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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구조를 겨냥했으나 해결하고자 하지 않는, ‘악귀’

<악귀>의 주인공은 구산영(김태리)이다. 그는 가장 많은 러닝타임을 부여받으며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 산영이 과연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산영이 가난에서 자유로워지고 싶고,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으며,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산영의 어릴 적 꿈은 뭐였는지, 그가 즐겨 듣는 음악은 뭔지, 유산을 물려받은 지금은 뭘 하고 싶은지 같은 건 알지 못한다.

사정은 함께 극을 이끌고 가는 염해상(오정세)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어머니(박효주)를 악귀의 손에 잃은 뒤부터 계속 귓것들을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다는 사실, 그래서 악귀를 쫓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외의 욕망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산영과 해상 모두 12회 내내 ‘악귀를 잡아서 봉인하고 주변 사람들을 지킨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하는데, 그 과정에서 캐릭터들은 다분히 평면적이 된다.

입체적인 캐릭터, 악귀

그 욕망이 가장 다채롭게 그려진, 그래서 가장 입체적으로 구현된 캐릭터는 누구일까? 바로 산영과 해상이 그토록 쫓던 악귀, 이향이(심달기)다. 향이는 자신보다 동생 목단(박소이)을 더 아끼는 부모가 원망스럽고, 버릇없이 칭얼거리는 목단이가 지긋지긋하다. 향이는 근사한 그림을 그릴 줄 아는데, 선생님이 다른 학생 그림보다 제 그림을 더 눈여겨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다 하겠다는 근원적인 욕망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갈구하는 애정결핍에 이르기까지 향이의 욕망은 총천연색으로 빛난다.

배경 설명을 할 시간을 1회밖에 부여받지 못한 향이에게, 산영과 해상이 12회 내내 보여준 것보다 더 선명한 욕망과 동기, 배경 설명이 있다는 건 다소 아이러니하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김은희 작가는 언제나 사회구조를 사건의 동기로 설명한다. 심지어 인간의 이해 너머에 존재하는 영적인 존재를 다루는 오컬트 스릴러를 쓰면서도, 김은희 작가는 아동 폭력과 청년 빈곤 같은 당대의 이슈, 배금주의, 상대적 박탈감과 같은 시대정신을 동기로 끌고 들어온다. 산영이 표백된 존재인 이유도, 향이가 욕망의 화신인 이유도 사회구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산영이 별다른 욕망이 없는 존재로 그려진 건 그가 어떠한 꿈도 가질 수 없을 만큼 각박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사회 속에서 당장의 생존을 위해 허덕이느라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탐구할 수도 없었던 시대의 피해자. 산영은 제 취향을 발견할 만한 돈도 시간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향이가 엄청난 욕망의 소유자로 그려지는 건, 그가 여자아이에겐 꿈꾸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시대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계집애가 어디다 써먹으려고 학교 같은 데를 다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집안일을 도와야지”라는 소리를 듣던 시대, 여자아이 하나 죽이는 걸 묵인하는 대가로 마을의 부를 축적하길 선택하는 시대. 향이는 그런 시대의 피해자이기에 불완전 연소된 욕망이 안에서 들끓을 수밖에 없다.

영화평론가 손희정이 지적한 것처럼, 향이에 대한 김은희 작가의 태도는 전작 <킹덤>의 중전, 계비 조씨(김혜준)를 보는 시선과 닮아 있다(손희정, KBS1라디오 <신성원의 뉴스브런치>). 둘은 모두 ‘계집’이라는 이유로 멸시당한 설움이 있고, 집안의 부 혹은 권력의 축적을 위한 도구로 활용된 바 있다. 여자아이를 착취하는 데 망설임이 없던 시대에 태어나, 타인의 욕망에 휘둘린 끝에 두 소녀는 악역이 된다. 개인의 악의가 빚어낸 괴물이 아니라, 시대적 압력과 사회구조가 빚어낸 ‘이해할 수 있되 용납할 수는 없는 악역’인 셈이다.그러나 산영이 향이에게서 육체의 소유권을 되찾아오는 마지막 회에서, 사회구조와 시대의 욕망을 이야기하던 <악귀>는 뒷걸음질치기 시작한다. 산영이 욕망이 표백된 삶을 살았던 이유는 그가 처한 경제적 상황 때문이었다. 향이와 대적하면서 산영은 마치 그 모든 게 자신의 탓이었던 것처럼, 선택의 문제였던 것처럼 말한다.

“나는 한순간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어. 나만을 위한 선택을 해본 적도,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걸어가본 적도. 나는 왜 누굴 위해 그렇게 스스로에게 가혹했을까? 어둠 속으로 날 몰아세운 얼굴은 나의 얼굴이었어. 내가 날 죽이고 있었어. 그걸 깨닫고 나니 죽을 수가 없었어.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택할 거야. 엄마(박지영)를 위해서도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온전히 나의 의지로 살아가볼 거야.”

구조를 이야기하던 작품은 이 대목에서 갑자기 자신을 아끼겠다고 마음가짐을 고쳐먹는 자기 계발적 방식을 제시한다. 산영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걸까? 산영이 아버지 구강모 교수(진선규)와 할머니 김석란(예수정)이 남긴 유산을 물려받아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난 게 아니었다면, 그리 쉽게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택할” 수 있었을까? 여전히 생활력 없는 엄마를 부양하며 소녀 가장으로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그걸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구조의 압박 속에서도 개인의 선의와 의지를 믿는 모습은 <킹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생사역을 이용해 권력을 쥐려는 해원 조씨 가문의 음모는, 세도정치라는 권력 양식과 그를 뒷받침해주는 유교 국가 체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구조가 잉태한 모순을 <킹덤>은 세자 이창(주지훈) 개인의 선택으로 돌파해낸다. 이창은 신분제의 지엄함을 넘어 직접 백성들과 함께 싸우기를 선택하고, 원자 이염(김강훈)에게 왕가의 피가 흐르지 않음을 알면서도 왕위를 양보함으로써 개인적인 층위에서 유교 이데올로기를 극복해낸다.

사회구조가 낳은 모순을 꺼내들고도…

그러나 이창은 애초에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모순을 잉태한 체제의 정점에 서 있는 신분이었다. 마찬가지로 산영이 “온전히 나의 의지로 살아가볼” 것을 택하는 시점이 경제적 제약에서 벗어난 이후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두 작품 모두에서 김은희 작가는 사회구조가 낳은 모순을 극의 뼈대로 삼는다. 그러나 그 모순을 극복해야 하는 순간엔, 구조적 해법 대신 사회구조에 제약을 덜 받는 지위의 개인을 앞세워 그의 의지에 기댄다. 심지어 세자가 백성들 곁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신분제의 한계를 어느 정도 초극하려 했던 <킹덤>에 비하면, <악귀>는 결말에 와선 놀랄 만큼 구조에 대한 언급을 삼간다.

개인의 선의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은 아름답지만, 사회구조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선택할 법한 해법은 아니다. 개인의 힘만으로 구조적 모순을 극복할 길은 없으며, 누구나 산영처럼 “온전히 나의 의지로 살아가볼” 것을 결심할 만큼 경제적으로 자유롭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악귀>의 결말은 이 모든 모순을 잉태한 구조를 겨냥하는 데에도, 그 속에서 허덕이는 청춘을 위로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어쩌면 김은희 작가는 더는 구조의 변화를 믿지 않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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