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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이 영화를 접했다면 감회가 달랐겠다. 작품 속 불법 체포된 2022년 이란 히잡 반대 시위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도록 사법부를 압박하는 검사, 여기에 독립적이기는커녕 순응하는 사법부, 현실과 다른 보도를 일삼는 매스미디어와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세속적인 군중의 모습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저 멀리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스펙터클로 즐겼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 얼마나 시의적절한 등장인가. 현실을 반영한 영화의 시차적 성격은 자주 잊힌다. 앞서 당도하거나 뒤늦게 도착할 영화는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현전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무해한 픽션이 아니라 엄습하는 현실로 우리의 감각을 괴롭힌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픽션에서 출발해 현실로 나아가는 경로에서 현실을 비추는 일을 넘어 성찰과 반성을 개입시키며 현실을 더욱 매섭게 감각하도록 한다.
이 영화의 존재 이유가 고발에 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런 만큼 작품에서 현실은 픽션에 거울처럼 비친다. 수사판사로
[비평] 픽션을 흔드는 현실, 김성찬 평론가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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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의 도쿄를 영화의 시공간으로 제시하는 <해피엔드>.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 영화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 같다. 후미(이노리 기라라)를 따라나선 코우(히다카 유키토)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 그곳에서 소위 운동권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일본 포크송의 상징적 존재인 오카바야시 노부야스가 발표한 <くそくらえ節>(똥이나 처먹어라 타령)이라는 곡이다. 1968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저항을 상징하는 시대적 언표였으며 직설적인 가사 때문에 금지되기도 했다. 테크노 클럽에서 치안에 의해 색출당하며, 인정받지 못할 정체성을 번번이 증명해야 했던 코우는 그곳에서 오래된 금지곡을 배우고 “시위하면 정말 사회가 변해요?”라고 묻는다. <해피엔드>는 미래를 향하는 앞모습과 잔존하는 파시즘의 뒷모습이 동시에 배태된 영화이자, AI 감시체계가 함의하는 판옵티시즘과 자위대라는 극단적인 상징을 반복해서 드러내며 사고실험을 감행하는 동시대의 기획물이다. 소라
[비평] 해커의 탄생, <해피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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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스크마스터(올가 쿠릴렌코)가 초반부터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몰랐다. <썬더볼츠*>는 자인하듯 마블 서사에서 탈락한 캐릭터들의 재활용 프로젝트다. 갱생의 여지가 있는 재활용 캐릭터들을 모아두고 바로 한명 탈락시키며 시작하는 걸 보고 마블의 나쁜 습관이 또 시작됐구나 싶었다. 하지만 또 한번 실패의 길을 답습하는 것처럼 보였던 <썬더볼츠*>는 의외로 초심으로 돌아가 정석대로 서사를 쌓아나간다. 오해 마시라. 전성기 마블의 영광을 회복할 만큼 매력적이라는 게 아니다. <썬더볼츠*>는 오히려 느리고 무겁고 설명적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다행이다. 다소 둔탁한 액션과 종종 지루해지는 기계적인 전개 등 여느 영화에선 단점으로 먼저 손꼽을 만한 요소들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거시적인 시야에서 보면 캐릭터에 필요한 질량을 제공한다. 그동안 확장의 저주에 빠졌던 마블을 향한 속죄의 무게라고 해도 좋겠다.
태스크마스터는 왜 먼저 죽어야 했을까
마블의 영광
[비평] 이야기의 중력을 캐릭터의 매력으로, <썬더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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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자주 챙겨보지 않는 사람에게 영화평론가라는 신분을 밝히면 나오는 가장 흔한 반응 중 하나가 “요즘 볼 영화 뭐가 있냐”라는 질문이다. 나는 최근에 흥미롭게 본 몇몇 작품의 제목을 주워섬기는데, 보통은 저 질문 자체가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한 예의 바른 반응에 불과하기에 관련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드물게 상대가 말을 덧붙이는 때도 있지만, 대개 “요즘은 어째 볼 영화가 없다”라는 불평이다. “어째 ‘그’ 마블도 예전 같지 않다”라든지 “그래서 극장이 망하는 것”이라는 말도 흔하게 나온다.
아마도 이런 불평을 하는 사람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더는 <어벤져스> 같은 영화가 나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이건 순전히 디즈니(마블 스튜디오)를 향한 불평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은 14편의 영화를 냈는데, 흥행 성적과 무관하게 이들이 영화 관객을 <어벤져스> 시절만큼 만족시킨 적은 없는 것 같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재
[비평] 무기력은 무능력보다 나쁘다, <썬더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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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흐르는 물처럼 시작된다. 수평 트래킹으로 담은 인도 뭄바이의 밤거리는 눈앞에서 쉴 새 없이 지나간다. 그러다 카메라는 때때로 속도를 늦춰 거리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바라본다. 이런 진행은 이 영화에 대해 붙는 수식어들, ‘몽환적’이라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담았다는 말을 불러오는 이유 중 하나다. 물 같이 흐르고 또 고이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 무렵, 성급한 판단을 멈춰 세우는 하나의 숏이 등장한다. 그것은 달리는 버스에 타고 있는 한 여인에 관한 숏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동공이다. 한곳을 부드럽게, 그러나 또렷하게 응시하며 형형하는 동공. 그것은 흔들리는 배를 붙드는 단단한 바위처럼 영화를 이곳에 정박시킨다. 그 눈이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물결처럼 우아하게 넘실대는, 그래서 몸을 내맡겼다가 영영 빠져버릴 것만 같은 영화의 흐름 안에서, 그 눈만은 우리를 불러 세워 단단하게 붙든다는 점만은 일러
[비평] ‘빛’이 있는 그곳을 향하여,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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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밝히겠다. 나는 일본 문화의 열성적인 팬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사로잡혀 <사유리>를 보았고 흥미로웠다. 기대감과 데이터베이스가 없어서 그렇게 봤을 수도 있다. 이 글은 무지로부터 출발한다. <사유리>는 이질적인 두개의 장르를 꽤 잘 어울리게 접목한 형태의 영화다. 두개의 장르 중 하나는 호러고, 다른 하나는 열혈물이다. 개인적으로 2부에 펼쳐지는 후자를 일본의 전통 장르라 부르기도 하고 ‘희망’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충분한 논의가 있기를 바라며 잠깐 적어보자면 일본의 현실 세계와 유리된 채 상당히 오랜 세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영화는 무모하리만치 희망을 품는다. 전후 폐허가 된 일본이 겪은 괴리를 픽션으로 극복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그때로부터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왜 이러한 양상이 진행 중인지에 대해 궁금하지만 내 몫은 아닌 것 같다.
<사유리>가 심리-액션 활극으로 변모하는 순간
다시 돌아와 <사유리
[비평] 희망의 본질에 대하여, <사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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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감독의 <로비>는 국책 지원사업을 따내려는 한 스타트업 회사의 작전기로 접대 골프라는 관행적 악습에 (영화의 대사를 빌려오자면) ‘명랑’한 접근을 시도한다. 이 영화에서 신선하게 여겨지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한국 누아르와 범죄영화에서 밀실로 변형되었던 전통 누아르의 암흑가를 골프장의 필드로, 부정함을 드러내는 부수적 수단으로 단 몇신에 불과했던 부당거래 장면을 100분 가까운 러닝타임으로 펼쳐내 장르의 요소를 영화 전체로 확장한다. 주 소재가 골프이기 때문에 전략 세우기와 심리전을 다룬 <1승>과 같은 스포츠영화의 변주로도 보인다. 일견 장르에 충실한 이 영화를 따르다 보면 갈등이 해소되기를 기대하는 시점에 놓이는데 서사가 봉합될 때 <로비>는 대체 어떤 연유로 장르영화의 기대에 반하는 선택을 내렸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그 첫째는 코미디에 덧입혀진 이 영화의 또 다른 장르 규범이 주인공의 도덕적 선택과 정면으로 충돌함에 있다. 여기에는
[비평] 전략과 각성의 딜레마,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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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 사이로 두 젊은 여성과 그 뒤에 손을 모으고 있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곧이어 “올파의 딸들의 이야기를 이 영화에 담으려고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 두 젊은 여성, 그 뒤로 포커스 아웃된 중년 여성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중년 여성의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이 이어지고 “올파의 네명의 딸 중 두명은 올파와 같이 살고 나머지 두딸은 늑대의 먹이가 되었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올파의 딸들>은 튀니지의 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가 2015년 튀니지 전역을 들썩이게 했던 고프란과 라흐마 자매의 이야기를, 실존 인물인 올파와 남은 두딸들이 심리치료극에 가까운 재연영화로 제작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아낸 영화다. 북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튀니지에 사는 올파는 딸만 있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가족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남장을 하고 운동을 하면서 관습적인 젠더를 거부하던 올파는 있으나 마나 한 무능
[비평] 실재와 허구, 경계의 틈에서 새 나오는 증언과 외침, <올파의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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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투어>를 곱씹으며 어쩐지 자연스럽게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을 떠올렸다. 아즈마가 특히 강조하는 개념인 ‘오배’는 전송의 오류를 뜻하지만 이러한 경험은 실상 관광객에게는 필수적이며 도리어 긍정적인 측면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가령 나의 근처라면 기웃거릴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을 곳을, 관광지에서는 필수로 방문하게 되는 역설 말이다. 오배의 경험은 오히려 단절되어 있던 역사에 관광객들의 산발적인 체험과 시선을 개입시킨다. 여행은 그러한 불확정성과 손을 잡음으로써 연대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드는 행위일 테다.
그러나 아무리 미시적 차원에서 발휘되는 여행의 효과를 긍정하더라도, 제국의 식민지 건설이 촉발한 관광의 포화가 낯선 땅에서의 고유한 미적 체험이나 미지와의 조우를 통한 성찰적 여정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그랜드 투어>가 드러내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랜드 투어는 제국의 (감각적, 문화적) 우월성을 재확인
[비평] 2부 혹은 제3인 것, <그랜드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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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수영 강사 영은(곽선영)이 딸 소현(기소유)의 살해 충동을 달래는 한편 스스로와 타인의 안전을 도모할 방편으로 소현에게 닭을 도살할 기회를 마련한 장면은 시각적이고 심리적인 면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준다. 자식의 성정을 두려워만 하지 않고 어떻게든 포용해보려는 심정은 불경해 보일 수 있으나 뱀파이어와 그에게 종속된 자들의 관계에 비견하지 못할 것은 없을 것 같다. 여러 참조물이 있겠지만 당장 생각나는 <렛 미 인>에 대입하면 소녀와 늙은 소년의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듯 뱀파이어에게 복종하는 건 그가 부리는 마력 때문일 텐데, 모성도 그 힘만큼은 이 마력에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은의 인내와 포용에는 특이한 구석이 있다. 미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범인의 친모는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저자이기도 한데, 거기서 사랑하는 아들이 총기난사범이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느낀 혼돈을 자주 풀
[비평] 망설임 두번, <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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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려져 있듯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크래쉬>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는 인터뷰에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 당시 코폴라가 강한 반감을 표했으며 직접 상패를 건네주는 것조차 거부했다고 회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1998년 국내에 검열본이 개봉했을 때 <크래쉬>의 홍보 팸플릿에는 코폴라의 평이 실려 있다. “<크래쉬>에 상을 주는 이유는 첫째, 대담하기 때문이고 둘째, 뻔뻔스럽기 때문이다.”(동숭씨네마텍 팸플릿) 코폴라의 사례가 보여주듯 <크래쉬>를 둘러싼 반응은 모순에 처해 있다. 영화의 인물들은 교통사고와 그로 인해 훼손된 신체를 페티시 삼고, 자동차가 으스러지는 순간에 절정에 달하려는 도착적인 행위를 반복적으로 추구한다. 그리고 <크래쉬>는 이 관능을 너무도 성공적으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욕망과 ‘거의’ 일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 관능에 몰입하는 것이 도덕적 거부감을 낳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비평] 속도를 높이되 도착하지 말 것: <크래쉬>라는 반복의 무대, <크래쉬: 디렉터스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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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전에 영화를 둘러싼 논란이 먼저 도착했다. 개봉을 앞둔 <에밀리아 페레즈>를 둘러싸고 영화 안팎으로 논란이 제기되었다. 주인공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이 과거 SNS에 남긴 문제적 발언을 둘러싼 논란을 비롯해 멕시코와 트랜스젠더 여성의 묘사 방식에 관한 비판 등 쟁점은 다양하다. 뮤지컬을 차용한 자크 오디아르의 가장 비현실적인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현실적인 논란에 직면했다.
여러 비판 가운데 핵심은 배우를 둘러싼 논란이다. 재현의 윤리 혹은 진정성과 관련된 부분은 실제 사건이나 지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반복해서 마주하는 논의에 속한다. <에밀리아 페레즈>가 이를 논하기에 가장 적절한 사례는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여기에서는 이를 반복하지 않겠다. 반면 영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배우를 둘러싼 논란은 영화가 지닌 특수성을 가리키기에 살펴볼 만하다. 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혼종적 형식과 클리셰가 작동하는 허구의 세계 안에서 현실성을 담보하는 거의
[비평] 통속성과 현실성은 서로를 구하는가, <에밀리아 페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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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벌거벗은 내 모습을 보여주었어. 그러자 남자들은 벌벌 떨었어.
내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지.
-마누엘 푸이그, <천사의 음부> 중에서
그들은 내 성기에 깊은 경외감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보통의 성기와는 달랐으니 더 강력할 수밖에 없겠지!
-키라 트리아, <파워, 오르가슴, 그리고 심리호르몬 연구실> 중에서
<콘클라베>는 이전에 교황 선거에 대해 다룬 영화(<두 교황>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등)가 교황 선거 자체를 주요 제재로 그리기보다는 몇몇 주요 등장인물의 심리를 그리기 위한 배경으로 다룬 것과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한다. 영화는 세계 최대 종교 종파의 수장을 뽑는 비밀 행사를 엿보는 듯한 호사가적 즐거움을 정면으로 제공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일반 대중은 교황 선거 기간에 굳게 잠긴 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가
[비평] 닫힌 문 뒤에서 반복되는 것, <콘클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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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달리 <히어>의 원작 그래픽노블에서 카메라는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서사가 있는 그림책’이라기보단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인 사진첩에 가깝다. 어떤 방법으로도 여기서 유의미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긴 어렵다. 그렇게 책의 마지막 장까지 도달해도 서사에 작가의 숨겨진 의도가 없다는 걸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된 독자는, 비로소 선형적 구조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을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반면 로버트 저메키스의 <히어>는 너무나 서사에 얽매여 있다. 후술할 엔딩과 더불어 <히어>는 독특한 형식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작위적이고 구시대적 감동 서사를 지닌 영화다. 스크린에 끊임없이 프레임을 열며 원작 고유의 실험을 이어가지만, 어떤 기교를 부려도 영화는 무엇보다 톰 행크스라는 스타의 장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는 결국 리처드(톰 행크스)와 마가렛(로빈 라이트)의 서사에 귀속되며, 둘의 시대가 아닌 시점에서 진행되는 나머지
[비평] ‘여기들’을 바라보는 저메키스의 카메라, <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