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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은 초반 영화의 흐름상 중요한 대상처럼 인식되었다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되며 사라지는 매개다. 달리 말해 맥거핀은 관객의 망각을 전제로 기능한다. 작은 사건은 영화에서 강조되는 더 큰 사건 속에 묻히며, 이에 종속된 대상들은 무의식중에 선택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1941) 속 ‘로즈버드’는 맥거핀을 연상시키되 맥거핀은 아닌 독특한 대상이다. 로즈버드는 케인이 죽기 직전 유언처럼 남긴 마지막 말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기자 톰슨이 케인의 주변인을 찾아다니며 로즈버드의 의미를 탐문한다. 로즈버드를 찾는 과정은 주변 인물들의 기억 속에 남은 케인의 조각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치환된다. 결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로즈버드가 일종의 미끼이고, 케인의 상을 그리는 것이 영화의 핵심처럼 보인다. 로즈버드의 의미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그가 잃어버린 어떤 것’일 거라고 두루뭉술하게 정리된 채 사라지지만, 관객은 마침내
[비평] 동시대의 로즈버드, 회귀하는 맥거핀, 김소희 평론가의 <슈퍼 해피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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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지만 동시에 가장 나중에 말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누구나 파더나 마더, 시스터-브러더를 우선 말하느라, 그 앞에 툭 튀어나와 있는 이 장면은 나중에 언급되거나 영영 잊힌다. 신이라기보단 토막 영상에 가까운 이 순간은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그리고 앞장과 뒷장의 사이를 잇는 막간에 짤막하게 등장한다.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배경으로 빨간색, 초록색을 띤 빛 입자들이 깜빡거린다. 묘사부터 어렵기에 더욱 기억하기 힘든 이 트랜지션 토막 자체가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에서 큰 특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만큼은 다르게 느껴지는 건, 여기서 이 토막들이 독립적인 세개의 이야기를 단절시키기보단 잇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세편의 단편을 이어서 볼 때 느낄 수 있는 총체적인 감각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그보다 더 크게
[비평] 길을 잇는 빛의 리듬, 김철홍 평론가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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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첫 장편영화를 발표한 해인 1997년에 아오야마 신지는 <누벨바그 선언, 혹은 나는 어떻게 필립 가렐의 사도가 되었는가>(이하 <누벨바그 선언>)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 일본판에 발표된 이 글은 누벨바그의 다음 세대로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필립 가렐의 과업을 되짚으며 동시대 일본에서 새로운 영화가 나오는 데 필요한 조건을 집요하게 캐묻는다. 아오야마는 현대 일본영화가 타자를 흡수하여 개인을 말살하는 공간이라 지적하고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는다. “개인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데 필요한 주체를 무시하는 것은 현대 일본영화의 담론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암묵적 전제이다. (...) 그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상의 ‘일본적 자연’ 속에서 밤낮으로 놀며 자신의 천박함을 눈치채지 못한다.”
아오야마는 ‘가상의 일본적 자연’이란 표현을 빌려 1990년대 일본영화에 나타난 풍경을 비판적으로 규정한다. 서사를 견인하고 끝맺는 극적 장치
[비평]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해 있다, 김병규 평론가의 <여행과 나날>과 <슈퍼 해피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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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가장 급진적이었던 기술적 선택에서 <아바타: 불과 재>(이하 <불과 재>)는 한 걸음 물러난다. 어떤 장면에서도 생성형 AI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강조하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말이 격세지감 속 낯선 선언처럼 들리고 만 이유는 최첨단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의 결실이었던 2009년의 <아바타>가 2025년의 <불과 재>에 이르러 또 다른 최첨단 기술의 생성형 AI 이미지와 대적하려는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지형의 판도라 행성은 실체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영화 기술의 진화와 실재하는 이미지 퇴행의 시대에 그 자체로 상징적 장소가 되어버렸다.
월드와이드웹에 반(反)하여
돌이켜보면 디지털영화 시대에 접어들어 등장한 <아바타>는 디지털네트워크의 미래가 아닌 디지털 이전의 직접 연결성으로 돌아가기를 상상했다. 문자 그대로 드넓게 펼쳐진 망(網)을 상상케 하는 월드와이드웹(WWW)은 다대다 동시접속이 가능한 디
[비평] 파격은 다시 새롭게 정의되는가, 유선아 평론가의 <아바타: 불과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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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 것. 우리가 상실한 것을 망각하지 말 것.’ 언젠가부터 일본 동시대 영화들이 수행하고 있는 이 거대한 캠페인의 지층 하부에는 도호쿠 대지진이라는 불가침의 콘크리트가 자리하고 있다. 캠페인의 주창자인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의 후반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운전기사 미사키(미우라 도코)를 끌어안으며 했던 말.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그게 계속되지’는 외화면의 전세계 관객들과 하마구치 이후의 영화감독들에게 이물 없이 각인되었다. 사자(死者)들을 위무하는 제의의 영화. 이는 사회적 책무와 시대적 윤리의식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예술영화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한 일본 감독들의 고유한 특권이자 누려 마땅한 성취일 것이다. 이가라시 고헤이의 전작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은 이러한 캠페인에 흠집을 내는 반가운 변수이다. 6살의 타카라는 어시장으로 출근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낯선 길을 나선다. 장
[비평] 유실물 센터로서의 영화, 문주화 평론가의 <슈퍼 해피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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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바움백의 영화 속 인물은 미완의 상태에 있다. 관계는 뒤죽박죽이고 감정은 넘쳐흐르며 인물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간다. 각자 말하고 동시에 말하며 휴대전화로 말한다. 바움백의 영화가 수다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물이 성장하고 완성돼가는 과정을 말로 보여주어서다. 말하는 동안 인물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확인하고 더 많은 말을 쏟아내며 관계를 회복하려 시도한다. 바움백의 세계에서 말은 미완의 인물들이 사용하는 성장 도구다.
<제이 켈리>는 이 익숙한 구조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성장의 현장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성장 서사가 끝난 이후, 즉 이미 성공한 인물을 내세운다. 바움백 영화 세계에서 만나는 새로운 유형, 사후(事後) 인물이다. 성장 서사가 종료된 이후의 인간, 변화가 중심 사건이 되지 않는 인물을 뜻한다.
제이 켈리(조지 클루니)는 성공한 영화배우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미 완성된 인물이므로 자신의 직업적 위치와 사회에서의 역할
[비평] 성장 이후의 인간, 최선 평론가의 <제이 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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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 주데는 신작 <콘티넨탈 ’25>(이하 <콘티넨탈>)의 참조점으로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유로파 51>(이하 <유로파>)과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를 언급한다. 편의적으로 구분할 때 전자는 내용의 측면에서, 후자는 구성의 측면에서 닮았는데, 가령 노숙자 이온이 난방기에 목을 매달고 죽은 후 그를 담당한 퇴거 집행인 오르솔리아가 사람들을 만나 고민을 나눈다는 줄거리는 <유로파>에서 어린 아들의 자살 이후 이레네가 도시를 거닐며 빈곤과 노동 실태를 마주하는 이야기와 느슨히 연관된다. 또 초반부에서 이온을 따라가던 영화가 그의 죽음 이후 오르솔리아로 주인공을 재설정한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관객으로 하여금 갑작스럽게 이입의 주체를 이양시키는 <싸이코>의 구성이 환기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로셀리니의 근심, 주데의 냉소
로셀리니의 근심은 반세기를 훌쩍 지나 주데의 냉소로 전환된 듯 보인다. 그런데 냉소는 실
[비평] 목격하는 개체, 이보라 평론가의 <콘티넨탈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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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보>에 나오는 첫 가부키 <세키노토>(국경의 관문). <세키노토>는 눈 덮인 오사카 산의 관문과 기묘하게 만개한 한 그루 벚나무를 배경으로 한 도키와즈(常磐津) 무용극이다. 무대를 벗어난 두 배우가 복도에서 연기를 이어갈 때 절묘하게도 그 후경엔 눈이 내리고 있다. 마치 가상의 이야기 속 무대가 현실에 확장 구현된 듯한 이 눈은 분명 아름답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 키쿠오 역시 아버지의 죽음을 이 눈과 함께 뇌리에 새길 테지만, 그리고 훗날 만키쿠의 무대에서 흩날리는 종이 눈을 보고 ‘처음 보는 풍경’을 쫓기 시작할 테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 눈은 그저 눈이다. 관객은 투명한 문 너머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세키노토>와 느슨하게 연결해 바라볼 뿐이다.
아직 아무런 의미도 덧붙여지지 않은 이 새하얀 눈이야말로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라면 이상한 말일까? 우리는 이후 자연에서 내리는 이와 같은 순수한 눈을 보지 못하며, 영화에
[비평] 박제가 되어버린 국보, 이병현 평론가의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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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로미(니콜 키드먼)와 그의 섹슈얼리티가 있다. 그는 명문대를 나온 백인 여성 CEO이며, 남편과의 성관계 후엔 몰래 포르노를 보며 자위한다. <베이비걸>은 로미의 전사를 서술하되 정신분석에 사용하지는 않는다. 컬트 공동체에서 보낸 성장기의 잔상은 로미가 자신의 욕망을 비정상이라 여겨 그 실마리를 과거에서 찾으려 했기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전사와 회사 내 지위가 로미의 욕망과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대디”가 나오는 포르노를 보는 원인이 모종의 과거사에 있으리란 법은 없고, 회사에서 지시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상대가 침대에서 복종하길 원하는 건 아니다. 섹슈얼리티는 특정한 인과로 설명되지 않고 누군가의 ‘유일한 진짜’도 아니다. 더불어 짚으면, ‘남성적 시선에 의해 여성의 마조히즘이 왜곡된 형태로 재현되곤 했다’는 식의 비판적 분석과 ‘여성의 마조히즘은 남성 판타지’라는 단정은 다르다. 납작한 일반화가 통용되는 시대는 지났다. 영화는 이를 인지
[비평] 유동하는 날숨의 감각, 김연우 평론가의 <베이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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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는 영화의 영원한 숙제다. 최근 탈출에 관한 흥미로운 영화 두편이 개봉했다. 하나는 <8번 출구>다. 이 영화는 탈출의 방법보다는 ‘무엇’으로부터 탈출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관객은 뫼비우스의띠 같은 지하철 복도를 같이 걸으며 탈출할 방법을 주인공과 함께 익힌다. 하지만 게임은 허울에 불과할 뿐 주인공이 탈출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주인공이 미로에 갇힌 것은 인생을 재고해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영화는 8번 출구 밖을 구경시켜주지 않는다. 다시 첫 장면과 비슷한 상황에 주인공을 데려다놓고 그의 변화된 행동을 지켜본다. 이상 현상으로 복도 바깥을 비추는 장면 역시 주인공의 과거나 미래에 해당하는 것이다. 결국 <8번 출구>는 탈출극을 표방하지만 심리극의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김유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바얌섬>이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인물들이 탈출할 의지가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때는 조선
[비평] 불가항력의 섬, 오진우 평론가의 <바얌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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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삶을 흔히 생의 마무리라 포장하지만, 영화 속 노인들에겐 버티기일 뿐이다. 마무리를 할 만큼 생의 과정이 정연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끝을 설계할 만큼 삶을 꾸미며 살지 않았다. 폐지를 줍고 노상에서 채소를 팔며 생을 이어가는 세명의 노인은 법과 제도의 보호망 밖에 있다.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고기를 먹고 도망치는 이들의 행위는 사회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존재가 현실의 질서 안으로 잠시 침투하는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영화에서 범죄를 다룰 때 종종 명확한 판단을 요구하지만, 이 영화는 그 판단을 미루게 한다. ‘노인들이 잘못한 건 알겠는데, 왜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 없나.’ 관객은 무전취식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분노보다 혼란을 느낀다. 세 노인의 삶이 이미 사회의 손이 닿지 않는 구역에 놓여 있다는 걸 알아서다. 영화는 도덕의 내용보다 도덕이 의미 없어지는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관객은 그들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대신 자신의 판단이 어떤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주시한
[비평] 살아 있는 척하기, 최선 평론가의 <사람과 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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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립영화계의 두드러진 경향 중 하나는 여성의 사라진 서사를 다시 쓰는 일이다. 미처 쓰지 못한, 시간에 파묻혀버린 이야기. 그래서 이런 시도는 대개 선대의 여성을 향한다. <양양>은 이런 조류 위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양양>을 ‘선대 여성 서사 쓰기’ 카테고리 속 하나로 심상하게 분류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가족 내부에서 지워진 고모를 가족 안에서부터 다시 찾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특별한 영화의 성취를 오롯이 인정하면서도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건 <양양>뿐 아니라 여성 서사의 복구를 시도하는 작품들에 함께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말해지지 않던 것을 말하는 작업
술에 취한 아버지의 한마디 고백으로부터 <양양>은 시작된다. 나에게 고모가 있었다고? 초반에 영화를 추동하는 것은 가족의 역사에서 사라진 고모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그녀와 나 나이의 ‘닮음’이 이끄는
[비평] 침묵 깨기의 어려움, 홍수정 평론가의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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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수(이병헌)와 그의 잠재적 경쟁자들은 장인에 근접한 숙련 노동자들이며 관리직이다. 특수 제지 생산 라인을 관리한다. 그들이 제지 생산 마지막 단계에서 막대기로 종이를 두들기는 행위는 종이의 밀도, 결, 수분 함량을 확인하는 기술이다. 손과 귀, 막대기의 반향만으로 그들은 종이의 상태를 진단한다. 종이는 두드림 속에서, 악기가 연주자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듯, 숙련공만이 이해하는 리듬, 소리를 전달한다. 이때 두들김은 종이를 “죽은 물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으로 다루는 몸짓이다. 막대기는 단순한 검사 도구가 아니라, 세대를 이어온 장인 문화의 매개, 촉각과 청각을 타격, 확장하는 감각의 연장, 보철이 된다. 25년간 “종이 밥”을 먹는 것은, 이 감각들을 동시에 극대화하는 일이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지난 25년간의 노동문화가 양생한 이들의 감각에 미학적으로 전력을 다해 반응하고 감응한다. 영화의 작가론은 영화산업의 요구와 어느 정도 불화하며 성취하는 감독의
[비평] 사라져가는 제지 공장의 장인과 영화 공장의 작가 감독, 김소영 평론가의 <어쩔수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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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하 <레제편>) 은 시네마다. 단순히 <레제편>이 서사의 완결성이나 매력적인 캐릭터의 구성으로 획득한 감흥을 두고 영화적이란 수사를 표하는 것은 아니다. 으레 ‘영화’로 불리는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차이야 명백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현실의 풍경을 오려낸 조각이고, 곤 사토시 감독의 말마따나 애니메이션은 “모든 화면이 의도로 가득 채워지는” 세계의 전체에 가깝다. 21세기 전후 급격히 발전한 3D CG, 모션 캡처 등으로 인해 실사와 그래픽의 경계가 흐려졌다 해도 두 매체를 다루는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실사영화의 카메라가 담는 현실의 우연성과 사건성을 영화 고유의 가치로 설파하는 연출가들이 지지를 얻고 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다만 <레제편>은 이제 정말, 영화만이 가졌던 ‘물리적인 카메라’의 성질이 비로소 ‘관념적 촬영’의 영역과 구분 불가능할 정도로 뒤섞인 것
[비평] 레제는 시네마다, 이우빈 기자의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