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출신의 1997년생 혜자(정은지)에게 서울은 정말이지 차가운 도시다. 콜센터 직원으로 일하는 그에게 늘 찾아오는 것은 수화기 너머 고객들의 폭언과 주변 동료들의 따가운 눈초리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혜자에게 주변인들은 “네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식의 비난을 가할 뿐이다. 그럼에도 혜자는 서울에 터를 잡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급히 돈이 필요해진 혜자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고향 부산에 들른다. 하지만 일은 순탄치 않다. 엄마의 지인들에게 직접 돈을 수금하러 다녀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결국 혜자는 엄마와 친밀했던 이모 희숙(김주안)과 함께 부산 곳곳을 돌아다니며 과거의 인연, 현재의 갈등을 마주한다. 전작 <울산의 별>로 중년 여성 노동자의 삶을 그렸던 정기혁 감독의 신작이다. 이번에는 청년세대의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삼았다. 이상한 차별의 풍토가 정상처럼 여겨지는 사회의 조감도가 부산의 풍경 위로 펼쳐진다. 다른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지역의 모습 곳
[리뷰] 배우들의 호연과 흔들림을 거부하지 않는 카메라, <97 혜자, 표류기>
-
60대 기호(최민식) 주변에는 만년필과 낡은 회중시계, 오란다 과자, 셜록 홈스 전집이 있다. 하나같이 오래됐지만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반면 젊은 CEO 선우(한소희) 주변엔 새로운 것들만 가득하다. 그가 이끄는 패션브랜드 ‘WOO22’(우투투)는 100억원 매출을 달성했지만 3년밖에 되지 않았다. 배송 문제, 모델과의 대립 등 매일 새로운 문제가 펼쳐진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우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이 등장한다. 세금 혜택을 위해서 부대표 영환(김준한)이 실버 인턴으로 기호를 뽑아 선우의 전속으로 배치한 것. 3개월만 고용할 인턴이 너무 열심이라 선우는 그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이를테면 기호는 아직 어두운 사무실에 제일 먼저 출근해 선우를 깜짝 놀라게 한다. “쫄따구가 일찍 일찍 다녀야죠”라고 말하는 머리카락 희끗한 인턴이 선우는 “진짜 불편하다”.
김도영 감독의 <인턴>은 동명의 할리우드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로버트 드니로와 앤
[리뷰] 애정 전선은 걷어내고 담백하게, <인턴>
-
15년 전 사고로 몸이 뒤바뀐 채 서로의 얼굴로 살아가는 리쿠(다카하시 가이토)와 마나미(요시네 쿄코). 서른이 되도록 남의 인생을 대신 산다는 건 로맨스의 설렘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워진 정체성 그리고 뒤틀린 가족관계와 같은 지극한 현실을 매일 마주해야 한다. <네 얼굴로는 울 수 없어>는 로맨틱코미디에서 흔히 쓰이는 보디 체인지 설정을 가져왔으나 기적적인 원점 회귀에 몰두하지 않는다. 대신 타인의 일상을 버텨내는 과정에서 찾아가는 진정한 ‘나’와 ‘우리’를 섬세하게 짚어낸다. 그렇게 영화는 타인이 되어 살아가는 고통을 넘어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스스로를 껴안는 온기를 전한다. 다채로운 매력의 다카하시 가이토와 연기파 요시네 교코가 주연으로 극을 이끌고, 의 하야시 유타가 리쿠의 남동생으로 합류해 몰입도를 높였다.
[리뷰] 판타지의 기적 대신 들여다본 일상의 무게, <네 얼굴로는 울 수 없어>
-
영화감독 성재(이제연)는 체코 서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 ‘카를로비바리’를 배경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한 것은 물론 투자까지 유치해내지만 현지 촬영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제작비가 모두 사라져버린다. <카를로비바리>는 두 가지 의문을 동력 삼아 영화를 전개한다. 제작비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동생 성준(김별)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는가. 영화는 이 의문보다 눈앞에 놓인 위기를 해결하는 데 주력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돈이 없으면 눈속임으로. 해외에 가는 대신 CG를 활용해서라도 크랭크업을 향해 달려가는 추진력을 보여준다. 영화 만들기에 관한 소동극이, 상대적으로 이 과정에 친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얼마나 유효한 웃음을 가져다줄까. 그 실효성에 의구심이 들다가도 이 작품이 지닌 긍정의 힘에 동조하게 된다.
[리뷰] 파동 없이 평탄하게 흐르는 소동, <카를로비바리>
-
-
부기장 벤(에런 엑하트)은 이륙 전 아픈 아들을 돌보는 아내의 전화를 무심하게 받은 일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벤의 비행기가 사고로 태평양 한가운데, 상어 떼가 출몰하는 영역에 추락한다. 벤은 승무원이 상어에 처참하게 물어 뜯기는 순간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또래의 소녀 코라(몰리 벨 라이트)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바다로 뛰어든다. <딥 워터>는 상어 스릴러에 재난 속 가족드라마를 함께 엮었다. 얼핏 모두를 구할 영웅의 등장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생존자 각자의 사연을 비추는 군상극으로 확장된다. 위기의 순간 어선이 물고기를 풀어 두 사람을 구하는 등 기발한 생존 아이디어로 상황을 이어가는 가운데, 탈출을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할머니와 사랑을 시작하는 소년 등 다양한 인물이 저마다 일상의 의미를 되새기는 영화다.
[리뷰] 상어가 보이지 않을 때 더 무섭다, <딥 워터>
-
‘발달장애인과 함께 이루는 꿈의 핸드볼팀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2021년 총 10개의 발달장애인 핸드볼팀이 전국에서 창단했다. 2년 뒤 발달장애인 핸드볼 리그가 공식적으로 꾸려지면서 선수들이 꿈을 펼칠 무대가 마련됐다. <퍼펙트슛>은 국내 최초의 발달장애인 핸드볼팀인 청주의 ‘행복모아 챌린저스’를 중심으로 수년간 선수들의 경기, 준비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도 굴하지 않고 선수들은 혹독한 훈련을 견딘다. 영화는 단순히 경기 내용을 좇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선수들의 개인사를 내밀하게 들여다본다. 가족과 선수가 서로에게 느끼는 부채감과 굴레처럼 여기던 장애를 딛고 새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복잡하게 얽힌다. 선수로서 코트 위에 서는 당사자들의 간절함에 초점을 맞춘 채 승패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영화의 시선이 따뜻하다.
[리뷰] 승패가 아닌 도전과 발전에 의미를, <퍼펙트슛>
-
소설의 목차를 펼쳐보듯 영화는 네개의 소제목과 함께 환희(정이주)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네개의 이야기에서 환희는 서로 다른 사람처럼 다채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난영(김시은)의 관심을 애타게 바라다가도 낯선 곳으로 홀연히 떠나 새로운 삶을 꿈꾼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에게 곁을 내어주기도 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이를 배신하기도 한다. 인물들이 마주 앉아 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말과 표정 사이에는 여백이 생긴다. 창 너머 멀리 떨어진 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눈길에는 말해지지 않은 속내가 깃든다. 관객 역시 보이는 것 너머를 저마다의 시선으로 헤아리며 지나온 만남과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오해했던 얼굴들을 떠올린다. 환희가 책장을 넘겨 마지막 장을 덮는 동안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각자의 기억과 상상이 머물 틈을 내어주는 작품이다.
[리뷰] 이해하고 상상하고 오해했던 얼굴들에게, <환희의 얼굴>
-
‘연옥’은 죄수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며 그중 염왕이 각 구역장을 통치하는 자치구역이다. 무기수 유성(브루스 칸)은 사면을 조건으로 죄수를 무차별 학살하는 현재의 염왕(김재현)을 제거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는 남편과 딸의 복수를 위해 스스로 연옥에 들어온 화선(이채영)과 함께 염왕을 향한 사투에 뛰어든다. 연출과 각본, 주연을 겸한 브루스 칸이 액션 슈퍼바이저로도 참여한 작품으로 속도감 있는 마셜아트 액션이 돋보인다. 다만 유성이 상대를 매끄럽게 제압하는 흐름이 반복되면서 대결을 지켜보는 긴장감은 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느슨해지고 시대적 감각과 동떨어진 대사는 몰입을 저해한다. 액션의 긴박감이 옅어지고 대사의 설득력이 확보되지 않으면서 정통 복수극과 마셜아트 액션, 무법지대 설정의 결합이 장르적 쾌감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리뷰] 쾌감을 스스로 상쇄한 연옥이라는 허우대,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
-
해외 생활 중 직장을 잃은 주인공(박정미)은 ‘0원살이 프로젝트’를 결심한다. 잘 곳과 먹을 것을 찾아 곳곳을 누비는 그는 다양한 공동체를 만나며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경험한다. 영국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는 독일, 벨기에, 튀르키예, 이란 등까지 이어진다. 이 자유로운 여정 속에서 영화는 감독 내면의 성찰적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담요를 입은 사람>은 <0원으로 사는 삶>의 저자 박정미의 일인칭 로드 다큐멘터리다.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분노 속에서 박정미는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던지며 인간을 둘러싼 삶의 조건을 탐구한다. 여정의 길목마다 만나는 타인의 따뜻한 환대는 그가 끝내 말하고자 하는 사랑과 연결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주거, 빈곤, 환경, 여성, 난민 등의 문제를 건드리던 영화는 중반부를 기점으로 삶의 실존적인 두려움과 진정한 자유에 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다소 반전처럼 드러나는 감독의 과거는 현대인이 지닌 불안과 무의식을 숙고하게 만든다. 대부분
[리뷰] 타인과 세계에서 나를 발견하는 여정, <담요를 입은 사람>
-
엠마(젠데이아)와 찰리(로버트 패틴슨)는 행복한 연애 생활 끝에 결혼을 앞두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친구와 결혼식 연설을 준비하며 지난 연애를 돌아본다. 결혼을 축하하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엠마는 의도치 않게 과거의 비밀 하나를 밝힌다. 이는 모두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찰리는 결혼을 망설이는 지경에 이른다. 크리스토페르 보르글리 감독과 A24의 신작 <더 드라마>는 결혼을 앞둔 연인의 갈등을 경유해 동시대의 도덕적 이슈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문제작이다. 감독의 전작 <드림 시나리오>에서 선보인 사회학적 상상력은 한층 더 두터워진 밀도와 피부에 맞닿는 현실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저마다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 기준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복합적일 수 있는지를 묻는 윤리적 게임이 흥미롭다. 피와 구토를 오가는 난장판을 그려내다가 끝내 일말의 인간적인 결말로 도달하는 점도 사려 깊다. 젠데이아와 로버트 패틴슨의 신경증적인 연기는 이들이 할리우드에서 꾸
[리뷰] 여전히 어렵고 갈수록 복잡해지는 결혼 상대 찾기, <더 드라마>
-
직장 스트레스가 심하고 아픈 엄마를 돌보는 일에 지친 해류(이청아)는 죽음으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렇지만 떨어진 핸드폰을 줍다가 강에 떨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가까스로 물속에서 빠져나온 해류가 기억하는 건 자신을 구해주고 다시 물속으로 사라진 남자다. 귀 뒤에 큰 상처처럼 보이는 아가미까지 있어 더욱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을 해류는 찾기로 한다. 남자를 찾는 글을 올린 얼마 뒤, ‘인어 남자’에 관한 정보를 줄 수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제보자 강하(강하늘)를 만난 해류는 인어 남자의 이름이 곤(정해인)이고, 그와 어릴 적부터 한집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구병모 작가의 장편소설 <아가미>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극장을 찾는다. 원작의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불어넣을 배우가 누가 될지 제작 단계부터 원작 팬들의 호기심이 쏠렸다. 곤 역에 정해인, 해류 역의 이청아, 강하 역의 강하늘뿐만 아니라 곤을 거둬 키운 강하의 할아버지 역의 유재명, 강하의 돌아
[리뷰] 원작의 강력한 생명력을 굳건히, <아가미>
-
무명 밴드 보컬인 릭(폴 러드)과 슬럼프에 빠진 팝스타 대니(닉 조너스)는 결혼식 축가 무대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합을 맞춘다. 마음이 맞은 대니는 작업 중인 곡 <How to Write a Song(Without You)>을 릭에게 들려주고 두 사람은 즉흥 아이디어로 명곡을 탄생시키지만 그 곡은 오로지 대니 이름으로만 세상에 알려진다. 한 노래를 둘러싼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 <싱 어게인>은 <원스> <비긴 어게인> <싱 스트리트>를 연출한 존 카니 감독의 신작이다. 놓지 못한 꿈에 대한 열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음악을 통해 풀어낸 이 영화는 주연인 폴 러드와 닉 조너스가 대역 없이 직접 라이브와 연주를 소화했다. 전작만큼의 패기와 감동은 덜하나 감독 특유의 음악적 감성과 배우들의 열연이 은은한 여운을 남긴다.
[리뷰] <싱 스트리트>만큼의 패기는 없지만 <비긴 어게인>의 진심을 담아, <싱 어게인>
-
시한부 선고를 받고 요양을 위해 무등산의 절에 들어온 무진(김채영). 연극 <햄릿>의 공연을 위해 광주로 내려온 준기(정우준)는 우연히 만난 무진에게 관심을 표한다. 빠르게 가까워진 둘은 무등산을 오르고 시내에서 시간을 보내며 무진의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이뤄간다. 무진이 꼭 보고 싶다는 공연 기간이 다가오자 준기는 자신의 연기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무진연가>는 <편지> <아들의 이름으로> 등을 연출한 이정국 감독의 신작으로, 제목에 걸맞게 정통 멜로드라마의 정서를 정직하게 따라간다. 죽음을 기다리는 청춘의 서사와 ‘사느냐 죽느냐’를 질문하는 햄릿의 운명이 미묘하게 겹쳐지며 인물의 정서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비극을 한 아름 껴안는 무등산의 풍경 또한 매력적이다. 다만 관객이 이입하기 전에 영화가 정서를 앞세우는 순간들이 끝내 아쉽다.
[리뷰] 순수함과 정직함의 힘, 끝내 와닿지 않는 정서, <무진연가>
-
대재앙으로 무너진 세상에서 파일럿 힉(제이컵 엘로디)은 반려견 재스퍼, 유일한 이웃 뱅리(조시 브롤린)와 함께 생존을 위한 사투를 이어간다. 어느 날 그는 의문의 라디오 무전을 듣고 무전의 발신지로 향하던 중 다른 구역의 생존자 시마(마거릿 퀄리)와 팝스(가이 피어스)를 만난다. 그렇게 오랜만에 인간다운 온기를 느끼며 잠시 평온을 되찾지만 이내 야만적인 생존자들의 습격에 휘말려 위기에 처한다. 피터 헬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도그 스타: 마지막 희망> 속 비행은 아득히 고요하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세계에서 곁에 남은 이들과 함께할 내일을 향하며 다시 희망을 발견하는 인물들의 밝음이야말로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엔진이다. 특히 종말 이후의 스펙터클과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을 조화롭게 엮는 솜씨는 거장의 손길이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리뷰] 스펙터클과 드라마의 균형, 희망을 향하는 비행, <도그 스타: 마지막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