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스미노 요루가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 타인의 감정을 눈으로 볼 수 있는 5명의 고교생이 주인공인 판타지 로맨스다. 이들은 각기 다른 형태로 타인의 마음을 인식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는데 이는 오히려 서로간에 상처를 남기고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절묘한 비율로 조율한 연출은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 판타지가 주는 기발함과 새로움은 유지하되 장난기가 서사를 압도하지 않도록 절제된 톤을 끝까지 이어간다. 결국 직시할 것은 타인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청소년의 이야기지만 타인과 자신 사이에서 한번쯤 흔들려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공명할 수 있는 성장담이기도 하다. 배우들의 빛나는 비주얼과 안정적인 연기 역시 인물들의 감정선을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리뷰] 현실과 판타지를 절묘한 비율로 배합하다, <나만의 비밀>
-
“운이 좋으시네요. 검사 결과, 자궁내막증보다 갱년기에 들어섰습니다.” 다행히 질환은 피해갔다지만 갱년기에 들어섰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은 수민(김영선)은 자신이 아직 마흔일곱밖에 되지 않았다고 응수한다. 그러나 그의 당혹감을 일체 신경 쓰지 않는 의사는 “정년기”라는 무딘 답만을 돌려줄 뿐이다. 이후로 수민의 삶의 온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감정이 오락가락하고, 평소와 같은 남편의 말도 날카롭게 들린다. 영화는 갱년기 여성을 일컫는 조롱 섞인 멸칭부터 이들을 더 이상 ‘쓸모 있는 여자’로 취급하지 않는 구시대적 인식까지 중년기를 침입한 성차별을 낱낱이 고백한다. 수민과 그의 친구 은영(전현숙), 현(유담연)의 삶을 빌려 생애주기에 걸친 사회 전반의 차별을 담아내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다만 모든 불합리를 구두와 서술로 풀어내는 과정이 다소 느슨하게 느껴지고 사회적 변혁을 바라는 방향보다 개인사 토로에 가까워 아쉬움을 남긴다.
[리뷰] 생애주기에 깃든 구시대적 성차별을 우정의 얼굴로 뻗어낸다, <나는 갱년기다>
-
화려할수록 어둠도 짙어지는 도시, 미선(한소희)과 도경(전종서)은 오직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냉혹한 현실을 버틴다. 두 사람은 은퇴 후 평범한 삶을 계획하며 낮에는 꽃집, 밤에는 유흥업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만 범죄조직에 사기를 당하며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된다. 탈출의 꿈이 산산조각 흩어진 미선과 도경은 위험한 게임에 발을 담근다. 우연히 알게 된 정보로 유흥가의 실세이자 자신들을 수렁에 빠트린 조직의 실세 토사장(김성철)의 은닉 자금을 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한 두 사람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변수들로 점점 꼬여가고, 탈출구가 없는 미선과 도경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수렁을 향해 질주를 시작한다.
<박화영>(2018), <어른들은 몰라요>(2021)로 청소년들의 어둠을 조명했던 이환 감독이 스타일리시한 범죄스릴러물로 세계를 넓혔다. 화려하고 감각적인 영상으로 도시의 어둠을 조망하는 이 영화는 의외로 앞으로 내달리지 않는다.
[리뷰] 속 빈 무드에도 살아남은 캐릭터들의 현란한 비주얼, <프로젝트 Y>
-
아무리 손뼉을 쳐도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공간이 사막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시라트>의 사막엔 일렉트로닉 뮤직이 사방으로 반사돼 울려 퍼진다. 레이브 파티가 한창인 모로코의 어느 사막. 부랑자들은 거대한 스피커를 말뚝처럼 모래 구덩이에 박은 채 밤낮 없이 비트와 약에 몸을 맡긴다. 그들 사이로 한 남자가 어린 아들 에스테반(브루노 누녜스 아르호나)과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들어온다. 떠돌이 생활과 무관해 보이는 남자의 이름은 루이스(세르히 로페스)다. 그는 레이브 파티에 갔다가 5개월째 실종된 딸을 수색 중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장한 군인들은 사막 너머의 세상에 전쟁이 벌어졌으니 파티를 중단하고 대피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5명의 레이버는 다른 레이브 파티로 향하고자 경비를 따돌리고, 루이스 부자는 레이버들의 탈주에 합류해 사막 곳곳에 매설된 폭력과 죽음을 경험한다.
‘천국과 지옥을 잇는 가느다란 다리. 그 길은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롭다.’ &
[리뷰] 통각수용기를 수시로 과부하하는 실용적 굉음, <시라트>
-
-
큰 병을 앓고 있는 15살 소녀 튜즈데이(롤라 페티크루)는 어느 화창한 날 죽음의 화신을 만난다. 그런데 생명을 거두는 존재가 인간처럼 보이진 않는다. 우습게도 빨간 앵무새가 이 세계의 모든 죽음을 관장하고 있다. 튜즈데이는 죽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농담을 던지고 앵무새가 웃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한편 긴 간병으로 지친 엄마 조라(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는 튜즈데이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안 후로 딸을 구하고자 한다. 앵무새를 없애면 딸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죽음의 전령을 붙잡아 불태우기에 이른다. 하지만 앵무새는 재 속에서도 고개를 든다. 놀란 조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을린 앵무새를 입안에 밀어넣고 삼켜버린다. <튜즈데이>로 첫 장편영화를 완성한 신인감독 데이나 O. 푸시치는 과연 죽음이 없는 세상이 천국일까란 질문을 유쾌하고 창의적으로 풀어낸다. 시트콤 <사인필드>의 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의 연기를 볼 수 있는 건 덤이다.
[리뷰] 모성신화도 죽음에 관한 관성적 재현도 깨다, <튜즈데이>
-
곧 성인이 될 세 고등학생이 동네의 작은 방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많지 않은 일감을 여럿이 나누고, 적당히 일을 배우며 학생들은 자신의 쓸모를 찾아간다. 어느 날 회사 차가 도난당하고 직원들은 흩어져 차를 찾기 시작한다. <여행과 나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연출한 미야케 쇼 감독의 데뷔작이다. 겨울의 삿포로를 배경으로 사회에서 제 몫을 하고 싶어 하는 10대들을 등장시키는데, 인물과 내러티브를 명확히 설명하는 숏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 비슷한 구도의 신을 반복하고 해당 신에 등장하는 구성원을 바꿔가면서 그들이 빚어내는 화학작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실험한 작품에 가깝다. 세 학생이 회사의 일원이 된 뒤 유추할 수 있는 미묘한 관계의 변화가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플레이백> <와일드 투어> <새벽의 모든> 등 미야케 쇼 감독 필모그래피의 일면을 발견하는 재미도 존재한다.
[리뷰] 미묘한 차이와 반복. 미야케 쇼의 영화적 실험의 시작, <굿 포 낫씽>
-
눈앞의 만사를 전지적 시점으로 조망하는 아기가 있다. 이름은 아멜리(루이즈 샤르팡티에). 일본 주재의 벨기에 영사 집안에서 태어난 아멜리는 세살을 맞는 1969년까지 오로지 제 의지로 발달과업을 거부한다. 아멜리는 할머니(캐시 세르다)가 선물한 화이트초콜릿으로, 보모 니시오(빅토리아 그로부아)가 가르쳐주는 삶과 죽음의 비밀로 점차 세상과 소통한다. 제49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관객상, 제27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을 수상한 <리틀 아멜리>가 한국 극장가를 찾는다. 원작 소설인 아멜리 노통브의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의 문체처럼, 영화 속 아멜리는 일그러진 세상을 인과관계로 재편하지 않고 왜곡 그 자체로 인지한다. 하지만 영화는 성장 과정에서 교차문화성(Cross-culturality)에 눈을 뜨는 아멜리를 경유해,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도 아름다움과 경이가 도처에 존재함을 인상적인 작화로 그려낸다.
[리뷰] 모순뿐인 세상에도 아름다움과 경이가 도처에, <리틀 아멜리>
-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관 1등 서기관 보리(이찬용)와 그의 연인 교통보안원 서복주(이가영), 그리고 이들을 감시하는 통역관 리명준(전운종). 본국으로 떠나야 하는 보리는 근무 연장을 신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세 사람의 관계는 예정된 끝을 향해 나아간다. 김보솔 감독의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으로 체제 안에서 통제되는 인간의 외로움을 저채도 색감으로 그려낸다. 개인의 삶이 노출되는 공간이면서 외부 세계와 철저히 차단된 밀실이기도 한 광장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지닌 상징적 공간과 연결고리를 가진다. 홍상수 감독 영화의 영화음악을 담당해 잘 알려진 정용진 음악감독이 전례 없이 학생 작품을 맡아 화제를 모았고, 제51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장편 최우수작품상을, 제49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리뷰] 광장에 갇힌 사람들의 외로운 맴돌기, <광장>
-
이곳은 사후 세계. 왕녀 스칼렛(아시다 마나)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숙부 클로디어스(야쿠쇼 고지)를 응징하기 위해 검을 든다. 억울한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분노와 집착이 지속되는 이곳은 지옥과 다를 게 없다. 그러던 어느 순간 스칼렛 앞에 기이한 복장의 남자가 나타난다. 중세 시대에서 건너온, 어둡고 무거운 스칼렛과 달리 현대에서 온 간호사 히지리(오카다 마사키)는 밝고 경쾌하다. 각자가 살아간 시대상도, 죽음을 이해하는 태도도, 여정을 통과하는 과정도 모두 다르지만, 스칼렛과 히지리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동생의 음모로 살해된 선왕, 죽은 남편의 동생과 재혼한 왕후, 들끓는 복수를 노리는 후계자까지 <끝이 없는 스칼렛>은 <햄릿> 세계관에 원형을 둔다. 그러나 자유롭고 진보적인 상상이 덧대지면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주요한 질문이 훼손 없이, 왜곡 없이 그대로 전달된다. 무엇보다 전작과 다른 작풍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리뷰] <햄릿>에서 뻗어나온 질문은 호소다 마모루의 ‘시간’으로 답을 얻는다, <끝이 없는 스칼렛>
-
대학 시절 록밴드의 보컬로 무대를 누비던 승민(권상우)은 공연 중 사고를 겪은 뒤 가수의 꿈을 접고 악기 판매점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던 그의 앞에 첫사랑 보나(문채원)가 손님으로 등장하면서 멈췄던 시간이 뜻밖의 방향으로 다시 흐른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승민에게는 숨겨야 하는 비밀이 생기고 이를 지키기 위해 선택의 기로에서 분투한다. 무해한 사람들의 선의와 오해가 사랑스럽고 자연스러운 웃음을 만들어내며 인물들이 충돌할수록 사랑이 충만해지는 묘미가 있다. <히트맨> 시리즈에 이어 <하트맨>으로 돌아온 최원섭 감독은 아르헨티나 원작을 한국적 정서로 각색해 풍부하고 따뜻한 웃음으로 풀어낸다. 새해에 어울리는, 딱 기분 좋은 온도의 가족코미디다.
[리뷰] 충돌할수록 충만해지는 하트의 힘, <하트맨>
-
어릴 적 도깨비 신비(조현정)와 함께 귀신을 무찔렀던 구하리(김영은)와 최강림(신용우), 그리고 그들의 두 친구는 어느덧 성인이 된다. 최강림은 종적을 감췄으며 나머지 셋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거기에 카페 아르바이트까지 하느라 바쁜 구하리는 신비에게 소홀해진다. 그즈음 ‘출동! 귀신 헌터’ 채널의 제작자 안 PD(황창영)가 신비에게 다가오고, 신비는 순식간에 유튜브 스타가 된다. 어느 날 신비는 안 PD의 스튜디오에서 수상쩍은 물건을 발견한다. <신비아파트 10주년 극장판: 한 번 더, 소환>은 투니버스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신비아파트>의 네 번째 극장판이다. K애니메이션의 현주소를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제작에 4년이 든 만큼 곳곳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묻어나온다. 세련된 캐릭터디자인과 흐트러지지 않는 작화, 스펙터클한 전개와 새 캐릭터의 등장 등 시리즈의 팬은 물론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도 충분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리뷰] ‘신비아파트: 엔드게임’이라 해도 손색없는 팬 서비스, 세련된 비주얼에 오열(서브웨이 레시피는 덤), <신비아파트 10주년 극장판: 한 번 더, 소환>
-
깨진 안경을 쓰고 손가락에 피 나도록 시나리오를 고치는 감독, 영화를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영화 때문에 신용불량자 된 적 있어?”란 질문을 받는 감독, 태초에 알타미라동굴 벽화를 그렸고 여러 번 환생을 거듭한 끝에 영화를 준비하는 감독, 카메라를 세팅하는 동안 노배우에게 연애 상담을 하는 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3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옴니버스영화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는 영화 배움터를 뿌리로 둔 덕에 여러 영화감독을 그린다. 김도영, 이종필, 이경미, 김홍준 감독 등 영상원 학생, 교수 출신 30명이 연출에 참여했고, 전고운 감독이 총괄 디렉터를 맡았다. ‘1막 Warm Up 예열’은 코미디 요소가 두드러지고, ‘2막 Deep Field 심연’은 진지한 태도를 취하며, ‘3막 Impact Zone 폭발’은 다양한 장르를 구사한다. 1월14일부터 순차적으로 1막씩 CGV에서 공개되며, 전체 작품은 2월4일부터 5일간 상영된다.
[리뷰] 각양각색이라 들쭉날쭉하지만 눈길이 가는,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
-
근미래, 정부의 정책 실패로 인해 생긴 ‘잉여’ 인구들이 가상의 도시 포구에 위치한 텍사스 온천에 모여든다. 엄마를 찾아온 제인(지니)도 그중 하나다. 온천의 운영자는 교한(유인수)과 동생 로한(조병규)으로, 형제는 미스터리한 인물 모자장수(서인국)에게 복종한다. 서로 적대하던 것도 잠시, 유일한 가족과 유해하게 얽힌 로한과 제인은 점차 가까워진다. 그러나 곧 제인의 엄마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고 제인은 교한의 골칫거리가 된다. 교한은 로한을, 로한은 제인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보이>를 한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면, 각자의 ‘지킴’이 자기중심적 착각일 수도 있음을 형제가 깨닫는 과정이다. 이상덕 감독의 세 번째 장편으로 장르가 다른 만큼 톤과 템포만은 전작들과 차별된다. 청년층이 MP3와 2G 폰을 휴대하는 <보이>의 세계는 꼭 2000~2010년 무렵의 감성으로 하나의 근미래 이미지를 상상한 결과물처럼 다가온다. 다양한 이들이 머물며 각종 물질과 행위
[리뷰] 매운 듯 싱거운, 인상들로서의 근미래담, <보이>
-
노래하는 즐거움 하나로 살아가는 마이크(휴 잭맨)는 중년의 모창 가수다. 낮에는 정비공으로, 밤에는 레스토랑이나 바, 지역축제에 참여한 주민들을 상대로 공연을 하며 산다. 마이크는 알코올중독 때문에 수십년째 술을 끊고 사는 베트남 참전 용사치고는 성격이 긍정적이고 밝다. 비록 모창을 하는 신세지만, 예술가로서의 자의식도 적당히 갖고 있다. 다른 동료가 자신과 똑같은 컨셉으로 한날한시에 모창 무대를 하는 걸 참지 못하는 식이다. 그의 평범했던 일상은 어느 날 축제에서 우연히 싱글맘 클레어(케이트 허드슨)를 만나면서 송두리째 뒤흔들린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서로의 장기를 살려 커버 밴드를 결성하기로 의기투합한다. 심지어 악기 연주자 멤버들과 매니저까지 섭외해서 명가수 닐 다이아몬드 모창을 전문으로 하는 헌정 밴드 ‘라이트닝 앤 썬더’를 결성한다. 비록 자그마한 동네 공연이긴 해도 무대 위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호흡이 어찌나 좋았던지, 당대 최고의 록밴드 ‘펄 잼’의 리더 에디 베더가
[리뷰] 희망은 복제해도 원본만큼 충분히 값지다, <송 썽 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