아>가 제빵사의 장례식에서 이어진 그 아들의 실종-살인 사건과 이방인 제레미를 둘러싼 치정을 여러 인물이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면, 장병기 감독의 <여름이 지나가면>은 먼저 세상을 조금 더 알아버린 한 소년이 그 여름의 진실을 뒤늦게 깨닫게 될 다른 소년의 등장과 퇴장을 지켜보는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앎과 모름 사이에서 파생되는 신경증적 긴장과 아연함이며, 떠남을 지켜보는 어린 두 형제에게 남은 아릿한 슬픔이다. 앎과 모름은 무지의 단순한 경계 안팎이 아니라 자기 삶을 등에 업고 보이는 것만을 볼 수 있는 파편적 실체, 아무래도 저편에서 바라볼 수 없는 진실의 비가역성을 드러낸다. 시학에서 비극의 요소는 공포와 애련을 불러온다고 했던가. 앎의 격차는 삶에서도, 서사에서도 비극을 야기한다. 신은 영웅의 운명을 알지만 영웅은 그 앞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알지만 그들은 모른다. 당신은 아는 이야기를 나는 여전히 모른다.
[비평] 앎과 모름 사이에서, 유선아 평론가의 <미세리코르디아> <여름이 지나가면>
-
<미세리코르디아>에서 가장 기이하면서도 욱신거리는 정념마저 불러일으키는 장면. 그것은 아마도 임무를 완수한 듯 만족스러운 표정의 미망인 마르틴(카트린 프로)과 손을 맞잡은 제레미(펠릭스 키실)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심연의 어둠으로 스며드는 엔딩 신일 것이다. 이때 화면 밖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사제 필리프(자크 드블레)는 매장되어 있던 뱅상(장바티스트 뒤랑)의 시신과 단둘이 있기를 간청한 후, 역시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설프게 매장되었던 뱅상은 완전한 죽음에 이를 것이며, 보잘것없는 증거였던 버섯도 숲속에서 불쑥 솟아오르기를 멈추고 이제 침묵할 것이다. 마르틴이 침대 위 조명을 소등하는 순간, 오롯한 암흑만이 조용한 마을과 프레임을 잠식한다. 스스로 불가지론자임을 밝히며, 신에 대한 인간의 복종과 같은 개념을 거부한다고 했던 알랭 기로디의 선언(<필로> 42호)을 증명이라도 하듯, 영화는 유일하게 르상티망을 가졌던 예언자 뱅상을 삭제
[비평] 구원을 비웃는 무위의 공동체, 문주화 평론가의 <미세리코르디아>
-
<미세리코르디아>라는 제목이 자비를 의미한다고 해서 자비를 영화의 최종 종착지로 여겨서는 안된다. 제목에는 ‘자비’라는 단어를 내걸었지만 영화에서 이와 비슷하게 사용되는 단어는 ‘무상의 사랑’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지된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를 넘어서는 에너지”라던 질 들뢰즈의 지적처럼, <미세리코르디아>가 이야기하는 자비는 선규정된 어떤 개념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언제나 현재형으로 흘러넘치는 유동의 힘, 그럼으로써 정태적인 도덕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그 경계를 확장하려는 에너지에 가깝다. 끝없는 유동적 움직임과 생성의 에너지, 그것이 알랭 기로디가 추구하는 욕망이자 자비의 모습이다. 그 자비의 힘에 의해서만 죽어 있는 공동체가 다시 부활할 터이니.
버섯을 먹어야만 하는 삶
영화의 도입부, 제레미(펠릭스 키실)는 마을로 다시 돌아온다. 그를 부른 것은 어린 시절 제빵 스승이자 유사 아버지였던 장피에르의 죽음이다.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이 죽음
[비평] 죽음 위에 핀 버섯에 자비를, 안시환 평론가의 <미세리코르디아>
-
슈퍼히어로의 대명사인 ‘슈퍼맨’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 작품은 새로운 DC 유니버스를 알리는 공식 작품이다. 그러나 <슈퍼맨> (2025)이 남긴 첫인상은 어쩐지 뜨뜻미지근하다. 히어로물 패러디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톤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크레더블> <메가마인드> <슈퍼배드> 같은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던 비틀린 영웅물이 떠오른다. 물론 이들 애니메이션은 저마다 미덕이 있는 작품이지만, 슈퍼맨이라는 프랜차이즈에서 이와 유사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당혹스럽다.
이 미지근한 온도는 단지 잭 스나이더 시절의 장중한 신화적 서사와 대비대며 나타난 낙차만은 아니다. 제임스 건이 ‘인간적인’ 히어로를 그리려는 시도 자체는 썩 흥미롭다. 문제는 이야기와 캐릭터의 설계다. 영화는 저스티스 갱을 비롯한 신인 히어로를 마치 오래된 인기 TV시리즈의 극장판 속 캐릭터처럼 관객의 면전에 던진다. 낯선 캐릭터가 아무 설명 없이 등장해 친근한 척할 때 관객은 마
[비평] 어려운 척 쉬운 길로, 이병현 평론가의 <슈퍼맨>
-
비슷한 시기에 월드 와이드로 개봉하여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28년 후>와 <F1 더 무비>에는 개봉 시점 외에 묘한 공통점이 있다. 첫째로 두 영화의 서사에 30년에 달하는 긴 시간의 역사가 암시되어 있다는 것, 이를 바탕으로 베테랑과 루키간의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이 베테랑이건 루키건 간에 반드시 적들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야만 한다는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울타리 밖에서든, 트랙 위에서든. 아니 어쩌면 울타리 안에서든, 트랙 아래에서든. 그 공통점 때문일까. 각각 좀비영화와 스포츠영화라는 전혀 다른 외피를 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를 보며 떠올리게 되는 질문은 같다. 그들은 왜 달리는가. 울타리 안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죽음의 위기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경주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겹다”라는 말과 함께 은퇴를 선언했다 그 말을 번복하고 다시 트랙 위에 오른 니키 라우다처럼, 수많은 동료 대
[비평] 이유 찾기 위한 달리기, 김철홍 평론가의 <28년 후> < F1 더 무비 >
-
“자꾸 나랑 자려고 하잖아. 하여간 이래서 퀴어들이 싫어. 그냥 친구로 만나는 게 불가능하다니까.”
영화의 초반, 리(대니얼 크레이그)와 함께 놀던 남자는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뒷담화를 한다. 폭력적인 말을 뒤로한 채 리는 걷는다(이때 스산하던 사운드가 너바나의 <Come as You Are>로 이어지는 순간의 쾌감이 상당하다). 중절모를 눌러쓴 채 흰색 슈트를 입고 휘적휘적 거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유령 같다. 이 걸음의 끝, 그는 유진(드루 스타키)과 마주친다. 첫 만남. 영혼처럼 흐릿하던 리는 그 순간 생생한 인간으로 돌아와 숨을 몰아쉬고 눈을 번뜩인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기. 그것은 ‘퀴어’라는 멸칭에 눌려 주변부를 떠돌던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강렬한 사랑과 마주하며 인생의 중심부로 복귀할 때 튀어 오르는 스파크다.
그런데 여기서 첫 만남의 짜릿함만큼이나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그건 이 순간에 드러나는 두 가지 대비되는 영역. 바로 ‘환상’과 ‘현실’
[비평] 환상은 이토록, 홍수정 평론가의 <퀴어>
-
다큐멘터리영화 <풀>(2024)에 대한 나의 호감은 하나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다큐멘터리스트가 대상에 대해 취하는 입장 혹은 그것에 대한 헌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왕도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연출자 이수정(<시 읽는 시간>(2016), <재춘언니>(2020))은 다큐멘터리스트가 현실에 개입하고, 또 그것을 증언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흥미로운 성취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대상이란 인격화된 존재로서 ‘풀’(대마초)이다. 지난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된 이래 크고 작은 수정을 거친 <풀>은 최종적으로 화자가 풀과 주고받는 대화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아닌 긴 자막 텍스트로 진행하는 대화는 풀에 전해지는 말이자, 서사의 주인공 격인 전직 의사 권용현을 향하고 있다. 견딜 수 없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환자에게 대마초를 줬다가 감옥에 다녀온 권용현은 이 이야기의 끝에서 한국을 떠나게
[비평] 불온함과의 대화, 장병원 평론가의 <풀>
-
“첨탑은 여전히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는데 누구도 그 위로 뛰어내리진 못했고.” -황유원, <잘린 목들의 합창>
“세상이 우리 앞에 주어졌다는 원초적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몇해 전 <프렌치 디스패치>에 대한 글(<씨 네21> 1332호)에서 나는 웨스 앤더슨이 “거 짓을 기반으로 아주 약간의 (진실이 아니라) 진심을 전달할 뿐이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페니키안 스킴>을 보고 나니 그 문장은 실로 이번 작품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여기서야말로 웨스 앤더슨의 관심은 신앙이기 때문이다. 과연 믿음만큼이나 대상/현상의 실체와 무관한 행위가 있을까? 반추하자면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웨스 앤더슨은 연극무대라는 고립된 판게아에 사막을 이식하고는 거기서 돌연 문(門)과 눈(目)의 이중 개방을 실험했다. 이 또한 믿음으로 지탱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비평] 추락하는 영광: 믿음의 역량에 관하여, 이보라 평론가의 <페니키안 스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