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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남현정의 첫 소설집. “그러니 인생을 취소할게 오이디푸스도 아마 그랬을 거야 자기의 인생을 취소하고 싶었을 거야 쥘리앵 또한 그랬을 거야 자기의 인생을 취소하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가만 나에게는 취소할 인생조차 없네 그렇다면 인생을 취소할게라는 말을 취소할게 인생을 취소할 일 없는 인생 없는 나는 이제부터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느낌표와 물음표는 있지만 마침표는 없는,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없는(하지만 여러 개의 각주가 자기주장을 하는) <없는>으로 시작하는 단편집 <아다지오 아사이>는 ‘예측되기’에 저항하는 듯 보인다. 소설 텍스트 바깥에서 끌어오는 레퍼런스들은 의미심장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데, <부용에서>는 영화 <국외자들>과 소설가 찰스 부코스키, 칸딘스키의 그림 <곡선의 지배> 같은 작품들이 언급된다. 외삼촌을 만나기 위해 부용이라는 타지에 발을 들인 ‘나’의 이야기로, 어딘가 꿈을
씨네21 추천도서 - <아다지오 아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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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비채 펴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떻게 영화를 구상하는가.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제작 과정 전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한 에세이다. 2022년 11월30일, 고레에다 감독은 <브로커>의 프랑스 개봉에 맞춰 방문한 파리에서 배우 카트린 드뇌브와 식사를 하게 되었다. 본인이 고른 식당에 조금 늦게 도착해서는 왜 안 먹고 기다렸냐고 말문을 열더니 음식이 나오고는 이런저런 투덜거림이 이어졌다는 회고로 책은 시작한다. 통역을 거친 대화는 뉘앙스에 대한 상상이 더해져 “어딘지 모르게 기키 기린씨 느낌이 가미됐다는 것을 미리 고백해둔다.” 카트린 드뇌브와 기키 기린은 1943년생 동갑.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공통점은 “재미있어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자신의 “재미있어하는 능력”을 살뜰히 담은 책이다.
먼저 설명하면
씨네21 추천도서 -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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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본 지음 문학동네 펴냄
<슬램덩크>의 2025년 버전 재녹음이 결정되었고 당신도 성우 오디션에 참여한다고 가정하자. 오디션에 합격하면 누구를 맡고 싶어? 당신의 답은? <차라리 잠든 밤>의 재하의 답은 이렇다. 서태웅. 아, 서태웅 좋지. 아마도 재하의 목소리가 엄청난 미남자인가보다. 누가 뭐래도 <슬램덩크> 최고의 미남은 서태웅이 아니던가. 재하가 서태웅을 선택한 이유는 다소 황당하다. “대사가 적어서.” 선배가 다시 고르라고 하자 재하는 이 사람을 고른다. “그럼 권준호.” 권준호? 바로 그 ‘안경 선배’다. “재하는 권준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 있어서 좋다고 했다. 농구 천재나 지난한 과거를 가진 양아치 슈터가 아니라, 벤치 위에서 스타팅 멤버에 뽑히지 못한 3학년 벤치 선수. 부주장이라는 애매한 감투도 재하에게 이입할 여지를 주었다.” 그런 애매한 인물들에게 애정을 느끼고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김본 소설집
씨네21 추천도서 -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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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지음 창비 펴냄
영화 <해피엔드>에서 코우와 유타는 길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재일한국인인 코우만이 체류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붙잡힌다. 근미래가 배경인 영화지만 이와 유사한 사건은 한국에서도 시시각각 발생하는 중이다. 몽골인 부모님과 어릴 때 한국으로 이주한 고등학생 민호는 친구들 싸움에 휘말리고, 경찰은 민호만 연행한다. 친구들이 “얘는 잘못 없다”고 증언했음에도 경찰은 민호가 미등록 신분이라서 내보낼 수 없다며 출입국 당국에 인계하고, 민호는 수갑이 채워진 채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를 거쳐 구금 시설인 화성외국인보호소로 보내진다. 한국에서만 살아 몽골어도 서툰 민호는 강제 퇴거를 명령받고 몽골로 쫓겨난다. 부모와 함께 이주한 아동은 부모의 한국 체류 자격이 상실되면 미등록 이주 아동으로 분류되어 기본권도 보호받기 어렵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법’의 울타리에는 무수한 인권의 빈틈이 존재한다. 민호는 미성년 아동으로서 보호자에게 보
씨네21 추천도서 - <그래도 되는 차별은 없다: 인권 최전선의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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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되는 차별은 없다: 인권 최전선의 변론>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지음 창비 펴냄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 - 김본 지음 문학동네 펴냄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비채 펴냄
<아다지오 아사이> - 남현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6월의 책 - 책에게 말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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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지음 창비 펴냄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파리에서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1980년대의 홍세화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꼬레에서 왔소.” 꼬레에서 왔지만, 그가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나라 역시 꼬레가 된 현실. 해외 지사 근무차 유럽에 갔다가 남민전 사건이 터져 귀국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그는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시작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1995년 출간되었고, 당시 아직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던 홍세화 없이 출간 기념회를 치른 후 금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출간 30주년 기념, 홍세화 선생의 타계 1주기를 기억하는 의미로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이전까지는 한없이 낯설었을 ‘톨레랑스’(tolerance)라는 단어를 한국 사회에 알린 것이 이 책이었고, 유럽 여행이 드물었던 시대에 그의 택시 뒷좌석에 타고 파리 시내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듯한 진기한 경험을 하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이제 파리 여행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있고, 그게 어렵다면 유튜브로도
씨네21 추천도서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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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이 인물을 내가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을까. <디트랜지션, 베이비>의 첫장부터 이러한 의문에 봉착한다. 이 소설에는 무작정 긍정할 수 있는 주인공이란 등장하지 않는다. 죄다 어딘가 불안정하고 결함이 있으며 이해불가한 선택을 연속한다. 트랜스젠더 여성 리즈는 아이가 갖고 싶다. ‘이 섹스로 인해 임신을 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느끼고 싶어서 버그체이싱(성행위를 통해 의도적으로 HIV바이러스 감염을 추구하는 행동)을 시도한다. 리즈는 과거 엄마가 될 준비를 한 적이 있다. 에이미라는 트랜스 여성과 레즈비언 커플로 사귀던 시절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려 했지만 에이미는 트랜스 여성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디트랜지션(Detransition)을 결정하며 다시 남성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의 이름은 에임스다.
에임스는 트랜스젠더를 대하는 혐오 사회와 주변인의 태도에서 피로감을 느꼈고, 더불어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애매함을 환멸해 원래의 성
씨네21 추천도서 - <디트랜지션, 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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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신종원 글 한규현 그림 소전서가 펴냄
신종원의 장편소설 <불새>를 읽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고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예정되어 있던 시기였다. 공교롭다고 말한 까닭은 이 소설이 젊은 사제 바오로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양을 찾아 떠나지만, 드물게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양들이 그들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노아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또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빚어질 때 이미 목자로 명명되어 일생 양들을 이끈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 신부가 등장한다. 그는 비행기에 타고 있다. 그런데 성당에 다니냐는 옆자리 사람의 말에 그는 “네, 그런데 이제 그만두려고 합니다”라는 비밀을 누설한다. 비행기에 탄 이유는 곧 밝혀진다. 성직을 내려놓겠다는 바오로 신부에게 아버지 신부인 베드로는 “네 눈으로 직접 성배를 보고 돌아오라”고 했던 것이다.
일의 발
씨네21 추천도서 - <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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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랑일까? 처음 사랑을 느낀 상대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여자 친구였다. 여자애들은 자라면서 여자 친구에게만 속삭인다. 꼭 너에게만 할 수 있는 비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도 몰라줬던 내 속마음은 꼭 그 애에게만 수신되었으니까. 내가 입을 열어 단어를 꺼내기만 해도 뒤이어질 다음 말을 잡아채서 겹치는 목소리로 “이 말 하려고 그랬지?”라고 대화의 바통을 낚아채던 여자 친구들. 그게 뭐 그리 웃긴지 끅끅대며 허리를 접고 웃어댔던 수다. 10대 소녀들이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다는 건 낭설이다. 낙엽이 굴러간다는 사실보다 소녀와 소녀가 함께란 사실이 앞선다. 이건 여자들만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교환일기를 가슴속에 방탄조끼처럼 품고 다른 반을 기웃대던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으니까.
릴리 댄시거의 우정에 관한 에세이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는 그의 여자 친구들, 그리고 자매애에 관한 책이다. 릴리는 언제나 여자 친구들에게 보호본능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에
씨네21 추천도서 -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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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5박6일 일정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오는 짐을 싸면서 한강의 <빛과 실>을 넣었다. 150여쪽에 불과한 이 책을 읽는 데 5박6일은 너무 짧았다. <빛과 실>은 머릿속에 있는 한강의 모든 소설과 함께 읽어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년, 길게는 칠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 작업은 한강의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좋았다”고 한강은 쓴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의 아름다움.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는 일. (대답을 찾아내서가 아니라) 질문들의 끝에 이르러서야,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음을 인식하기. 소설을 시작하던 때와 같은 사람일 수 없는 누군가가 되기. 질문을 포개고, 책을 쌓아가기. <빛과 실>에는 그러한 소설 쓰기에 대한 경험이 차례로 언급된다. <채식주의자>의
씨네21 추천도서 - <빛과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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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 - 릴리 댄시거 지음 송섬별 옮김 문학동네 펴냄
<불새> - 신종원 글 한규현 그림 소전서가 펴냄
<디트랜지션, 베이비> -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홍세화 지음 창비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5월의 책 - 문장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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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목 지음 난다 펴냄
영화감독, 시인, 에세이스트. 어느 쪽으로 불려도 어색하지 않은 시간을 작업하는 데 쏟아온 유진목에게 재능이란 뭘까. 경고. 실질적인 도움을 구하는, 데뷔를 갈망하는 창작자라면 <재능이란 뭘까?>를 불태우고 싶어질 수 있다. 추천의 말. 데뷔는 했고, 작품도 쌓였고, 대기 중인 작업도 있지만 번아웃에 시달리는, 다음달의 공과금을 걱정하는, 지속가능성만 생각하면 부정적인 생각에(때로는 죽음에) 사로잡히는 창작자라면 책장을 뜯어 먹어도 소화가 잘될 것이다. 당신에게서 나온 이야기 같을 테니까.
“지금은 그냥 불을 끄고 누워서 어릴 때의 오만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바라보는 중이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다시 보니 책의 부제가 ‘쓰기에서 죽기까지’이다. 그 중간에는 무엇이 있는지가 유진목의 관심사다. 읽다보면 알 수 있다. 질문이 선행했다기보다는, ‘결론’으로 질문이 존재한다. 예컨대 “기회는 눈앞에 써 있는 것을 읽는다”는 문장은 “이 글은 충분
[culture book] 재능이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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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슐리 엘스턴 지음 엄일녀 옮김 문학동네 펴냄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관심을 잡아끈다. 스릴러 장르에서 ‘누굴 의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흔히 타자를 향하지만,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에서 독자는 가장 수상한 사람이 주인공인 이비 포터임을 알게 된다. 이비 포터? 그게 누군진 모르겠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주인공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사연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이야기에 멱살잡혀 읽어가게 된다.
시작은 가정 스릴러 장르처럼 보인다. 타인의 눈에 완벽한 커플이 지닌 속사정을 다루는 듯해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비 포터는 남자 친구인 라이언과 완벽해 보이는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비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은 이비를 ‘연기’하고 있으며 모종의 이유로 라이언에게 접근한 상태임이 밝혀진다. 이비는 비밀스러운 조직의 명령을 받아 일하고 있는데, 새로운 일이 시작될 때마다 이름, 배경을 비롯해 각종 정보
씨네21 추천도서 -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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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조시현의 소설을 읽으며 밑줄 그은 대목을 다시 읽어보니, 나는 이 책을 시집처럼 읽은 걸까 싶어졌다. “영혼은 슈크림.” 달콤해서는 아니다. “이건 일기는 아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흩어지는 생각을 모으고 싶다.”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도록, 발견되도록. “오렌지, 밤, 집게, 끈 풀린 운동화 한짝 또는 마디의 얼굴.” 표제작이자 마지막 수록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다소 기묘하게 시작한다. 혼자만의 세계에 골몰한 영화 주인공의 내레이션을 듣는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정신, 뇌, 의식, 인식, 데이터, 자아, 신경, 귀신, 영혼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라 불러도 적확하지 않은 것 같지만 무엇으로도 불릴 수 있는 존재다. 그런 ‘나’가 그리움을 알게 되었다. 마치 손바닥에 묻은 슈크림처럼 문지를수록 더욱 끈적해지는 그 감정 말이다. SF라는 장르의 외피를 입고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머리
씨네21 추천도서 -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