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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발라드의 모든 것’을 다룬다고 감히 말해도 좋지 않을까. 음악평론가 김영대의 <더 송라이터스>는 ‘송라이터’와 ‘(노래라는) 이야기’를 두루 아우른다. 작사와 작곡의 역할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이야기되는 가요의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김영대는 글과 멜로디가 분리될 수 없음을 짚으며 ‘송라이터’라는 개념을 끌고 들어와 책을 쓴 것이다. 한국 발라드. 실연당하면 다 자기 마음을 읽어낸 것처럼 들린다는 그 장르 말이다. 지극히 통속적이어서 분석할 거리라고는 한줌 남아 있지 않은 듯 느껴지는 한국 발라드의 세계를 짚은 <더 송라이터스>는 그 자체로 끝내주는 플레이리스트의 구실을 한다. 첫곡이 나미가 처음 불렀고 후일 015B가 다시 부른 <슬픈 인연>이다. 1984년 일본에서 발표된 <키즈나>라는 곡을 일본 활동 당시 나미가 작곡가에게 받아와 한국에서 발표한 이 곡은 ‘발라드’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통용되던 1985년이라는 시대와 맞물린다. 유
씨네21 추천도서 - <더 송라이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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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소멸했다는 의미다. 그 세계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붕괴가 된다. 나탈리 레제의 <창공의 빛을 따라>는 2018년 급작스레 작고한 남편, 극작가 장루 리비에르를 위한 애도의 책이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라고 쓰는 나탈리 레제는 집에 들어서면서 세상을 떠난 남편의 콧노래를 듣고 기침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어 적는다. “너는 곧 내게 올 것이다.” 미치지 않았지만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창공의 빛을 따라>는 세상을 떠난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회고하는 글은 아니다. 애도 자체를 화두로 삼아 뒤에 남은 자의 삶, 매일 상실을 절감하며 앞으로 힘겹게 밀고 나아가는 삶을 글로 쓴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남긴 기록인 <애도 일기>, 조앤 디디온이 남편의 죽음에 대해 쓴 <상실>과 같은 책을 눈여겨본 독자라면 나탈리 레제의 <
씨네21 추천도서 - <창공의 빛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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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사고팔고 원하는 신체에 기억을 주입해 새 삶을 살아가는 플롯은 SF영화에서도 유구한 소재다. <토탈 리콜>이나 <셀프/리스>와 같은 영화는 물론이고 로맨스인 <이터널 선샤인>이나 최근작인 Apple TV+ 시리즈 <세브란스: 단절>도 기억과 신체의 복잡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 무엇이 나를 나답게 하는가, 라고 했을 때 어쩌면 외모나 신체적 특징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진짜 나를 증명하는 특질이기에 무수한 작가들이 기억을 소재로 미래 세계를 그리는 것일 테다. <데드 헤드 대드>는 2057년 인간의 뇌를 스캔해 기억 정보를 저장해두는 시냅스 칩을 개발해 인류가 죽지 않고 살게 된 근미래를 그린다. 신체가 병들어 사망 선고를 받더라도 자신의 기억을 칩에 저장해두면 복제된 신체로 기억을 옮겨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인공 현은 의체 개발을 하는 회사의 엔지니어로 일하며 전투용 의체를 개발하고 있다. 능력을
씨네21 추천도서 - <데드 헤드 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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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문제를 생각하면 문명 전체가 선택의 갈림길에 멀뚱히 서 있는 것만 같다. 지난여름 갑작스레 쏟아진 폭우도 그렇고, 이번 겨울은 또 예전보다 춥지 않으면서 변칙적으로 심한 추위가 닥치는 등 이상기후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더는 변덕이라는 말로는 품을 수 없을 듯한 변화가 닥칠 것 같다. 이 책도 그렇고 기후와 생태 문제를 다룬 책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자본주의가 약 200년 동안 지구의 자원을 추출하여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사이클을 돌려왔으나 이제 더는 자원을 뽑아다 쓸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자원이 유한한데, 인류의 무한한 자유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선진국 상류층 소비자들의 영향력이 크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비를 자발적으로 줄여야 하고, 문명 자체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조별 과제 같은 문제를, 인류가 다 함께 힘을 모아 해낼 수 있을까? 대학 조별 과제 같은 작은 일도 갈등이 벌어지기 일쑤인데 하물며 인류 전체가 다 같
씨네21 추천도서 - <불타는 지구에서 다르게 살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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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홀레는 아내의 죽음 이후 오슬로를 떠났고, 표면적으로는 경찰 일에서도 손을 뗐다. 신용카드 한도가 초과될 때까지 술을 사 마시던 그가 다시 오슬로로 돌아가려면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야 할 텐데, 참으로 그 사람다운 사건이 생긴다. 영화 때문에 진 큰 빚을 갚지 못해 채권자에게 죽게 생긴 한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돕기로 결심하는데, 때마침 오슬로에서 벌어진 여성 실종 및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태도는 무뚝뚝해도 자기와 별 관계도 없는 여자를 목숨 걸고 도와주려는 이타적인 마음을 다들 알기 때문인지 오슬로에는 해리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일단 남들은 모르지만 해리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수사관이 있고, 해리를 좋아하는 검시관도 따로 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용의자의 알리바이와 관련된 증거를 슬쩍 건네주는 여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죽음을 앞둔 예전의 남자 동료는 병원 입원실을 해리
씨네21 추천도서 - <블러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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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나오는 옷장 때문일까. <나니아 연대기>를 읽기 훨씬 전부터 옷장 속에 숨으면 안전한 기분이 들곤 했다. 이후 많은 동화들에서 옷장은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이 겨울 나라 나니아로 향하는 문이었고, 다시 옷장으로 나오면 모험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것과 달리 <자개장의 용도>의 자개장은 좀더 복잡한 사용법을 가진다. 증조할머니에서 할머니로, 다시 할머니에서 엄마에게로 계승되었던 이 자개장에는 원하는 곳으로 시간을 단축해 데려다주는 기능이 있지만,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주는 기능은 없다. 그러니까 이 자개장을 통해 전세계 어디든 갈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아프리카의 벌판에도 갈 수 있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다면 정석의 방식대로 비행기를 타고 걷고 버스를 타고 긴 시간을 들여 돌아와야만 한다. 그러니 어디든 갈 수 있다고 그냥 떠났다가는 원래의 자리로 돌
씨네21 추천도서 - <자개장의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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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이룰 수 없는 밤에, 혹은 혼자 멍하니 있을 때 그렇게 빈 시간이 있을 때마다 문득 죽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와, 라고 하자 친구는 놀라서 힘든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딱히 힘든 일이 없어도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누구나 하지 않나. 아니, 그런 생각을 모두가 하진 않지, 라는 대답에 도리어 내가 놀랐다. <말라가의 밤>의 엄마는 밥을 먹다가, 소파에 누워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아, 여행 가고 싶다’ 정도의 뉘앙스로 죽고 싶다는 말을 한다. 혼잣말이었지만 혼자 있을 때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우리 다 같이 죽을까?” 형우와 은우, 두 아들에게 엄마는 묻는다. 어린 동생 은우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나(형우)는 단호하게 말한다. “싫어, 난 안 죽을 거야.” 엄마는 같이 죽자는 말을 다신 하지 않았지만 몇년 후 동생과 함께 울릉도로 가는 배 위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선택한다.
친밀한 이가 자살한 후 그 사건을 견뎌내야 하는 이들을 자살 사별자라 한다. 어린 시
씨네21 추천도서 - <말라가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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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의 밤> - 조수경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자개장의 용도> - 함윤이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블러드문> - 요 네스뵈 지음 남명성 옮김 비채 펴냄
<불타는 지구에서 다르게 살 용기> - 조효제 지음 창비 펴냄
<데드 헤드 대드> - 성하성 지음 CABINET 펴냄
<창공의 빛을 따라> - 나탈리 레제 지음 황은주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더 송라이터스> - 김영대 지음 문학동네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12월의 책 – 2025년_최종_독서목록.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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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지음 창비 펴냄
2024년 기준 전국 고립 청년 및 은둔 청년 비율은 5.2%이다. 19살에서 34살까지 전국 청년 기준으로 조사된 결과이지만 사실 조사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응답하지 않은 비율까지 생각한다면 실제 비율은 이보다 더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은둔, 고립 청년과 더불어 뉴스에서 곧잘 언급되는 것이 니트족, 구직 활동을 하지 않거나 취업을 포기하고 ‘쉬었음’에 체크하는 청년들이다. 언론에서는 니트족 청년들을 대략 7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 숫자들은 단순히 일하지 않고 회사에 다니지 않음, 만을 뜻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의 현재 상태가 자발적으로 휴식을 선택해 마음이 자유롭거나 설령 일은 하지 않더라도 친구를 비롯한 사회에 관계맺음이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바로 니트족 청년이 고립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자발적으로 고립을 선택하는 청년은 없다. 인간은 타고나기를 타인과 연결되기를 원하고, 또 이 네트워킹 활동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고 삶의
씨네21 추천도서 - <당신은 연결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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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털리 호지스 지음 송예슬 옮김 문학동네 펴냄
과거를 바꾸고 싶으면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록해보기만 하면 된다. 이 책의 첫 문장을 만나고는 바로 알았다. 이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다섯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호지스는 매일 5시간씩 악기를 연습했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이 책의 머리글에는 그의 외조부모가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고, 어떤 계기로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소개한다. 그는 음악이 꼼짝없이 자신을 한국인다움과 이어준다고 설명하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회상한다. 호지스와 형제들은 어머니의 바람에 의해 악기를 배웠는데, 금요일에 연주가 끝나면 온 가족이 ‘신라’라는 이름의 한국 식당에서 갈비와 물냉면을 먹곤 했다. 저자는 자신을 바이올린 솔리스트로는 실패했다고 여긴다. 평생 바이올린 연주에 매진했지만 그는 연주 여행을 다니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되지 못했다. 그의 글들은 사랑했지만 끝내 실패한 일에 대한 기록이다. 첫
씨네21 추천도서 - <엇박자의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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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연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집을 떠나서 사는 딸들은 늦은 밤 술에 취한 아빠의 전화를 받곤 한다. 평소엔 먼저 전화하는 법이 없지만 음주 상태의 아빠들은 대개 안 하던 속이야기를 풀어놓곤 한다. 무심한 성격인 주연의 아빠 역시 술에 의지해야만 감정을 털어놓는데, 이날도 불쑥 이런 고백을 한다. “아빠한테… 사실은 누나가 있었어.” 살면서 들어본 적 없는 고모 이야기에 놀란 주연은 고모가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아빠는 긴 침묵 후에 고모가 대학 졸업식 전에 자살했다고 답한다. 또 침묵 후 아빠는 이렇게 말한다. “주연아, 너는 고모처럼 되지 말아라. 양씨 집안의 여자들은 모두 불행했으니까.” 영화 <양양>은 양주연 감독이 40년 전 죽은 고모의 과거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이고, 동명의 책은 영화에는 미처 담지 못했던 감독의 심상과 함께 고모의 흔적을 찾기 위해 카메라 뒤에서 벌여야 했던 치열한 기록을 담은 책이다. 저자이자 감독이 주지한 대로 다
씨네21 추천도서 -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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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W. 아도르노 지음 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예술에 관해서는 이제 아무것도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 자명해졌다”라는 첫 문장의 울림을 다시 만난다. 현대 미학 논의의 출발점. 1984년 아도르노 연구자 홍승용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처음 출간된 <미학 이론>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기존 번역을 수정하고, 초판에 누락되었던 ‘부록’과 ‘서론 초고’, ‘독일어판 편집자 후기’를 추가로 번역해 수록했다. <미학 이론>은 아도르노 사망 1년 후인 1970년 출간됐으며, 그의 미완성 원고와 편집 메모를 정리한 책이다. 아도르노는 1950년부터 1968년까지 미학 강의를 여러 차례 진행했다. 강의를 토대로 1961년부터는 <미학 이론>의 구술, 초고 작업을 시작했다.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아도르노는 지금의 형태로 이 책의 인쇄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목차의 제목들은 아도르노가 초고 페이지에 붙인 핵심어들을 참고해 편집자들이 붙인 것이다.
씨네21 추천도서 - <미학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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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비채 펴냄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면 내가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과거에 남겨진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산타크루즈 해변 마을 팟벨리에서 엄마의 친구 베델와 함께 사는 미티의 처지도 그렇다. 테크 산업이 번창하고 부유한 엔지니어들이 곳곳에 집과 별장을 구하고 여행을 다니는 생활양식이 부상하면서 해변의 옛집은 헐리고 매끈하고 화려한 새집이 지어진다. 그렇게 동네에 단 하나 남은 허름한 집, 환풍이 잘 안되고 곰팡내가 묘하게 나며 햇빛 속에서 먼지가 춤추는 지저분한 집에서 미티가 산다. 그녀는 타코 식당에 설거지 일을 하러 나갈 때를 제외하면 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나이 많은 베델이 모은 20세기 중반의 여성 잡지와 원예 잡지를 탐독하고 TV 프로그램을 녹화하며 최신 기계와는 거리가 먼 세상에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세상의 변화가 결국 미티에게도 와닿는다. 어느 테크기업 엔지니어가 풋내기들에게 살해당했는데, 그 이유가 의식이 있는 AI 로봇을
씨네21 추천도서 - <네가 누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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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반타(오팬하우스) 펴냄
약 650페이지에 달하는 긴 분량의 소설을, 중간에 조금씩 쉬긴 했지만 거의 한번에 읽어나가는 동안 이 정도 분량을 계속 읽어나가게 만들다니 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하고 타임루프 설정의 영감을 어디에서 받았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타임루프는 똑같은 시간대가 계속 반복되어, 주인공이 그 시간대에 갇히는 설정의 장르로 <사랑의 블랙홀>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은 그 시간대의 폭이 무척 넓다. 1919년에 태어난 해리 오거스트는 죽고 나면 이전 삶의 모든 기억을 지닌 채 또 태어나는 ‘크로노스 클럽’의 회원이다. 성장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죽는 일을 반복하며 전쟁과 냉전으로 점철된 서구의 20세기 역사를 관통한다. 그런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태어나며 수명도 정해져 있으므로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이며 전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다 알지만 시공간 자체를
씨네21 추천도서 -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