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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임부부 지연(김시은)과 도진(이도진)은 또다시 유산 소식을 듣는다. 저출산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건네진 위로는 형식적일 뿐, 대화는 금세 불편한 침묵으로 가라앉는다. 믿기 힘든 현실 앞에서 지연은 점차 이성을 잃고 병원을 전전하며 유산 방지 주사를 구걸하기에 이른다. 도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내의 집착에 서서히 지쳐간다. <통잠>은 상실감에 잠식된 보통의 인간을 지극히 사실적인 화법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그 어떤 감정도 몰아세우지 않지만, 예의 바른 주인공이 낯부끄러운 행동을 이어갈수록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처절함이 번져나온다. 영화는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한 인물의 표정을 여백으로 남긴 채, 관객의 기억과 사연이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리뷰] 얄궂은 운명에 마음을 깊이 베인 그대들은 어떤 표정이었나요, <통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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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강민주)는 고향 무풍으로 간다. 이윽고 금주(이금주)와 동근(서동근)이 그녀를 따라오면서 느슨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셋 주위를 맴도는 두 여성 요선(백요선)과 은경(조은경)도 저만의 사랑을 나눈다. 이 묘한 영화는 송문(박종환)의 연기 워크숍에서 찍은 것이다. 거기에 선영(엄선영)과 동윤(강동윤)까지 총 7명의 배우는 파트너가 가진 최초의 기억을 이해하고 모방하는 모방 독백 과제를 수행한다.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경쟁부문에 진출한 <최초의 기억>은 <한여름의 판타지아><한국이 싫어서>의 장건재, <파스카><나의 연기 워크숍>의 안선경 감독이 협업한 영화다. 7명의 배우가 실제 진행한 연기 워크숍을 통해 제작했으며 비선형적 서사의 힘을 탐구하는 두 감독의 매력이 실험적 구조로 드러나 있다. 연기를 매개로 한 인간이 자신의 심연을 마주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탐구하는 시선이 인상적이다.
[리뷰] 무풍 기행, 혹은 마음 하나 기댈 곳 없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픈 연기 처방전, <최초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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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트릭을 활용하여 전세계의 악덕 기업들의 민낯을 폭로하는 활동을 이어온 호스맨이 긴 잠적을 끝내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번에 그들이 속여야 할 상대는 다이아몬드 거래를 통해 검은 세력들의 자금세탁을 돕는 밴더버그 가문의 상속자 베로니카(로저먼드 파이크)이다. 활동을 멈춘 호스맨 원년 멤버들을 소집한 정체불명의 계획자는 이번 프로젝트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젊은 신예 마술사들까지 섭외한다. 찰리(저스티스 스미스), 보스코(도미닉 세사), 준(아리아나 그랜블랫)은 호스맨의 열렬한 팬일 뿐만 아니라 실력 또한 뛰어난 마술사들이다. 그렇게 그들은 힘을 합치는 동시에 서로를 향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면서, 베로니카의 ‘하트 다이아몬드’를 훔칠 계획을 세운다.
<나우 유 씨 미 3>는 그 이름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한 히트 시리즈의 9년 만의 속편이다. 마술의 화려함과 하이스트 장르 특유의 빠른 액션이 결합되어 전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던 전작의 명성을 이어가고자, 오랜 시간이 흘
[리뷰] 거듭할수록 트릭이 드러난다는 핸디캡을 안고, <나우 유 씨 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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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없는 가해의 풍경이 신랄하게 펼쳐진다. 지위와 양심이 가리키는 바대로 ‘내 잘못’임을 감각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 혼자 속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남기는 것은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라 그저 암담한 충격파다.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의 도시 클루지 나포카. 번영을 꿈꾸는 도시 개발 프로젝트는 콘티넨탈이라는 이름의 호텔 개발에 착수한다. 부동산 퇴거를 담당하는 집행관인 오르솔리아(에스테르 톰파)는 재개발 예정지의 지하실에 거주하는 노숙자 이온(가브리엘 스파히우)을 퇴거시켜야 한다. 갈 곳을 잃은 남자는 곧 목에 철사를 휘감아 지하실에서의 죽음을 택한다.
이온을 따라가던 시선이 그의 죽음 이후 오르솔리아로 급격히 전환되는 구성이 대담하다.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죽음에서 죄책감으로 초점을 옮기며 관객을 적극적으로 곤경의 자리에 놓는다. 오르솔리아는 점심시간이면 광장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고 상사의 지시를 대체로 성실히 따르며, 이온에게도 몇번이나 기회를 주었던 여자 오리솔
[리뷰]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속죄의 메아리에 질식하는 도시 우화, <콘티넨탈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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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 엘리아스(마크 앙드레 그롱당)는 쇼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비보를 접한다. 오랜 기간 연을 끊고 지내온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찝찝함을 안고 홀로 고인이 떠난 집을 수습하던 엘리아스는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아버지의 흔적을 마주한다. 데뷔작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 아동을 상대로 한 가정폭력을 다룬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두 번째 장편 <후계자>로 다시 한번 가족 내부로 들어간다. 가부장제의 그늘이 드리운 사회에서 “남성은 어떻게 같은 남성에게조차 최악의 상대가 되었나”를 논하고 싶었다는 감독은 오이디푸스, 이카루스, 햄릿과 같은 인물을 떠올리며 이 비극의 회로를 꾸렸다고 한다. 반복되는 나선형 이미지와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가는 열쇠들도 일종의 대물림을 시각화한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고부터의 전개가 개운치 않은 감도 있지만, 고전적이면서 직관적인 매력을 갖춘 스릴러.
[리뷰] 나선형 회로에 갇힌 남성성을 비관하다, <후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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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헌터이자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인 ‘D’ (다나카 히데유키)가 지주의 딸 샤를로트를 찾아 나선다. 샤를로트가 뱀파이어 마이어 링크에게 납치됐기 때문이다. D의 주위에 또 다른 뱀파이어 헌터 레일라 등이 합세하고, 액션과 판타지 그리고 로맨스가 얽힌 이 추적극은 어둠에 휩싸인 체이트성으로 들어선다. 다크 판타지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작품으로, 2000년에 제작된 이후 25년 만에 한국에서 최초 개봉한다. <무사 쥬베이>로 20세기 말 재패니메이션을 세계에 알린 가와지리 요시아키 감독과 캐릭터 디자이너 겸 작화 감독 미노와 유타카, <아키라>에 참여했던 미술감독 이케하타 유지 등이 합심했다. 고딕호러와 로맨스의 세계를 바탕으로 SF, 서부극, 크리처 장르의 향취를 뒤섞어 펼친 아름다움의 완성도가 압도적이다.
[리뷰] 당신이 ‘멋’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뱀파이어 헌터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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덱(디미트리우스 슈스터-콜로아마탕기)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돌연변이다. 힘을 숭배하는 프레데터 사이에서 소외된 덱을 보호하는 이는 친형뿐이다. 그는 난폭한 아버지에게서 동생을 지키려다가 죽는다. 덱은 형의 소원대로 칼리스크를 죽이고 자신이 프레데터임을 증명하고자 행성 제나로 떠난다. 그곳은 모든 생명체가 무기인 곳으로, 덱은 하반신이 망가진 휴머노이드 티나(엘 패닝)을 만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프레데터: 죽음의 땅>은 <프레데터>프랜차이즈의 신작으로 전작 <프레이>의 감독 댄 트랙턴버그가 메가폰을 쥐었다. 애크러배틱한 액션과 미야자키 하야오풍의 경이로운 크리처 디자인, 안정적인 이야기 구조, 생태적 상상력과 소수자의 연대라는 주제 등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프레데터>시리즈와 다른 방향의 오락성을 그려낸다. <에이리언>에 등장하는 기업 웨이랜드 유타니가 나오며 <에이리언>시리즈와의 접점도 예고한다.
[리뷰] 애니메이션 1기를 몰아서 보는 듯한 재미, 동시대 남성성을 고찰하는 윤리, <프레데터: 죽음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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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동계올림픽은 3번의 시도 끝에 유치에 이른 초국가적 이벤트였다. 2018년 2월9일부터 25일까지, 17일 동안 열렸던 평창동계올림픽은 국가의 위상을 입증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였으며, 선수들에게는 스스로를 증명하는 시험대이자 영광을 누리는 시상대가 마련된 꿈의 장소였다. <종이 울리는 순간>은 전세계로 영광의 순간을 송출하던 찰나의 이벤트가 끝난 후 남겨진 흔적을 응시하면서, 지금도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단 3일간 열렸던 알파인스키 경기의 환호성과 맞바꾼 것은 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가리왕산의 원시림이다. 가리왕산을 터전으로 삼았던 야생동식물의 자리를 대체한 것은, 적자로 운영되고 있는 텅 빈 케이블카다. 산림 복원과 시설 유지라는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양측의 아우성 너머로, 발언권을 부여받지 못한 숲의 오래된 주인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리뷰] ‘가리왕자갈산’, 훼손을 넘어 도륙, <종이 울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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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로 휠체어농구를 소재로 한 영화. 농구대잔치 시절 ‘코트의 여우’로 명성을 날렸던 고 이원우 감독과 그의 제자로 휠체어농구 발전에 공헌한 고 한사현 감독에 영감을 받아 극화한 작품이다. 휠체어농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 없이 참여하는 통합 스포츠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말하기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경계 없이 함께 뛰는 스포츠라는 점을 알리는 데 포커스를 맞춘다. 한때 국가대표였던 스타, 사고로 코트를 떠난 천재, 제각기 상처를 품은 선수들이 한팀을 이루어 성장하고 회복하는 여정은 진정한 의미의 승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농구 스타 우지원과 실제 국가대표 선수들, 용인대 YB팀이 만들어내는 리얼플레이는 느려도 멈추지 않는 달팽이들의 분투에 진정성을 더한다.
[리뷰] 스포츠 영화의 킥은 리얼플레이에 있다, <달팽이 농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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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딸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연희(임채영)는 남편이 남긴 빚 때문에 밤낮없이 일하며 초콜릿으로 끼니를 때운다. 자신의 이를 치료해주던 치과의사 서진(김선혁)에게 구원의 환상을 품게 된 연희는 그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하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숨겨진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작 <숙희>에서 구원자로서의 여성을 그린 양지은 감독은 구원자를 기다리다 붕괴하는 연희를 따라가며 사랑과 구원의 경계가 어디인지 묻는다. 진짜 불행을 파헤치기보다 표면적 이미지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지만 반복되는 상징적 장면들은 묘한 끌림을 만들어낸다. 달라진 모습으로 새로운 구원자를 찾아 나서는 듯한 연희의 마지막 잔상이 오래 남는다. 나를 구원하는 열쇠가 타인의 손에 있다고 믿는 눈빛.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리뷰] 포즈에 매몰된 자기연민의 불행놀이, <초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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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고급 아파트에서 사는 파니(루 드 라주)와 장(멜빌 푸포)은 사교모임을 즐기는 이상적인 상류사회 커플이다. 완벽해 보였던 두 사람의 삶은 어느 날 파니의 고등학교 동창 알랭(닐스 슈나이더)이 나타나며 균열이 시작된다. 파니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알랭과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서로에게 점점 빠져든다. 운명적인 만남을 믿는 문학가 알랭과 달리 부자 남편 장은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고 선택하는 것이라 확신한다. 아내의 변화를 의심한 장은 사설탐정을 고용해 사생활을 캐고, 파니의 불륜을 확인한 뒤 위험한 선택을 결심한다.
우디 앨런 감독이 50번째 영화 <럭키 데이 인 파리>로 돌아왔다. 우디 앨런의 첫 번째 불어영화이자 프랑스에서 제작한 이 작품은 <로마 위드 러브><미드나잇 인 파리><레이니 데이 인 뉴욕>등 도시 시리즈의 연장에 있다. ‘뜻밖의 행운’(Coup de Chance)이란 원제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 우연과 운에 얽힌 아이러니
[리뷰] 찬스(Chance)와 초이스(Choice) 사이 여전히 반짝이는 농담(혹은 진실), <럭키 데이 인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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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소녀 이징(니나 예)이 엄마 그리고 언니와 함께 대도시 타이베이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시골에서 살다온 이징의 눈에 타이베이는 온통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꿈의 공간이지만, 엄마 슈펀(저넬 차이)과 언니 이안(시 유안 마)에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버텨 살아남아야 하는 정글 같은 곳이다. 슈펀은 야시장 한편에 국수 가게를 차려 생활비를 마련하려 하지만 월세를 감당하기조차 여의치 않고, 이안은 뭐라도 하기 위해 찾은 일자리가 영 불편하다. 거기에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전남편과의 관계와 부모의 생일잔치까지 더해져, 슈펀이 어린 이징을 신경 쓰지 못하는 시간이 늘어만 간다. 어느 날 외할아버지로부터 왼손잡이에 관한 무서운 미신을 듣게 된 이징은, 그때부터 뭔가에 홀린 듯 아슬아슬한 일탈을 벌이기 시작한다.
<왼손잡이 소녀>는 2004년 숀 베이커 감독과 공동 연출한 <테이크 아웃>이후 21년 만의 단독 연출 데뷔작을 만든 쩌우스칭 감독
[리뷰] 시궁창을 댄스홀로 만드는 마법사 숀 베이커의 친구들, <왼손잡이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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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미스러운 스캔들에 휘말려 활동을 중단한 아이돌 스타 은채(조수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랫동안 교류가 없던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 전해진다. 그가 남긴 것은 출처 모를 빚과 낡은 태권도장뿐. 주변에 떠밀려 계륵 같은 유산을 떠안게 된 은채는, 그곳에서 옛 친구 희찬(김동한)과 재회하며 잠시 접어두었던 꿈을 다시 펼치기 시작한다. 대부분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지만 20대라는 어린 나이에 첫 좌절을 맛보기 쉬운 것이 예체능의 길이다. 이에 영화는 각각 대중음악과 체육을 상징하는 두 인물의 재도전을 조명하며 <리플레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아쉽게도 극장용 장편영화보다는 웹드라마 스타일의 설정, 연출, 캐스팅이라는 인상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하며, ‘도전’이라는 교훈과는 반대로 작품 자체는 익숙한 서사와 연출을 ‘리플레이’하는 안전한 길을 택하고 만다.
[리뷰] 어디선가 이미 본 것들만 ‘리플레이’, <리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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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엄마(홍 다오), 그리고 심해지는 발작 증세. 거리의 이발사 환(뚜언 쩐)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착한 청년이지만, 그가 짊어진 가족의 생계와 병세는 한계에 다다른다. 결국 환은 엄마가 젊은 시절 아버지를 만났던 한국으로 떠나기로 한다. 더 나은 치료, 혹은 잃어버린 가족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절박함과 함께. 지난 8월 베트남에서 개봉해 200만 넘는 관객을 동원한 <엄마를 버리러 갑니다>는 감독, 배우, 주요 연출진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한국과 베트남이 합작한 영화다. 롯데월드나 첫사랑과 같은 상징으로 영화는 ‘코리아 판타지’를 제시하는 한편, 두 베트남 주인공이 처한 질병과 빈곤은 감당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들의 연속으로 그려져 관객을 지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은 한국이라는 과거가 아닌 고국이라는 현재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모범적인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베트남을 위한 서사와 정서를 되찾는다.
[리뷰] 적당히 치고 빠지는 코리아 판타지, <엄마를 버리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