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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수감 생활을 끝내고 교도소에서 출소한 한장유(이강생)는 고향 하이난으로 돌아가 과거 연인이었던 수홍(이몽)과 재회한다. 한장유는 수홍과 새로운 가족을 이루길 희망하고, 수홍은 신축 아파트에 입주하길 꿈꾸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이 그들 앞을 가로막는다. 결핍을 채우려 가족이 되는 현실을 그린 <부재>는 미니멀하고 정제된 영상미로 서사의 빈틈과 대사의 공백을 채운다. 다양한 프레임과 제한된 색채 팔레트로 평범한 서사를 낯설게 만듦으로써 미장센이 영화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훌륭히 보여준다. 흔한 이야기를 비전형적 형식으로 연출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사건의 불분명한 인과관계는 완성도 높은 시각적 이미지로 보완한다. 미장센이 제 역할을 다하면 구체적 언어가 된다.
[리뷰] 평범한 서사도 낯설게 만드는 미장센의 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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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타히티의 고갱. 잃어버린 낙원>은 폴 고갱의 삶과 작품 세계를 따라가며 타히티와 마르키즈제도의 원시적 풍광을 시각적 원형으로 조명한다. 뉴욕, 시카고, 워싱턴, 보스턴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된 걸작을 감상하면서 고갱 회화의 색채와 구도도 함께 탐구한다. 고갱이 꿈꾼 낙원을 낭만적으로만 그리지 않고 이상향이 아닌 삶과 맞닿은 인간적 장소로, 예술에 대한 갈망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공간으로 바라본다. 작품에 담긴 존재론적 질문을 인간에 대한 근원적 성찰로 이어가는 이 다큐멘터리는 그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며 낭만화된 이미지 이면의 현실을 포착한다. 경제적 곤궁과 문화적 충돌, 논란의 그늘까지 골고루 다루지만 고갱을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이 어리어 냉철하게 따져 묻지는 않는다.
[리뷰] 삶이 따라오지 않는 낙원은 없다, <타히티의 고갱. 잃어버린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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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는 수아(임도화)는 폭력적인 연인 현우(송승현)와 관계를 이어가며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수아와 운명이 얽힌 아누앗(아누팜 트리파티)은 끔찍한 과거를 숨긴 채 그녀의 곁을 맴돌고, 수아는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아 연인과 친구를 따라 위태로운 여행을 떠난다. 만월의 밤, 아누앗은 그녀를 좇다 섬뜩한 진실과 마주한다. 전형적인 공포물에서 벗어나려는 영화는 외국 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우는 이색적인 캐스팅으로 차별화를 시도했으나 설정과 상황을 단순 나열하는 데서 그친다. 서사와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시도는 공허할 수밖에 없고, 허약한 기본기 위에 낯선 소재를 모아놓는 것만으로 새로움이 만들어지진 않는다.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서사를 위해 복무할 때 낯섦과 새로움을 기대할 수 있다. 의도를 실현해주는 것은 결국 탄탄한 서사다.
[리뷰] 전형에서 벗어나려면 전형에 도달해야 한다, <검은 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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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셰프 오바나(기무라 다쿠야)는 도쿄에서 아시아 최초로 미슐랭 3스타를 달성해 명성이 자자하다. 큰 뜻을 품고 파리에서 파인다이닝을 연 뒤 같은 지위를 얻고자 하지만 늘 2스타에서 제자리걸음이다. 별 세개에 대한 압박감에 흔들리던 그는 동료들의 지지를 힘입어 다시 도전하기로 한다.
<그랑 메종 파리>는 드라마 <그랑 메종 도쿄>의 세계관을 잇는 작품으로, 완벽한 요리를 향한 사람들의 집념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무대가 파리로 확장된 만큼 식재료와 조리법은 한층 다채로워졌다. 실제 미슐랭 3스타 셰프에게 자문을 받아 완성한 요리들을 실감나게 담아낸 숏들이 극의 풍미를 더한다. 드라마와 뚜렷이 구별되는 영화적 개성이 부족하다는 점은 아쉬우나 ‘요리에 국경은 없다’라는 핵심 메시지만큼은 분명하게 전달한다.
[리뷰] 보장된 맛에 찾아가는 단골집처럼, <그랑 메종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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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공민정)과 정호(감동환)는 연인이며 둘 다 그림 그리는 일을 한다. 수진은 글을 쓰는 훈성(유의태)과 몰래 만나는 사이이기도 하다. 인주(정보람)는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시한부일지도 모르는 그는 정호를 짝사랑한다. 한편 연기하는 유정(정회린)은 연인 우석(류세일)과 자꾸 다툰다. 유정은 현재 우석을 대하는 자신에게서 전 연인 정호의 모습을 겹쳐 본다. 각자가 겪는 일상의 파편들로 관계를 조립해나가던 영화는, 어느 지점에 이르자 지나간 장면들로 되돌아가 잘라냈던 시간이나 공간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상황들, 스스로의 언어와 창작물에 비친 상들로 하나의 진실을 엮어낼 수 있을까.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서사를 분해해 재구성하며 정교한 연출로 관계와 감정의 복잡한 결을 담아낸다. 조희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으로, 전작 <이어지는 땅>의 분위기를 잇지만 긍정적인 의미로 낯설다.
[리뷰] 제목만큼 영화를 잘 드러내는 문장이 없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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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서 친 사고의 대가로 살인이 포함된 특수 임무를 수행하며 빚을 갚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허치(밥 오든커크)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에 아내 베카(코니 닐슨)와 두 자녀 그리고 허치의 노부 데이빗(크리스토퍼 로이드)과 함께 워터파크가 있는 휴양지로 바캉스를 떠난다. 그러나 평온함은 오래가지 못한다. 휴가지에서의 작은 실랑이로 인해 허치가 참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해버렸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상대가 해당 지역의 검은 조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렇게 가족과의 평범한 휴가를 지키려는 허치의 눈물 겨운 전투가 시작된다.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북미에서의 깜짝 흥행으로 인상을 남긴 <노바디>의 4년 만의 속편이다. 여러 액션영화를 연출한 인도네시아 출신 티모 타잔토가 연출을 맡았다. 평범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일상이나 휴가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품들을 활용하여 선보이는 반전 액션을 보는 재미가 있다. 전체적 서사는 ‘분노한 아버
[리뷰] 피곤한 아버지의 애처로운 휴가 지키기, <노바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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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소설가인 체사레 파베세의 저서 <레우코와의 대화>는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당시 짧은 유서가 적힌 채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은 <레우코와의 대화> 중 <바다 거품>을 영화화할 수 있겠다고 적은 과거 자신의 메모에서 출발해 <바다 거품> 을 스크린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바다 거품>은 고대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와 그리스신화 속의 님프 브리토마르티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사포는 실연의 고통으로 바다로 투신했으며 브리토마르티스는 미노스 왕의 구애로부터 도망치다 바다에 빠졌다. 영화는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 역을 맡은 두 배우의 목소리를 빌려 <바다 거품>의 대사와 여러 각주, 그리고 유실되지 않고 남은 사포의 시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너는 나를 불태워>는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신작이다. 아르헨티나와 미국, 이탈리아, 그리스, 페루, 스페인 등 여러 국
[리뷰] 다른 매체, 다른 언어의 경계를 감각게 하는 번역 실험, <너는 나를 불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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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살대’는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 혈귀에 대항하기 위한 인간 조직이다. 귀살대에 속한 주인공 탄지로(하나에 나쓰키)는 오랜 훈련과 결투 끝에 혈귀들의 대장인 무잔을 처치하려 한다. 이에 무잔은 탄지로와 귀살대 대원들을 ‘무한성’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가둔다. 무한성에서 귀살대 정예 대원인 ‘주’들과 가장 강한 혈귀인 ‘상현’들이 맞서 싸운다. 탄지로는 선배 대원의 원수인 혈귀 아카자(이시다 아키라)와 대적한다. 2억2천만권의 발행부수를 기록한 인기 만화 <귀멸의 칼날>이 원작이며, 이번 극장판은 서사의 최종 국면에 들어서는 대목이다. <귀멸의 칼날>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그간 보여준 애니메이팅의 압도적인 시청각적 화려함은 한결같다. 드라마의 완성도도 더욱 깊어졌다. 일본에서의 대흥행이 한국에서도 이어질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리뷰] 소년만화의 고전성을 현대 애니메이션의 호흡으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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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지(메리앤 장밥티스트)의 신경은 자주 곤두서 있다. 동식물을 두려워하고 날마다 가구를 소독하는 그는 타인과 마주치면 날 선 지적을 일삼는다. 언니를 걱정하는 동생 샨텔(미셸 오스틴)은 어머니날을 맞아 팬지의 가족을 초대하는데, 이날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 <내 말 좀 들어줘>는 전형적 비호감으로 여겨지는 인물의 내면을 살피는 와중에 주변을 고루 둘러본다. 팬지의 남편과 아들의 심리를 클로즈업하며, 샨텔과 두딸이 소통하는 방식을 그린다. 마이크 리 감독과 배우들이 함께 구체화한 캐릭터들은 일상의 균열을 세밀하게 포착하는 이야기 안에서 저마다의 리듬으로 생동한다. <비밀과 거짓말>에서 차분한 호흡으로 인상을 남겼던 메리앤 장밥티스트의 연기가 복잡한 인물의 결을 살린다. 팬지의 돌출된 언행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폭소하다가도, 빽빽한 말 사이로 ‘내 마음 좀 봐줘’라는 요청이 들리면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리뷰] 빽빽한 말의 틈새를 포착하는 세밀화, <내 말 좀 들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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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실종된 상처를 안고 가톨릭 사제가 된 정도운(신승호)은 고해성사를 위해 성당을 찾은 남자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듣는다. 비밀을 지켜야 하는 사제의 의무와 진실을 밝히고 싶은 아들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형사 윤주영(한지은)과 함께 과거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그 과정에서 사이비종교 집단의 실체를 만난다.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은 사제라는 정체성과 사적 복수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의 내적 투쟁을 그린 작품으로, 종교적 윤리와 인간적 감정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도록 유도한다. 선과 악, 공과 사, 흑과 백의 경계에 선 인물이 고해성사하듯 자신을 더 쏟아냈다면 작품의 입장이 한층 분명해졌을 것이지만 사제복을 입은 또 한명의 인물이 한국영화의 사제 계보를 잇는 순간만큼은 모호함 없이 빛난다. 사제복의 존재감은 여전히 크다.
[리뷰] 작품까지 경계에 설 필요는 없다,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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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군사독재가 절정에 달했던 1971년, 정치인이 었던 루벤스(세우통 멜루)가 군부에 의해 불법체포되면서 남겨진 가족의 평온한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루벤스의 아내이자 다섯 아이의 어머니 유니스(페르난다 토히스)는 취조와 감금의 고초를 당하면서도 가족을 지키고 진실을 찾기 위해 당당히 맞선다. 마르셀루 후벵스 파이바가 쓴 전기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시대를 이겨낸 한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며 국가 폭력의 실체를 폭로한다. 1970년대 리우데자네이루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따뜻한 질감으로 살려 억압의 시대를 강조함과 동시에 울부짖거나 몸부림치지 않고 불의에 맞서는 법을 보여줌으로써 조용하고 품위 있는 저항이 오히려 상대의 폭력성을 부각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개인을 기억하는 일이 곧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을 미소 띤 얼굴로 역설하고 있다.
[리뷰] 조용하고 품위 있는 저항은 상대의 폭력성을 부각한다, <아임 스틸 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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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끝나지 않은 전쟁>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홍범도 장군의 삶을 기리는 다큐멘터리다. 2001년 <나비>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한 문승욱 감독이 연출했다. 조진웅과 군인 출신 배우 이귀우가 내레이션과 배우로 참여했다. 영화는 2023년 8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과 12·3 계엄 등 지금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다음 홍범도 장군과 독립군의 행보를 통해 국군 정신의 본질을 고찰한다. 감독은 LED 스튜디오 속 두 배우의 연극적 연기와 생성형 AI 이미지로 내용을 생생히 전달하려 한다. 문제는 생성형 AI 이미지가 작품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사료의 한계를 보완하기보다 사료의 객관성을 대체하는 주객전도가 생긴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반복적이고 난삽한 화면 구성과 논지 전개, 전투 장면의 언캐니 밸리가 혼란을 남긴다.
[리뷰] 생성형 AI 이미지 홍수와 맥없는 전개에 어질어질, 최소한의 성의조차 부족, <독립군: 끝나지 않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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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형제의 잔혹한 신데렐라 이야기를 각색한 <어글리 시스터>의 주인공은 신데렐라의 ‘못생긴’ 의붓자매 엘비라(레아 미렌)다. 왕자와의 결혼을 꿈꾸는 그는 엄마(아네 달 토르프)의 주도하에 특정한 미적 기준에 부합하도록 신체를 변형시킨다. 한편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아그네스(테아 소피 로흐 내스), 즉 신데렐라는 생존을 위해 왕자와 결혼하고자 한다. 외모에 대한 집착이 엘비라의 몸과 마음을 좀먹는 와중, 왕자의 신붓감을 찾는 무도회가 열린다. 영화는 다듬어진 호러의 전시에는 관심이 없다. 틀에 맞춰 몸을 훼손하는 묘사는 사실적이므로 공포스럽다. 입체적인 인물들은 현대와 공명하고, 세련된 연주곡을 업은 레아 미렌의 연기는 엘비라의 심리를 선명하게 그린다. 피부를 긋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내장까지 찔러 주입된 시선을 토해내게 만드는 성공적 각색. 에밀리 블리치펠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리뷰] 피부만 벗겨내지 않고 내장까지 뒤집는 비정제 호러, <어글리 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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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적 웃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엔딩크레딧에 똑같은 이름이 빼곡히 채워진 노고 가득한 이 영화가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에 적합한 답변이 될 것이다. 구독자 10만명을 이제 막 달성한 귀신 찾는 유튜버 귀식커(귀신+Seeker) 인공(변재신)은 숲속에서 귀신이 출몰한다는 제보를 받고 친구 병진(정용훈)과 한달음에 달려간다. 딱 한방만 더 있으면 채널이 안정적으로 안착할 거라는 욕망이 그를 자꾸만 공포의 선단으로 몰아세운다. 그렇게 도착한 산골짜기.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촛불로 연명하는 이곳에는 도인 같은 차림의 자칭 타칭 자연인이 거주 중이다. 여벌의 수저도 없어 맨손으로 밥을 먹어야 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소금잼(이라고 하는데 비주얼적으로는 쌈장 같은)만이 유일한 밑반찬이다. 볼일 보고서도 뒤처리는 꼭 계곡에서 해야 하는 게 원칙. 따라서 자연인의 생활양식은 전원적이기보다 원시적이고, 목가적이기보다 생존적이다. 한편 인공은 자연인에게 어딘가 찜찜함을 느낀다. 문명과 떨어진
[리뷰] 같은 자연인이라 아는데 분명 모두 웃는다, (어이없어) 하하하!, < THE 자연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