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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가 <듄> 시리즈와 <컨택트>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만들기 전, 그러니까 필모그래피에 장편보다 단편의 수가 더 많던 2011년, 그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 <그을린 사랑>이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이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압도된 건 해외도 마찬가지였다.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현 국제영화상) 후보에 올랐고 국내외 평론가들의 올해의 영화 리스트 상위권에서 <그을린 사랑>을 찾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두통의 편지, 하나의 진실’이라는 포스터 문구는 이 영화가 남기는 충격을 정확히 요약한다. 유언장이기도 한 두통의 발신인은 어머니 나왈(루브나 아자발), 수신인은 쌍둥이 남매인 잔느(멜리사 데소르모 풀랭)와 시몽(막심 고데트)이다. 나왈은 자녀들에게 각기 다른 가족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잔느는 기억 하나 없는 아버지를, 시몽은 존재조차 몰랐던 형을 찾아 나선다. 이 여정은
[리뷰] 재개봉 영화 <그을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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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함께 형사 생활을 했으나 지금은 불법체류자 신세로 한국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다섯 남자가 있다. 그들은 멤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트로트 공연을 하는데, 그 영상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폭력배로부터 쫓기는 한 몽골 여성을 돕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한 조직이 몽골 여성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밴드로 위장하여 수사를 시작한다. <위장수사>는 몽골과 한국 제작사가 공동제작한 작품으로, 모든 장면이 한국에서 촬영된 코믹 범죄수사극이다. 몽골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와 엔터테이너들이 대거 출연하여 영화 내내 크고 작은 웃음을 선사한다. 한국 관객에게는 외국인들의 시선으로 보는 한국이 어떤 장르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윤제문, 기주봉 배우와 같은 묵직한 베테랑들의 활약이 극의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리뷰] 허술한 위장을 한 채 한판 잘 놀다 가는, <위장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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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로부터 격리된 섬에서 태어난 소년 스파이크(앨피 윌리엄스). 소년은 마을의 통과의례에 따라 어느 금요일 난생처음 아버지 제이미(에런 테일러존슨)와 함께 성벽 너머의 세상을 마주한다. 스파이크는 절멸의 세상에 처음 나가 경험한 적 없던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지만, 이내 어머니 아일라(조디 코머)의 불치병을 치료할 방법이 어쩌면 섬 바깥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마주한다. <28년 후>는 <28일후…>와 <28주 후>를 잇는 좀비 아포칼립스의 종장인 동시에 <28년 후: 뼈의 사원> <28년 후: 파트3>로 이어질 새 트릴로지의 서막이다. 영화는 여름 블록버스터에 관객이 기대할 법한 서스펜스와 다음 3부작에서 줄곧 탐구할 것으로 보이는 철학적 화두 모두를 인상적인 미술과 음악, 독특한 편집 리듬 안에서 배합해낸다. 세계관의 끝이며 시작인 작품의 정체성을 경제적인 러닝타임 내에서 효율적으로 독파했다는 인상이다.
[리뷰] 원시로 회귀하고 죽음을 수용하면 오히려 인간은 진화할 수 있을까, <28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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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의 외딴 마을. 태원(조관우)은 오늘도 서울로 떠난 아들을 그리워하며 하루를 견딘다. 칠성(장윤서)은 아버지를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다짐 하나로 상경했지만 공장 기계에 손을 잃는 불의의 사고를 겪는다. 그로부터 5년, 갈 곳을 잃고 노숙자들과 함께 부유하던 칠성이 예기치 못한 살인 누명을 뒤집어쓴다. 칠성이 범죄자로 지목되며 고향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 꽃 축제가 취소될 위기에 놓이고, 사건을 파헤치던 윤 기자는 그 속에 감춰진 비리를 마주한다. <세하별>은 인간성을 상실한 시대에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부자의 사연을 그린다. <참외향기> <감동주의보> 등 지역의 풍광과 정서를 고스란히 스크린에 새겨온 김우석 감독의 노하우가 강원도 철원에서도 빛을 발한다. 악한 부자와 선한 서민의 도식적인 대립 구도는 상투적으로 느껴지지만, 잔뼈 굵은 조연들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빈틈을 메운다.
[리뷰] 악한 부자와 선한 서민의 대립 구도에 갇혀 있다, <세하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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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고차에 탄 사람들에게 유서를 나눠주는 일도(박정표). 무표정의 그는 자살 모임을 가장해 인신매매를 일삼는 전형적인 밑바닥 인생이다. 같은 보육원 출신 우식(이호원)과 함께 궂은일을 도맡던 일도는 평생 아버지처럼 따르던 보스가 자신의 친형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몇십년 만에 재회한 형이 간절히 도움을 청하고, 조직은 변함없는 충성을 시험하는 상황. 두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던 일도는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건 결정을 내리게 된다. <천국은 없다>는 같은 이름 아래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형제의 비극을 다룬 액션 누아르다. 박정표 배우가 1인2역으로 일란성쌍둥이 역할을 소화하며 극을 견인해나간다. 효과음에 과하게 의존하는 만화적 연출이 종종 호흡을 끊지만, 삼류 양아치들의 언행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각본이 무너진 리듬을 빠르게 회복시킨다.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리뷰] 다소 과한 캐릭터에도 배우들의 역량이 돋보인다, <천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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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이선빈)은 동생 주희(한수아)가 실종된 후 그녀가 살던 아파트로 간다. 주희는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혀온 층간소음의 범인을 잡으러 간 후 돌아오지 않고 있다. 후천적 청각장애인 주영은 동생이 남긴 녹음 파일을 들은 후 층간소음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즈음 설상가상으로 아래층 남자(류경수)가 층간소음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면서 주영을 위협한다. <노이즈>는 김수진 감독의 데뷔작으로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층간소음이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밀실 호러로 풀어냈으며 아파트로 한국인의 무의식을 포착하려는 야심이 인상 깊다. 윤종찬의 <소름>을 계승하려고 한 흔적도 곳곳에 돋보인다. 감독은 중반까지 정교한 사운드디자인과 폐쇄적 공간, 여러 도구와 트릭의 활용으로 미스터리의 감흥을 살려낸다. 다만 후반의 초자연적 소재와 심리극 요소가 관객의 호불호가 갈릴 기점이 될 것이다.
[리뷰] 정교한 사운드 연출부터 넘쳐흐르는 야심까지 모든 것을 응원하고 싶은, <노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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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올가 솔리스(조이 살다나)는 부모를 여읜 조카 엘리오(요나스 키브레브)를 혼자 기른다. 둘의 동거는 순탄하지 않다. 엘리오는 외로움을 못 이기고 외계인과의 통신에 집착해 말썽을 피우고, 올가는 그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꿈을 포기한다. 어느 날 올가가 일하는 공군기지에 외계 신호가 잡힌다. 엘리오는 그 신호에 응답해 얼떨결에 지구를 대표하여 우주의 지성 교류 공동체 코뮤니버스로 가게 된다. <엘리오>는 디즈니·픽사의 신작으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감독 도미 시가 합류했다. 기괴하고 우아한 외계의 풍경을 담은 독창적 비주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우우와 글로던 등 캐릭터가 작품에 사랑스러움을 더해 평탄한 스토리를 보완한다. 칼 세이건의 음성과 골든디스크 등 우주적 외로움이라는 소재에 대한 애정과 <콘택트> <A.I.> <터미네이터> 등 걸작 SF의 오마주가 인상적이다.
[리뷰] 칼 세이건과 픽사의 컬래버 팝업스토어에 온 듯한 느낌, <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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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살해당한 사건으로 조선인들이 큰 슬픔에 빠진다. 일본인 기독교 선교사 노리마쓰 마사야스는 그런 조선인들을 위로하고자 수원에 터전을 잡고 한반도에 복음을 전파한다. 그는 생소한 종교를 조선에 알리는 것뿐 아니라 조선인들에게 을미사변에 대한 사죄를 구하기도 하며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까지 바꿔낸다. 그 유지를 이은 또 한명의 선교사 오다 나라지는 일제의 조선 통치가 한창인 1928년에 조선을 찾는다. 전국을 돌며 선교를 하던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다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무명 無名>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일본인 선교사의 숭고한 삶을 조명하는 종교다큐멘터리로, 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현재의 이야기와 재연드라마 톤으로 펼쳐지는 과거가 동시에 전개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두 인물의 행보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메시지가 현재에도 큰 울림을 줄 만하다.
[리뷰] 반복되지 말하야 할 과거를 위해 거듭 호명되어야 하는 이름, <무명 無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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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촉망받는 드라이버였으나 사고 이후 30년 넘게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소니(브래드 피트)가 옛 동료였던 루벤(하비에르 바르뎀)으로부터 F1 리그로의 복귀를 제안받는다. 소니는 신인 드라이버 조슈아(댐슨 이드리스)와 힘을 합쳐 리그 최하위권 수준의 팀을 살려보려 하지만 강팀과의 격차를 줄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소니에게 시급한 것은 과거 자신의 실수로 비롯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이다.
<F1 더 무비>는 <탑건: 매버릭>으로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이 된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신작으로, 지상 최대의 스포츠 중 하나인 F1 레이싱 장면을 스크린에서 생생하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영화다. 줄거리는 평범하지만, 모터스포츠의 매력을 널리 알리기 위한 디테일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거론되는 현역 드라이버 루이스 해밀턴이 제작 및 특별 출연으로 작품에 참여했다.
[리뷰] 실수로 비롯된 트라우마 위를 달리는, < F1 더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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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고교생 토모리(요미야 히나)를 비롯한 5명의 소녀가 밴드를 결성하고자 한다. 가장 큰 걸림돌은 소요(고히나타 미카) 등 멤버 몇명이 이전에 꾸렸던 밴드 ‘CRYCHIC’의 과거다. 새 밴드를 만들 것인지, 이전의 밴드를 지킬 것인지 문제로 이들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그렇게 먼 길을 헤매던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있을 곳, 새로운 밴드 ‘MyGO!!!!!’에 이른다. TV애니메이션 <BanG Dream! It’s MyGO!!!!!>를 재편집한 극장 총집편의 후편이다. 기존의 <BanG Dream!> 시리즈를 잘 모르더라도 입문하기 쉬운 별도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작품의 핵심은 물고 물리는 인간관계의 세밀한 감정적 파고다. 무한의 평행을 달리는 듯하던 다섯 멤버의 마음이 하나의 무대 위에 모였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음악의 힘이 발휘된다. 이번 극장판엔 MyGO!!!!!의 등 세곡의 필름 라이브 영상이 더해졌다.
[리뷰] 화해와 갈등의 무한 평행, 밴드 한번 만들기 참 어렵다! <극장판 뱅드림! 잇츠 마이고!!!!! 후편: 노래하자, 우리가 될 수 있는 노래 & 필름 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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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러분들은 이 세트장에서 한편의 영화를 같이 작업하게 될 겁니다.” 첫 대사부터 극중극을 연상시키는 <바다호랑이>는 연극무대와 같은 공간에서 만들어졌다. 영화는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희생자 시신을 수습한 민간 잠수사 고 김관홍씨의 이야기를 그린 김탁환 작가의 소설 <거짓말이다>를 원작으로 삼았다. 김관홍 잠수사를 모델로 한 주인공 경수(이지훈)는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인해 잠을 못 이룬다. 그러던 중 동료 잠수사 창대(손성호)가 과실치사죄로 재판을 받게 되고, 경수는 그날을 떠올리며 무죄판결을 위한 탄원서를 작성한다. 푸른 조명만으로 수중을 구현한 촬영, 마임과 같은 동작으로 시신을 안고 헤엄치는 고통을 표현해낸 배우의 연기가 돋보인다. <말아톤> <좋지 아니한가> <대립군> 등을 연출한 정윤철 감독의 신작이자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리뷰] 여백을 채우는 공통의 기억, <바다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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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빛의 마술사이자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화파 중 하나였던 인상주의의 창시자.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모네는 자신의 말년에 지베르니 생가에 있는 수련 정원을 그리는 데 골몰한다. 모네가 백내장을 앓으며 번뜩이던 시력을 점차 잃어가던 시기에 그는 250여점에 달하는 수련 연작을 제작한다. 캐나다의 논픽션 작가 로스 킹의 저서 <광기의 마법: 클로드 모네와 수련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는 모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수련 연작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간다. 배우 엘리사 라소스키가 해설로 참여한 영화는 모네의 정원과 센강 그리고 지베르니의 자연경관을 그의 작품과 교차시키며 모네의 작품 세계를 설명한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모네가 수련에 집착한 이유와 그의 캔버스에 담긴 희로애락의 정서를 흥미로운 관점으로 풀어낸 모범적인 후기 클로드 모네 입문서다.
[리뷰] 그의 정원은 결코 도피처가 아니었다, <모네의 수련. 물과 빛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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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가르치는 경민(정승민)과 피아노를 가르치는 영원(이유하)은 물물교환식 과외를 진행하면서 서로에게 점차 이끌린다. 경민에겐 3년차 연인 선희(전한나)가 있지만 결혼이란 과제 앞에서 관계가 표류 중인 모양새다. 나아가려는 여자와 머뭇거리는 남자, 그 앞에 나타난 낯선 상대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향한 ‘레슨’이 되어줄 것이다.
경계 지대에 놓인 관계를 그리는 <레슨>엔 불안과 충동이 함께 일렁인다. <이인> <올 겨울에 찍을 영화> 등을 만든 김경래 감독은 각자의 방식으로 흔들리는 세 인물들의 감정을 일상 속 미세한 기류로 포착한다. 절제된 시선 속에서 확보된 서늘한 관능이 이 유예된 멜로드라마의 매혹이다. 욕망과 책임에 대한 한편의 느슨한 도덕극처럼 보이기도 하는 <레슨>은 삼각관계 속 미묘한 균열들을 수집해 내면의 풍경화로 완성시킨다.
[리뷰] 엇갈린 시간과 각도로 사랑을 배운다는 것. 구조와 관능이 공존한다, <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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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직선으로 내리쬐는 작은 시골 마을. 함구증 증세를 보이는 초등학생 오노다 아키는 다른 친구들과 쉬이 섞이지 못한다. 어느 날 같은 반 소부에 료, 이노하라 유타와 장난스레 뒤섞이다가 고슴도치 같기도, 강아지 같기도 한 후레루를 마주한다. 후레루는 예부터 섬마을에 전해내려온 전설의 동물. 후레루만 있으면 사람들이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전할 수 있다. 텔레파시의 힘은 실로 놀랍다. 세 친구는 허물없이 빠르게 가까워졌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의 단층이 탄탄해졌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각기 다른 관심사와 취향이 생겨도 세 친구는 여전히 하나다.
그리고 이제 스무살. 섬마을을 떠나 도쿄에 상경한 이들은 기울어져가는 주택을 개조하여 함께 살아간다. 월셋집은 대도시를 부유하는 젊은이를 불안하게 하지만 내가 너고 네가 나 같은 단짝들은 동고동락하며 안정적으로 정착한다. 그리고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귀여운 후레루. 신비로운 의사소통 능력을 지닌
[리뷰] 인생에 불순물이 좀 섞여줘야 면역력도 커지는 법이지, <후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