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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에 대한 숱한 오독(誤讀) 가운데 흔한 사례는 ‘감시와 처벌’과 관련한 그의 담론을 권력에 관한 크리틱으로만 읽는 것이다. 이같은 오해는 전공 연구자들에게서조차 종종 발견되다 2000년대 들어 그의 강의록과 에세이가 사후 출간되면서 차츰 바로잡혀가는 분위기다. 푸코는 사망 2년 전인 1982년 에세이 <주체와 권력>(The Subject and Power)에서 “지난 20년간 내 연구의 주된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라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 논지를 거칠게나마 정리하자면 파놉티콘 꼭대기에 감시 권력이 있으므로, 문제는 저 위의 권력이기도 하지만, 언제 어디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겠는 피감시자들이 스스로를 통제하고 규율하면서 ‘만들어지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감시하는 권력과 감시당하는 주체 중 어느 한쪽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세계의 실체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며,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
[비평] 권력과 주체, 송형국 평론가의 <전지적 독자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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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기로디 감독의 <미세리코르디아>가 제빵사의 장례식에서 이어진 그 아들의 실종-살인 사건과 이방인 제레미를 둘러싼 치정을 여러 인물이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면, 장병기 감독의 <여름이 지나가면>은 먼저 세상을 조금 더 알아버린 한 소년이 그 여름의 진실을 뒤늦게 깨닫게 될 다른 소년의 등장과 퇴장을 지켜보는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앎과 모름 사이에서 파생되는 신경증적 긴장과 아연함이며, 떠남을 지켜보는 어린 두 형제에게 남은 아릿한 슬픔이다. 앎과 모름은 무지의 단순한 경계 안팎이 아니라 자기 삶을 등에 업고 보이는 것만을 볼 수 있는 파편적 실체, 아무래도 저편에서 바라볼 수 없는 진실의 비가역성을 드러낸다. 시학에서 비극의 요소는 공포와 애련을 불러온다고 했던가. 앎의 격차는 삶에서도, 서사에서도 비극을 야기한다. 신은 영웅의 운명을 알지만 영웅은 그 앞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알지만 그들은 모른다. 당신은 아는 이야기를 나는 여전히 모른다.
[비평] 앎과 모름 사이에서, 유선아 평론가의 <미세리코르디아> <여름이 지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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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리코르디아>에서 가장 기이하면서도 욱신거리는 정념마저 불러일으키는 장면. 그것은 아마도 임무를 완수한 듯 만족스러운 표정의 미망인 마르틴(카트린 프로)과 손을 맞잡은 제레미(펠릭스 키실)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심연의 어둠으로 스며드는 엔딩 신일 것이다. 이때 화면 밖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사제 필리프(자크 드블레)는 매장되어 있던 뱅상(장바티스트 뒤랑)의 시신과 단둘이 있기를 간청한 후, 역시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설프게 매장되었던 뱅상은 완전한 죽음에 이를 것이며, 보잘것없는 증거였던 버섯도 숲속에서 불쑥 솟아오르기를 멈추고 이제 침묵할 것이다. 마르틴이 침대 위 조명을 소등하는 순간, 오롯한 암흑만이 조용한 마을과 프레임을 잠식한다. 스스로 불가지론자임을 밝히며, 신에 대한 인간의 복종과 같은 개념을 거부한다고 했던 알랭 기로디의 선언(<필로> 42호)을 증명이라도 하듯, 영화는 유일하게 르상티망을 가졌던 예언자 뱅상을 삭제
[비평] 구원을 비웃는 무위의 공동체, 문주화 평론가의 <미세리코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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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리코르디아>라는 제목이 자비를 의미한다고 해서 자비를 영화의 최종 종착지로 여겨서는 안된다. 제목에는 ‘자비’라는 단어를 내걸었지만 영화에서 이와 비슷하게 사용되는 단어는 ‘무상의 사랑’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지된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를 넘어서는 에너지”라던 질 들뢰즈의 지적처럼, <미세리코르디아>가 이야기하는 자비는 선규정된 어떤 개념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언제나 현재형으로 흘러넘치는 유동의 힘, 그럼으로써 정태적인 도덕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그 경계를 확장하려는 에너지에 가깝다. 끝없는 유동적 움직임과 생성의 에너지, 그것이 알랭 기로디가 추구하는 욕망이자 자비의 모습이다. 그 자비의 힘에 의해서만 죽어 있는 공동체가 다시 부활할 터이니.
버섯을 먹어야만 하는 삶
영화의 도입부, 제레미(펠릭스 키실)는 마을로 다시 돌아온다. 그를 부른 것은 어린 시절 제빵 스승이자 유사 아버지였던 장피에르의 죽음이다.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이 죽음
[비평] 죽음 위에 핀 버섯에 자비를, 안시환 평론가의 <미세리코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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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의 대명사인 ‘슈퍼맨’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 작품은 새로운 DC 유니버스를 알리는 공식 작품이다. 그러나 <슈퍼맨> (2025)이 남긴 첫인상은 어쩐지 뜨뜻미지근하다. 히어로물 패러디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톤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크레더블> <메가마인드> <슈퍼배드> 같은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던 비틀린 영웅물이 떠오른다. 물론 이들 애니메이션은 저마다 미덕이 있는 작품이지만, 슈퍼맨이라는 프랜차이즈에서 이와 유사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당혹스럽다.
이 미지근한 온도는 단지 잭 스나이더 시절의 장중한 신화적 서사와 대비대며 나타난 낙차만은 아니다. 제임스 건이 ‘인간적인’ 히어로를 그리려는 시도 자체는 썩 흥미롭다. 문제는 이야기와 캐릭터의 설계다. 영화는 저스티스 갱을 비롯한 신인 히어로를 마치 오래된 인기 TV시리즈의 극장판 속 캐릭터처럼 관객의 면전에 던진다. 낯선 캐릭터가 아무 설명 없이 등장해 친근한 척할 때 관객은 마
[비평] 어려운 척 쉬운 길로, 이병현 평론가의 <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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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월드 와이드로 개봉하여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28년 후>와 <F1 더 무비>에는 개봉 시점 외에 묘한 공통점이 있다. 첫째로 두 영화의 서사에 30년에 달하는 긴 시간의 역사가 암시되어 있다는 것, 이를 바탕으로 베테랑과 루키간의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이 베테랑이건 루키건 간에 반드시 적들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야만 한다는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울타리 밖에서든, 트랙 위에서든. 아니 어쩌면 울타리 안에서든, 트랙 아래에서든. 그 공통점 때문일까. 각각 좀비영화와 스포츠영화라는 전혀 다른 외피를 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를 보며 떠올리게 되는 질문은 같다. 그들은 왜 달리는가. 울타리 안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죽음의 위기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경주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겹다”라는 말과 함께 은퇴를 선언했다 그 말을 번복하고 다시 트랙 위에 오른 니키 라우다처럼, 수많은 동료 대
[비평] 이유 찾기 위한 달리기, 김철홍 평론가의 <28년 후> < F1 더 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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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나랑 자려고 하잖아. 하여간 이래서 퀴어들이 싫어. 그냥 친구로 만나는 게 불가능하다니까.”
영화의 초반, 리(대니얼 크레이그)와 함께 놀던 남자는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뒷담화를 한다. 폭력적인 말을 뒤로한 채 리는 걷는다(이때 스산하던 사운드가 너바나의 <Come as You Are>로 이어지는 순간의 쾌감이 상당하다). 중절모를 눌러쓴 채 흰색 슈트를 입고 휘적휘적 거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유령 같다. 이 걸음의 끝, 그는 유진(드루 스타키)과 마주친다. 첫 만남. 영혼처럼 흐릿하던 리는 그 순간 생생한 인간으로 돌아와 숨을 몰아쉬고 눈을 번뜩인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기. 그것은 ‘퀴어’라는 멸칭에 눌려 주변부를 떠돌던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강렬한 사랑과 마주하며 인생의 중심부로 복귀할 때 튀어 오르는 스파크다.
그런데 여기서 첫 만남의 짜릿함만큼이나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그건 이 순간에 드러나는 두 가지 대비되는 영역. 바로 ‘환상’과 ‘현실’
[비평] 환상은 이토록, 홍수정 평론가의 <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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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영화 <풀>(2024)에 대한 나의 호감은 하나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다큐멘터리스트가 대상에 대해 취하는 입장 혹은 그것에 대한 헌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왕도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연출자 이수정(<시 읽는 시간>(2016), <재춘언니>(2020))은 다큐멘터리스트가 현실에 개입하고, 또 그것을 증언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흥미로운 성취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대상이란 인격화된 존재로서 ‘풀’(대마초)이다. 지난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된 이래 크고 작은 수정을 거친 <풀>은 최종적으로 화자가 풀과 주고받는 대화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아닌 긴 자막 텍스트로 진행하는 대화는 풀에 전해지는 말이자, 서사의 주인공 격인 전직 의사 권용현을 향하고 있다. 견딜 수 없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환자에게 대마초를 줬다가 감옥에 다녀온 권용현은 이 이야기의 끝에서 한국을 떠나게
[비평] 불온함과의 대화, 장병원 평론가의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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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탑은 여전히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는데 누구도 그 위로 뛰어내리진 못했고.” -황유원, <잘린 목들의 합창>
“세상이 우리 앞에 주어졌다는 원초적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몇해 전 <프렌치 디스패치>에 대한 글(<씨 네21> 1332호)에서 나는 웨스 앤더슨이 “거 짓을 기반으로 아주 약간의 (진실이 아니라) 진심을 전달할 뿐이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페니키안 스킴>을 보고 나니 그 문장은 실로 이번 작품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여기서야말로 웨스 앤더슨의 관심은 신앙이기 때문이다. 과연 믿음만큼이나 대상/현상의 실체와 무관한 행위가 있을까? 반추하자면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웨스 앤더슨은 연극무대라는 고립된 판게아에 사막을 이식하고는 거기서 돌연 문(門)과 눈(目)의 이중 개방을 실험했다. 이 또한 믿음으로 지탱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비평] 추락하는 영광: 믿음의 역량에 관하여, 이보라 평론가의 <페니키안 스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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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이 영화를 접했다면 감회가 달랐겠다. 작품 속 불법 체포된 2022년 이란 히잡 반대 시위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도록 사법부를 압박하는 검사, 여기에 독립적이기는커녕 순응하는 사법부, 현실과 다른 보도를 일삼는 매스미디어와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세속적인 군중의 모습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저 멀리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스펙터클로 즐겼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 얼마나 시의적절한 등장인가. 현실을 반영한 영화의 시차적 성격은 자주 잊힌다. 앞서 당도하거나 뒤늦게 도착할 영화는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현전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무해한 픽션이 아니라 엄습하는 현실로 우리의 감각을 괴롭힌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픽션에서 출발해 현실로 나아가는 경로에서 현실을 비추는 일을 넘어 성찰과 반성을 개입시키며 현실을 더욱 매섭게 감각하도록 한다.
이 영화의 존재 이유가 고발에 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런 만큼 작품에서 현실은 픽션에 거울처럼 비친다. 수사판사로
[비평] 픽션을 흔드는 현실, 김성찬 평론가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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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의 도쿄를 영화의 시공간으로 제시하는 <해피엔드>.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 영화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 같다. 후미(이노리 기라라)를 따라나선 코우(히다카 유키토)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 그곳에서 소위 운동권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일본 포크송의 상징적 존재인 오카바야시 노부야스가 발표한 <くそくらえ節>(똥이나 처먹어라 타령)이라는 곡이다. 1968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저항을 상징하는 시대적 언표였으며 직설적인 가사 때문에 금지되기도 했다. 테크노 클럽에서 치안에 의해 색출당하며, 인정받지 못할 정체성을 번번이 증명해야 했던 코우는 그곳에서 오래된 금지곡을 배우고 “시위하면 정말 사회가 변해요?”라고 묻는다. <해피엔드>는 미래를 향하는 앞모습과 잔존하는 파시즘의 뒷모습이 동시에 배태된 영화이자, AI 감시체계가 함의하는 판옵티시즘과 자위대라는 극단적인 상징을 반복해서 드러내며 사고실험을 감행하는 동시대의 기획물이다. 소라
[비평] 해커의 탄생, <해피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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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스크마스터(올가 쿠릴렌코)가 초반부터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몰랐다. <썬더볼츠*>는 자인하듯 마블 서사에서 탈락한 캐릭터들의 재활용 프로젝트다. 갱생의 여지가 있는 재활용 캐릭터들을 모아두고 바로 한명 탈락시키며 시작하는 걸 보고 마블의 나쁜 습관이 또 시작됐구나 싶었다. 하지만 또 한번 실패의 길을 답습하는 것처럼 보였던 <썬더볼츠*>는 의외로 초심으로 돌아가 정석대로 서사를 쌓아나간다. 오해 마시라. 전성기 마블의 영광을 회복할 만큼 매력적이라는 게 아니다. <썬더볼츠*>는 오히려 느리고 무겁고 설명적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다행이다. 다소 둔탁한 액션과 종종 지루해지는 기계적인 전개 등 여느 영화에선 단점으로 먼저 손꼽을 만한 요소들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거시적인 시야에서 보면 캐릭터에 필요한 질량을 제공한다. 그동안 확장의 저주에 빠졌던 마블을 향한 속죄의 무게라고 해도 좋겠다.
태스크마스터는 왜 먼저 죽어야 했을까
마블의 영광
[비평] 이야기의 중력을 캐릭터의 매력으로, <썬더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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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자주 챙겨보지 않는 사람에게 영화평론가라는 신분을 밝히면 나오는 가장 흔한 반응 중 하나가 “요즘 볼 영화 뭐가 있냐”라는 질문이다. 나는 최근에 흥미롭게 본 몇몇 작품의 제목을 주워섬기는데, 보통은 저 질문 자체가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한 예의 바른 반응에 불과하기에 관련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드물게 상대가 말을 덧붙이는 때도 있지만, 대개 “요즘은 어째 볼 영화가 없다”라는 불평이다. “어째 ‘그’ 마블도 예전 같지 않다”라든지 “그래서 극장이 망하는 것”이라는 말도 흔하게 나온다.
아마도 이런 불평을 하는 사람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더는 <어벤져스> 같은 영화가 나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이건 순전히 디즈니(마블 스튜디오)를 향한 불평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은 14편의 영화를 냈는데, 흥행 성적과 무관하게 이들이 영화 관객을 <어벤져스> 시절만큼 만족시킨 적은 없는 것 같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재
[비평] 무기력은 무능력보다 나쁘다, <썬더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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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흐르는 물처럼 시작된다. 수평 트래킹으로 담은 인도 뭄바이의 밤거리는 눈앞에서 쉴 새 없이 지나간다. 그러다 카메라는 때때로 속도를 늦춰 거리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바라본다. 이런 진행은 이 영화에 대해 붙는 수식어들, ‘몽환적’이라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담았다는 말을 불러오는 이유 중 하나다. 물 같이 흐르고 또 고이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 무렵, 성급한 판단을 멈춰 세우는 하나의 숏이 등장한다. 그것은 달리는 버스에 타고 있는 한 여인에 관한 숏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동공이다. 한곳을 부드럽게, 그러나 또렷하게 응시하며 형형하는 동공. 그것은 흔들리는 배를 붙드는 단단한 바위처럼 영화를 이곳에 정박시킨다. 그 눈이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물결처럼 우아하게 넘실대는, 그래서 몸을 내맡겼다가 영영 빠져버릴 것만 같은 영화의 흐름 안에서, 그 눈만은 우리를 불러 세워 단단하게 붙든다는 점만은 일러
[비평] ‘빛’이 있는 그곳을 향하여,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