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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로 고가니 지음 김진희 옮김 문학동네 펴냄
슬픈 이야기에는 눈물이 난다. 기쁜 이야기에도 눈물이 난다. 오시로 고가니의 단편집 <해변의 스토브> 이야기다. 이별과 겨울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묶이는 단편 사이로 꿈과 햇살을 닮은 작품들이 섞여 있다. 종이에서 온기와 온기를 닮은 냉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초반에 차례로 실려 있는데 <해변의 스토브>와 <설녀의 여름>이 그렇다. <해변의 스토브>에서 체온이 낮은 편인 스미오는 체온이 높은 편인 엣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동거한 지 1년이 지나 엣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산 날, 엣짱은 오히려 눈물을 터뜨린다. “둘이 있으면 너는 제로라서 내가 점점 깎여나가.” 이별을 고하고 집을 나간 엣짱을 보며 스미오의 스토브가 말을 시작한다. “바다에 가자.” 흑백인 만화에서 유일하게 붉게 온기를 발하는 스토브는 좀처럼 감정을 표현할 줄 몰랐던 스미오와 같다. 불을 켜면 따뜻해지지만
[culture book] 해변의 스토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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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비채 펴냄
필립 로스의 전작을 쉬이 읽은 독자가 아니라면 <샤일록 작전>을 펼치는 데 약간의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벽돌책으로 보이는 두께에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메타픽션적인 작품이라는 소개는 난해할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립 로스의 명료한 문장은 소설이 난해할 틈을 주지 않으며, 바로 이 거대한 이야기의 소용돌이를 향해 돌진하는 데 소설의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는 주인공 ‘필립 로스’씨가 직면한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필립 로스이다. 물론 작가는 ‘이 소설은 허구’라고 하면서 법적인 이유로 여러 사실이 변형되었다고 밝히기도 한다. 실제로 책에는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열린 나치 강제수용소 교도관의 재판 내용을 그대로 적은 기록도 등장한다.
주인공 필립 로스는 어느 날 친척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는다. 이스라엘에서 필립 로스를 사칭하는 인물이 강연을 하고 방송 인터뷰를 하는 등 정치 활동을
씨네21 추천도서 - <샤일록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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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기다리고 기다리던 백수린의 네 번째 소설집. <눈부신 안부> <여름의 빌라>를 즐겁게 읽은 독자에게 봄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봄밤의 모든 것>이라는 살가운 제목이다. 첫 번째 수록작 <아주 환한 날들>의 주인공은 일흔이 넘은 여성이다. 혼자 살고 있는 그녀는 평생교육원에서 이것저것을 배우며 소일한다. 혼자 사는 그녀의 처지를 다른 사람들은 동정하곤 하지만 사실 꽤나 홀가분하게 잘 지내는 중이다. 가정을 꾸린 딸에게 전화를 걸지만 딸은 대체로 냉담하게 응대하며, 딸의 짤막한 답을 듣고 섭섭함을 느끼며 “콱 죽고 싶어”지는 일도 있다. 어느 날 사위가 아이들을 위해 집에 들였던 앵무새를 데려와 맡기고 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앵무새 돌보기가 제법 까다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것에도 뛰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이, 말 한마디에도 콱 가라앉고 쓰러지는 마음이 다시 설렘에 눈을 뜬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프랑스어
씨네21 추천도서 - <봄밤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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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루 지음 엘릭시르 펴냄
남해의 작은 섬인 구루섬의 별장에서 초능력자 검증 모임 ‘구루회’가 열린다. 도시전설을 비롯한 각종 소문을 연구하는 임채호 회장이 사실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3회를 맞는 이 모임에 탐정 김재건이 참석한다. 정신력으로 물건과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스테파니, 투시를 할 수 있는 김태연,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전찬호 등 여섯 사람이 한데 모인다. 사람들은 저마다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능력을 증명해 보이면 상금 10억원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임 회장은 모은 보물 중 가장 값어치 있는 것도 내주겠다는 것이다. 김재건은 이 모임에 초대를 받았을 때부터 생각했다. 여기에는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박하루 작가의 <순결한 탐정 김재건과 초능력자의 섬>은 ‘탐정 김재건 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시리즈 첫 번째인 <순결한 탐정 김재건과 춤추는 꼭두각시>는 2018년 제1회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으며,
씨네21 추천도서 - <순결한 탐정 김재건과 초능력자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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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지음 창비 펴냄
원래 속도에는 ‘물체의 빠르기’라는 의미만 있지 그 자체가 빠르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니 느린 것 역시 속도인데 지금 세상에서 속도란 그저 빠른 것만을 표현하는 것 같다. 효율, 유용성과 경제성만이 바람직함의 척도와 같은 세상에서 윤성희의 소설을 읽는 일은 일상의 체감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유튜브에는 영상을 꾸욱 누르면 2배속으로 빨라지는 기능이 있다. 2시간짜리 영화를 10분으로 축약해놓은 영상조차 2배속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빠름의 경쟁 속에서 <느리게 가는 마음>의 인물들은 하릴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고, 동네를 쏘다니며 금속탐지기로 땅 밑에 누군가 묻어두었을 타임캡슐을 찾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싶은 무용한 인물들의 여행에 동행하다보면 어느새 그 일원이 된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이 느리디느린 세계에 함께 머물고 싶어진다.
<타임캡슐>의 진형의 유튜브 채널명은 ‘어설픈 코난
씨네21 추천도서 - <느리게 가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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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가는 마음> - 윤성희 지음 창비 펴냄
<순결한 탐정 김재건과 초능력자의 섬> - 박하루 지음 엘릭시르 펴냄
<봄밤의 모든 것> - 백수린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샤일록 작전> -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비채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3월의 책 - 봄밤엔 책을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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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징야요 글 장지야 그림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펴냄
“전설에 따르면 하늘과 땅이 생성될 때 모든 물이 모여서 바다가 되었다. 아득하고도 푸르게 넘실대는 해양 속에 거대한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아무도 그 이름은 모른다.” <요괴 나라 대만>의 ‘총론’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대만섬이 어떤 신화적 작용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논하며 시작해 산과 바다 사이에 번식하는 요괴와 귀신의 존재를 하나하나 짚어가겠다는 선언이다. <요괴 나라 대만1: 요귀신유권> <요괴 나라 대만2: 괴담기몽권> 두권으로 출간된 <요괴 나라 대만>은 1권 824쪽, 2권 640쪽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데, 대만섬의 옛날부터 현대까지 300여년 동안 전해진 고문서 수백권 중에서 추린 요괴 이야기와 시골 괴담을 채록한 결과물이다. 대만 소설에서 적잖이 등장하는 요괴와 귀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괴이(怪異)가 국가별로 어떻게 다른지를
씨네21 추천도서 - <요괴 나라 대만 1 : 요귀신유권>, <요괴 나라 대만 2 : 괴담기몽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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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호 지음 비채 펴냄
웹소설은 제목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제목만 봐도 어떤 이야기인지 ‘기대’할 수 있게 만들어야 독자의 ‘유입’이 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 낚시가 중요하다고 하고, 특정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인기 있는 키워드는 그 시기의 웹소설 트렌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나 혼자’, ‘악녀’ , ‘복수’ 같은 단어들은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키워드들이었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는 제목부터 신기하다. 무슨 내용인지 도통 추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연재가 시작되고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연산호 작가는 큰 반응 없이 연재를 쌓아갔는데, 눈 밝은 독자들이 ‘어바등’(<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를 줄여 부르는 말)의 진가를 발견하면서 ‘SF 어워드’ 웹소설 부문 대상과 ‘리디 어워즈’ 판타지 e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의 절반 정도 분량인 4권까지가 먼저 출간되었다. 땅의 자원은 고갈되고
씨네21 추천도서 -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세트(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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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원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소설집을 덮으면서 그림자들이 걸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소설 속 인물의 명확한 생김새가 아니라 희미한 그림자 발소리다. 다행히 그림자는 혼자가 아니라 그 옆과 뒤를 다른 이가 함께 걷는다. 그러니까 그 소리는 조용하지만 수런수런대기도 한다. 김채원 소설집 <서울 오아시스>에는 여덟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등단작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와 표제작 <서울 오아시스>를 비롯해 <빛 가운데 걷기> <럭키 클로버> <외출> 등이다. 당연히 별도의 소설들이고 인물들에는 모두 이름이 별도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들은 이름이 있음에도 자기만의 개성을 갖기보다는 상실감을 가장 중요한 고유성으로 지닌다. 이상하다. 현재는 상실된 것이 자기의 가장 큰 특징이라니.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의 동우, 석용, 성아는 얼마 전 유림을 잃었다. 이들의 친구 유림은 자살했다. 이들은 정처 없이
씨네21 추천도서 - <서울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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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창비 펴냄
정확히 이 책의 도발적인 제목처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남자 친구에게 가졌던 비슷한 의문이 있다. 왜 그는 10대 때 만난 사람만 친구로 여기는가. 한 부서에서 일하며, 일주일에 세번 술잔을 기울임에도 그 사람은 직장 동료지 친구는 아니라고 하는 그에게 “고등학교 친구들은 1년에 두번 만나고, 회사 동료는 일주일에 두번 만나는데, 누가 더 가까운 거냐?”라고 반문하고 싶었다.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의 저자 맥스 디킨스는 인류학 박사도 아니고 연구자나 인문학자도 아니다. 영국의 스탠딩 코미디언이다. 저자의 정체성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을 불러오는데,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는 무엇보다도 끝내주게 웃기다. 남자가 쓴 ‘본격 남성 탐구 보고서와 에세이 그 사이 어디쯤’의 성격 때문에 대부분은 자조적인 유머로 설을 푸는데, 맥스의 약혼자 나오미가 매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기는 왜 친구에게 먼저 만나자고
씨네21 추천도서 -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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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 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창비 펴냄
<서울 오아시스> - 김채원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세트 (1~4)> - 연산호 지음 비채 펴냄
<요괴 나라 대만 1 : 요귀신유권>, <요괴 나라 대만 2 : 괴담기몽권> - 허징야요 글 장지야 그림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펴냄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2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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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비채 펴냄
결혼을 원하지 않는 남자 이스마엘과 결혼을 원하는 여자 ‘나’가 결혼을 더이상 언급하지 않기 위해 결혼한 척하기로 한다. 가짜 결혼식을 핑계 삼아 “섬에 가서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해변가에서 보낸 첫 나흘 동안은 시간이 녹아 흘러내리듯 흐른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이스마엘의 통증이 시작된다. 음식 찌꺼기가 잔뜩 낀 잇몸이 부어올랐지만 식욕은 여전히 왕성한 이스마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삿갓조개 껍데기가 이스마엘의 잇몸을 관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가짜 남편의 입냄새는 점점 더 심해져 간다. 이스마엘은 갑작스레 고백한다. “사실 나, 벌레로 변하고 있어.” 이즈음에서 카프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지만, 단편소설 <잇몸>은 결혼과 불운이라는 테마로 이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표제작 <토끼들의 섬>에서도 악취가 중요하다. 강에서 시체를 발견한 남자는 한 섬에 텐트를
씨네21 추천도서 - <토끼들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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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서울리뷰오브북스>의 ‘이마고 문디’에 연재된 사회학자 김홍중의 영화 에세이가 책으로 출간되었다. 영화에 대한 글 7편이 묶였다.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나루세 미키오, 지아장커, 켈리 라이카트, 코언 형제와 아키 카우리스마키, 박찬욱과 박해영의 총 7장으로 영화 작가들의 이름이 나열된 목록만으로도 풍성함이 전달되는 듯하다.
최근 개봉한 <쇼잉 업>의 켈리 라이카트 감독에 대한 글을 먼저 살펴보면 좋겠다. “켈리 라이카트는 미국 독립영화계의 독보적인 감독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켈리 라이카트의 스타일은 흔히 “느린 보폭의 리얼리즘”이라고 불린다. 특별한 사건이나 스펙터클, 극적 전개가 거의 없이 관조적이고 섬세하고 미니멀한 카메라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인물의 본성이나 이력 또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에게 느림은 단순한 미학적 효과나 아방가르드적 실험의 의미를 넘어서, ‘영화가 아니었다면 놓
씨네21 추천도서 - <세계에 대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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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 지음 문학동네 펴냄
“1992년 신년 세일!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배달된 편지봉투 속에는 채시라가 모델인 그 옛날의 전단지가 고이 들어 있다. 엄마는 인쇄물을 보자마자 이건 아빠가 보내온 게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기민하게 미래를 내다본 투자를 하고 부자가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우리의 주인공 ‘에스’의 아버지는 종이 인쇄가 사양산업의 길목으로 들어서기 직전 인쇄소를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일거리가 뚝 끊겨 파산한다. 그쯤에서 멈췄으면 좋았으련만 아빠는 성공의 기억이 있는 을지로 인쇄골목을 떠나지 못하고 엄마의 인감도장으로 빚을 내 연거푸 파산한 후 잠적한다. 아니, 여기서 멈췄으면 또 나았을 것이다. 에스의 엄마는 이번엔 에스의 이름으로 빚을 내 홍제동에 작은 옷가게를 열고 카드 네개로 생활비를 돌려막으면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부모의 빚을 자식이 이어받아 개인회생과 파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무살의 이야기. 암담하기만 할 것
씨네21 추천도서 - <이렇게 바삭한 카사바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