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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가을, 깊은 산골에 사는 17살 소녀 순옥(박서경)은 단짝 친구 정임(최주은)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듣고 황홀한 기분에 휩싸인다. 둘은 한글을 모르고 악보도 볼 수 없지만 그들만의 예술 세계에 흠뻑 빠져 있다. 현실에선 땔감과 나물, 약초를 지게에 지고 산등성이를 넘는 신세이나 두 소녀는 언젠가 서울로 올라가 가수와 단장이 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때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공기는 두 사람의 꿈을 찢어놓는다. 송일곤 감독은 1991년 가을 노년의 순옥(김혜자)과 정임(차미경)의 시점으로 일제강점기 소녀들의 이야기를 감싸며 러닝타임 내내 교차편집으로 긴장감을 높인다. 박칼린 뮤지컬 연출자가 꾸린 뮤지컬 시퀀스와 긴 세월을 오가는 편집술이 인상적이며, 노년의 순옥을 연기한 김혜자 배우의 연기는 너무도 빼어나다. 그를 보고 울지 않을 수 없다.
[리뷰] 시간을 넘나드는 편집, 문학 같은 대사, 그리고 배우 김혜자, <여전히 찬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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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가는 것들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걸 떠나려는 순간에야 깨닫죠.” 2001년, 경제위기에 휩싸인 부에노스아이레스. 구두 가게를 운영하며 탱고 밴드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훌리오(디에고 크레모네시)는 생계를 위해 독일 이민을 결심한다. 그러나 택시 운전사 마리엘라(마리나 벨라티)와의 만남에 이어 탱고 스타였던 토르토렐라(마리오 알라르콘)가 밴드에 합류하면서 그의 마음은 흔들린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여 안녕>은 <라스트 탱고> <마지막 갈채 - 탱고카페 엘치노> 등 탱고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온 헤르만 크랄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다. 영화 속 불안정한 정세는 삶의 터전을 흔들고 일상에 균열을 내지만 유려한 탱고 선율은 그 틈을 메우며 인물들을 잇는다. 시대의 상처를 기억하며 연대와 회복을 향한 예술의 힘을 전하는 작품이다.
[리뷰] 시대의 균열을 메우는 탱고, 그 낭만이 닿는 자리, <부에노스 아이레스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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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는 가사를, 교실에서는 부반장 노릇을 도맡는 소녀 미코(하라 나노카)에게 귀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터넷에서 본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그 존재를 무시하고도 싶지만, 절친 하나(구마다 린카)에게까지 악령이 붙자 성실한 미코는 어쩔 줄 모른다. 설상가상 출산으로 자리를 비운 담임선생님 대신 찾아온 임시 교사 토노(야마시타 고키)에게서까지 수상한 기운을 느낀 미코는 같은 능력을 지닌 동료들과 힘을 합치기로 한다.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된 동명의 만화를 실사화한 <보이는 여고생>은 오싹한 구석이 없지 않으나 전반적으로 코믹한 하이틴물에 가깝다. 공포는 가볍게, 추리는 싱겁게 마무리되는 한편 잇단 반전이 드러나면서 인물의 성장을 암시하는 대목만큼은 미소를 자아낸다. 롯데시네마에서 단독 개봉한다.
[리뷰] 공포는 가볍게, 추리는 싱겁게, 성장은 귀엽게, <보이는 여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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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소설가 베러티(앤 해서웨이)는 연작 <고귀한 미덕>의 완결을 남긴 채 식물인간이 됐다. 출판사는 무명의 작가 로웬(다코타 존슨)에게 남은 책의 대필을 의뢰한다. 로웬은 베러티와 일체를 이루고자 그가 누워 있는 대저택으로 향한다. 집 안엔 베러티의 남편 제러미(조시 하트넷)가 아내를 정성으로 간호 중이다. 로웬은 도착 첫날 베러티의 방에서 그가 남긴 자서전의 일부를 발견한 후 충격에 빠진다. 교외의 고립된 대저택, 유령처럼 저택을 떠도는 전임자의 망령, 은밀한 텍스트까지. 영화는 원작 소설이 품은 고딕소설의 클리셰를 과거의 할리우드 에로틱 스릴러의 문법으로 재해석한다. 그 시도는 반가우나 플롯의 논리, 캐릭터의 동기 등 스릴러에 추진력을 제공하는 디테일이 영화의 하이 컨셉에 발목 잡혔다는 인상이다.
[리뷰] 에이드리언 라인풍의 <레베카>, <베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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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마을에서 나임(조 버드)과 라이언(스테이시 클라우센)은 서로에게 끌린다. 구원 치유 의식을 당한 두 사람 앞에 나타난 건 사랑하는 서로의 얼굴을 한 괴물이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생명을 위협하는 괴물이 된다면, 두려움은 사랑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불길한 분위기와 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는 서로를 향한 마음과 생존 본능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들의 감정을 설득력 있게 전한다. 중반 이후 갈등을 풀어내는 과정과 공포 시퀀스의 전개는 다소 안전한 범위에 머무르지만 사랑과 혐오, 욕망과 공포가 뒤얽히는 설정은 익숙한 장르에 새로운 결을 더한다. <레위기>는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 앞에서도 끝내 마음을 거둘 수 없는 감정의 역설을 남기며 퀴어한 사랑과 종교적 억압을 초자연적 공포 장르로 독특하게 엮어낸다.
[리뷰] 괴물의 얼굴을 끌어안는 사랑, <레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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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카메라 크루 ‘킬링타임’의 방송 도중 크루원의 사망 사고가 발생하고, 연우(류혜영)는 살인자라는 비난 속에 활동을 중단한다. 주원(남윤수)의 제안으로 복귀를 위해 폐병원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촬영하던 이들은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존재의 위협에 휘말린다. <킬링타임>은 콘텐츠를 통해 재미를 추구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자극적인 콘텐츠로 관심을 끌려는 욕망을 공포의 소재로 삼고, 타인을 촬영하고 관찰하던 이들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음으로써 관음의 시선을 역전한다. 발상의 전환은 흥미롭지만, 심리적 긴장을 쌓기보다 폭력의 수위를 높이는 데 치중해 잔혹한 장면들이 유효한 공포로 이어지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타인의 공포를 구경거리로 삼던 이들이 되레 공포의 한가운데 놓인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를 남긴다.
[리뷰] 킬링타임을 노리는 자들의 킬링 타인, <킬링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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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이 휩쓸고 간 농장, 수많은 돼지가 산 채로 땅에 묻힌다. 살처분 구덩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돼지 ‘H’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도 인간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한편 어린 시절부터 폭력과 따돌림에 시달려온 정석은 정반대의 꿈을 꾼다. 자신을 괴롭히던 군대 선임을 살해하고 숲으로 도망친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처럼 살고자 한다. 2024년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대상을 수상한 는 인간과 짐승의 경계를 뒤집어 인간다움의 조건을 묻는 잔혹한 우화다.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인가. 고 허범욱 감독은 이 질문을 관념적인 논쟁 대신 육체의 고통과 변형을 통해 밀어붙인다. 혐오가 일상이 된 세계에서 괴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걸 일깨우는,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다.
[리뷰] 짐승 묻은 따에서 솟아오른 인간의 야만, 애니메이션의 야심, 작가의 뚝심,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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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스쿨버스 실종 사건으로 아들 선우를 잃은 소영(김현주)은 증강현실 프로그램 ‘낙원의 아이들’에서 어린 아들의 기억에 매달려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훌쩍 성장한 청년 선우(배현성)가 나타나면서 굳게 믿어온 기억과 눈앞의 현실이 충돌한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은 실종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이자 상실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포착한 심리 스릴러다. <부산행>(2016), <지옥> 시리즈 등에서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의 선택을 탐구해온 연상호는 이번에도 장르적 상상력을 빌려 인간의 욕망과 믿음의 취약함을 드러낸다. 연상호의 또 다른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한 배우 김현주와 기존 이미지와 상반된 캐릭터를 선보인 배현성의 미묘한 충돌이 이채롭다.
[리뷰] (어김없이) 모성의 숭고보다 맹목을 응시하는, 작가 연상호의 오늘, <실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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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35번째 장편영화다. 누나 상희(김민희)와 동생 상원(신석호)이 오랜만에 엄마(최명길)를 만나러 제주에 왔다. 남매의 부모가 일찍이 이혼하여 상희는 조부모의 손에 자랐고, 이 탓에 모녀는 그다지 친하지 않다. 오늘이 거의 10년 만에 보는 날이다. 상희는 외국 과자를 수입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틈틈이 짧은 실험영화를 만들며 산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리고 피아노도 곧잘 쳤다고 한다. 어머니의 옆에는 새아버지(권해효)가 있다. 둘은 함께 살며 펜션을 가꾸고 식당도 운영한다. 땅을 사서 상희와 상원에게 물려줄 만큼 돈을 제법 벌었다. 함께 커피 마시고 식사하고 바다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와중, 상희는 새아버지의 딸 주원(박미소)을 만난다. 주원은 상희의 영화를 유튜브에서 본 뒤 너무 좋다며 난리다. 그렇게 2박3일의 나날이 지나고 서울로 돌아갈 때가 되었으나 상희는 불현듯 사라져 어딘가에서 영화를 찍고 있다. 늘 가지고 다니기 좋은, 작고 귀여운 캠코더를 들고서다.
[리뷰] 광풍 속일지라도 좋아하는 것에 눈을 두기 위해, <눈 둘 데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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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오 도미타가 신시사이저로 다시 빚은 드뷔시의 선율이 뉴욕의 소음 위로 흐르고, 영화는 거리에서 살아가는 할리(아리엘 홈스)를 따라간다. 그녀는 헤로인 중독자이며 가학적인 연인 일리야(케일럽 랜드리 존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다. 일리야에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할리는 면도칼로 손목을 긋는다. 구걸하고, 훔치고, 약을 구하면서도 일리야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할리를 연기한 배우 아리엘 홈스는 실제 그 거리에서 살았다. 감독의 권유로 쓴 그녀의 회고록이 이 영화의 원안이며 상당수의 주변 인물들도 실제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섭외했다. 망원렌즈는 인물의 얼굴에 바짝 붙어 도시를 흐릿한 배경으로 밀어낸다. 숨 돌릴 틈 없는 클로즈업과 전자음 속에서 관객은 금단의 초조함을 함께 앓는다.
[리뷰] 사랑도 약도, 끊는 게 제일 어렵다, <헤븐 노우즈 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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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의 은하수에서 시작해 서서히 새벽빛이 밝아오며 대지가 깨어난다. 6분의 롱테이크 끝에 두 그루의 나무를 배경으로 멕시코 치와와의 메노나이트 마을이 보인다. 농부 요한(코르넬리오 월 페르)은 아내 에스터(미리암 토이우스)와 아이들 곁에서 성실히 살아가지만, 이웃 여인 마리안(마리아 판크라츠)과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는 이 사랑을 숨기지 않고 아내와 아버지, 친구에게 털어놓는다. 믿음이 단단한 공동체 안에서 그의 사랑은 죄이면서 동시에 가장 정직한 마음이다. 실제 메노나이트 신자들이 자신들의 말인 플라우트디치어로 연기했다. 욕망과 죄, 용서와 부활이 같은 빛 아래 놓일 때, 우리는 무엇을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영화는 해가 지고 다시 밤하늘로 돌아가며 끝난다. 한 사람의 고백이 지나간 자리에 침묵의 빛만이 남는다.
[리뷰] 사랑이 가장 깊은 죄가 될 때, <침묵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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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오락수호대’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무사히 경험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는 비밀조직이다. 수호대의 모바일게임부서 최연소 팀장 승진을 앞둔 패치(김다올)는 여느 때처럼 주인공이 엔딩을 볼 수 있도록 힘쓰다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를 시기한 동료 치트(신용우)가 계략을 펼친 것. 결국 패치는 고전게임부서로 좌천돼 망해가는 게임 ‘용검 전설’에 떨어진다. 가스파드 작가가 연재한 동명의 웹툰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픽셀 표현이다. 인물, 배경, 소품 등이 전부 각진 테두리를 갖춰 향수를 자극한다. 이러한 설정이 최신 게임을 형상화한 3D애니메이션과 공존할 때 위화감이 아닌 독창성이 느껴진다. 원작의 상징과도 같은 오프닝곡, 비트펠라하우스가 참여한 엔딩곡이 영화의 비주얼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보고 듣는 재미가 배가된다.
[리뷰] 게임의 존재 방식을 포용하는 명랑한 시선, <전자오락수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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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의 연출 데뷔작. 비노슈는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안무가 아크람 칸과 함께 현대무용극 <인-아이>로 월드 투어를 진행했고 이후 <인-아이>의 메이킹필름과 그 실황을 결합해 다큐멘터리 <인-아이 인 모션>을 완성했다. 영화의 방점은 큰 호평을 받은 <인-아이>로부터 온다. 연인으로 분한 비노슈와 칸이 온몸으로 상대를 갈망하는 몸짓을 큰 스크린에서 다시 볼 기회는 그 자체로 귀하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단순 공연 실황이 아닌 ‘영화’로 만드는 힘은 메이킹필름에 있다. 평생 춤을 춰본 적 없는 명배우와 평생 연기를 해본 적 없는 안무가. 이 둘은 같은 연습실에서 오로지 각자의 직관에 의존해 상대의 재능을 꽃피워낸다. 특히 칸에게서 연기를 이끌어내는 비노슈는 고스란히 ‘감독’ 비노슈의 역량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게 한다.
[리뷰] 자신의 직관으로 상대의 재능을 꽃피우는 몸짓 워크숍, <인-아이 인 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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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불꽃 공방이 철거를 앞두고 있다. 330년 동안 불꽃을 만들어온 이곳에서 케이타로(하기와라 리쿠)는 홀로 작업을 이어간다. 4년 전 자취를 감춘 아버지가 남긴 전설의 불꽃 ‘슈하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다. 주변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지만 케이타로의 시간은 공방 안에 멈춰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로 떠났던 소꿉친구 카오루(후루카와 고토네)가 돌아온다.
<파리스 그린이 밝는 날에>는 지나간 시간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노미야 요시토시 감독은 인물의 감정을 서둘러 설명하는 대신 빛과 색의 미묘한 변화에 마음을 싣는다. 특히 흔들리는 감정을 고스란히 옮긴 듯한 작화와 기억의 온도를 전하는 섬세한 색감이 마치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마지막 불꽃처럼 오랜 잔상을 남긴다.
[리뷰] 감정의 선과 기억의 색. 사라질 것들을 위한 불꽃처럼 아름답게, <파리스 그린이 밝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