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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을 거래하는 시장이라는 강렬한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결핍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귀시의 문을 두드린다. 인정욕구, 아름다운 외모, 성적과 실적, 유명세까지. 서로 다른 갈망은 귀신의 힘을 빌려 실현되지만 거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귀시>는 이러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에 가까운 형식으로 풀어낸다. 한 인물의 일화가 끝나면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방식으로 독립적인 서사들을 이어가지만 서사를 응집하는 힘은 다소 약해 각각의 욕망이 단순 나열되는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귀신 시장이라는 독자적인 공간을 만들어낸 발상이 낯설고 신선해 구조적 빈틈을 메운다. 다수의 K팝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며 탁월한 감각을 인정받아온 홍원기 감독은 <귀시>를 통해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이 어떻게 균열을 일으키고 파국을 불러오는지 적절히 포착해낸다.
[리뷰] 납득할 수 있어야 무서울 수 있다, <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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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두산중공업의 석탄발전소 수출을 저지하기 위해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 강은빈, 이은호는 게릴라 시위에 나선다. 기후 위기의 절박함을 드러내기 위한 활동으로 인해 두 사람은 법적 분쟁에 휘말린다. 활동가 은빈은 재판이 진행되며 자신이 기후 위기 문제에 관심을 품게 된 여러 이유를 설명한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영화는 폭염에 취약한 쪽방촌, 석탄발전소 가동을 재개한 삼척, 폭우와 가뭄으로 한해 농사를 망친 농부들까지 기후 재난의 현장으로 뻗어간다. 다큐멘터리 <바로 지금 여기>는 두산중공업 시위라는 재판에서 시작하여 작금의 세대가 직면한 기후 재난의 현실을 폭넓게 살핀다. 다만 각 담론들이 유기적인 호흡을 구축하며 새로운 의제를 던지기보다는 단편적인 나열에 그친다. 사회 각 계층에서 겪고 있는 기후 불평등의 사례집보다 4년에 걸친 법적 투쟁에 더 마음이 가는 이유다.
[리뷰] 사례집보단 투쟁의 지난한 시간에 마음이 간다, <바로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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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사진전을 연 쑤밍이(정여희)는 필름 카메라 셔터와 함께 2013년 여름으로 돌아간다. 등굣길 아침마다 동선이 겹치는 옌리야오(시백우)를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쑤밍이는 멀찍이 그의 사진을 찍으며 마음을 키워온다. 다소 왈가닥 구석이 있는 그는 교복 치마 아래 체육복 바지를 입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보수적인 학교는 그를 두고 복장불량이라 지적하고, 이를 지켜본 옌리야오만이 그에 대항하는 시위를 연다. 빠르게 가까워진 둘. 옌리야오는 제안 섞인 고백을 한다. “이유는 묻지 말고 졸업 때까지 사귀자”고. 푸른 잎사귀, 길어진 오후 그림자, 느슨한 바람 등 여름 풍경을 가지런히 배열한 <썸머 블루 아워>는 간질거리는 풋사랑의 맛을 아름답게 펼쳐낸다. 쑤밍이의 묵중한 가족사나 청옌(임자굉)과의 우정 등 한데 뒤섞이기 어려운 주제들이 한꺼번에 나열되기도 하지만, <상견니>의 애절함을 통과한 배우 시백우의 소년미가 무척 인상적이다.
[리뷰] 그림자 지는 오후, 교실 풍경은 그리운 여름 소다맛, <썸머 블루 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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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 로즈(올리비아 콜먼)와 테오 로즈(베네딕트 컴버배치). 금실 좋은 이 영국인 부부는 미국에 정착한 지 10년째다. 테오는 미국에서도 스타 건축가로 이름을 떨치는 반면, 아이비는 파인다이닝 주방을 수놓던 영국에서와 달리 자신의 요리 실력을 집 부엌에서만 사용한다. 테오는 그런 아이비를 위해 마을의 빈 건물을 매입하고, 아이비는 게 요리 전문점을 열며 소소한 사업을 시작한다. 어느 날, 캘리포니아에 전례 없는 태풍이 몰아친다. 이윽고 모든 관계가 일시에 뒤집힌다. 테오가 하루아침에 건축가로서의 명성을 잃은 반면 아이비는 눈떠보니 스타 셰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로즈 부부의 가계 부양은 아이비가, 살림은 테오가 도맡는다. 관계의 변화는 수면 아래 도사리던 부부 사이의 갈등을 조금씩 증폭하기 시작한다.
<더 로즈: 완벽한 이혼>의 장르는 코미디다. 또한 이 영화는 80년대 할리우드 흥행작인 <장미의 전쟁>을 리메이크했다. 따라서 이 작품으로부터 혼인 제도
[리뷰] ‘타이밍’을 정확히 인지한 할리우드 블랙코미디, <더 로즈: 완벽한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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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초현실적 설정도 없고, 종교도 등장하지 않는다. 딱히 폐쇄적인 집단으로 배경을 좁히는 것도 아니다. 연상호의 어느 작품과 가장 비슷하냐고 묻는다면 꼽을 수는 있으나 말을 얹기 조심스럽다. 선입견이나 기대를 제하고 관람하는 편이 나으리란 판단이 들어서다. <얼굴>은 2018년 그래픽노블 형태로 먼저 세상에 공개됐다. 영화화하며 일부 캐릭터를 압축하는 등 각색이 이루어졌으나 큰 줄기와 틀은 같다. 동시에 단지 원작에 충실한 영화라고 뭉뚱그리기엔 할 말이 많은 작품이다.
동환(박정민)은 공방 ‘청풍전각’의 장인 임영규(권해효)의 아들이다. 선천적 시각장애가 있는 영규는 손의 감각을 바탕으로 도장을 파는 시각 예술가다. 기적적인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칭송받는 그에 관한 TV다큐멘터리가 한창 촬영되고 있다. 와중 동환은 40년 전 집을 나간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 정영희(신현빈)가 당시 이미 사망했고 어쩌면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는 소식
[리뷰] 시대가 파낸 음각을 조명하는 미스터리극,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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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취업으로 1년 전 먼저 부다페스트로 떠난 아내를 만나기 위해 송진욱 감독은 두 아들과 아버지까지, 총 삼대가 함께하는 유라시아 횡단을 계획한다. 육로상 17000km에 달하는 광주광역시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의 긴 여정에서 이들이 택한 교통수단은 다름 아닌 전기자동차. 누가 봐도 무모한 도전처럼 보이는 여행답게 송가네 삼대는 갖은 난관과 마주하게 된다. 러시아에선 전쟁의 위험을 피해야 했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전기차 충전소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송송송 가족여행: 전기차 지구횡단>은 국내 최초 전기차 유라시아 횡단에 도전한 삼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계획처럼 이뤄지지 않는 돌발 상황의 연속에도 끈끈한 가족애가 돋보인다. 드론 카메라를 이용한 각국의 광활한 풍경과 낯선 이방인들이 베푼 온정을 바라보며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여행기다.
[리뷰] 가족애는 전기차를 타고, <송송송 가족여행: 전기차 지구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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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엔 ‘뭐라도 하고 싶으나 뭘 할 수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뒹굴뒹굴, 별다른 목적 없이 사는 유미(구보 시오리)가 그렇다. 반대로 유미의 룸메이트 루카(유나 다이라)는 뮤지션의 길을 묵묵히 가는,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잠자는 바보>는 이 두 사람을 주축으로 하여 일어나는 일상을 그린다. 때론 연애 문제로, 꿈의 이야기로, 생계의 부박함으로 엮이며 사는 룸메이트의 하루하루를 꽤 타율 높은 개그 만화처럼 유유자적하게 그리다가 음악 시퀀스를 통한 홈런도 때린다. 느린 듯 빠른 듯 묘하게 엇박자를 치는 영화의 템포는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천국대마경> 등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 원작자 이시구로 마사카즈 특유의 여유로운 진중함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리뷰] 뭐라도 하고 싶은데 뭘 할진 모르겠는 여러분께, <잠자는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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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윤세아)는 불륜한 남편과 이혼한 후 8살 딸 지우(윤별하)와 살기를 택한다. 아침마다 보험사로 출근해야 하는 그녀는 몸이 약한 지우를 위해 베트남인 가정부 수진(리마 탄 비)을 고용한다. 대신 집 안 곳곳에 홈캠을 설치하고 손님을 들이지 말라는 조건을 내건다. 성희는 직장에서 홈캠으로 지우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던 중 수진과 지우의 이상 행동을 보게 된다. 그즈음 수상쩍은 아랫집 남자(권혁)가 성희의 집을 서성거린다. <홈캠>은 <자기만의 방>을 연출한 오세호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는 2000년대 유행한 J호러와 <파라노말 액티비티> 등 파운드 푸티지 호러의 컨벤션에다 최근 유행하는 무속 소재를 더했다. 여러 익숙한 요소가 잘 어우러지나 기시감을 만든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헐거운 서사와 과잉보호와 무한경쟁 등 주제를 퇴색하게 하는 반전도 마찬가지다.
[리뷰] 00년대 유행한 호러를 양껏 쏟아부은 부대찌개 호러, <홈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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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86년, 초자연현상 조사관 에드(패트릭 윌슨)와 로레인(베라 파미가) 워렌 부부는 은퇴 후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딸 주디(미아 톰린슨)와 토니(벤 하디)의 결혼식이 임박한 시점에 워렌 부부에게 원한을 품은 악령이 등장한다. 악령은 워렌 부부의 친구인 고든 신부를 죽이며 워렌 부부를 뒤흔든다. 악령을 볼 수 있는 로레인의 초능력을 이어받은 주디는 악령이 빙의한 스멀 가족의 집으로 간다. <컨저링: 마지막 의식>은 <컨저링> 시리즈의 마지막 편으로 패트릭 윌슨과 베라 파미가는 이 영화를 끝으로 워렌 부부 역에서 은퇴한다.<컨저링> 시리즈의 공식을 되풀이하지만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만큼 팬 서비스를 삽입했으며 스펙터클을 대폭 늘렸다. <죠스>를 보는 듯한 후반부 거울 시퀀스는 컨저링 유니버스를 총괄하는 제작자 제임스 완이 추구하는 블록버스터 호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리뷰] 할리우드 고전 블록버스터의 향수를 배부를 때까지 묵직하게, <컨저링: 마지막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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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진수(김법래)는 최근 들어 아내 연정(김혜은)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목적이 불분명한 외출이 잦아지고 집안일에도 빈틈이 생기자 진수는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진수가 아내의 불륜 증거를 찾느라 바쁜 와중에 가족은 한층 복잡한 상황에 놓인다. 연정은 건축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재취업을 준비하겠다고 하고, 고등학생 딸 미나(김보윤)는 그동안 해오던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 갈등은 깊어지고 함께할 시간은 줄어들면서 진수의 가족은 진심을 나눌 기회에서 멀어진다.
제2회 4·16재단 문화콘텐츠 공모전 대상작인 <가족의 비밀>은 슬픔으로 묶인 감정을 하나씩 풀어내는 작품이다. 영화는 아들이자 오빠인 승현(박현우)을 사회적 참사로 잃은 가족을 단순히 슬픈 유가족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직업을 고민하고 뜻밖의 사건을 겪으며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인물들의 일상을 통해 유가족 서사의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코미디 장르를 선택하면서도 상처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세
[리뷰] 슬픔과 그리움에서 빠져나와 희노애락의 일상으로, <가족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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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말하지 못한 비밀을 품고 산다. 그 비밀이 언제,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관계가 무너질 수도,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도 있다. <비밀일 수밖에>는 평범한 가족의 일상적인 풍경 속에 숨겨진 균열과 묻어둔 진실을 포착한 작품으로,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여러 인물이 머물게 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표면적으로는 결혼을 앞둔 두 집안의 만남이지만 이면에는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상처와 감정이 켜켜이 자리한다. 김대환 감독은 가족이 가진 복잡한 감정을 탐색함과 동시에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건 무엇이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심각하거나 어둡지 않은 분위기로 웃음 포인트도 곳곳에 마련돼 있다. 휴직 중인 교사 정하(장영남)의 집에 예비 사돈 하영(박지아)과 문철(박지일)이 갑작스럽게 방문하면서 숨겨왔던 정하의 비밀이 폭로되는 이야기다. 비밀은 다름 아닌 정하의 성정체성이며, 정하는 애인 지선(옥지영)과 동거 중이다. 서사의 중심에 있는
[리뷰] 말 못 하게 만드는 실체에 대하여, <비밀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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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이유로 모국에서 추방되어 태국에서 한량처럼 살아가는 전직 요원 루카스(조시 하트넷). 그에게 미국으로 돌아갈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 방콕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안에서 ‘고스트’라 불리는 테러리스트를 제거하라는 옛 상사(케이티 새코프)의 지시를 받은 그는, 같은 목표물을 노리는 전세계 킬러들을 공중에서 상대해야 한다. <킬러들의 비행>은 크리스토퍼 놀런, 가이 리치, M. 나이트 샤말란 등 거장들의 프로젝트에서 최근 활약하고 있는 배우 조시 하트넷의 신작이다. 아시아를 배경으로, 이동 수단 내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킬러들의 액션이라는 설정은 브래드 피트 주연의 <불릿 트레인> (2022)을 연상시킨다. 다인종·다성별의 킬러 캐릭터들이 다양성을 무기로 B급 액션의 익숙한 공식을 비틀고, 예상치 못한 긴장과 리듬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특징이자 장점이다.
[리뷰] 다양성이 추진하는 탈것 액션, <킬러들의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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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인 팀(데이브 프랭코)과 밀리(앨리슨 브리)가 관계 회복을 위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린다. 교사인 밀리가 교외의 작은 학교로 전근하게 되었고, 뮤지션을 꿈꾸던 팀은 고민 끝에 밀리와 함께 이사를 가게 된다. 일상의 사사로운 문제들로도 조금씩 어긋나던 둘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모종의 원인으로 인해 서로의 몸이 점차 붙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서로를 원하게 되고, 피부가 맞닿는 순간 두 사람의 몸이 합쳐지는 현상을 겪게 된다.
이처럼 <투게더>는 근래 유행 중인 보디 호러 장르에 로맨스 서사를 더하며 독특한 장르물의 묘를 내뿜는 작품이다. 올해 선댄스영화제 미드나이트 부문에서 프리미어 상영 후 큰 화제를 끌었고, 인디 배급사의 작품임에도 북미 박스오피스 10위권에 진입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리뷰]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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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 콜먼(줄리아 버터스)과 릴리 레예스(소피아 해먼스)는 학교에서 소문난 앙숙이다. 아이러니하게 하퍼의 어머니 안나(린지 로언)와 릴리의 아버지 에릭(매니 저신토)은 사랑에 빠져서 재혼하기로 마음먹는다. 하퍼와 릴리, 안나와 안나의 어머니 테스(제이미 리 커티스)는 둘의 결혼을 기리는 파티에서 수상한 영매 마담 젠(버네사 바이어)을 만난다. 젠의 마법으로 릴리는 테스와, 하퍼는 안나와 몸이 바뀌고 하퍼와 릴리는 결혼식을 방해하려고 한다. 린지 로언을 하이틴 스타로 만든 <프리키 프라이데이>가 22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왔다. 린지 로언과 제이미 리 커티스도 주연으로 컴백했다. 캐릭터의 수가 늘어난 만큼 전작에 비해 서사가 훨씬 복잡해졌다. 넷이 얽히고설킨 가운데 팬 서비스와 각 세대를 풍자하는 유머가 쏟아진다. 다소 구성이 산만하나 세대 통합을 바라는 메시지가 뭉클함을 자아낸다.
[리뷰] 쏟아지는 팬 서비스와 세대 풍자, <프리키 프라이데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