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배우(송선미)가 꼬박 12년 만에 영화를 찍었다. 스타 배우였는데 결혼하고 아이도 기르다 보니 한동안 연기를 그만뒀다. 젊은 감독(하성국)이 보내준 시나리오가 무척 재밌었고, 집까지 찾아와 자기 영화를 설명하는 감독이 믿음직스러워 영화를 찍었다. 자그마한 독립영화다. 오늘은 기자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날이다. 평소 알던 독일식 음식점이라 편하다. 3명의 기자가 녹음기를 켜고 배우와 인터뷰한다. 영화에 관한 얘기는 많아야 3할 정도인 듯하다. 그외에는 대부분 사는 얘기다. 기사가 제대로 나올는지 모르겠다. 사는 얘기에 빠지다 보니 배우는 맥주 한잔을 자꾸 권하게 된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3명의 기자는 똑같이 묻는다.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세요?” 배우는 답한다. “자신을 사랑해주세요.”
홍상수 감독의 34번째 장편영화 <그녀가 돌아온 날>은 아주 소박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1부터 5까지의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고, 1~3의 이야기는 기자들과의 인터뷰다
[리뷰] 그녀의 고개만 보더라도, 아니 그녀의 고개만이 예쁘다, <그녀가 돌아온 날>
-
18세기 초 베네치아, 뛰어난 오케스트라로 명성이 높은 피에타 보육원. 감미로운 선율로 가득한 겉모습과 달리 소녀들은 엄격한 규율 속에 살아간다. 체칠리아(테클라 인솔리아)는 매일 밤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도하지만, 성인이 된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의 결혼뿐이다. 희망이 서서히 체념으로 기울어가던 무렵, 새로 부임한 음악 교사 비발디(미켈레 리온디노)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다. <비발디와 나>는 오페라 연출가 출신 다미아노 미키엘레토 감독의 영화 데뷔작이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음악이 대화의 여백을 메우며 서사의 리듬을 단단히 조율한다. <햄넷>처럼 거장의 이름을 전복하는 데까지 나아가진 못하지만, 억압된 환경 속에서 예술적 열망이 싹트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리뷰] 창살의 틈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선율, 유디트의 승리!, <비발디와 나>
-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버섯 왕국의 수호자인 피치 공주가 있었습니다.” 잠자리를 뒤척이는 별들(루마)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로젤리나 공주는 갑작스레 왕국을 침범한 괴상한 로봇에 납치당한다. 괴한의 정체는 쿠파 주니어. 전편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에서 땅콩버섯을 먹고 힘을 잃어 피치 성에 감금된 쿠파의 아들로, 아버지를 구출하고 세계를 정복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한편 히어로 배관공으로 거듭난 마리오와 루이지 형제는 모래 왕국에서 민원을 해결하던 중 귀여운 공룡 요시를 만나게 된다. 전 세계 흥행 수익 13억달러, 메가 히트 애니메이션의 속편은 닌텐도 위(Wii) 게임 <슈퍼 마리오 갤럭시> 시리즈를 기본 세계관으로 장착했다. 전편보다 더 숨 가쁘고 더 정신없어졌지만, 버섯을 먹고 배관으로 이동하는 친숙한 장면에 이번에도 향수에 빠지고 만다.
[리뷰] 숨가쁜 게 이 시리즈의 제맛이라고요!, <슈퍼 마리오 갤럭시>
-
<란 12.3>은 한국영화계의 대표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의 신작으로 그의 첫 다큐멘터리다. 영화 전반에 12·3 내란을 실시간으로 볼 때의 답답함과 긴장감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선명히 드러나 있다. 감독은 이를 위해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이 가결되기까지의 시간을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했다. 그다음 현장감을 살리려 내레이션과 인터뷰 등 사후적인 자료를 제외했으며 현장 영상 중심으로 화면을 배치했다. 이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파트너로 활동했던 조성우의 음악을 따라서 푸티지를 빠른 리듬으로 연결해 스릴러를 보는 듯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다만 영화 속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에 관한 풍자는 신선하기보다는 기존의 정치적 밈을 답습하는 차원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란 12.3>의 핵심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감독의 실험정신이다. 계엄을 주도했던 내란 세력의 음모를 무성영화 스타일의 자막으로 그려냈고 분할화면을 동원한 애니메이션과 생성형 AI
[리뷰] 기존 정치 다큐멘터리와 확연히 다른 스타일리시, <란 12.3>
-
-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라면 기쁜 일은 배가 되고 슬픈 일은 반으로 나눌 수 있어 좋다고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그렇게 아름답게 전개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토’라는 똑같은 성을 가진 사치(기시이 유키노)와 타모츠(미야자와 히오) 커플에게 긴 시련이 주어진다. 사건은 타모츠의 사법시험 불합격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음씨 좋은 사치는 동거인의 페이스메이커가 되고자 직장 생활을 하는 와중에 고시 공부를 병행하는데, 그러다 덜컥 합격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기쁨과 슬픔의 덧셈 뺄셈을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둘의 본격적인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 사랑의 결실인 아이가 생기지만 타모츠의 수험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엇나간다.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현실이 되는 걸까. 그리고 <사토상과 사토상>은 그 어떤 로맨스영화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영화다. 직업이 변호사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 어떤 커플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을 만한 디테일한 대사들이 쏟아진다.
[리뷰] 둘보다 나은 하나가 되는 것의 어려움, <사토상과 사토상>
-
노동과 계급, 전쟁 등 공동체의 현실 문제를 집요하게 다뤄온 마크 허먼 감독이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연출한 작품이 2008년 첫 공개 이후 입소문을 타고 오래 회자되다 드디어 올봄 국내 영화관에서 관객을 만난다. 나치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베를린에서 폴란드로 이사 온 8살 소년 브루노(아사 버터필드)는 집 뒤로 보이는 농장을 궁금해하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슈무엘(잭 스캔런)을 만난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슈무엘과 친구가 된 브루노는 우정을 쌓아가며 점차 참혹한 진실을 향해 다가간다. 2026년 봄, 18년 만에 다시 만나는 두 소년의 이야기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전쟁 미치광이들에 의해 현재에도 그 참상이 실시간으로 이어지고 있어서다. 두 소년의 이야기는 과거사를 돌아보는 데서 그칠 수 없는, 바로 오늘의 우리 이야기다.
[리뷰] 전쟁 미치광이들의 낯이 어른거리는 바로 오늘의 이야기,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
사업에 실패하고 해고까지 당해 집에서 설 자리를 잃은 봉수(오대환). 그는 뜻밖의 사고로 기억을 잃고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잊은 채 모든 관계를 새로 구성해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하루아침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상 속에 봉수와 그의 가족들은 좌충우돌하며 엉킨 관계를 회복하려 애쓴다. <플란다스의 개> 각본을 쓰고 <해부학교실>을 연출한 손태웅 감독은 기억상실이라는 설정을 통해 익숙한 가족관계를 낯설게 들여다보도록 안내한다. 가장과 배우자, 부모와 자식, 친구와 동료라는 이름 아래 갇혀 있던 인물들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재조합되면서 하나의 역할극을 수행하듯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성장한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자리에서 한발 비켜났을 때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코믹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간다.
[리뷰] 미스매치로 시작해 믹스매치로 끝냈더라면, <미스매치>
-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부유하는 초등교사 철수(차시윤). 자로 잰 듯 반복되던 그의 일과는 여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거절당한 뒤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재회를 위해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던 그는 정신과 의사로부터 “모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기묘한 처방을 받는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이 그를 옥죄기 시작할 무렵, 초등학교 동창 영희(이재리)가 나타나 그의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관념의 남자 김철수>는 제목만큼이나 독특한 정신세계가 엿보이는 블랙코미디다. 별다른 사건 없이도 실없는 웃음을 자아내는 건조한 톤은 다양한 질감의 이미지를 혼용하는 연출과 맞물려 분명한 개성을 드러낸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서사의 추진력이 약해지며 초반의 신선함이 흐릿해지는 점은 아쉽다. 공동 연출을 맡은 두 감독이 직접 주연으로 나섰다.
[리뷰] 독특한 정신세계만으로는 완주하기 어렵다, <관념의 남자 김철수>
-
암흑가 조직이 거리를 장악한 런던. 시 당국은 통행금지령을 선포하며 진압에 나서지만, 도심 곳곳으로 번진 총성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다. 전역 후 평범한 삶을 이어가던 에이다(케이트 베킨세일)는 딸이 범죄 조직에 납치되며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린다. 막다른 길에 내몰린 그녀는 거액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라이벌 갱단의 보석상을 터는 무모한 작전에 뛰어든다. 제임스 넌 감독의 신작 <와일드캣>은 전직 특수요원이 딸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는 설정에서 자연스레 <테이큰>을 연상시킨다. <언더월드> 시리즈로 액션 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진 케이트 베킨세일이 이번에도 거침없는 몸놀림으로 극의 중심을 단단히 붙든다. 다만 정교한 설계가 생명인 하이스트 장르임에도, 빈약한 밑그림 탓에 어수선함이 감도는 지점은 못내 아쉬움을 남긴다.
[리뷰] 장르의 치밀함 대신 익숙한 액션의 관성으로, <와일드캣>
-
서른살을 앞둔 배우 지망생 짱구(정우)는 친한 동생 깡냉이(조범규)와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백번 가까이 오디션에서 낙방했어도 그의 꿈은 흔들리지 않는다. 짱구는 부산 친구 장재(신승호)와 함께 간 나이트클럽에서 이상형 민희(정수정)를 만난다. 둘은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짱구는 이따금 연락이 끊기는 민희가 자신을 떠날까 불안하다. <짱구>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섹션 상영작으로 <바람>의 스핀오프 격인 영화다. 정우는 <그 겨울, 나는>의 오성호 감독과 공동 연출을 맡았고 각본, 주연, 제작에도 참여했다. <바람>처럼 정우의 자전적 서사를 그려내나 완성도는 미흡하다. 갈피를 못 잡고 늘어지는 서사와 시대착오적 감수성과 연출, 고민 없이 쓴 온갖 클리셰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리뷰] <짱구>를 말렸는가, 못 말렸는가, <짱구>
-
샤아와 아무로가 공멸한 네오지온 2차 항쟁으로부터 12년 뒤. 테러 조직 마프티의 리더 하사웨이 노아(오노 겐쇼)는 부패한 지구 고위층이 모이는 애들레이드 회의장을 급습하려 한다. 마프티를 소탕하는 부대 키르케의 지휘관인 케네스 슬랙(스와베 준이치)과 파일럿 레인 에임(사이토 소마)은 이에 맞서 기만 작전을 펼친다. 노아는 아무로와 샤아, 첫사랑 퀘사의 환영에 시달리면서도 전투에 임한다. 그 한가운데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소녀 기기 안달루시아(우에다 레이나)가 있다. 도미노 요시유키가 1985년에 쓴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시리즈의 2편이다. 일인칭시점과 3D CG 모델링을 활용한 액션 연출, 드라마틱한 명암대비와 도미노 요시유키 특유의 반테러리즘 사상이 인상적이다.
[리뷰] 토미노의 가장 어두운 세계관을 감당하는 연출, 홀릴 수밖에 없는 기기 안달루시아의 매력,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
-
“혼자 쓸 수 있는 방 있나요?” PCB 공장에 입사한 지원(이연)이 담당자에게 가장 처음으로 건넨 질문이다. 지원은 과거 친구로부터 배신당한 기억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일면식 없는 지원자들과 대기실에 있을 때조차 기둥 옆 구석에 혼자 덩그러니 있다. 지원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곳에 선을 둔다. 그리고 그 선을 가뿐히 뛰어넘는 게 주희(권소현)다. 다른 사람을 살뜰히 생기고 다정한 얼굴로 말하는 그는 지금까지 지원이 못해본 경험을 하게 해준다. 그리고 지원과 함께 공동 조장이 된 한별(박한솔)까지. ‘ 탱고엔 반드시 두 사람이 필요하다’(It takes two to Tango)라는 오래된 말처럼 <새벽의 Tango>는 지원, 주희, 한별 세 사람의 모나고 둥근 관계를 그려간다. 삶이 어긋날 때마다 그것을 즐거움으로 변주하는 탱고의 메시지로 따뜻한 위로를 준다.
[리뷰] It takes two to tango, 탱고엔 ‘우리’가 필요해, <새벽의 Tango>
-
오랜 시간 아마추어 선수들의 격전지였던 야구장이 새 중학교 부지로 선정된다. 철거를 앞두고 열린 최후의 시합. 양팀은 끝을 의식하되 늘 그래왔듯 창의적으로 황당한 플레이를 이어간다. 싱거운 농담 사이로 삶의 비밀스러운 잠언들도 고개를 내민다. 그중 하나가 원제인 ‘이퍼스’(eephus)와 관련된다. 위력은 없지만 타자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으로 목적을 다하는 느린 공처럼, <마지막 야구 경기>는 삼삼한 풍미를 자랑한다. 생중계를 보는 듯한 전개, 스리슬쩍 뭉개지는 위기, 중장년의 회한이 밴 결말이 긴 하루에 녹아 있다. 한 장소의 소멸과 남성 무리의 황혼이 맞물리는 동안 그라운드 안팎의 이웃들까지 살갑게 품는 이 영화에는 지난 2월 작고한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이 라디오 속 목소리로 찬조 출연하기도 했다. 제77회 칸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작.
[리뷰] 한 장소의 소멸과 동지들의 황혼이 겹칠 때, <마지막 야구 경기>
-
이집트 특파원인 찰리 캐넌(잭 레이너)의 딸 케이티(나탈리 그레이스)는 의문의 여성에게 납치당한다. 실종 수사가 무마되고 어머니 라리사(라이아 코스타)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로부터 8년 뒤 케이티가 비행기 추락 사고 현장에 있던 관에서 붕대에 봉인된 채 발견된다. 케이티가 돌아온 날부터 집 안에 으스스한 일이 생긴다. 어느 날 찰리는 케이티를 감싼 붕대에서 패턴을 발견한 후 8년 전의 미스터리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집트의 형사 자키(메이 칼라마위)도 함께 범인을 수색한다. <리 크로닌의 미이라>는 제임스 완과 블룸하우스가 공동 제작하고 <이블 데드 라이즈>의 리 크로닌이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완성도는 훌륭하다. <엑소시스트> <샤이닝> 등 고전 호러를 독창적으로 계승한다. 폐쇄된 공간 활용과 광각렌즈로 폐소공포증을 유발하는 촬영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영향이 감지된다. 엑소시즘의 틀 안에서 코즈믹 호러, 밀실 호러, 고어와 파운드 푸티지
[리뷰] 왜 미라인지 모르겠지만 <샤이닝> <엑소시스트>부터 코즈믹 호러까지 장인의 차력쇼는 압권, <리 크로닌의 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