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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퍼의 빛>은 테이블톱 롤플레잉게임(TRPG)을 즐기는 10대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정해진 대본 없이 게임 플레이어들이 가상의 역할을 연기하는 TRPG의 대전제에 따라 <괴력의 아이들><새벽의 파편><기뇌국>의 주인공들은 OA 에스퍼가 제공하는 선택지에 의거한 모험을 떠난다. <에스퍼의 빛>은 청소년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형태든 될 수 있는 세계를 다루며 이들이 직접 자기만의 서사를 써나갈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이를테면 영화 속 청소년들은 게임 세계에서 특별한 이(異)능력을 부여받는다. 그 이능력은 <엑스맨>의 세계관처럼 플레이어들을 원가정으로부터 유리하는 동시에 절멸 직전인 세계를 구원하도록 만든다. 청소년 플레이어들이 회복하려는 세계의 원점은 우정, 자연, 가상현실 등 제각각이다. 한데 그 바람이 끝내 한 지점으로 수렴할 때, 통상의 영화를 보며 좀처럼 감각하기 어려웠던 낯선 감흥이 관객을
[리뷰]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그럼에도 세계에 빛을 밝히려 할 때, <에스퍼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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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표범><하얀 목련><향수><타타타 >…. 장르를 넘나들며 수많은 히트곡을 쓴 작곡가이자 뛰어난 기타리스트 김희갑, 그의 동반자이자 컬래버레이터인 작사가 양인자. <바람이 전하는 말>은 두 사람의 이웃이었던 양희 감독이 10년에 걸쳐 남긴 기록이다. 김희갑, 양인자부터 그들과 협업한 뮤지션, 뮤지컬 음악감독, 음악평론가, 혜은이 팬클럽 회원들까지 다양한 인터뷰이를 경유해 음악인으로서 김희갑의 재능과 태도를 그린다. 인물의 근거리에서 출발한 작품인 만큼 평가와 해석보다는 애정 어린 회고에 무게가 실린다. 반복되는 감탄의 말보다 곡에 사로잡힌 순간을 떠올리며 눈을 빛내는 뮤지션들, 즉흥연주를 하고 소탈하게 웃는 김희갑, 기억을 잃어가는 증상을 차분히 받아들인 채 나란히 걷는 노부부의 뒷모습 등 서정적인 고백과 여백들이 인상에 남는다. 불후의 명곡을 과거 공연 푸티지와 함께 모아 들을 수 있다는 점도 영화의 묘미다.
[리뷰] 10년의 서정적인 기록, <바람이 전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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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13일 일본군에 함락당한 난징은 생지옥이 된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사기를 꺾으려는 목적으로 학살을 저지르고 사진으로 기록하려고 한다. 길상 사진관의 집배원 쑤류창(류호연)은 우연히 일본군의 종군 사진사 이토 히데오(히라시마 다이치)에게 조수로 발탁된다. 그는 지하에 숨은 사진관 사장 진천종(왕효)에게 필름현상을 배우며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쑤류창은 필름을 인화하다가 학살 현장이 담긴 필름 원본을 발견한다. <난징사진관>은 <고주일척>을 감독한 신오 감독의 신작으로 중국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반인륜적 범죄인 난징대학살을 스펙터클로도, 민족주의 프로파간다로도 소비하지 않으려는 절제가 돋보인다. 대신 역사적 참상을 알리려는 소시민의 휴머니즘에 주목해 공감대를 불러오는 데에는 성공하나, 영화가 여러 유명한 전쟁영화의 장점을 고스란히 가져온 패치워크 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리뷰]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비극 재현, 딱 거기까지, <난징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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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시골에 있는 한 병원. 흉기에 찔린 은서(김정민)가 실린 하얀 차가 도착한다. 경찰 현주(이정은)는 정황을 파악하려고 차를 운전한 도경(정려원)의 진술을 듣는다. 친언니도 아닌 은서를 언니라 부르는 등 그녀의 진술은 심정적인 혼란으로 가득해 앞뒤가 맞지 않다. 현주는 그 진술에 숨은 진실을 찾아야 한다. <하얀 차를 탄 여자>는 드라마 <검사외전 ><로스쿨>을 공동 연출한 고혜진 감독의 데뷔작으로,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을 수상했다. <용의자 X의 헌신>을 오마주한 소품에서 드러나듯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보는 듯한 장르적 재미가 탄탄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장르적인 장치로 가정폭력의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여성의 마음을 섬세히 그려내는 미덕이 돋보인다. 이야기에 비해 평면적인 연출이 아쉬움을 남기나 두 주연의 호연이 단점을 상쇄한다.
[리뷰] 이쯤이면 히가시노 K-고 차가운 추리에 담은 뜨거운 연대, <하얀 차를 탄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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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제2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에서 먼저 관객을 만난 <생명의 은인>은 서로를 ‘생명의 은인’으로 삼은 두 여자를 따라간다. 먼저 구원자를 찾아 나선 건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은숙(송선미). 그는 자립 지원금 500만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정(김푸름)에게 자신이 오래전 화재 사고에서 세정을 구했다고 말하며 뒤늦은 보상을 요구한다.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진실은 안갯속인 가운데 각자의 이유로 돈이 절실한 그들은 뜻밖의 동고동락을 경험한다. 방미리 감독은 세정과 은숙 사이의 긴장감과 해소 과정을 밀도 높게 묘사할 뿐 아니라 영화가 일종의 추리극이자 로드무비로서 재미를 갖출 수 있도록 리듬감 있는 전개를 택했다. 여정이 다소 급작스럽게 마무리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지만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 대목의 여운 또한 진하게 남는다.
[리뷰] 상실마저 삶의 일부로 매만지는 다정한 손길, <생명의 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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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첫해이자 변화의 물결이 시작되던 2001년. 일본 문화에 열광하는 경환(심현서)이 대구로 전학해온다. 취향을 드러내기 어려운 분위기 때문에 자신을 숨기던 경환에게 재민(현우석)이 마음을 열고, 두 소년은 그룹 글로브의 음악을 듣는 5분의 시간을 공유하며 가까워진다. 경환이 재민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후 이들은 새 국면을 맞는다. 영화는 인터넷과 MP3, 일본 노래를 매개로 서로의 세계를 잠시 엿보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404 Still Remain’으로 사람과 장소는 사라져도 그때의 감정은 남아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404 Not Found가 아닌 데서 오는 안도감, 그리고 5분처럼 짧았던 그 시절이 여전히 기억에서 재생된다는 위안의 메시지. 노래 한곡의 재생 시간만큼 5분 동안 펼쳐지는 결말의 힘이 크다.
[리뷰] 5분의 노래 5분의 엔딩 그리고 404 Still Remain, <너와 나의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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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선희, 그림 그리는 준상 그리고 시를 쓰는 지봄.” 무척이나 가뿐한 영화의 시놉시스처럼, <구름이하는말>은 정말 구름의 자유로운 모양새를 이야기로 치환한 듯한 작품이다. 부산에 있는 작은 카페 ‘매일이다르다’에선 곧 2인조 밴드 ‘현수와 선희’의 작은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이에 준상(이시오)은 공연의 포스터를 그리게 되고, 선희(배선희)는 노래를 준비한다. 이 과정에 청중으로 참여했던 지봄(이지봄)은 선희의 곡에 가사를 붙이게 된다. 재개발로 인해 정든 집을 떠나야 하는 지봄에게 이 일은 꽤 기분 좋은 전환의 계기가 된다. 이렇게 창작의 맥락과 협업으로 자연스레 얽혀가는 많은 이의 모습이 차근차근 포개어진다. 가까운 곳에 사는 이들이 서로의 옷깃을 스치며 살짝 만났다가 헤어지고, 각자의 일상을 사는 느슨한 군상극이다. 여기엔 지나치게 예술 작업을 지나치게 우상화하는 과잉의 터치도 없고, 감정의 골을 억지로 뽑아내려는 드라마타이즈의 압박도 없다. <구름이하
[리뷰] 구름의 테두리처럼 자유롭고 흐릿하게 뻗쳤다가, 모였다가, <구름이하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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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제시 플레먼스)는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들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고 믿는다. 돌보는 벌집에서 일벌들이 떠나고, 엄마는 임상시험 부작용으로 수년간 입원해 있다. 직장 동료는 일하다 다치고도 보상은커녕 페널티를 받는다. 벌과 인간을 겹쳐보고 두종이 외계인 탓에 위기에 처했다고 믿은 테디는, 사촌동생 돈(에이든 델비스)과 함께 몸을 단련하고 이론을 학습하며 지구를 구할 계획을 세운다. 호일 슈트와 복면으로 무장한 두 사람은 외계인으로 의심되는 미셸(에마 스톤)을 납치해 지하실에 감금하고선 협상을 시도한다. 미셸은 테디가 근무하는 바이오기업, 벌집 군집붕괴현상의 주범으로 추정되는 살충제 제조사이자 엄마가 의식을 잃게 만든 바로 그 회사의 CEO다. 추궁하는 테디와 부정하는 미셸 사이에서 돈은 혼란스럽다.
알려져 있듯 <부고니아>는 장준환 감독의 2003년작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일단 본래 아이디어부터 란티모스의 언어로 재현되기에 적합했고,
[리뷰] 더는 가엾지 않은 자멸의 종에게, <부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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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고양이를 영험한 동물로 꼽지만, 충실한 강아지 인디도 어느 날부턴가 불길한 기운을 느끼기 시작한다. 주인 토드(셰인 젠슨)의 건강 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그의 곁에 의문스러운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피를 토하고 병원에 실려간 토드는 무슨 일인지 퇴원 직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낡은 별장으로 향한다. 외진 숲속에서 자신의 눈에 아른거리는 흉측한 형상으로부터 인디는 토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벤 리언버그의 <굿 보이>는 견생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호러영화다. 이따금 허공을 향해 짖는 반려견의 행동이 마치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서늘함을 포착하는 듯 풀어낸 영화의 발상이 인상적이다. 다만 견생이 마주할 실질적 공포를 묘사하기보단 주인을 위한 충직만으로 반복되는 서사는 과감한 시도에 비해 얄팍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명견 인디의 호연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다.
[리뷰] 영견(靈犬)도 곧 충견(忠犬)이기에 가능했다, <굿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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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정애화)와 아들(윤원준), 치매 노모(변중희)와 LA에 정착한 춘배(김종구)는 어느 날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요양원에서 어머니를 오늘 데리러 가겠다고 하지만 설날 준비로 바빠 얼버무리고 만다. 오랜만에 얼굴을 비친 딸 윤희(이주우)와 사위(손문영)는 약속과 달리 한복을 입고 오지 않고, 아들이 느닷없이 멕시코계 여자 친구를 부르면서 춘배의 심기는 더 불편해진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사라지고 만다. 익숙한 명절 집안을 배경으로 하는 <라리랑>은 보통의 가족이 품고 있는 갈등을 능숙하게 저글링한다. 온 가족이 모인 식탁부터 엄마와 아들이 단둘이 마주한 세탁실까지, 말 한마디가 걷잡을 수 없는 다툼으로 번지는 과정을 위트 있게 연출한 대화 시퀀스들이 인상적이다. 가족은 일심동체여야 한다는 안정적인 결말로 향하지만 배우들의 조화로운 앙상블이 개성을 만든다.
[리뷰] 재료와 균형이 어우러진 한상차림처럼, <라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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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에서 나만 탈출했다.” <1980 사북>은 혼자 살아남았다는 한 남자의 죄책감 서린 목소리로 열린다. 1980년 4월, 저임금 착취와 어용노조의 폐해에 맞선 사북의 광부들이 항쟁을 벌였다. 유혈 사태는 노동자, 경찰, 노조원의 가족까지 폭력의 가담자와 피해자를 뒤섞어놓았다. 계엄군 투입 직전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나, 이후 시위에 참여한 광부들이 체포·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사북항쟁의 트라우마는 짙어졌다. 영화는 시대의 야만을 단순히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존자들의 엇갈리는 증언을 모자이크해 이 혼란을 기록하려 한다. 100여명 이상을 인터뷰하고 방대한 아카이브를 수집해 국가 폭력이 공동체를 와해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오늘날 되풀이된 풍경에도 닿는다. 다중의 진실과 슬픔이 맺힌, 그러나 잊혀진 역사를 들여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곧 <1980 사북>의 윤리다.
[리뷰] 낯선 역사의 내장까지 침투해 기억을 깨우는 카메라, <1980 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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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하객으로 만난 데이빗(콜린 패럴)과 새라(마고 로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동차를 빌려 타고 길을 떠난다. 목적지도 이유도 분명치 않던 그들의 여정은 점차 과거를 향하고, 문을 통과할 때마다 가슴에 묻어둔 장면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슬픔과 후회, 못다 한 말과 놓친 순간들. <애프터 양>과 <파친코>를 만든 코고나다 감독은 회피해온 우리의 감정을 소환해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진다. 음악 또한 지나칠 수 없는 부분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히사이시 조는 자신만의 맑고 절제된 선율로 특별한 여정에 햇살을 드리운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려면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명랑한 언어로 말하는 이 영화는 기억의 여행길에 관객을 초대해 다시 사랑할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한다.
[리뷰] 마음의 결절을 풀어가는 또 한번의 시간여행, <빅 볼드 뷰티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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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니콜 키드먼)는 로봇 자동화 회사의 CEO다. 일상을 통제하는 데 익숙한 그는 지배-복종 역학을 따르는 성적 판타지를 숨겨왔다. 어느 날 출근길, 그는 목줄 풀린 개를 단숨에 진정시키는 사무엘(해리스 디킨슨)에게 이끌린다. 회사에서 두 사람은 대표와 인턴으로 재회한다. 로미를 꿰뚫어보듯 사무엘은 도발적인 제안을 하고, 이들은 밀회를 이어간다. 불륜, 나이 차, 회사 내 위계 등의 요소가 이 관계를 문제적이고 더 자극적으로 만들지만, 로미와 사무엘의 BDSM 역할극 자체는 상호 동의하에 규칙을 조율하며 하는 놀이다. 이때 카메라의 관심은 로미가 느끼는 감각과 심리에 있다. 영화는 대화와 행위의 리듬, 권력의 밀고 당김을 노련하게 조절해 긴장을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도 방향성을 유지하며 로미가 억압된 욕망을 해방하고 삶의 균형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다.
[리뷰] 익숙한 설정에 깔끔하게 녹아든 욕망 탐구, <베이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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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베일리(니키야 애덤스)는 훨훨 날아 떠나고 싶다. 싱글 대디 버그(배리 키오건)와 오빠 헌터(제이슨 부다)와 함께 무단 점거한 집에 살고 있는 베일리 주변은 엉망진창이다. 철없는 아빠는 새 여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린다며 난리법석을 떨고, 이복오빠는 불량한 무리들과 어울리느라 정신이 없다. 친엄마가 가까이 살지만 동생들 돌보기에도 버겁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마을을 떠나 자연 속에서 위안을 얻던 베일리는 어느 날 버드(프란츠 로고프스키)라는 이름의 한 남자를 만난다. <베일리와 버드>는 <붉은 거리>(2006), <피쉬 탱크>(2009), <아메리칸 허니>(2016)로 칸영화제를 휩쓴 앤드리아 아널드 감독의 신작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팔색조 감독이 이번에는 사실주의와 드라마,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술적 리얼리즘을 선보인다. 둥지를 떠나고 싶은 새와 다시 둥지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새가 나란히 날아가는 마술적인 순간, 사랑과 희
[리뷰] 마술적 리얼리즘이 선사하는 자유, <베일리와 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