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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실종된 상처를 안고 가톨릭 사제가 된 정도운(신승호)은 고해성사를 위해 성당을 찾은 남자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듣는다. 비밀을 지켜야 하는 사제의 의무와 진실을 밝히고 싶은 아들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형사 윤주영(한지은)과 함께 과거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그 과정에서 사이비종교 집단의 실체를 만난다.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은 사제라는 정체성과 사적 복수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의 내적 투쟁을 그린 작품으로, 종교적 윤리와 인간적 감정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도록 유도한다. 선과 악, 공과 사, 흑과 백의 경계에 선 인물이 고해성사하듯 자신을 더 쏟아냈다면 작품의 입장이 한층 분명해졌을 것이지만 사제복을 입은 또 한명의 인물이 한국영화의 사제 계보를 잇는 순간만큼은 모호함 없이 빛난다. 사제복의 존재감은 여전히 크다.
[리뷰] 작품까지 경계에 설 필요는 없다,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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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군사독재가 절정에 달했던 1971년, 정치인이 었던 루벤스(세우통 멜루)가 군부에 의해 불법체포되면서 남겨진 가족의 평온한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루벤스의 아내이자 다섯 아이의 어머니 유니스(페르난다 토히스)는 취조와 감금의 고초를 당하면서도 가족을 지키고 진실을 찾기 위해 당당히 맞선다. 마르셀루 후벵스 파이바가 쓴 전기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시대를 이겨낸 한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며 국가 폭력의 실체를 폭로한다. 1970년대 리우데자네이루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따뜻한 질감으로 살려 억압의 시대를 강조함과 동시에 울부짖거나 몸부림치지 않고 불의에 맞서는 법을 보여줌으로써 조용하고 품위 있는 저항이 오히려 상대의 폭력성을 부각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개인을 기억하는 일이 곧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을 미소 띤 얼굴로 역설하고 있다.
[리뷰] 조용하고 품위 있는 저항은 상대의 폭력성을 부각한다, <아임 스틸 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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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끝나지 않은 전쟁>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홍범도 장군의 삶을 기리는 다큐멘터리다. 2001년 <나비>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한 문승욱 감독이 연출했다. 조진웅과 군인 출신 배우 이귀우가 내레이션과 배우로 참여했다. 영화는 2023년 8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과 12·3 계엄 등 지금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다음 홍범도 장군과 독립군의 행보를 통해 국군 정신의 본질을 고찰한다. 감독은 LED 스튜디오 속 두 배우의 연극적 연기와 생성형 AI 이미지로 내용을 생생히 전달하려 한다. 문제는 생성형 AI 이미지가 작품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사료의 한계를 보완하기보다 사료의 객관성을 대체하는 주객전도가 생긴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반복적이고 난삽한 화면 구성과 논지 전개, 전투 장면의 언캐니 밸리가 혼란을 남긴다.
[리뷰] 생성형 AI 이미지 홍수와 맥없는 전개에 어질어질, 최소한의 성의조차 부족, <독립군: 끝나지 않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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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형제의 잔혹한 신데렐라 이야기를 각색한 <어글리 시스터>의 주인공은 신데렐라의 ‘못생긴’ 의붓자매 엘비라(레아 미렌)다. 왕자와의 결혼을 꿈꾸는 그는 엄마(아네 달 토르프)의 주도하에 특정한 미적 기준에 부합하도록 신체를 변형시킨다. 한편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아그네스(테아 소피 로흐 내스), 즉 신데렐라는 생존을 위해 왕자와 결혼하고자 한다. 외모에 대한 집착이 엘비라의 몸과 마음을 좀먹는 와중, 왕자의 신붓감을 찾는 무도회가 열린다. 영화는 다듬어진 호러의 전시에는 관심이 없다. 틀에 맞춰 몸을 훼손하는 묘사는 사실적이므로 공포스럽다. 입체적인 인물들은 현대와 공명하고, 세련된 연주곡을 업은 레아 미렌의 연기는 엘비라의 심리를 선명하게 그린다. 피부를 긋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내장까지 찔러 주입된 시선을 토해내게 만드는 성공적 각색. 에밀리 블리치펠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리뷰] 피부만 벗겨내지 않고 내장까지 뒤집는 비정제 호러, <어글리 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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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적 웃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엔딩크레딧에 똑같은 이름이 빼곡히 채워진 노고 가득한 이 영화가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에 적합한 답변이 될 것이다. 구독자 10만명을 이제 막 달성한 귀신 찾는 유튜버 귀식커(귀신+Seeker) 인공(변재신)은 숲속에서 귀신이 출몰한다는 제보를 받고 친구 병진(정용훈)과 한달음에 달려간다. 딱 한방만 더 있으면 채널이 안정적으로 안착할 거라는 욕망이 그를 자꾸만 공포의 선단으로 몰아세운다. 그렇게 도착한 산골짜기.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촛불로 연명하는 이곳에는 도인 같은 차림의 자칭 타칭 자연인이 거주 중이다. 여벌의 수저도 없어 맨손으로 밥을 먹어야 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소금잼(이라고 하는데 비주얼적으로는 쌈장 같은)만이 유일한 밑반찬이다. 볼일 보고서도 뒤처리는 꼭 계곡에서 해야 하는 게 원칙. 따라서 자연인의 생활양식은 전원적이기보다 원시적이고, 목가적이기보다 생존적이다. 한편 인공은 자연인에게 어딘가 찜찜함을 느낀다. 문명과 떨어진
[리뷰] 같은 자연인이라 아는데 분명 모두 웃는다, (어이없어) 하하하!, < THE 자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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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여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재개봉한다. 폭력과 배신으로 점철된 한 여성의 삶을 쇼처럼 연출한 이 작품은, 2006년 일본에서 개봉해 기이한 형식과 가학적 표현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화려한 색채, 뮤지컬의 혼합, 과장된 연기 연출은 한 인물의 파국을 시각적 퍼포먼스로 포장하지만 그 안에는 외면당한 삶이 끝내 어디로 향하게 되는지를 끝까지 밀어붙여 보여주는 냉혹함이 담겨 있다. 유년기의 상처를 품고 자란 마츠코(나카타니 미키)는 성인이 된 뒤에도 비인간적인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그는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망하지만, 반복적으로 착취당하고 버림받으며 자신을 혐오하기에 이른다. 최소한의 울타리도 없이 홀로 남겨진 존재가 세상의 공격에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주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은 비인간적 폭력에 희생된 존재의 기록이자 자기방어의 기본자세를 익히지 못한 이의 비극적 전시물이다. 이 영화는 마츠코를 위로하거나 구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리뷰] 재개봉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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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경제범죄수사대 폭스 헌트팀은 어마어마한 금액을 국외로 빼돌린 다이이첸(양조위)을 수년째 쫓고 있다. 한편 신분을 조작해 프랑스에 머물며 금융권 인맥을 쌓은 다이이첸은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중이다. 정보를 입수한 팀장 예준(단혁굉)과 샤오지아, 자오위(장오월)는 프랑스에 도착하지만, 국제 공조 수사는 순탄치만은 않다. 설상가상으로 다이이첸이 판 함정에 빠지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범죄수사물인 <폭스 헌트>는 파리와 상하이를 오가며 촬영됐다. 주연배우들의 호연과 카체이싱을 비롯한 몇몇 액션신이 볼만하다. 교활한 범죄자로 분한 양조위의 여유로운 카리스마는 납작한 인물도 매혹적으로 만든다. 다만 성긴 전개와 다소 매끄럽지 못한 톤 전환은 아쉬움을 남긴다. 특히 내셔널리즘의 향이 풍기는 후반부 장면들은 몰입을 방해한다.
[리뷰] 갈팡질팡하는 연출, 당황스러운 내셔널리즘, <폭스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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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나이키, 에르메스. 제프 맥페트리지의 그림은 세계적인 브랜드 광고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스케이트보드 디자인으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현재 회화, 그래픽디자인, 영상 작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다. 미니멀하면서도 명확한 메시지를 담은 그의 고유한 스타일은 일상 속 루틴에서 비롯된다. 불안이 밀려올 때마다 그는 끊임없이 내면을 다스리며 삶과 예술의 균형을 모색해왔다. 다큐멘터리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는 스파이크 존즈, 소피아 코폴라 등 오랜 동료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예술가의 삶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불안을 창작의 재료로 삼지 않겠다는 단단한 다짐은 ‘천재 예술가’에게 따라붙는 선입견을 비틀며 제프 맥페트리지만의 창작 윤리를 드러낸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껴안으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는 그의 지혜는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
[리뷰] 성실함을 무기로 ‘천재 예술가’에 따라붙는 선입견을 비틀다, <제프 맥페트리지: 드로잉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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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오진으로 암 선고를 받은 고등학생 남쯔제(첨회운). 퇴학을 피하려 꾀병 연기를 하던 그는 담임의 지시로 반장인 여쯔제(강제)의 보살핌을 받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둘 사이에 새로운 감정이 싹트고, 장난처럼 시작된 꾀병은 결국 사랑병이 된다. <나의 아픈, 사랑이야기>는 전형적인 청춘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따르며 대만 학원 로맨스물 특유의 감수성과 정서를 오롯이 담아낸다. 서툰 감정 표현, 빠르게 지나가는 사건들, 소란스럽고 유쾌한 분위기. 고도로 구조화되고 정량화된 시대에 이토록 허술하고 유치한 사랑 이야기가 유효한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갖기 어려운 감정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실수와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고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을 편지로 전하는 서사는 이제 영화관이 아니면 쉽게 만날 수 없는 멸종위기의 사랑법으로 우리의 빈곤한 마음을 다정하게 토닥인다.
[리뷰] 프레임 안에서 유영하는 멸종 위기 사랑법, <나의 아픈,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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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맑고 공기 좋은 숲속에 자리 잡은 햇빛 왕국.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벤자민은 이웃 나라 캐롤리나 공주의 초상화를 보고 단숨에 사랑에 빠진다. 그는 곧바로 사절단을 보내 정식으로 청혼하지만, 공주를 둘러싼 간신들의 계략에 가로막혀 거절당하고 만다. 심지어 캐롤리나 공주는 어머니를 여읜 뒤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상황. 벤자민은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정원사로 신분을 숨긴 채 그녀의 왕국으로 향한다. 뮤지컬 애니메이션 <프라우드 프린세스: 로열 어드벤처>는 사랑의 힘으로 사악한 음모를 이겨내고 위기에 빠진 왕국을 구하는 왕족들의 모험을 그린다. 섬세하게 묘사된 자연광은 두 사람의 박진감 넘치는 여정과 어우러지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귀엽고 개성 넘치는 동식물 캐릭터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센스가 돋보인다. <황금나침반>과 <200% 울프: 최강 푸들이 될 거야!> 제작진이 참여했다.
[리뷰]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예상 밖의 완성도, <프라우드 프린세스: 로열 어드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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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공시생 영수(장희웅)와 경석(김인권)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합격’뿐. 가족도 사랑도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앉기만 하면 붙는다는 도서관 815번 좌석 정보를 입수한다. 이들은 ‘명당’을 사수하기 위해 치열한 좌석 전쟁에 돌입하고, 관계가 뒤엉키며 시험보다 더 복잡한 싸움을 벌인다. 공시생의 청춘 생존기 <815 사수작전>은 유쾌한 설정 속에 청년의 절박한 현실을 담아내려 분투한다. 간절한 만큼 치열한가에 대해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지만 그 속에서 특별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 발견되기도 한다. 과감한 웃음과 냉철한 현실 인식 사이에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해도 미래를 희망으로 손쉽게 포장하지 않는 태도만큼은 남는다. 과연 이들은 좌석 번호 ‘815’처럼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생 광복’을 이뤄낼 수 있을까.
[리뷰] 간절한 만큼 치열한가, <815 사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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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탑 메이킹 센스>가 국내에서 처음 개봉한다. 1983년 할리우드 판타지스 극장에서 열린 토킹 헤즈의 공연을 몇 차례에 걸쳐 촬영한 필름이다. 토킹 헤즈 자체 제작, 조너선 드미 연출. 40년이 흐른 지금 이 영화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건 4K 리마스터링 버전의 선명한 화질 때문만은 아니다. 뉴웨이브의 선구자 토킹 헤즈의 음악에 있는 고유성은 2025년에도 유효하다. 촘촘한 무대를 소화하는 아홉 멤버의 개성과 조화가 빛난다. 일본 전통 춤에서 영감을 받은 안무는 데이비드 번의 기묘한 존재감과 완벽히 어울린다. 카메라는 무대를 역동적으로 활보하며, 즉흥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담듯 이들을 탐색한다. 극영화에 가까운 관점으로 접근한 연출, 현장 객석과 분리된 시선을 취하는 촬영이 독특한 현장감을 부여한다. 기록된 콘서트를 시청하는 것과는 별개의 체험을 선사하는 작품.
[리뷰] ‘창의성을 증명할 필요 없는’(< Artists Only >) 이들의 협업 예술, <스탑 메이킹 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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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한 뒤로 길구(안보현)는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아랫집에 이사 온 선지(임윤아)에게 첫눈에 반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껏 주눅 든 길구는 그에게 쉽게 말 붙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길구는 새벽녘에 엘리베이터에서 선지와 마주친다. 조용하던 낮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화려하게 꾸민 채 등장한 선지는 길구에게 적대심을 보이며 공격적으로 대한다. 선지의 변화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길구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선지의 뒤를 좇던 길구는 선지의 아버지 장수(성동일)에게 발각되는데, 장수는 길구의 우직함을 알아본다. 그리고 밤마다 집 밖으로 나서는 선지의 보호자 역할을 해달라고 제안한다. 이유인즉 악마가 선지의 몸에 들어온 상태여서 선지가 낮에는 평범하게 생활하다가도 새벽 2시만 되면 악마가 활동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선지와 함께하며 길구는 그의 비밀에 관해 더 자세히 알게 된다.
2019년 데뷔작 <엑시
[리뷰] 선의로 완성된 구원의 서사, <악마가 이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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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위는 언제쯤 끝날까. 여름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산뜻한 바람을 맞이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계절로서 짓궂게 서 있을 뿐이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 비로소 미풍을 껴안게 된 청춘들의 이야기인 <남색대문>이 7월 마지막 주에 다시 열린다. 2002년 대만 개봉 이후 한국에서는 영화제와 기획전을 통해서만 소개되다가 2021년 8월 국내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 지 4년 만이다.
대만 청춘영화의 고전 반열에 오른 이 작품의 재개봉을 맞아 주연배우 계륜미도 12년 만에 내한 소식을 알렸다. 그는 8월8일과 9일 무대인사와 GV 행사에 참여해 자신의 데뷔작에 얽힌 추억을 관객과 나눌 예정이다. <남색대문>에 출연한 경험을 두고 “인간 본성에 대해 더 다양하고 관용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고,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밝힌 계륜미의 고백은, 그가 연기한 주인공 커로우의 성장을 지켜본 관객이 새겼을 법한 감상과 맞닿아 있다. 17살 커로우는
[리뷰] 재개봉 영화 <남색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