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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굳은살이 박여 큰 외부 자극이나 타인으로부터 심각한 타격, 예상하지 못했던 나쁜 일에 휘말려도 어릴 때만큼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고 자신할 때가 있었다. 이른바 매사에 무덤덤해진 것인데,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이 생겨서 이제 상처를 쉽게 받지 않게 된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런데 나쁜 자극에만 무덤덤해진 것이 아니라 좋은 자극에도 무덤덤해졌다는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낯선 여행지에 가서도 좋지도, 싫지도 않고 과거와 달리 감탄사를 내뱉지도 않는 나를 발견하고는 그 역시 어른이 된 증거인 줄 알았다. 우연히 만난 명상 전문가는 ‘슬픔도 분노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는 위험한 것이지 성숙해진 것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기쁨, 환호, 설렘과 같이 긍정적인 감정들은 분노, 슬픔, 좌절과 같은 감정과도 연결돼 있어 나쁜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면 좋은 감정 역시 느끼지 못하게 되고 이는 ‘안전한’ 상태가 아니라 우울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했다. <감정 조절>에는 이러한 감정들
씨네21 추천도서 - <감정 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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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쓴 책을 믿는 편이다. 적어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문장과 글의 함량, 그리고 필력을 신뢰한다는 말이다. 현직 기자가 쓴 책은 대개 사회문제의 시의성을 담고 있고, 전직 기자라면 거기에 자신의 시선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미처 생각지 못했던 어젠다를 던진다는 점에서 믿고 읽는다. 물론 모든 기자의 책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건은 왜 항상 금요일 밤에 일어나는가>를 읽으면서는 생각한다. 아, 역시 믿을 수 있다. <한겨레>에서 18년간 기자 생활을 한 저자는 난민 정책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연수를 떠나고, 아예 베를린 이주를 마음먹는다. 나이 오십에 직장을 그만두고 언어도 서툰 다른 나라로의 이주를 선택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중년, 여성, 아시안 정체성을 가지고 미성년 딸과 함께 독일로 이주하기를 선택한 저자는 독일 대학에 진학에 사회복지학을 공부한다.
처음엔 독일에 저자의 이주를 도울 정착민 가족이 있거나, 그가 유창한 독일어를
씨네21 추천도서 - <사건은 왜 항상 금요일 밤에 일어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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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왜 읽어야 할까, 특히 소설을 왜. 이 질문에 많은 독서사랑단은 ‘문학을 읽는 것이야말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모두 나로 태어나 나로 죽는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볼 방법은 이번 생에는 없다. 회귀, 빙의, 환생 같은 것을 해볼 수 있다면 모를까, 나로 태어난 이상 다른 삶은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고 ‘남의 삶 들여다보기’에 있어 문학 읽기만큼 적절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문학에 깊숙이 빠져들어 독서 이후에 우리가 가닿고 싶은 세계는 무엇일까. 뛰어난 글을 읽으면 그 글을 쓴 사람이 궁금해지고 궁극적으로는 글이 쓰고 싶어진다. 아니 에르노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작품들을 번역해온 신유진의 <나를 균열내기>는 독특한 구성을 한 산문집이다.
이 책은 자기 이야기이면서도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다. 생활에서 겪은 자기의 경험이 아니라 번역가이자 애서가인 작가가 사랑했던 다른 작가들의 문학과 삶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취향이
씨네21 추천도서 - <나를 균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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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영광송에는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도 일종의 삼위일체일 것인데,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지만 영원은 결국 그 모든 구분을 무효화하는 시간성을 뜻한다. 이 구절을 떠올린 것은 <브로콜리 산양 작은 사람>의 ‘시인의 말’을 읽다가였다. “사과 옆에 돌 옆에 감자 옆에 어둠이 하나씩.// 이미 있었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처럼, 해파리 인간 제미나이.” 그러니까 단어 셋이 나란히 나열되는 것의 효과 말이다. 두개일 때는 짝을 짓지만 셋이 되면 삼각형이 되고 그 삼각형은 무엇으로 만들어도 단단한 결속력을 지니곤 한다. 이것이 구조의 힘일 것이다. 해파리 인간 제미나이. 브로콜리 산양 작은 사람. 공교롭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이 시집의 제목은 이 시집에 수록된 시의 제목이 아니다. 하지만 ‘작은’이라는 단어를 빵부스러기처럼 따라, <작은 교회>라는 시를 읽어본다. “(전략) 여태 기도문을 잊어버리지 못했니? 대낮에도 콩알 같은
씨네21 추천도서 - <브로콜리 산양 작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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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80권의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 소설 전집>을 탐독하던 시절, 작가 소개도 본문 못지않게 열심히 읽었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인생이 소설처럼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시절 간호사로 일하며 독약 조제를 배운 덕분에 청산가리 등의 독극물 트릭을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만큼이나(푸른 제라늄 벽지 트릭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눈길을 끈 건 애거사 크리스티가 신인 작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무렵 겪은 실종 사건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남편과의 불화로 정신적 불안이 심했던 1926년 12월 초의 어느 날 애거사는 사라지고, 연못 근처에 그가 타고 다니던 차만 남았다. 경찰들이 수색에 대거 투입되고 남편 아치볼드는 곤욕을 치렀다. 11일 후 애거사는 돌아왔고 기억상실 때문이라며 상황은 대충 봉합되었으나, 당시 남편이 만나던 여자의 이름으로 호텔에 투숙한 사실 등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기억상실, 혹은 정신
씨네21 추천도서 - <애거사 크리스티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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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필연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연한 만남이 필연적 인연으로 이어지길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간절한 마음은 휴대전화 같은 빠른 매체보다는 편지처럼 느리고 불확실한 매체에 어울리는 것 같다. 단어 하나마다 고민하며 골라 쓴 편지지가 상대에게 잘 가닿기를, 그리고 편지에 담은 마음에 대한 답장을 받을 수 있기를. 1968년의 준하가 친구를 대신하여 주희에게 공들여 편지를 쓰는 모습이, 2002년의 지혜가 짝사랑하는 선배 상민에게 친구를 대신해서 정성껏 편지를 쓰는 모습과 겹칠 때 영화 <클래식>만의 서정이 느껴진다.
사실 누가 마음을 고백한다고 해서 그걸 곱게 받아줄 이유가 없는 게 당연한 지금 시대에 첫사랑 감성은 심심하고 촌스럽게 다가올 수 있고, 이는 “촌스러워! …음… 좋아, 클래식하다고 해두지 뭐…”라는 지혜의 대사로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지금은 편지가 거의 사라진 2026년이니 까마득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각본집을 천천히 넘
씨네21 추천도서 - <클래식 각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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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각본집> - 곽재용 지음 스튜디오오드리 펴냄
<애거사 크리스티 미스터리> - 마리 베니딕트 지음 백지민 옮김 문학동네 펴냄
<브로콜리 산양 작은 사람> - 이원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나를 균열내기> - 신유진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사건은 왜 항상 금요일 밤에 일어나는가> - 남은주 지음 창비 펴냄
<감정 조절> - 권혜경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8월의 책 – 여름의 사이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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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문법>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가 누리는 과거의 예술 작품 상당수는 이런 불건전한 악취미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공포물은 특히 ‘불건전한 악취미’의 신세를 지는 장르다. 사랑과 공포, 환상과 현실, 역사와 비사, 악몽과 비밀의 무의식적 역동을 조장해 재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포는 독서 혹은 상영 당시의 경험과 밀접히 연관되기 마련이며, 때로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공포의 공식(대표적으로는 <링>의 사다코 스타일로 움직이는 동아시아의 유령들)이 생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여전히 유효한 공포물도 있다. 영화평론가이자 작가인 듀나가 공포라는 장르를 다룬 논픽션 <공포의 문법>을 썼다.
영화와 드라마를 다루는 듀나의 글이 흔히 그렇듯 오래된 작품들이 꽤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그리고 (놀랍지 않게도) ‘우리는 무엇을 왜 두려워하는가’만큼이나 ‘우리는 무엇을 왜 재밌어하는가’를 다룬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인, 스티븐 킹
[culture book] <공포의 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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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 JSA>부터 <어쩔수가없다>까지 박찬욱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 각본을 모은 <박찬욱 각본 컬렉션>이 9권으로 출간되었다. 묵직한 박스세트로 묶인 9권의 책에는 오직 각본만 실려 있는데, 그 점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진다. 영화는 영화로 말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세트로 묶였기 때문에 통일감 있는 판형과 디자인이 적용되어 시나리오의 ‘분량’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데, 가장 분량이 적은 책은 <복수는 나의 것>, 가장 분량이 많은 책은 <아가씨>다. 유일하게 박찬욱 감독의 이름이 각본 크레딧에서 빠진 책은 <복수는 나의 것>이다(대신 ‘박리다매’라는 이름이 올라 있는데, 이것은 이무영, 박찬욱 두 사람의 공동 작업 팀명이다). 참, 한국영화계에서는 시나리오를 ‘책’이라고 부른다.
(개봉과 영화관 상영을 마친 영화의) 각본 읽기는 영화를 보지 않고 각본만 읽는 아주 드문 케이스를 제외하면 필연적으로 영화
씨네21 추천도서 - <박찬욱 각본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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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 공원에 가본 적 없던 유년 시절, 혼성그룹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들으며 환상을 품었다. 어른이 되어 가본 마로니에 공원에는 정작 마로니에가 몇 그루 없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조성래 시인의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은 백일장을 치른 마로니에 공원을 추억한다. 그때 그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이어폰으로 들은 바이올린 협주곡의 파일명은 ‘Mozart.mp3’였는데, 지금은 그 곡이 바흐의 것임을 알지만 그날의 장면을 수정할 수는 없다는 시인의 말에 백번 동감한다.
<햇생강이 나오면>은 젊은 시인 23명의 시를 엮은 여름 앤솔러지 시집이다. 시집의 제목은 남현지 시인의 시 <햇>에서 따왔다고 한다. 햇, 그해에 새로 났다는 뜻의 접두사. 발음이 귀엽고 생김새가 산뜻한 말. 그렇지만 햇생강에는 집에서 보내주는 말린 생강이 따라붙고, 아무리 차를 마셔도 생강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단다. 찬장 곳곳에 밀어넣곤 했던 말린 식재료
씨네21 추천도서 - <햇생강이 나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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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을 닮은 외형의 중국 ‘반려 로봇’이 사전 주문만 1만대를 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수천만원에 달하는 가격인데 배터리가 네 시간을 넘지 못해 구매자들의 항의가 잇따른다는 내용이었지만, 아직은 가짜 티가 나는 로봇 사진을 보며 기분이 묘했다. 몇년 지나면 인간과 정말 비슷해질 것 같아서일까, 그 수준까지 밀어붙여 돈을 벌겠다는 회사들의 집요함 때문일까, 혹은 위로를 얻겠다는 고객의 열정 때문일까.
성해나 작가의 기담집 <인비인(人非人)>에는 ‘인간 아닌 인간’이 얼굴을 자주 내민다. 9편의 단편은 이야기의 시간대에 따라 ‘어제’, ‘오늘’, ‘내일’로 나뉘는데, ‘내일’에 등장하는 인간 아닌 인간이 로봇이다. 미래의 어느 날에는 <아미고>에서처럼 로봇이 영화 촬영장 스턴트맨의 일자리를 빼앗아갈 가능성이 있다. 인간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장은 로봇에게 외주를 주는 게 이득이니까. 로봇의 세계는 변수가 없고 매끈해 인간처럼 동전을 던져 운을 예측할 필요가 없
씨네21 추천도서 - <인비인(人非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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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블러디 헬>은 판타지소설의 ‘김치찌개 맛집’처럼 클리셰들을 충족시키면서도 자기만의 공고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헝거 게임>을 언급하는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실랜도르왕국이 차기 왕을 선발하기 위해서 벌이는 왕이 계승전 ‘로열 블러디 리그’ 때문이다. <헝거 게임>이 계급에 따라 어린 소년, 소녀들이 살인 게임에 강제 차출된다면 <로열 블러디 헬>에서는 왕족이 왕좌를 두고 리그에 출전한다. 왕국이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서로 다른 왕비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자가 여섯, 공주가 다섯이기에 이들은 ‘형제, 자매’라기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경쟁자로 길러진다. 왕자와 공주는 13살이 지나면 리그를 준비해야 하고 형제를 잔인하게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거나 지옥에 끌려간다. 잔혹한 리그 규칙뿐 아니라 판타지의 재미를 증폭시키는 장치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왕이 리그에 출전할 자기 자식에게 선물이랍시고 하사하는 에코셸이 그 예다.
씨네21 추천도서 - <로열 블러디 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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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서 친한 관계에서 나 빼고 나머지 둘이 더 친밀할 때, 둘 사이에 나만 모르는 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은 아닌지 내가 저 아이에게 더 특별한 존재이고 싶은데 왜 그게 아닌지 못 견디게 싫고 친구 사이에 이런 질투와 모멸감을 번갈아 느끼는 내가 더 싫고. 끝내 그 관계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깍두기였다는 것을 확인할 때의 감정을 김화진 소설만큼 잘 표현한 것이 있을까. <공룡의 이동 경로>가 3-2=1에서 나머지 1의 애증 어린 감정을 묘사했다면 김화진의 신작 소설집 <텅 빈 마음 가진 채로>는 그 1이 다른 1을 찾아 2가 되었을 때, 혹은 2로 시작해 1이 떠나고 다른 1이 그 자리를 채워도 괜찮을 때, 아니 사실은 그냥 1로서 완전하게 삶이 괜찮게 느껴진 사람들이 나온다.
왜 사람은 지긋지긋하도록 긴 시간을 갖게 됐을까, 왜 나는 나인 채로 그 시간을 견뎌서 이 인생을 끝까지 완주해야 할까, 그 긴 달리기 과정에서 왜 내 트랙에는 자꾸 이상한 사람이
씨네21 추천도서 - <텅 빈 마음 가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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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마음 가진 채로> - 김화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로열 블러디 헬1> - 박소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인비인(人非人)> - 성해나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햇생강이 나오면> - 강우근, 강지이, 김보나 외 엮음 창비 펴냄
<박찬욱 각본 컬렉션> - 박찬욱, 이종용, 이재순, 박리다매 외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7월의 책 - 책 읽으면 덜 더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