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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을 전공했지만 4년째 다른 작가의 보조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와다(도모토 쓰요시). 혹사에 가까운 노동과 낮은 임금 속에서도 ‘좋아하는 일을 하는 어른은 없다’는 체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 사고로 해고까지 당한 그는 방바닥의 개미를 따라 무심코 그린 동그라미 하나가 SNS를 타고 전세계적 유행을 일으키며 하루아침에 인기 작가가 된다. <동그라미>는 <카모메 식당><안경>으로 국내외 많은 사랑을 받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는 현대미술을 둘러싼 논란을 영리하게 끌어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감독 특유의 담담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그림을 그린 당사자조차 해답을 알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답답함을 불교적 통찰을 경유한 서사로 풀어내며 맑고 간결한 울림을 전한다.
[리뷰] 급할수록 향을 잃는 다도(茶道)의 영화, <동그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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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립 해병대의 전설적인 특수요원 레본(제이슨 스테이섬). 20년 넘게 나라에 헌신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자살한 아내를 둘러싼 오해뿐이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거짓 소문으로 딸과의 만남마저 위태로워진 그는 건설 현장에서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의 딸 제니(아리아나 리바스)가 괴한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딸을 잃는 고통을 또다시 지켜볼 수 없었던 레본은 숨겨온 정의의 본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워킹맨>은 <비키퍼>에 이어 제이슨 스테이섬과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이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배우와 감독의 앙상블로 탄생한 액션 시퀀스는 보장된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진부한 인신매매 응징극의 클리셰를 답습하여 전작보다 돋보이는 지점을 찾기 어렵다. 또 다른 액션 스타인 실베스터 스탤론이 각본을 맡았다.
[리뷰] 요란한 포장지에 싸인 익숙한 맛이 끝내 피로감을 유발한다, <워킹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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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돕기 위해 생산된 헬퍼 봇 올리버(신주협)와 클레어(강혜인)는 빈 아파트에 버려진 채 살아간다. 떠난 주인 제임스(유준상)를 기다리던 올리버는 앞집에 사는 클레어와 주인을 찾아 나서고 두 로봇의 여정이 시작된다. 대학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재해석한 이 작품은 로봇 이야기임에도 차갑거나 기계적인 질감을 배제한다. 금속성 광택이나 첨단 장비가 없는 집 안의 세심한 인테리어는 따뜻하고 서정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며 인간의 삶에 로봇이 늘 있어온 듯한 가정 풍경을 보여주어 사실감을 높인다. 특히 인간성을 강조하기 위해 ‘비인간적 인간’을 등장시키지 않고 타자를 악역으로 만들지 않는 선택은 우리의 일상이 그렇듯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올리버에게 물건을 배송하는 택배 기사(강홍석)의 표정 변화와 두 로봇의 버전 차이를 미세하게 구별하는 디테일이 돋보인다.
[리뷰] 인간 없는 인간세계가 오히려 인간다운, <어쩌면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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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 특집 단편 드라마가 드라마 방영 10주년과 한글날을 기념하여 2주간 롯데시네마에서 특별 상영한다. 단막극을 웹드라마로 먼저 공개해 천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던 화제의 작품으로, 청소년의 고민과 사랑을 명랑하게 담아낸 판타지 사극이다. 수학을 포기한 고3 장단비(김슬기)는 수능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조선시대로 타임슬립하고 수학과 한글 연구에 몰두하는 조선의 왕 이도(윤두준)를 만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완성도 높은 디테일과 섬세한 연출이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며,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해 반전과 유머를 이어간다. 판타지다운 상상력으로 관객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이 작품은 수능으로부터 도망친 단비를 통해 오늘을 버리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도 잊지 않고 전한다. 고3 가방에서 나오는 신문물의 활용과 캐릭터의 입체적인 활약이 기발하고 사랑스럽다.
[리뷰] 귀여움에 취하고 디테일에 놀라다, <퐁당퐁당 러브: 더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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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하우스와 냥이 친구들을 되찾기 위한 개비(레일라 록하트 크레이너)의 초특급 구조 작전! 긍정 소녀 개비는 매직하우스를 훔쳐간 괴짜 수집가를 쫓아 상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신나는 모험을 펼친다. 귀여운 비주얼의 친구들과 힘을 합쳐 위기를 헤쳐나가는 개비의 하루는 아슬아슬한 재미와 맛있는 웃음, 따뜻한 우정으로 가득하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개비의 매직하우스 극장판>은 반짝이는 색감과 톡톡 튀는 연출로 아이는 물론 노는 법을 잊은 어른들까지 빠져들게 만든다. 특히 블랙핑크 로제가 부른 <APT.>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에스파의 엔딩곡 를 듣는 즐거움도 커서 컬러 도파민과 함께 뮤직 도파민이 팡팡 터진다. 엔딩크레딧엔 쿠키영상이 숨겨져 있어 재미와 설렘이 끝까지 이어진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더욱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개비와 함께 너의 색깔을 밝혀봐!
[리뷰] 도파민 터지는 초특급 구조작전, 그리고 쿠키!, <개비의 매직하우스 극장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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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박근형)은 동네에서 폐지를 줍는 것으로 생활비를 마련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두 독거노인 우식(장용)과 화진(예수정)을 만난다. 어느 날 소고기뭇국을 나눠 먹으며 오랜만에 고기의 맛을 느낀 그들은 홧김에 식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은 뒤 돈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친다. 그로부터 묘한 쾌감을 느낀 셋의 아슬아슬한 무전취식이 이어진다. <사람과 고기>는 현재 대한민국의 주요 사회문제인 노인 빈곤에 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고기를 먹는 것으로 욕망을 실현한다는 아이디어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만큼 고기를 사치품으로 여기는 계층이 사회에 많아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세 주연배우의 몸짓과 표정엔 연기 그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파노라마 부문’ 상영작.
[리뷰] 언젠가 다 똑같은 고기가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화, <사람과 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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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길을 운전하던 에그발(에브라힘 아지지)이 떠돌이 개를 차로 들이받는다. 그는 우연히 바히드(바히드 모바셰리)가 운영하는 정비소에 들르는데, 에그발의 의족 소리를 듣고 바히드는 임금 체불 문제로 항의하다 수감됐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에그발이 당시의 고문관이라 확신한 바히드는 곧바로 에그발을 납치한 채 함께 수감됐던 동료들을 찾아간다. 그에게 어떻게 복수할지 고민하는 사이, 에그발의 임신한 아내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란 정권의 부조리를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비판하고 나선 영화다. 등장하는 다섯 주인공의 서사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반체제 혐의로 수감됐을 때 수감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반영됐다. 정당한 요구를 했음에도 수감자들이 과한 형벌을 받았고 트라우마를 남겼다는 점, 그럼에도 이들의 저항이 또 다른 폭력을 야기하지 않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제78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리뷰] 가장 큰 복수는 가해자와 똑같은 인간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사고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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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네이버웹툰 <연의 편지>가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돌아온다. 악동뮤지션 이수현의 더빙으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는 아름다운 작화와 음악으로 중무장했다. 과거 아픈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할머니 댁 근처로 전학 온 소리(이수현). 하지만 과거의 힘이 너무 센 탓일까. 새 학교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다. 외로움과 고립감으로 매몰될 즈음 소리는 비밀스러운 편지 한통을 발견한다. “다음 편지를 찾기 위해선 이곳으로 가봐!” 학교 곳곳에 숨겨진 편지를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벌어지는 동화적인 장면은 일종의 교내 어드벤처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연의 편지>가 그리는 10대 아이들은 순진무구하게 행운에 기대기보다 제 손으로 다음 챕터를 여는 자력을 지녔다. 특히 이수현이 부른 메인 O.S.T <연의 편지>가 청량함을 고조시킨다.
[리뷰] 요즘 힘들다는 당신에게, 초록빛 무성한 편지를 보냅니다, <연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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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의 게임이 시작된다. 다만 이번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려놓기 경쟁이다. <보스>는 한때 명절 극장가의 대표 장르라고 해도 좋을 조폭 코미디의 계보를 오랜만에 잇는다. 1990년 후반 ‘식구파’는 조직명 그대로 끈끈한 협력으로 지역을 접수한다. 순태(조우진), 판호(박지환), 강표(정경호)는 각자 싸움 기술을 발휘해 조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지만 세월은 조직폭력배를 원치 않는다. 중국집 요리사를 꿈꾸는 순태, 춤의 매력에 눈을 뜬 강표가 각자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이 조직의 보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치열한 ‘보스 양보전’이 펼쳐진다. 추석 극장가의 ‘보스’였던 조폭 코미디 장르가 시대에 맞춰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다.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웃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강력한 개연성으로 작동한다. 모난 구석이 없이 추석 극장가 공략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잘 뽑힌 오락영화다.
[리뷰] 추석과 조폭 코미디. 여전히 먹히는 공식으로 풀어낸 안전한 오락,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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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아닌, 그 옆에 있던 조연은 시간이 지나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작품 바깥을 상상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는 원작 팬들에게 추억의 시간을 선물하듯 새로운 관점의 이야기를 선사한다. 오직 하니의 라이벌로 기능하던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이제 고등학생이 된 두 사람은 보다 고차원의 주제로 싸운다. 특히 길거리 위를 달린다는 ‘에스런’ 경기를 새롭게 창조하면서 다채로운 액션, 경기를 긴장감 넘치게 만드는 변수, 하니와 애리가 균형을 이뤄야만 하는 개연성 등을 지혜롭게 보완했다. 중간중간 유아동 애니메이션으로 전환되는 장면이 아쉬움을 남기지만 후반부 경기가 많은 것을 상쇄하기 충분하다. 노브레인 황현성이 음악감독을 맡아 스포츠물의 벅차오름을 고양시킨다.
[리뷰] 어쩌면 그동안 세상이 하니와 애리에게 주고 싶었던 것들이 마침내,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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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덴지는 전기톱의 악마와 계약한 후, 모든 것을 썰어버리는 막강한 힘의 ‘체인소 맨’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 일본 공안 소속의 데블 헌터가 되어 각종 악마와 맞서 싸우고 있다. 한편 상사 마키마를 흠모하는 덴지는 자신에게 진정한 마음이랄 게 있는지 고민하는 중이기도 하다. 여기엔 제대로 된 사회의 보살핌 없이 자란 덴지의 성장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그런 덴지에게 불현듯 찾아온 또 한명의 소녀, 보랏빛 머리칼과 신묘한 눈망울을 지닌 레제. 덴지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레제와 함께 설레는 시간을 보내지만, 뜻밖의 악마와 마주치며 잠깐의 사랑을 멈추고 결투를 시작한다. 동명의 인기 만화 중 한 에피소드를 극장판으로 만든 작품이다. TVA에서 명확히 살아나지 못했던 원작의 허무하고 충동적인 정서가 훨씬 더 잘 어우러지는 모양새를 보여준다. 일반적이지 않고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덴지의 성격이 비약 없이 자연스레 드러나면서 <체인소 맨>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가
[리뷰] 물의 고요에서 불의 열망으로, 톱질도 순애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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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원소 3부작’을 완성하는 마지막 작품. 베를린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라우라(파울라 베어)는 남자 친구와 함께 내키지 않는 여정에 오른다. 그녀는 길 한가운데에 서 있던 이방인 베티(바르바라 아우어)와 시선을 주고받는다. 이윽고 불의의 사고로 남자 친구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라우라는 베티의 손길에 의식을 되찾는다. 라우라가 베티와 함께 머물기를 간청하면서, 그리고 베티는 마치 그녀를 오랜 시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라우라를 집 안으로 들이면서 둘은 기묘한 돌봄의 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베티의 보살핌 속에 먹고, 입고, 자전거를 타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새로운 삶에 정착하려 한다. 그러나 그곳의 가구들은 어딘가 늘 고장 나며, 베티의 남편과 아들이 라우라를 대하는 태도는 이 임시적 모녀 관계에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미러 넘버 3>는 사고에서 깨어난 라우라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표층의 서사와 베티 가족이 비밀스레 공유하는 상실의 기억이
[리뷰] 페촐트의 시네마일까. 우리의 인생일까, <미러 넘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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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핀천의 <바인랜드>는 1980년대 레이건 시대에서 시작하지만 읽어나갈수록 불안과 해방 사이에 놓였던 ‘반문화’의 60년대가 피어오르는 소설이다. 일찌감치 핀천의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던 폴 토머스 앤더슨이 다시 한번 같은 작가의 <바인랜드>에서 영감을 받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로 돌아왔다. 60년대와 80년대를 가로지르며 전개되었던 소설과 달리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이야기는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재로 시대를 옮겼다.
무장혁명단체 ‘프렌치 75’에서 폭발물 제조를 담당하는 밥(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은 억류된 이민자들을 탈출시키는 급습 작전에 동참한다. 조직의 핵심 인물이자 누구보다 급진적인 철학을 지닌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는 작전 도중 군인 스티븐 록조(숀 펜)를 성적으로 모욕한 후 생포하면서 그에게 충동과 분노를 동시에 산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프렌치 75는 이후로도 미국 도심
[리뷰] 미국이라는 더러운 유산에 새로운 점화를 외치는 PTA의 ‘진짜’ 21세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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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디저트만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엉뚱하고 개성 넘치는 악당을 총집합시킨 <브레드이발소: 베이커리타운의 악당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터뜨리게 하는 코믹한 에피소드를 모았다. 먼저 거울을 향해 베이커리 타운에서 가장 아름다운 디저트가 누군지 묻는 케이크 여왕은 다른 디저트가 언급될 때마다 그들을 못생기게 만든다. 자기보다 예쁜 디저트를 모두 엉망으로 만들려던 그가 처리한 인원은 무려 53만명. 허무맹랑한 숫자에 웃음이 터지지만, 진짜 아름다운 디저트 1위가 공개되는 순간 대반전에 놀라게 된다. 정직원이 되기 위해 막힌 변기를 뚫는 악당파이, 설탕과 카페인, 셀레늄을 섞어 거짓 에너지 드링크를 파는 레드벨벳 케이크 등 독창적인 설정의 빌런들이 등장하여 친근한 에피소드를 완성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웃음까지 책임졌던 본시리즈의 힘만큼 모두를 웃게 만든다.
[리뷰] 브레드 아저씨 그만 웃겨요, 유아동을 뛰어넘는 코미디, <브레드이발소: 베이커리타운의 악당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