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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1979), <블레이드 러너>(1982) 등을 거쳐 대표적 비주얼리스트로 자리 잡은 리들리 스콧과 두 여성 무법자의 이야기를 들고 나타난 신인 작가 캘리 쿠리. 이들의 만남이 이토록 오랫동안 영화사에서 회자될 것임을 예상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1993년 국내에 첫 개봉했던 <델마와 루이스>가 그로부터 30여년 만에 다시 관객을 찾는다. 이제는 여성 서사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델마와 루이스>는 여전히 세심하고도 풍성한 독해를 요청한다. 영화는 델마(지나 데이비스)의 집, 루이스(수전 서랜던)가 일하는 식당에서 시작해 창공을 가르는 선더버드 위의 두 여자로 마무리된다. <델마와 루이스> 는 이토록 상반된 시작과 끝 사이를 채우는 여정에 관한 로드무비다. 두 인물이 자리를 바꿔가며 단독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비틀린 서부극이자 관찰과 애정이 뒤섞인 실패한 추격전이다. 델마와 루이스는 친구, 연인, 모녀, 사제 등 다양한
[리뷰] 재개봉 영화 <델마와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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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덥지근한 여름날, 소설가 니콜(산다 코드레아누)과 캠걸 루비(수헤일라 야쿠브)가 사는 아파트에 친구 엘리즈(노에미 메를랑)가 찾아온다. 화목한 저녁 식사 후 발코니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세 친구는 전부터 유심히 보던 맞은편 이웃집 남자의 초대로 흥겨운 밤을 보낸다. 아침이 밝고 그의 집을 다시 찾은 세 친구는 그곳에서 참혹한 시체로 변한 남자를 발견한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배우 노에미 메를랑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으로 호흡을 맞춘 감독 셀린 시아마가 각본에 공동 참여했다. 푹푹 찌는 폭염을 배경으로 그려낸 세 여성의 시체 은닉기는 살갗이 끈적이는 습도를 형상화한다. 이 꿉꿉함의 원천은 공기처럼 떠도는 가부장제와 강간 문화에서 비롯된다. 코믹과 호러를 넘나들며 경쾌하게 질주하는 영화의 직선적인 전개는 미묘한 불쾌감을 겪고 있던 여성들에게 통렬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리뷰] 살갗이 끈적이는 꿉꿉함, <발코니의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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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경(한예리)과 수환(김설진)은 각자 파혼한 이후 깊은 슬픔을 견디고 있다. 중증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영경은 결국 국어 교사 일을 그만둔 상태이며 철공소를 운영하고 있는 수환은 오랫동안 류머티즘을 앓아온 탓에 점점 움직이는 게 힘들어진다. 우연히 지인의 결혼식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사랑에 의지한 채 다가오는 죽음을 견딘다. <푸른 강은 흘러라>에 이어 강미자 감독이 17년 만에 내놓은 신작으로 권여선 작가의 단편 <봄밤>이 바탕이 됐다. 원작에 비해 간결하고 절제된 연출을 보여주되 인물들의 감정은 더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영경과 수환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자신의 죽음이 아닌 서로의 부재다. 술에 취해 바닥에 쓰러진 영경과 병으로 인해 걸을 수 없는 수환의 처절한 몸부림은 대사 없이도 상대에게 닿고자 하는 둘의 간절함을 대변한다. 시를 반복해 읊듯 표현된 영경의 대사 또한 행간에 담긴 그의 감정들이 절절히 전해진다.
[리뷰] 오직 당신만이 이해할 나의 공백,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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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아이(진연비)는 대만 명문 제일여고에 입학했지만 학교 얘기가 나오면 움츠러든다. ‘짝퉁’ 소리를 듣는 야간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낮에 자신의 책상을 쓰는 주간반 학생 민(항첩여)과 친해지면서 학교생활에 적응해나간다. 공고하던 둘만의 세계는 머지않아 주야간반 사이의 신경전, 동급생 루커(구이태)를 향한 미묘한 감정이 겹치면서 균열이 생긴다. <우리들의 교복시절>은 10대 남녀가 등장하지만 익숙한 대만 로맨스영화의 길을 걷지 않는다. 삼각관계의 낭만 대신 치열한 입시제도와 수험생의 극심한 스트레스, 가난과 계급 문제, 재난 상황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진지하게 다룬다. 무엇보다 영화는 한 사람의 성장에 주목한다. 엄마의 기대나 사회적 압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잘하고 싶은 일을 찾았을 때 얼마나 빠르게,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공들여 묘사한다.
[리뷰] 어여쁜 청춘 연가가 아닌, 날것의 성장통, <우리들의 교복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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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의 공룡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인간-공룡 공존의 시대. 특수임무 요원 조라(스칼릿 조핸슨)는 거대 제약회사 대표 마틴(루퍼트 프렌드)에게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막대한 성공 보수를 줄 테니 신약 개발에 필요한 거대 공룡들의 유전자를 채취해달라는 것. 신약의 필요성에 공감한 조라는 팀원들과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한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쥬라기 월드> 트릴로지의 세계관을 잇되 오리지널 <쥬라기 공원> 시리즈의 피가 진하게 흐른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별점을 가진다. 그러니까 제대로 무섭다. 사지가 굳고 눈물만 흐르는 등 인간이 근원적 공포와 마주했을 때의 신체 반응을 생생히 담아낸다. 친숙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부터 새롭게 등장한 작은 초식공룡 아퀼롭스까지.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공룡들의 향연은 <쥬라기> 시리즈에 기대하는 재미를 고스란히 충족시킨다.
[리뷰] 사육된 공포가 끝나고, 진짜 세계가 입을 벌린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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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입시전형을 위해 엄마 손에 이끌려 지방 소도시 학교에서 전학 절차를 밟는 기준(이재준)은 서울 아닌 그 장소가 영 내키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기준의 어머니(고서희)가 담임 선생님과 교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신발장에 둔 기준의 아디다스 운동화가 사라진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복도를 비추는 CCTV는 고장이 나버려 누가 운동화를 가져갔는지 알 수 없다. 기준만이 느끼고 있던 찜찜함은 운동화가 사라진 이후로 기준의 어머니와 선생님에게도 전염되듯 옮아간다.
장병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여름이 지나가면>은 13살 기준이 전학 간 학교에서 보내는 여름 한철을 담는다. 2017년 첫 단편영화 <맥북이면 다 되지요>로 광화문국제단편영화제 국내경쟁 대상을 받은 장병기 감독은 2019년 <할머니의 외출>을 연출했다. 첫 번째 장편인 이 영화는 얼핏 보면 소년 시절의 한때를 다룬 성장영화로 보인다. 그러나 성장의 문턱에 선 아이들은 도둑질과 폭력,
[리뷰] 결핍도, 풍요도 모르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여름이 지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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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국내 최초 개봉 이후 세번의 재개봉을 거듭해왔으니, 벌써 네 번째 재개봉이다. 올해로 35살을 맞이한 영화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그린스크린과 VFX, AI와 XR 등 시각적 기술이 첨단화된 지금, 오히려 단출하고 정직한 고전영화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인 1940년대,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 사는 토토(살바토레 카시오)는 마을의 유일한 영화관인 시네마 천국을 자주 찾는다. 영화를 다 본 뒤 영사실을 방문하는 게 그의 루틴이다. 하지만 소년을 둘러싼 대부분의 어른은 영화를 향한 그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머니에 따르면 전쟁통에 영화는 사치스럽고, 영사 기사 알프레도(필립 누아레)는 영사 기사가 딱히 좋은 직업이 아니라고 한다. <시네마 천국>은 토토의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를 따라 영화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그의 순수한 사랑과 소명을 그린다. 죽음과 고통으로 얼룩진 전쟁의 참극 속에서도, 깊은
[리뷰] 재개봉 영화 <시네마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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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민준현)은 인수(정주홍)가 10년 전 훔친 금불상을 강탈해 도망가던 중 귀걸이 살인마에게 살해당한다. 그는 정연식(정경호)의 부하로 최근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살인마다. 흥신소를 운영하는 최무달(성홍일)과 경찰 정병욱(박채익)은 살인마를 추적하던 중 연식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흥신소>는 한국영화배우협회의 제작 지원을 받은 배우 김태하의 장편 데뷔작이다. 영화의 만듦새는 아쉬움이 크다. 일단 금불상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 인육을 먹는 사이코패스라는 소재를 매끄럽게 접합하는 데 실패한 시나리오가 가장 큰 문제다. 비속어를 비효율적으로 남발하는 대사와 구멍 많은 설정, 난삽한 전개와 캐릭터의 허술한 동기가 영화를 보는 동안 의문을 자아낸다. 연출 면에서도 납치와 살인, 인육 등 유혈이 낭자한 이미지를 전시할 뿐 왜 그런 설정이 있어야만 하는지 당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리뷰] 이런 인육 설정이라면 양들도 침묵에서 깰 듯하다, <흥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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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털로 뒤덮인 거대한 유인원 ‘사스콰치’는 북미 지역의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미확인 생물이다. 목격담만 무성하고 실제로 발견된 적 없는 거대생물이 지금도 자연에서 지내고 있다면? <사스콰치 선셋>은 바로 이 발칙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숲속에서 태고의 상태로 사계를 보내는 사스콰치 가족의 일상을 담은 영화는 지극히 원초적이다. 먹고, 자고, 싸고, 교미하는 이들의 생애는 철저히 욕구에 의해 움직인다. 게다가 괴성과 몸짓이 전부인 의사소통을 바라보고 있자면 관객들에겐 당혹감이 먼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스콰치 선셋>은 대사 한줄 없는 야만의 생태 속에서 가장 고귀한 희로애락의 정서를 끌어낸다. 엄습하는 인간 문명의 공포에도 안간힘을 다해 살고자 하는 본능의 로드무비는 우리를 웃게 하고, 울리고,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아리 애스터가 제작을 맡았으며, 2024 선댄스영화제 상영작이다.
[리뷰] 본능과 날것의 배설물로도 인간을 웃기고 울리네, <사스콰치 선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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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만 열면 술술 나오는 거짓말로 사기에 달인이었던 제니(강지영)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지리산 근처 작은 마을 용두골에 도착한다. 평생 명품을 두르고 산 그에게 한적한 전원생활은 무료할 뿐이다. 그러던 중 제니는 우연히 전설의 담금주 ‘천년삼주’의 존재에 대해 듣게 된다. 부르는 게 값인 명약을 훔치면 크게 한탕을 노릴 수 있다는 생각에 곧장 약초꾼 된장할배(유순웅)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9살 꼬마 된장이(이주원)가 밤낮으로 창고를 지키는 탓에 계획은 꼬이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제니는 말썽꾸러기와 며칠 밤을 같이 보내기로 한다. <된장이>는 조한별 감독의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이자 장편 데뷔작이다. 허영과 범죄에 빠진 도시의 어른이 때 묻지 않는 시골 소년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코믹한 방식으로 그려냈다. 영화 전반에 감도는 무해하고 순박한 정서는 지리산이라는 공간적 배경의 덕이 크다. 평생을 자연과 함께 자란 아이는 여전히 세상을 동화처럼 바라보고, 호시탐탐
[리뷰] 구수하지도 깊지도 않은 싱거운 무해함, <된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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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괴담 유튜브를 운영하는 다경(주현영)에겐 조회수와 구독자 수를 올려줄 새로운 공포 콘텐츠가 간절하다. 결국 다경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실종 사건이 발생하는 광림역에 방문해 해당 역의 역장(전배수)에게 역사에서 벌어진 괴이한 일들을 전해 듣는다. 재수를 준비하는 학생, 성형을 바라던 사람, 지하철 내에서 이상한 용액과 접촉한 직장인 등 광림역 괴담을 소개한 영상이 반응을 얻으면서 다경의 콘텐츠는 단숨에 최고 조회수를 기록한다. 채널 구독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다경에게 주변의 축하가 이어진다. 그러던 중 괴담 속 사건의 실제 피해자가 찾아와 유튜브 영상을 전부 내려야 한다고 경고한다. 다경은 겁을 내면서도 늘어가는 조회수, 구독자 수를 포기하지 못한 채 반복해 괴담을 수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경은 점점 예민해지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동료 우진(최보민)과의 사이마저 틀어지고 만다.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는 역장에게 다경은 마지막 괴담을 청하고, 그는 광림역에 관한 비밀
[리뷰] 속도감 있는 괴담단편선, <괴기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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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가 <듄> 시리즈와 <컨택트>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만들기 전, 그러니까 필모그래피에 장편보다 단편의 수가 더 많던 2011년, 그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 <그을린 사랑>이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이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압도된 건 해외도 마찬가지였다.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현 국제영화상) 후보에 올랐고 국내외 평론가들의 올해의 영화 리스트 상위권에서 <그을린 사랑>을 찾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두통의 편지, 하나의 진실’이라는 포스터 문구는 이 영화가 남기는 충격을 정확히 요약한다. 유언장이기도 한 두통의 발신인은 어머니 나왈(루브나 아자발), 수신인은 쌍둥이 남매인 잔느(멜리사 데소르모 풀랭)와 시몽(막심 고데트)이다. 나왈은 자녀들에게 각기 다른 가족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잔느는 기억 하나 없는 아버지를, 시몽은 존재조차 몰랐던 형을 찾아 나선다. 이 여정은
[리뷰] 재개봉 영화 <그을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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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함께 형사 생활을 했으나 지금은 불법체류자 신세로 한국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다섯 남자가 있다. 그들은 멤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트로트 공연을 하는데, 그 영상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폭력배로부터 쫓기는 한 몽골 여성을 돕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한 조직이 몽골 여성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밴드로 위장하여 수사를 시작한다. <위장수사>는 몽골과 한국 제작사가 공동제작한 작품으로, 모든 장면이 한국에서 촬영된 코믹 범죄수사극이다. 몽골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와 엔터테이너들이 대거 출연하여 영화 내내 크고 작은 웃음을 선사한다. 한국 관객에게는 외국인들의 시선으로 보는 한국이 어떤 장르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윤제문, 기주봉 배우와 같은 묵직한 베테랑들의 활약이 극의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리뷰] 허술한 위장을 한 채 한판 잘 놀다 가는, <위장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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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로부터 격리된 섬에서 태어난 소년 스파이크(앨피 윌리엄스). 소년은 마을의 통과의례에 따라 어느 금요일 난생처음 아버지 제이미(에런 테일러존슨)와 함께 성벽 너머의 세상을 마주한다. 스파이크는 절멸의 세상에 처음 나가 경험한 적 없던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지만, 이내 어머니 아일라(조디 코머)의 불치병을 치료할 방법이 어쩌면 섬 바깥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마주한다. <28년 후>는 <28일후…>와 <28주 후>를 잇는 좀비 아포칼립스의 종장인 동시에 <28년 후: 뼈의 사원> <28년 후: 파트3>로 이어질 새 트릴로지의 서막이다. 영화는 여름 블록버스터에 관객이 기대할 법한 서스펜스와 다음 3부작에서 줄곧 탐구할 것으로 보이는 철학적 화두 모두를 인상적인 미술과 음악, 독특한 편집 리듬 안에서 배합해낸다. 세계관의 끝이며 시작인 작품의 정체성을 경제적인 러닝타임 내에서 효율적으로 독파했다는 인상이다.
[리뷰] 원시로 회귀하고 죽음을 수용하면 오히려 인간은 진화할 수 있을까, <28년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