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 그동안 너의 이름을 선뜻 부르지 못했어. 너에 대해 무지했지.” 대마를 ‘풀’이라 부르며 오래된 친구를 소개하듯 시작하는 다큐멘터리 <풀>은, <재춘언니> 등으로 노동자의 파업 현장을 기록해온 이수정 감독의 신작이다. 의사였던 권용현은 공황장애에 CBD가 효과가 있음을 스스로 경험하고 아픈 이에게 대마초를 건넸다가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농부 천호균은 남북 접경지역에서 ‘평화’라는 구호 아래 대마를 재배한다. 일년생 풀인 대마는 물과 비료 없이도 빠르게 성장하여 탄소를 흡수하는 친환경적 식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마는 ‘금지된 식물’이라 높은 철망으로 둘러싸인 밭에서 재배해야 하고 수확한 대마는 공무원의 참관 아래 줄기를 제외하고 땅에 묻어야 한다. <풀>은 대마 합법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대안적 삶을 따라가며, 해외 사례와 전문가 인터뷰,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그간 금기시되어온 대마의 진실을 친근하게 풀어낸다.
[리뷰] 목가적 풍경과 평온한 얼굴로 대마초라는 금기를 깨다, <풀>
-
낚시 유튜버 호준(김호원)이 촬영차 지방의 한적한 낚시터를 찾는다. 곧이어 영화감독인 남 감독(성환), 그리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먼 길을 떠나온 배우 희진(임채영)이 등장한다. 호준은 처음엔 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머지않아 그의 과거가 밝혀지며 조용했던 낚시터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박중하 감독의 <잔챙이>는 하고 싶은 말을 에두르지 않는 영화다. ‘잔챙이’는 선택받는 것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인물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이며, 감독과 배우라는 특수 관계에 얽혀 있는 세 인물의 대화는 어차피 ‘영화 이야기’로 귀결된다. 다 필요 없고 하고 싶은 말 원 없이 뱉고 싶은 심정의 배우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한정된 장소에서 펼쳐지는 세 인물의 대사 주고받음이 인상적이다. 주연이자 각본, 제작을 맡은 김호원 배우는 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리뷰] 일찍이든 늦게든 일어난 낚시꾼에게 기회가 온다, <잔챙이>
-
무라카미 에츠코(아마미야 소라)는 초등학생 시절 달리기 선수를 목표로 살아왔으나 이제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그녀가 다니는 미츠히가시 고등학교에 도쿄에서 전학생 타카하시 리나(다카하시 리에)가 온다. 그녀의 꿈은 조정부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조정부가 부활한다는 소식에 곧바로 부원이 모이고 이들은 다 함께 대회에 나가려 한다.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는 사쿠라기 유헤이 감독의 애니메이션으로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최애의 아이>에서 호시노 아이로 분한 다카하시 리에 등 유명 성우가 참여했다. 작품은 3D로 연출되었으며 전형적인 스포츠 동아리 영화의 공식을 따라간다. 해안가 풍광을 살리는 작화와 인물의 감정선을 과장하지 않는 소박함이 인상적이다. 조정을 사실적으로만 그려 애니메이션만 줄 수 있는 쾌감이 살아나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리뷰] 청춘이여 청량한 오늘과 쨍쨍한 내일을 향해 노 저어 나가라,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
-
탈식민시대인 21세기에도 언어가 정치 투쟁의 도구로 자리할 수 있을까. <니캡>을 보고 나면 누구든 민족 고유의 언어를 힙합 비트에 실은 채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을 것이다. <니캡> 속 항거의 주체는 니시(모 차라)와 리암(모글리 밥) 그리고 오도허티(DJ 프로비)다. 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사는 니시와 그의 친구 리암은 영어가 아닌 아일랜드어를 수호하며 아일랜드어로 랩메이킹을 한다. 이들은 우연히 아일랜드어 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는 오도허티과 연을 맺고, 힙합 밴드 니캡을 결성해 아일랜드에 파란을 일으킨다. <니캡>은 힙합과 마약, 섹스가 내러티브 내에서 질펀하게 뒤엉키고 불안정한 청춘의 1인칭 내레이션과 힙노시스풍의 타이포그래피가 범람하는 영화다. 이같은 특성으로 인해 <트레인스포팅>의 추억을 떠올리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세 주인공은 실제 2017년부터 활동 중인 밴드 ‘니캡’의 멤버들이다.
[리뷰] 필요한 도발, 유효한 저항. 우리 시대의 <트레인스포팅>이 될 자격이 충분해, <니캡>
-
-
스타 강사 유정(한채영)은 지인에게 명품 의류를 수입하는 CEO 선희(현우성)를 소개받는다. 선희의 정체는 불법을 일삼는 건달이다. 그는 유부녀인 유정에게 명품 의류를 선물하는 등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유정의 친한 동생 강수(장의수)는 선희의 사악한 계략을 알아차리나 때는 늦었다. <악의 도시>는 아침드라마의 황태자로 불린 현우성 배우의 입봉작이다. 한채영 배우가 8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목을 끈다. 영화의 만듦새는 전반적으로 아쉽다. 우선 범죄물로의 매력이 떨어질뿐더러 각 캐릭터의 이야기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플래시백으로 캐릭터의 서사를 보충하려고 애쓰지만 되레 서사의 중심을 흩뜨려뜨는 역효과를 낳는다. 약물 강간 등 성폭력을 재현하는 태도도 문제다. 성폭력이 용인 되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대신 인간에 대한 믿음이란 추상적인 문제로 갈무리하며 아쉬움을 남긴다.
[리뷰] 인간혐오로 논점을 얼버무리기, <악의 도시>
-
베트남 북부 산골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번진다. 물귀신에게 잡혀간 사람들이 머리가 잘린 채 발견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탐정 키엔(꾸옥 후이)이 조사를 시작한다. 문 부인(응옥 지엡)의 잃어버린 조카 응가를 찾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수사를 이어가던 키엔은 이 사건에 생각보다 많은 마을 사람들의 과거가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마을에서의 체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귀신이 키엔까지 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빅터 부 감독의 신작 <탐정 키엔: 사라진 머리>는 베트남 산골 마을이라는 독특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미스터리 추리극이다. 탐정 캐릭터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려 노력하는 대신 이야기 자체에 공을 들여 정면 승부를 꾀한다. 극이 다소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만 배경 특유의 음산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이를 보완한다.
[리뷰] ‘넥스트 키엔’을 기대하게 만드는, <탐정 키엔: 사라진 머리>
-
1950년대 멕시코시티, 작가 리(대니얼 크레이그)는 술과 마약에 중독된 채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리는 곁을 지켜줄 상대라면 가리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그의 호의는 종종 불쾌한 추파로 오해되거나 자신을 겨냥한 조롱을 오롯이 견뎌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외로움으로 방황하던 리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유진(드루 스타키)을 발견한다. 아름다운 유진에게 마음을 빼앗긴 리와 달리 유진은 그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유진에게 “일주일에 두번 정도만 다정하게 대해달라”며 리는 어떻게든 유진과 마주할 시간을 가지려 한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 뒤로 유진에 대한 리의 갈망은 더욱 강해졌지만 유진은 여전히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어느 날, 리는 상대와 텔레파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약초 야헤에 관해 듣는다. 어떻게 해서든 유진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리는 야헤가 있다는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정글로 유진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진의 숨겨진 진
[리뷰] 몽환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사랑의 실험, <퀴어>
-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귀도(로베르토 베니니)는 작은 서점 운영을 꿈꾸며 로마로 이주한다. 유대인 차별과 늦은 행정 처리로 인해 호텔에서 일하던 그는 학교 선생인 도라(니콜레타 브라스키)와 사랑에 빠진다. 이미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도라는 귀도와 가정을 꾸리고 아들 조슈에(조르조 칸타리니)와 단란한 생활을 이어간다. 조슈에가 5살이 됐을 무렵 이탈리아 정부는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수감시키고 조슈아와 귀도도 군인들의 손에 붙들린다. 가족의 소식을 접한 도라 역시 수용소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귀도는 조슈에가 겁에 질릴 것을 염려해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게임의 일환이라 속이고 1000점을 먼저 따는 우승자에게 선물로 탱크가 수여된다고 전한다. 어느 날 장교가 증거 인멸을 위해 수감자들을 전부 사살할 것이란 소식을 들은 귀도는 조슈에를 숨겨두고 아내 도라를 찾아 나선다. <인생은 아름다워> 는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개인의 삶을 투과해 홀로코스트
[리뷰] 재개봉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
성세찬 감독의 다큐멘터리 <빛의 혁명, 민주주의를 지키다>는 2024년 12월3일부터 윤석열 탄핵 선고일까지 꺼지지 않았던 광장의 열기를 담으려 노력한다. 12월3일 밤에 국회로 나선 익명의 시민, 재치 넘치는 깃발과 응원 봉을 들고 시위를 축제로 만든 청년,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전봉준투쟁단과 키세스 군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등이 영화에 인터뷰로 참여했다. 푸티지와 언론 보도, 정치인과 교수, 신부, 시인 등 전문가의 인터뷰가 광장을 의미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실시간으로 제작된 다큐임을 참작하더라도 다양한 의제를 다루며 최소한의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쓴 점이 인상적이다. 앵커 출신 안귀령 더불어민주당 부대변인의 내레이션도 다큐에 안정감을 더한다. 다만 지나치게 친절한 구어체의 내레이션 대사, 쟁점을 소개할 때마다 등장하는 큼지막한 타이포그래피 및 그래픽 등 낡은 감각의 연출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리뷰] 교실에서 많이 틀어줄 듯한 교과서다운 다큐, <빛의 혁명, 민주주의를 지키다>
-
탐사보도 유튜브 PD 정현수(안내상)는 수년간 검찰총장 출신 정치인 김석일(주성환)과 그의 아내 윤지희(김규리)를 둘러싼 의혹을 추적 중이다. 부부가 권력의 중심부로 다가설수록 정현수는 그들의 주변에서 발생한 기이한 사건들이 주술과 관련돼 있다는 걸 직감한다. 영화 <신명>은 정치 유튜브 채널 <열린공감TV>가 제작한 극영화다. 조금씩 바꾼 인물들의 이름은 파면된 윤석열 전 대통령 내외의 이야기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취임 전부터 꾸준히 제기된 사이비 무속 논란을 지적하려 오컬트적 세계를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풍자적 의도라고 해도 비윤리적인 서술이 난무한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다. 특히 삼풍백화점,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와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주술적인 인신공양으로 묘사하는 것은 최소한의 영화 윤리조차 위반한 것처럼 보인다. 도덕성이 부재한 풍자는 시민들이 애도와 연대로 뭉친 광장에 대한 모욕일 뿐이다.
[리뷰] 참사에 대한 몰윤리는 광장에 대한 모욕이다, <신명>
-
오키나와에서 통역사를 꿈꾸는 여고생 미우(가미시라이시 모카)는 어느 날 병원에서 운명적인 뒤바뀜을 겪는다. 음악을 만들고 싶은 선배 미나토(아카소 에이지)와 부딪치면서 음반이 바뀐 것. 맞교환한 뒤 가까워진 둘은 사귀게 되고, 이들의 인연은 성인이 된 뒤 도쿄에서도 이어진다. 함께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나토가 미우에게 갑작스럽게 이별을 요구하며 둘은 각자의 길을 걷지만 이들에게는 다시 만나야 할 이유가 남아 있다. 일본의 장기 흥행작 은 2003년부터 2024년까지의 긴 시간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사랑과 엇갈림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오키나와의 푸른 바다와 도쿄의 회색빛 풍경은 이들의 감정선과 절묘하게 연결되며 서로를 너무 배려한 나머지 결국 놓치게 되는 안타까운 순간들을 포착한다. 작품의 영감이 된 오키나와 밴드 HY의 동명 곡이 후반부 클라이맥스를 감정적으로 끌어올리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리뷰] 딱 하루만 자신을 더 챙겼더라면, <366일>
-
음악이 사라진 세계가 사람에게만 지옥은 아닐 것이다. 이제 막 동면에서 깨어난 곰 어네스트(램베르트 윌슨)는 겨우내 악몽을 꾸었다. 셀레스틴(폴린 브루너)은 자신에게 툴툴대기 바쁜 어네스트에게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친구를 챙기지만, 어네스트의 바이올린을 망가뜨리는 사고를 친다. 바이올린을 수리할 곳은 장인 옥타비우스가 사는 어네스트의 고향 샤라비. 하지만 샤라비엔 음악이 금지되었고, 옥타비우스는 마을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가브리엘 뱅상의 동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11년 만에 정식 개봉한다. 속편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멜로디 소동>엔 수채화와 파스텔화를 섞은 듯한 뱅상의 화풍이 전작에 이어 그대로 구현된다. 포용의 가치에 근간을 둔 우정과 화합이라는 작품의 대주제도 여전히 유효하다. 구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의 목소리를 드높여야 한다는 메시지가 어린이들이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선에서 그려진 점이 인상적이다.
[리뷰] 전체관람가로 그린 앙시앵레짐 타도,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멜로디 소동>
-
연인인 태민(장성범)과 민지(임영주)는 오로라를 보기 위해 먼 해외에 도착했다. 영어를 곧잘 하는 민지와 달리 태민은 영어에 익숙지 않아 외국인들과의 대화에 곤욕을 겪는다. 두 사람은 외딴곳에 자리한 숙소에 도착하고 잠시 쉬려 한다. 그러던 중 미지의 소리와 함께 민지가 사라진다. 당황한 태민은 지역의 보안관에게 민지의 실종에 대해 설명하지만, 보안관은 행적이 수상한 태민을 용의자로 의심하기 시작한다. 태민은 누명을 벗기 위해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언해줄 사람들을 찾아 헤매기에 이른다. <어브로드>는 낯선 장소에 떨어진 이방인의 공포와 불안정한 심리를 추적 스릴러 장르에 접합해 극의 톤 앤드 매너를 일정하게 이끈다. 다만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 의도적으로 설치한 서사적 비약들이 외려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202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코리안 판타스틱 관객상 등을 수상했다.
[리뷰] 흥미로운 목적지로의 경로에서 조금은 휘청휘청, <어브로드>
-
자외선에 노출되면 건강이 나빠지는 XP증후군 환자인 미솔(정지소)은 스무살이 되어서도 은둔 생활을 이어간다. 방에서 홀로 기타를 치고 노래를 쓰고 부르는 일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다. 어느 날 그녀에게 과일 트럭 장수이자 배우 민준(차학연)이 나타나고 둘은 곧장 사랑에 빠진다. 미솔은 민준의 응원에 힘입어 자신의 노래를 유튜브에 공개한다. <태양의 노래>는 2006년에 제작된 동명 일본 음악영화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원작의 설정을 따라가되 동시대 청춘 멜로의 감수성을 반영해 각색했다. 원작의 담백한 연출과 달리 화사한 역광과 뮤지컬을 보는 듯한 연출, 곳곳에 삽입된 콩트 등이 눈에 띈다. 하지만 서사가 허술하고 각 캐릭터의 사연이 피상적으로 그려져 있어 감정이입이 힘들다는 게 큰 단점이다. 정지소와 차학연의 연기와 가창력, 음악감독으로 데뷔한 이찬혁의 사운드트랙이 이러한 단점을 포장한다.
[리뷰] 두 배우의 맑은 눈망울과 목소리만 조각별처럼 빛날 뿐, <태양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