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절규>는 짤방으로도 꽤 인기가 많다. 해골 같은 얼굴, 붉게 물든 하늘, 요동치는 풍경은 그 자체로 눈길을 사로잡을뿐더러 ‘절규’라는 제목 때문에 마치 내지르는 비명이 귓전을 울리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규>속 인물이 사실 절규하고 있지 않다면?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됐던 당시의 독일어 제목은 ‘자연의 비명’이었고, 뭉크 자신의 모국어인 노르웨이어 제목은 ‘비명’이었는데, 영어 ‘The Scream’으로 번역된 제목이 다시 한국어로 ‘절규’가 된 것이다. 작품의 원제가 ‘자연의 비명’이었다면 인물의 심경만 대변하는 그림은 아닐 터. “뭉크의 진술에 따르면 이 인물은 주변의 비명을 듣고 귀를 막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그는 자연의 비명이 내면을 관통하는 심리적 경험을 형상화했으며, 그림 속 인물은 공포에 질린 채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신음 같은 소리를 듣고 있는 존재로 그려졌다. 이 비명은 주관과 객관, 개인과 자연이 뒤섞인 복합적
씨네21 추천도서 - <두 번째 미술사>
-
‘지금, 여기’의 감각으로 시를 읽는다. 문지문학상[시] 후보작을 묶어 해마다 한권씩 출간하는 ‘시 보다’ 시리즈의 2025년 책이 출간되었다. 김복희는 쓴다. “대한민국에 사는 희망은 키가 작다.” (<새 입장>) 문보영의 시 제목은 “너에게 수상함이 없었다면 너를 좋아하기 힘들었을 거야”이다. 신이인의 <꿈의 옷>은 “너희들은 어떤 옷을 입고 자니 세상의 잠옷이란 원래 이따위일까 사랑받은 옷의 말년이 모두 이 모양이라면 나는 울지 않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침대에서 꿈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유선혜의 <모텔과 인간>은 “방에는 성행위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흔해서 먹먹한 살풍경으로 시작한다. 이실비는 <귀와 종>에서 택시 밖 북촌의 풍경을 바라본다. 구윤재, 김복희, 김선오, 문보영, 신이인, 유선혜, 이실비, 한여진의 기발표작 4편과 시인이 쓴 ‘시작 노트’ 그리고 선정위원의 ‘추천의 말’을
씨네21 추천도서 - <시 보다 2025>
-
소설가 어슐러 K. 르 귄은 대만 작가 우밍이의 소설 <복안인>을 “남아메리카 작품이 우리에게 마술적 리얼리즘을 선사했다면 이 소설은 새로운 현실을 새롭게 이야기하는 전혀 다른 방식을 선사한다”고 소개했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백년의 고독>이 떠오르는 부분이 <복안인>에는 존재한다. <복안인>을 소개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데이비드 미첼의 소설을 언급하는 해외 비평들도 존재하는데 이 모든 선배 작가들의 훌륭한 전작들이 연상되면서도 르 귄의 추천과 같이 <복안인>은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 새롭게 이야기하는, 독창적이며 참신하고 감각적인 소설이다. <복안인>의 주인공은 크게 두명이다. 태평양 어딘가에 숨어 있어 세계 지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은 외딴섬 ‘와요와요’에서 태어난 소년 아트리에와 대만의 문명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바닷가에 남편이 직접 건축한 외딴집에 홀로 사는 학자 앨리스. 심지어 남편
씨네21 추천도서 - <복안인>
-
마트에서 쉽게 구매하는 식재료, 치킨처럼 익숙한 외식 메뉴부터 남미 요리까지 배달되는 서비스. 뭐든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식문화.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자본주의 식탁을 ‘획일적이고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꼬집는 이가 있다. <로컬 오딧세이>의 저자이자 아워플래닛의 김태윤 셰프는 우리의 식탁이 단조롭다고 지적한다. “지역의 고유한 음식 문화가 유지되고, 제철 식재료가 살아 있는, 용도에 따라 다양한 품종을 선택할 수 있고, 세대간에 이어지는 조리법과 기억이 공존하는”것이 진짜 식탁의 다양성이라는 것이다. 전국 어디서나 똑같은 채소를 먹고 계절감이나 조리법의 다양성이 사라진 것은 풍요 속의 빈곤에 불과하다. 진짜 다양성은 지역의 고유한 음식 문화가 대를 이어 계승되고 편리성이나 유통 구조에 의해 사라진 품종들을 찾아내 세대간의 조리법과 기억이 공존하는 실재적 풍부함이다.
김태윤 셰프와 <한국인의 밥상>의 취재 작가로 전국을 누볐던 장민영 기획자가 운영하는
씨네21 추천도서 - <로컬 오딧세이>
-
-
진부하지만 동일본대지진 이후 기타노 다케시가 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 책을 소개해야겠다. “이 지진을 2만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하면 피해자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2만건 있었던 것이다.” (이 발언은 책 속 옮긴이의 말에도 인용되어 있다.) 재난이 일어났다. 테러일 수도, 지진이나 해일, 화재나 코로나19 팬데믹일 수도 있다. 재난 복구 전문가로 20여년간 전세계를 누빈 루시 이스트호프는 재난 복구에서 현장의 잔해를 정리하거나 시신을 수습하고 무너진 건물을 재건하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9·11 테러를 비롯해 영국의 온갖 재난과 최근의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그가 복구 절차에 참여한 재난을 열거하고 참사 현장을 세세히 묘사하는 것 또한 이 책의 일부분일 뿐이다. <먼지가 가라앉은 뒤>는 재난 현장에서 유가족과 대면했던 전문가의 객관적인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슬픔이란 감정의 한복판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씨네21 추천도서 - <먼지가 가라앉은 뒤>
-
“하루미는 슬픔을 훌훌 털고 일어날 줄 알았어. 내가 악평을 읽고 울고 있을 때면 다가와서, ‘계속 울어, 울어봤자 남는 건 울음을 그쳐야 한다는 사실뿐이라는 걸 깨달을 때까지’ 하고 무섭게 말하곤 했지.” 소설집 중 <나는 지금 빛나고 있어요>의 문장을 읽고 엘라 휠러 윌콕스의 시구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가 떠올랐다. <올드보이>에 나와 더 유명해진 구절이다. 이르게 연예계에 뛰어든 아역배우들의 착취 문제, 일본 AV의 성폭력, 화려한 아이돌 산업 뒤편의 그림자, 코로나 시대 대학의 표피적 관계와 온라인 강의의 표절 문제 등 박민정 소설집에 담긴 소설들은 그가 왜 사회파 소설가라 불리는지 가늠케 한다. 그러나 정녕 그게 소설집을 설명할 수 있는 전부일까. 그것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하다 싶다. 분명 세상에 존재했고, 여전히 종식되지 못한 사회문제들과 그 속에서 실패하며 인생의 어떤 시절을 상실해버린 인물들을
씨네21 추천도서 - <전교생의 사랑>
-
<전교생의 사랑> - 박민정 지음 문학동네 펴냄
<먼지가 가라앉은 뒤> - 루시 이스트호프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 펴냄
<로컬 오딧세이> - 김태윤, 장민영, 홍종욱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복안인> -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비채 펴냄
<시 보다 2025> - 구윤재, 김복희, 김선오, 문보영, 신이인, 유선혜, 이실비, 한여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두 번째 미술사> - 박재연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10월의 책 - 재미와 의미의 이중주
-
최재천 지음 창비 펴냄
나는 리더가 안 맞나봐, 한창 팀장 생활의 고독을 주변에 토로할 때마다 했던 말이다. 리더라기엔 팀원 둘뿐인 팀이지만 거기서도 후배들과의 세대 차이, 소통 불화를 느끼며 ‘내가 부족해서 팀 결과물이 이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당시 리더십 책을 한두권 읽었는데 겨우 그 정도밖에 읽지 않은 이유는 “난 이건 못하겠다” 싶은 카리스마 리더십에 대한 조언들이 대부분이라서였다.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국립생태원 초대원장을 지냈으며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최재천 작가의 <어쩌다 리더가 된 당신에게>는 많은 자기계발서류의 리더십 책과는 다른 제안을 한다. 흔히 떠올리는 ‘강력하고 확고한 리더십’과 달리 그가 제안하는 리더십은 조용히 입은 다물고 숙론하며 잘 듣는 리더에 가깝다. 여러 협회의 대표와 회장직을 맡았던 그이지만 그 역시 ‘리더’는 하기 싫었고 더구나 학교에서 리더십 강의를 맡았을 때 안 하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생태학자답
씨네21 추천도서 - <어쩌다 리더가 된 당신에게>
-
김홍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도대체 얼마나 불행한 일을 겪었기에 저러나 싶었다. “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이 찾아왔을 때 불행이란 단어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데 한참이나 모자람을 깨달았다.” 오호라. 대체 불행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렇게 자기 연민을 한담? 그는 “이 불행이 전부 내 것이라고? 이렇게나 크고 많은 것이? 이 정도 불행이면 모두가 함께 나눠야 하지 않나?”라고까지 생각한다. 저마다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 여기는 한국에서 주인공 장은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렇게 ‘불행의 크기'에 자부하는 것일까.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심지어 심사위원 만장일치라고 한다) <말뚝들>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자문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은행에서 대출 심사를 담당하는 장은 본부장 눈 밖에 나 유배 중이다. 감정평가사를 따라 전국을 돌며 담보 물건을 확인하는 것이 장의 하루. 여느 날과 다를 게 없는 출근길, 자동차 와이퍼에 꽂힌 쪽지에 “트렁크에 넣어
씨네21 추천도서 - <말뚝들>
-
마틴 푸크너 지음 김지혜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올여름 무지막지한 더위를 통과하는 동안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하고 은근하고도 끈질기게 불안감을 느꼈다. 앞으로 매해 여름이 더 더워진다는데 전 지구적 차원에서 탄소를 줄이자는 목표는 아무리 봐도 달성하기 어려워 보인다. 사람이 저지른 잘못을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 문제를 죄와 벌의 관점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변화하는 행성 지구를 위한 문학>의 입장이다. 책은 마치 자연과학서처럼 시작한다. “1억6천만년 전 중력의 미세한 상호작용으로 소행성대 안쪽에서 운석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운석이 지구에 떨어져 연쇄작용으로 엄청난 파괴가 일어났듯, 오늘날 지구에도 대규모 자연 재난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다. 털 없는 두발 잡식성동물이 정착 생활을 하고 글쓰기를 발명하여 지식을 축적한 까닭에 지구는 엉망이 되어버렸다고 저자는 분명히 밝힌다
씨네21 추천도서 - <변화하는 행성 지구를 위한 문학>
-
윤혜정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2023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아니시 카푸어의 전시는 블랙홀 다음으로 새카만 블랙 컬러를 볼 수 있다는 기사와 함께 많은 관객이 몰렸다. 막상 전시장을 갔을 때 눈길을 끈 것은 높이 4m에 육박하는 거대한 검은색 덩어리들이 벽에 걸려 있는 모습이었다. 압도적인 그 작품들을 보면서 이건 무슨 뜻으로 만든 작품일까? 라는 질문이 들었다.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를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큰 네점의 조각은 일과 시간에는 사대문 안의 도로를 이용할 수 없어 꼭두새벽에 이동해야 했단다. 그렇게 수고스럽게 옮겨온 작품, 그리고 그 작품으로 작가가 새롭게 짠 공간을 놓고 저자는 전시가 어떤 풍부한 감각을 전하는지 자세히 전달한다. 일상적인 감각과는 다른 낯설고 인상적인 감각이야말로 예술 체험에서 중요하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2024년 구겐하임미술관을 오랜만에 찾은 제니 홀저의 전시 소개를 읽다 보면 전시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관
씨네21 추천도서 -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
탐낌 지음 우디 옮김 엘릭시르 펴냄
홍콩에는 ‘함까찬’(冚家剷)이라는 욕이 있다. ‘이 집구석 다 뒈져버려라’ 정도의 뜻인데, 어떤 사람이 “쓰우씨는 다 죽어야 한다”는 의뢰를 하는 것이 소설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의 시작이다. 홍콩 란타우섬 사이위의 한 마을을 본관으로 하는 쓰우씨는 생존한 사람이 다 합쳐 오십명이 좀 넘는 수준. 결혼해서 나간 여자의 후손까지 전부 손을 봐달라는 요구다. 부유한 쓰우씨는 가족구성원에게 막대한 생활자금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3년에 한번 있는 가족 연회에 참석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궁금한 건 이렇다. 정말 쓰우씨는 다 죽을까?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죽일까?(가족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죽이지?) 현대사회에서 이렇게까지 온 집안을 멸살하려는 범인은 누구일까? 대체 왜? 예순명이 넘는 쓰우씨가 모두 모이는 가족 연회 날이 유력한 디데이인 가운데, 그날이 온다.
<쓰우 씨는다 죽어야 한다>는 202
씨네21 추천도서 -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
-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비채 펴냄
홋카이도의 소도시는 지명부터가 일본의 다른 지역과 다르다. 겨울이 유난히 긴 최북단의 홋카이도의 지명에는 일본 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어의 울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한자로 쓴 지명조차 한자의 원래 뜻과는 관계없이 음이나 훈을 빌린 것이라 낯설게 읽는다. 호로카나이, 오토이넷푸, 도마코마이, 시무캇푸 같은 지명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홋카이도에서 생활한 적 있는 게이코는 그런 지명마저도 그리워한다. 급여가 몇분의 일 수준으로 깎이는데도 게이코가 홋카이도의 안치나이 마을에 계약직 우편배달부 일을 구하고 이사한 이유다. <가라앉는 프랜시스>는 고독하지만 외롭지는 않은 게이코의 나날을 묘사한다. 속도가 느린 이야기인데도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어 계속 읽게 된다. 홋카이도의 자연에 대한 묘사, 그 풍경을 통해 드러나는 게이코의 내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가라앉는 프랜시스>를 쓴 마쓰이에 마사시는 1
씨네21 추천도서 - <가라앉는 프랜시스>
-
<가라앉는 프랜시스> -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비채 펴냄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 - 탐낌 지음 우디 옮김 엘릭시르 펴냄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 윤혜정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변화하는 행성 지구를 위한 문학> - 마틴 푸크너 지음 김지혜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말뚝들> - 김홍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어쩌다 리더가 된 당신에게> - 최재천 지음 창비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9월의 책 - 그 책은 오래 내 마음에 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