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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서가에 들이는 순간 영원히 이별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김혜순 죽음 트릴로지>가 그런 책이다. 2025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처음 선보인 이 책은, 1권 <죽음의 자서전>으로 시작해 2권 <날개 환상통>을 지나 3권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에 다다르는 여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600쪽에 달하는 이 아름다운 책은 순서대로 읽기를, 순서를 뒤집어 읽기를 권한다. <죽음의 자서전> 은 첫시 <출근>에서부터 죽음과 삶 그 사이의 귀신 들림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너는 너로부터 달아난다. 그림자와 멀어진 새처럼./ 너는 이제 저 여자와 살아가는 불행을 견디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과 멀어지고 나서야 “네 직장으로 향하던 길을 간다. 몸 없이 간다.” 여자가 오늘 또 하루를 살아가는 비결이다. 그렇다고 앞서 성큼성큼 걷는 법을 익히기에는 복잡한 것들이 여자의 안에서 아우성치기
씨네21 추천도서 - <김혜순 죽음 트릴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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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통, 그러니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권위주의에 가득 찬 정부가 들어서고 다양성을 박해하고 애국적인 행동을 강요하는 법률을 제정한다. 특히 미국 문화와 전통 보존이라는 명목하에 PACT 법안에 진보적인 의원들조차 찬성하며 법안이 통과되자 ‘미국의 전통을 위협’하는 책은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어 금지되고 부모가 선동가이거나 이민자일 경우 아이를 정부에서 빼앗아 위탁가정에 보내기까지 한다. 이 모든 것이 국가안보와 국민 안전을 위해서라며 정부는 국민을 감시, 검열하고 이러한 매카시즘에 가까운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 역시 서로를 위협하고 경멸하며 차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여기까지 소개했을 때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뉴스 같지만 실은 셀레스트 잉의 소설 <우리가 잃어버린 심장>에 대한 소개다. 2021년 <뉴요커> 표지는 아시아 여성과 어린 소녀가 지하철 플랫폼에서 손을 잡고 주변을 살피는 그림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뉴욕 내에서는 아
씨네21 추천도서 - <우리의 잃어버린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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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없는 것>은 <잘 자요, 엄마>와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에 이은 ‘하영 시리즈’ 3부작의 최종편이다. <잘 자요, 엄마>에서 하영은 엄마가 죽고 집에 불이 나 조부모까지 죽자 재혼한 아빠의 집에 갑자기 떠맡겨진 열한살 여자아이였다.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양육하는 상황이 된 선경의 시점에서 볼 때 하영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아이가 보이는 이상행동들, 동물을 공격한다거나 분노를 표출하며 인형을 찢는다거나 하는 행위들은 특히나 선경을 섬뜩하게 만든다. 범죄심리학을 전공한 선경이 봤을 때 아이의 돌발행동은 어린 시절 연쇄살인범들이 보였던 행동과 유사했다. ‘사이코패스는 타고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인가’에 대해 파헤쳤던 전작에서 사이코패스 기질을 가진 아이로 등장했던 하영이 성인이 되어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겨 이름을 바꾼 후 재벌 2세 세나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것이 <나에게 없는 것>이다.
씨네21 추천도서 - <나에게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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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보편화된 시대에는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무엇을 물을지 알기 위해서는 어디에 공백이 있는지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하고,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공지능 미디어아티스트인 우숙영의 <어느날 미래가 도착했다>는 인공지능과 관련한 여러 국면에 대한 ‘질문의 책’이다. 인공지능이 추천해준 연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다 해결해주는데 공부를 왜 해야 할까? 킬러로봇을 도입하면 전쟁의 희생자를 줄일 수 있을까? 어떤 질문은 답이 쉬운 것 같은데 막상 답을 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이어지고, 어떤 질문은 아예 답을 할 수 없을 것같이 느껴진다. <어느날 미래가 도착했다>는 영화와 시리즈, 게임에서 시작해 수많은 뉴스 기사들을 오가며 생각해볼 만한 지점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이다. 인공지능과 관련한 여러 이슈를 일별하며 대화를 청한다.
‘상실과 애도’을 1장에,
씨네21 추천도서 - <어느날 미래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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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미래가 도착했다> - 우숙영 지음 창비 펴냄
<나에게 없는 것> - 서미애 지음 엘릭시르 펴냄
<우리의 잃어버린 심장> - 셀레스트 잉 지음 남명성 옮김 비채 펴냄
<김혜순 죽음 트릴로지> - 김혜순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7월의 책 - 여름 독서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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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남현정의 첫 소설집. “그러니 인생을 취소할게 오이디푸스도 아마 그랬을 거야 자기의 인생을 취소하고 싶었을 거야 쥘리앵 또한 그랬을 거야 자기의 인생을 취소하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가만 나에게는 취소할 인생조차 없네 그렇다면 인생을 취소할게라는 말을 취소할게 인생을 취소할 일 없는 인생 없는 나는 이제부터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느낌표와 물음표는 있지만 마침표는 없는,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없는(하지만 여러 개의 각주가 자기주장을 하는) <없는>으로 시작하는 단편집 <아다지오 아사이>는 ‘예측되기’에 저항하는 듯 보인다. 소설 텍스트 바깥에서 끌어오는 레퍼런스들은 의미심장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데, <부용에서>는 영화 <국외자들>과 소설가 찰스 부코스키, 칸딘스키의 그림 <곡선의 지배> 같은 작품들이 언급된다. 외삼촌을 만나기 위해 부용이라는 타지에 발을 들인 ‘나’의 이야기로, 어딘가 꿈을
씨네21 추천도서 - <아다지오 아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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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비채 펴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떻게 영화를 구상하는가.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제작 과정 전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한 에세이다. 2022년 11월30일, 고레에다 감독은 <브로커>의 프랑스 개봉에 맞춰 방문한 파리에서 배우 카트린 드뇌브와 식사를 하게 되었다. 본인이 고른 식당에 조금 늦게 도착해서는 왜 안 먹고 기다렸냐고 말문을 열더니 음식이 나오고는 이런저런 투덜거림이 이어졌다는 회고로 책은 시작한다. 통역을 거친 대화는 뉘앙스에 대한 상상이 더해져 “어딘지 모르게 기키 기린씨 느낌이 가미됐다는 것을 미리 고백해둔다.” 카트린 드뇌브와 기키 기린은 1943년생 동갑.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공통점은 “재미있어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자신의 “재미있어하는 능력”을 살뜰히 담은 책이다.
먼저 설명하면
씨네21 추천도서 -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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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본 지음 문학동네 펴냄
<슬램덩크>의 2025년 버전 재녹음이 결정되었고 당신도 성우 오디션에 참여한다고 가정하자. 오디션에 합격하면 누구를 맡고 싶어? 당신의 답은? <차라리 잠든 밤>의 재하의 답은 이렇다. 서태웅. 아, 서태웅 좋지. 아마도 재하의 목소리가 엄청난 미남자인가보다. 누가 뭐래도 <슬램덩크> 최고의 미남은 서태웅이 아니던가. 재하가 서태웅을 선택한 이유는 다소 황당하다. “대사가 적어서.” 선배가 다시 고르라고 하자 재하는 이 사람을 고른다. “그럼 권준호.” 권준호? 바로 그 ‘안경 선배’다. “재하는 권준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 있어서 좋다고 했다. 농구 천재나 지난한 과거를 가진 양아치 슈터가 아니라, 벤치 위에서 스타팅 멤버에 뽑히지 못한 3학년 벤치 선수. 부주장이라는 애매한 감투도 재하에게 이입할 여지를 주었다.” 그런 애매한 인물들에게 애정을 느끼고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김본 소설집
씨네21 추천도서 -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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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지음 창비 펴냄
영화 <해피엔드>에서 코우와 유타는 길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재일한국인인 코우만이 체류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붙잡힌다. 근미래가 배경인 영화지만 이와 유사한 사건은 한국에서도 시시각각 발생하는 중이다. 몽골인 부모님과 어릴 때 한국으로 이주한 고등학생 민호는 친구들 싸움에 휘말리고, 경찰은 민호만 연행한다. 친구들이 “얘는 잘못 없다”고 증언했음에도 경찰은 민호가 미등록 신분이라서 내보낼 수 없다며 출입국 당국에 인계하고, 민호는 수갑이 채워진 채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를 거쳐 구금 시설인 화성외국인보호소로 보내진다. 한국에서만 살아 몽골어도 서툰 민호는 강제 퇴거를 명령받고 몽골로 쫓겨난다. 부모와 함께 이주한 아동은 부모의 한국 체류 자격이 상실되면 미등록 이주 아동으로 분류되어 기본권도 보호받기 어렵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법’의 울타리에는 무수한 인권의 빈틈이 존재한다. 민호는 미성년 아동으로서 보호자에게 보
씨네21 추천도서 - <그래도 되는 차별은 없다: 인권 최전선의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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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되는 차별은 없다: 인권 최전선의 변론>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지음 창비 펴냄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 - 김본 지음 문학동네 펴냄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비채 펴냄
<아다지오 아사이> - 남현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6월의 책 - 책에게 말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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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지음 창비 펴냄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파리에서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1980년대의 홍세화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꼬레에서 왔소.” 꼬레에서 왔지만, 그가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나라 역시 꼬레가 된 현실. 해외 지사 근무차 유럽에 갔다가 남민전 사건이 터져 귀국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그는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시작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1995년 출간되었고, 당시 아직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던 홍세화 없이 출간 기념회를 치른 후 금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출간 30주년 기념, 홍세화 선생의 타계 1주기를 기억하는 의미로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이전까지는 한없이 낯설었을 ‘톨레랑스’(tolerance)라는 단어를 한국 사회에 알린 것이 이 책이었고, 유럽 여행이 드물었던 시대에 그의 택시 뒷좌석에 타고 파리 시내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듯한 진기한 경험을 하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이제 파리 여행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있고, 그게 어렵다면 유튜브로도
씨네21 추천도서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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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이 인물을 내가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을까. <디트랜지션, 베이비>의 첫장부터 이러한 의문에 봉착한다. 이 소설에는 무작정 긍정할 수 있는 주인공이란 등장하지 않는다. 죄다 어딘가 불안정하고 결함이 있으며 이해불가한 선택을 연속한다. 트랜스젠더 여성 리즈는 아이가 갖고 싶다. ‘이 섹스로 인해 임신을 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느끼고 싶어서 버그체이싱(성행위를 통해 의도적으로 HIV바이러스 감염을 추구하는 행동)을 시도한다. 리즈는 과거 엄마가 될 준비를 한 적이 있다. 에이미라는 트랜스 여성과 레즈비언 커플로 사귀던 시절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려 했지만 에이미는 트랜스 여성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디트랜지션(Detransition)을 결정하며 다시 남성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의 이름은 에임스다.
에임스는 트랜스젠더를 대하는 혐오 사회와 주변인의 태도에서 피로감을 느꼈고, 더불어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애매함을 환멸해 원래의 성
씨네21 추천도서 - <디트랜지션, 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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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신종원 글 한규현 그림 소전서가 펴냄
신종원의 장편소설 <불새>를 읽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고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예정되어 있던 시기였다. 공교롭다고 말한 까닭은 이 소설이 젊은 사제 바오로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양을 찾아 떠나지만, 드물게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양들이 그들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노아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또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빚어질 때 이미 목자로 명명되어 일생 양들을 이끈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 신부가 등장한다. 그는 비행기에 타고 있다. 그런데 성당에 다니냐는 옆자리 사람의 말에 그는 “네, 그런데 이제 그만두려고 합니다”라는 비밀을 누설한다. 비행기에 탄 이유는 곧 밝혀진다. 성직을 내려놓겠다는 바오로 신부에게 아버지 신부인 베드로는 “네 눈으로 직접 성배를 보고 돌아오라”고 했던 것이다.
일의 발
씨네21 추천도서 - <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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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랑일까? 처음 사랑을 느낀 상대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여자 친구였다. 여자애들은 자라면서 여자 친구에게만 속삭인다. 꼭 너에게만 할 수 있는 비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도 몰라줬던 내 속마음은 꼭 그 애에게만 수신되었으니까. 내가 입을 열어 단어를 꺼내기만 해도 뒤이어질 다음 말을 잡아채서 겹치는 목소리로 “이 말 하려고 그랬지?”라고 대화의 바통을 낚아채던 여자 친구들. 그게 뭐 그리 웃긴지 끅끅대며 허리를 접고 웃어댔던 수다. 10대 소녀들이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다는 건 낭설이다. 낙엽이 굴러간다는 사실보다 소녀와 소녀가 함께란 사실이 앞선다. 이건 여자들만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교환일기를 가슴속에 방탄조끼처럼 품고 다른 반을 기웃대던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으니까.
릴리 댄시거의 우정에 관한 에세이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는 그의 여자 친구들, 그리고 자매애에 관한 책이다. 릴리는 언제나 여자 친구들에게 보호본능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에
씨네21 추천도서 -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