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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이치로의 소설 <한 남자>를 읽고 남긴 독서 메모를 보니, “다소 설명적이고 논평적”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 때문이었을까? 이시카와 게이 감독의 <한 남자>는 소설과 전혀 다른 질감의 영화로 다가왔다. 원작 소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소설의 사변적 설명을 이토록 매력적인 ‘영화적 행간’으로 연출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비 오는 오후 문구점의 리에(안도 사쿠라)의 눈물, 낯선 손님의 등장과 멈추는 눈물, 그리고 정전으로 리에의 마음만큼이나 어두워진 문구점을 환히 밝혀주던 불빛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실질적인) 첫 장면을 떠올려보라. 이 장면만으로도 이시카와 게이가 소설의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압축하고, 형태 변환하는지 느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낙인 찍힌 자들의 뒷모습
‘타니구치 다이스케’라는 이름이 죽은 남편(구보타 마사타카)의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부인과 시아주버님(인 줄 알았건
[비평] ‘한 남자’,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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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불가능에 도전한다. 영화는 스탈린의 ‘피의 대숙청’ 시기라 불리는 1938년을 배경으로 한다. 반역 세력을 색출해 처형하는 일을 진행하는 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NKVD) 소속 볼코노고프 대위(유리 보리소프)는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피해자 유가족들을 방문한다. 가해자인 그가 과연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영화는 볼코노고프의 발걸음을 통해 아직도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스탈린 시대의 감춰진 역사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선다. 나탈리야 메르쿨로바, 알렉세이 추포프 부부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역사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을 차용한 ‘환상적 우화’에 가깝다고설명한다. 때론 완벽한 고증을 거친 역사적 재현보다 우화적 재현이 역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틈새를 만든다.
도망에서 구원으로
영화에 이러한 틈새를 만드는 두번의 추락이 있다. 볼코노고프는 출근길에 직속상관인 그보즈데프 소령(알렉산드르 야첸코)의
[비평] 두번의 추락에 대하여,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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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게 시련을 안기면 드라마가 되고 집단에 재앙을 내리면 재난영화가 된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인물에게 위기를 주어 그들의 선택을 지켜보게 하는 동안에 어떤 카메라는 그 얼굴을 주시한다. 두편의 한국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보호자>를 연이어 보고 하나의 글에서 다루기로 한 이유는 많은 점이 상이한 두 영화에서 도드라진 공통점으로 얼굴의 클로즈업을 보았기 때문이다. 분절된 신체 이미지에서 시작된 얼굴의 클로즈업은 현대 상업영화에서는 또 다른 영화적 장소로서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기보다는 얼굴의 향연에 가깝게 전시되는 듯하다. 상업영화에 스타의 얼굴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얼굴의 클로즈업이 그저 영화의 부품처럼 장면의 최소 단위 기능만 수행하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은 아쉬운 현실이다. 반대 지점에서 접근한다면 근접한 얼굴숏은 어떤 기능만큼은 충실하게 이행한다는 것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호자>에서는 무엇과의 사이를 벌
[비평] 카메라 너머의 얼굴들, ‘보호자’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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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이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나 지지부진한 이유는 영화를 감싼 가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 뉘앙스 때문이다. 실제로 비판이 무색할 정도로 거친 보수적 정서가 영화를 두르고 있다. 이 영화를 ‘국뽕영화’라고 정리하고 넘어가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한데 <더 문>은 거시적 이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모호한 균열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 균열이 이 작품을 재평가받게 할 요소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균열을 살펴봄으로써 동시대 이미지에 관한 몇 가지 논점을 환기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더 문>의 흥행 실패가 의미심장한 이유는 더이상 국가주의가 흥행 코드로서도 유효하게 수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텐트폴 영화의 국가지상주의는 호소력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김병규 평론가는 2010년대를 건너오며 한국영화에서 법정과 같은 국민 통합의 장소(<변호인> <아이 캔 스피크>)가 소멸하고, 법 바깥의 폐허가 무대화
[비평] ‘더 문’의 빈틈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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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의 주인공은 구산영(김태리)이다. 그는 가장 많은 러닝타임을 부여받으며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 산영이 과연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산영이 가난에서 자유로워지고 싶고,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으며,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산영의 어릴 적 꿈은 뭐였는지, 그가 즐겨 듣는 음악은 뭔지, 유산을 물려받은 지금은 뭘 하고 싶은지 같은 건 알지 못한다.
사정은 함께 극을 이끌고 가는 염해상(오정세)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어머니(박효주)를 악귀의 손에 잃은 뒤부터 계속 귓것들을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다는 사실, 그래서 악귀를 쫓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외의 욕망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산영과 해상 모두 12회 내내 ‘악귀를 잡아서 봉인하고 주변 사람들을 지킨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하
[비평] 구조를 겨냥했으나 해결하고자 하지 않는, ‘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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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개봉 이후 톰 크루즈가 없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말을 여기저기에서 종종 듣는다. 그 말에 100% 동의하지만 그래도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해하며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다. 오리지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설정은 캐릭터가 몽땅 바뀌어도 이야기 진행에 아무 지장이 없는 종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리즈의 배우들은 꾸준히 바뀌었고 1988년에 나온 속편 시리즈까지 포함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으로 출연한 배우와 캐릭터는 단 한명도 없다. 피터 그레이브스(영화에서는 존 보이트)가 연기한 팀의 리더 짐 펠프스도 시즌2부터 등장했다(첫 번째 리더인 댄 브릭스는 배우 스티븐 힐이 안식일에 일하는 걸 꺼려하는 정통주의 유대교도라 하차했다). 설정에서 캐릭터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캐릭터들의 역할이었다. 리더, 변장의 명수, 테크 전문가, 근육 그리고 여자의 역할만 확
[비평] ‘여자’는 팀이 될 수 있는가,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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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리멘탈>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6월14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24일째인 7월8일 토요일에 자신의 일일 최다 관객수(33만명)를 경신했다. 종전의 기록은 7월1일(개봉 17일차)의 28만명이었는데, 이 수치는 개봉 후 주말마다 우상향하는 중이었다. 개봉 31일차인 7월15일 토요일엔 그 기세가 26만명으로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이는 여전히 개봉 첫주 토요일의 수치(17만명)보다 높다. 이 숫자들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엘리멘탈>은 지금 역주행 중이다.
<엘리멘탈>과 관련해 두 번째 흥미로운 사실은 개봉 한달이 지난 시점에 새롭게 열린 특별 상영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극공감에프(F)관’이다. 이는 CGV에서 마련한 특별 상영으로, 7월15일과 16일 이틀간 수도권 5개 관에서 하루 1~2회차씩 진행됐다. 이 기획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MBTI 성격 유형 검사에 익숙한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것으로, 예매 진행 시 안내되는
[비평] ‘엘리멘탈’의 흥행 역주행에 대하여(feat. MB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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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작성한 메모를 확인해 보니, ‘관객이 웃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정말 웃지 않았을까? 물론 누군가 조용히 폭소를 터뜨렸으나 내가 듣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은 항상 일어난다. 그러나 설령 이 메모가 영화의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날조된 픽션이라 하더라도, 이런 픽션을 쓰게끔 했던 어떤 충동이 영화에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에서. 보(호아킨 피닉스)가 벌거벗은 채로 (화면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남근을 덜렁거리면서 거리를 달릴 때, 자신의 아들 앞에서 한번도 섹스를 한 적 없다고 고백하는 아버지가 등장할 때, 죽은 줄 알았던 보의 아버지가 대뜸 고추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 울부짖을 때. 아리 애스터는 루저 남성의 자아를 박살냈다. 거세공포라는 유산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초라한 파편들로 해체시켜놓고 있다. 분명 이 장면들이 조롱을 동반한 웃음을 유발하는 농담임을 알지만, 관객은 (거의) 웃지
[비평] 영화에 새겨진 감각과 체험의 오차들, ‘보 이즈 어프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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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낭만화되기 십상이다. 한국영화 속 풍경으로 국한하면, 폭력은 학창 시절의 추억(<친구> <말죽거리 잔혹사>)이고, 상처 입은 가여운 영혼의 초상(<아저씨>)이며, 최근 사례로는 능청스러움이나 가벼운 농담과 동일한 값을 지닌다(<범죄도시> 시리즈). 추억과 놀이, 심지어 향수와 애상마저 포괄하는 낭만화한 폭력에 반성이나 통찰 따위는 희미하다. 다르게 말하면 폭력은 주어진 질서 안에서 태생하는 동시에 이 질서를 영속시키는 수단이다. 생각해보라. 농담처럼 가볍고 통쾌한 <범죄도시> 시리즈 속 마석도(마동석)의 펀치가 범죄자를 때려눕혀도 범죄자를 양산하는 사회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참혹한 복수에 나서는 특수부대 출신의 인간 병기는 흠모의 대상이 되고, 학교 폭력 가해자는 우상이 된다. 폭력의 낭만화와 관련해 사회는 분명 개인과 공모 관계에 있다.
오로지 개인만이 낭만화하는 폭력
박훈정 감독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쓰임도
[비평] 폭력을 낭만화하는 또 다른 방식, 박훈정 감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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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해당 영화와 관련된 굿즈를 수령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굿즈의 유형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는 등장인물이 그려진 다양한 형태의 판촉물이고, 둘째는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의 모형)들이다. 지난해 개봉한 <범죄도시2>의 시사회에서 캐릭터 딱지를 제공했던 <범죄도시>는 올해엔 영화에 나온 아주 사소한 소품 몇 가지를 굿즈로 증정했다. 굿즈는 <범죄도시3>에서 형사 마석도(마동석)가 한번쯤 손에 쥐었던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이 글을 통해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두 가지는 바로 손거울과 증거 수집용 지퍼백이다. 그 둘이 어떤 측면에서 올해 첫 ‘천만 영화’ (예정)인 <범죄도시3>의 성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손거울과 지퍼백 같은 영화
둘은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가장 특징적인 것은 두 소품이 영화와 딱히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거울과 지퍼백은
[비평] ‘범죄도시’라는 프랜차이즈와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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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품고 있는 리듬을 담은 영화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공간과 그 안의 사물들과 사람들, 그들의 물질성과 운동이 자아내는 리듬이 하나의 세계를 이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으로 이름 지어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미야케 쇼는 느린 걸음으로 세상을 응시하며 온몸의 감각으로 느낀 세상의 리듬을 영화 속으로 흘려보낸다. 그러고선 도쿄에 자리한 아담한 복싱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리듬을 형성하고, 전철의 기척을 알리는 소리가 도시의 순환하는 리듬을 일깨우며, 도심지의 소음과 작은 동네의 고요함이 개별적인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부드럽게 각인시킨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깊고 단단하며 신비롭다. 이 영화엔 사사롭지만 눈길을 끄는 장면들과 주인공 게이코(기시이 유키노)의 세계를 이루는 순간들이 느슨하게 들어찬다. 영화는 복싱 선수 게이코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게이코의 삶과, 그녀와 이어진 인물들과 그들이 스쳐가는 사람들과 공간의 모습들까지 모든 풍
[비평] 너의 눈에 시간을 새긴다는 것,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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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당시 대학생 한지원은 <코피루왁>이라는 24분(!) 분량의 단편(!)애니메이션을 발표했다. 비유와 상징, 함축 등의 기존 독립 단편애니메이션의 미학에서 벗어나 드라마 연출의 정공법을 택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담뿍 담아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10대 후반 주인공들은 주저 없이 질주했다. 넘치는 에너지와 탄탄한 기본기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작품이었다. 기본기와 연출력은 그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추진력일 뿐이라는 듯, 2013년 <학교 가는 길>은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는 간극을 한껏 벌리면서 한지원만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각인시켰다. 반려견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한지원의 작품들 속 청춘이 겪는 현실 사회의 풍경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것일지니. 학교와 가정이라는 (안정적이면서도 억압적인) 울타리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막연한 기대를 꿈꾸지만, 정작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 그러고는 쉼표도 없이, 대학원 준비생의 고민을 다룬
[비평] ‘그 여름’, 지극히 마술적인, 또한 사실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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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더이상 집이라고만 부를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것이 개인의 경제적 성공에 따른 신분이 드러나는 지표이고, 또한 그 경제적 가치를 재생산하기 위한 투기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공통의 감각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투사되는 선망과 원한은 동시대의 문화적 감정구조에 있어 핵심이다. 지난해 가장 문제적 작품이었던 <안나>와 <작은 아씨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투쟁적 계급의 개념은 유효하지 않으며 그 자리를 회복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자연화된 ‘신분’이 차지한다. 주어진 신분의 극복이 중심 모티프로 작용하는 두 시리즈 모두에서, 아파트는 그에 따른 갈등 상황을 첨예하게 만드는 서사적 장치로 사용된다. <안나>에서 정체가 탄로날 위기에 처한 안나(수지)는 가짜 신분으로 통행증을 얻은 셈인 자신의 아파트 건물에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숨어 다닌다. <작은 아씨들>의 인주(김고은)가 다가올 어떤 위험도 감수하기로 마음먹
[비평] ‘드림팰리스’, 욕망의 성취도, 연대도 실패한 자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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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결말에서 이 영화는 안데르센 원작의 비극이 지닌 공허함을 단호하게 포기하는데, 아마도 30년 전의 문화적 분위기가 동화 속 ‘불가능한 사랑’을 옹호하지 않았기에 관객 다수가 이 애니메이션의 제안을 환영했던 것 같다. 동화란 원래 구전되거나 문서화되며 상황에 맞게 변화되는 특징을 가진 장르다. 따라서 영화화 과정에서 원형의 일부가 훼손되거나 변형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일부 비평가들의 언급처럼, 과거 디즈니의 영상화 작업은 안데르센 특유의 ‘뒤틀린 욕망’이 지닌 환영을 타파해낸 성과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성공했다. 그리고 의도주의 비평의 관점에서, 이러한 개작의 문제는 도덕적으로 텍스트의 합리성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원주의적 해석이 관심을 받으면서 작품 스스로의 ‘지각가능성’ 여부가 창작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실사화된 <인
[비평] ‘인어공주’, 가장 숭고한 사랑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