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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비채 펴냄
우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102쪽) 20대의 페미니스트 여성 조에가 온라인에 쓴 글 중 위의 질문은 우리를 가장 괴롭고 슬프게 만든다. 평범하게 같은 교육을 받고 자라 같은 사건에 대한 일련의 정보를 비슷하게 접해도 우리는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그러곤 서로를 향해 ‘상식을 가졌다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라며 통탄해한다. 위의 이야기는 반대의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가지는 생각이지만 이는 다른 사안에서도 적용된다.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는 세명의 화자가 주고받는 메일, SNS 글 등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몇권의 책을 낸 40대 남성 작가 오스카는 우연히 과거 동경했던 배우 레베카를 보게 된다. 레베카는 젊을 때 뭇 남성들의 ‘책받침 여신’이었지만 50대가 넘어 과거의 명성을 잃었다. 오스카는 레베카의 미모가 몰락했다며 SNS에 글을 쓰
씨네21 추천도서 -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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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 지음 창비 펴냄
이가 빠지는 꿈을 꾸었다. 멀쩡하던 이가 하나둘 빠지다 우수수 떨어지는 꿈. (<혼모노>) 삼십 평생 온 정성을 다해 모시던 신이 갑자기 어린 신애기에게 옮겨갔다. 하필 내 신당 앞으로 이사 온 신애기에게 옮겨간 나의 장수할멈신. 칼춤을 추다 신령님이 오지 않아 피를 보고 만 무당은 자신이 번아웃에 걸렸다고도 의심해보지만 실은 모시던 신이 죄다 떠났을 뿐이다. 이가 우수수 빠지는 꿈을 꾸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큰 굿을 의뢰받고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습까지 한다. 성해나 소설집의 표제작 <혼모노>는 한장씩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까울 만큼 이야기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혼모노>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니 갑자기 떠나버린 나의 재능, 그리고 그 빛나는 재능을 보란 듯이 과시하는 신애기에 대한 집착에 숨이 막힐 것 같다. 주인공의 터무니없는 시도와 자기혐오가 마치 글이 너무 안 써질 때 내가 하는 말들 같다.
씨네21 추천도서 - <혼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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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 성해나 지음 창비 펴냄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비채 펴냄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 - 조시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 애슐리 엘스턴 지음 엄일녀 옮김 문학동네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4월의 책 - 씨네리 북클럽에 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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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로 고가니 지음 김진희 옮김 문학동네 펴냄
슬픈 이야기에는 눈물이 난다. 기쁜 이야기에도 눈물이 난다. 오시로 고가니의 단편집 <해변의 스토브> 이야기다. 이별과 겨울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묶이는 단편 사이로 꿈과 햇살을 닮은 작품들이 섞여 있다. 종이에서 온기와 온기를 닮은 냉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초반에 차례로 실려 있는데 <해변의 스토브>와 <설녀의 여름>이 그렇다. <해변의 스토브>에서 체온이 낮은 편인 스미오는 체온이 높은 편인 엣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동거한 지 1년이 지나 엣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산 날, 엣짱은 오히려 눈물을 터뜨린다. “둘이 있으면 너는 제로라서 내가 점점 깎여나가.” 이별을 고하고 집을 나간 엣짱을 보며 스미오의 스토브가 말을 시작한다. “바다에 가자.” 흑백인 만화에서 유일하게 붉게 온기를 발하는 스토브는 좀처럼 감정을 표현할 줄 몰랐던 스미오와 같다. 불을 켜면 따뜻해지지만
[culture book] 해변의 스토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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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비채 펴냄
필립 로스의 전작을 쉬이 읽은 독자가 아니라면 <샤일록 작전>을 펼치는 데 약간의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벽돌책으로 보이는 두께에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메타픽션적인 작품이라는 소개는 난해할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립 로스의 명료한 문장은 소설이 난해할 틈을 주지 않으며, 바로 이 거대한 이야기의 소용돌이를 향해 돌진하는 데 소설의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는 주인공 ‘필립 로스’씨가 직면한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필립 로스이다. 물론 작가는 ‘이 소설은 허구’라고 하면서 법적인 이유로 여러 사실이 변형되었다고 밝히기도 한다. 실제로 책에는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열린 나치 강제수용소 교도관의 재판 내용을 그대로 적은 기록도 등장한다.
주인공 필립 로스는 어느 날 친척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는다. 이스라엘에서 필립 로스를 사칭하는 인물이 강연을 하고 방송 인터뷰를 하는 등 정치 활동을
씨네21 추천도서 - <샤일록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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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기다리고 기다리던 백수린의 네 번째 소설집. <눈부신 안부> <여름의 빌라>를 즐겁게 읽은 독자에게 봄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봄밤의 모든 것>이라는 살가운 제목이다. 첫 번째 수록작 <아주 환한 날들>의 주인공은 일흔이 넘은 여성이다. 혼자 살고 있는 그녀는 평생교육원에서 이것저것을 배우며 소일한다. 혼자 사는 그녀의 처지를 다른 사람들은 동정하곤 하지만 사실 꽤나 홀가분하게 잘 지내는 중이다. 가정을 꾸린 딸에게 전화를 걸지만 딸은 대체로 냉담하게 응대하며, 딸의 짤막한 답을 듣고 섭섭함을 느끼며 “콱 죽고 싶어”지는 일도 있다. 어느 날 사위가 아이들을 위해 집에 들였던 앵무새를 데려와 맡기고 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앵무새 돌보기가 제법 까다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것에도 뛰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이, 말 한마디에도 콱 가라앉고 쓰러지는 마음이 다시 설렘에 눈을 뜬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프랑스어
씨네21 추천도서 - <봄밤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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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루 지음 엘릭시르 펴냄
남해의 작은 섬인 구루섬의 별장에서 초능력자 검증 모임 ‘구루회’가 열린다. 도시전설을 비롯한 각종 소문을 연구하는 임채호 회장이 사실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3회를 맞는 이 모임에 탐정 김재건이 참석한다. 정신력으로 물건과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스테파니, 투시를 할 수 있는 김태연,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전찬호 등 여섯 사람이 한데 모인다. 사람들은 저마다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능력을 증명해 보이면 상금 10억원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임 회장은 모은 보물 중 가장 값어치 있는 것도 내주겠다는 것이다. 김재건은 이 모임에 초대를 받았을 때부터 생각했다. 여기에는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박하루 작가의 <순결한 탐정 김재건과 초능력자의 섬>은 ‘탐정 김재건 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시리즈 첫 번째인 <순결한 탐정 김재건과 춤추는 꼭두각시>는 2018년 제1회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으며,
씨네21 추천도서 - <순결한 탐정 김재건과 초능력자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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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지음 창비 펴냄
원래 속도에는 ‘물체의 빠르기’라는 의미만 있지 그 자체가 빠르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니 느린 것 역시 속도인데 지금 세상에서 속도란 그저 빠른 것만을 표현하는 것 같다. 효율, 유용성과 경제성만이 바람직함의 척도와 같은 세상에서 윤성희의 소설을 읽는 일은 일상의 체감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유튜브에는 영상을 꾸욱 누르면 2배속으로 빨라지는 기능이 있다. 2시간짜리 영화를 10분으로 축약해놓은 영상조차 2배속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빠름의 경쟁 속에서 <느리게 가는 마음>의 인물들은 하릴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고, 동네를 쏘다니며 금속탐지기로 땅 밑에 누군가 묻어두었을 타임캡슐을 찾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싶은 무용한 인물들의 여행에 동행하다보면 어느새 그 일원이 된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이 느리디느린 세계에 함께 머물고 싶어진다.
<타임캡슐>의 진형의 유튜브 채널명은 ‘어설픈 코난
씨네21 추천도서 - <느리게 가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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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가는 마음> - 윤성희 지음 창비 펴냄
<순결한 탐정 김재건과 초능력자의 섬> - 박하루 지음 엘릭시르 펴냄
<봄밤의 모든 것> - 백수린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샤일록 작전> -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비채 펴냄
<씨네21>이 추천하는 3월의 책 - 봄밤엔 책을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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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징야요 글 장지야 그림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펴냄
“전설에 따르면 하늘과 땅이 생성될 때 모든 물이 모여서 바다가 되었다. 아득하고도 푸르게 넘실대는 해양 속에 거대한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아무도 그 이름은 모른다.” <요괴 나라 대만>의 ‘총론’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대만섬이 어떤 신화적 작용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논하며 시작해 산과 바다 사이에 번식하는 요괴와 귀신의 존재를 하나하나 짚어가겠다는 선언이다. <요괴 나라 대만1: 요귀신유권> <요괴 나라 대만2: 괴담기몽권> 두권으로 출간된 <요괴 나라 대만>은 1권 824쪽, 2권 640쪽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데, 대만섬의 옛날부터 현대까지 300여년 동안 전해진 고문서 수백권 중에서 추린 요괴 이야기와 시골 괴담을 채록한 결과물이다. 대만 소설에서 적잖이 등장하는 요괴와 귀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괴이(怪異)가 국가별로 어떻게 다른지를
씨네21 추천도서 - <요괴 나라 대만 1 : 요귀신유권>, <요괴 나라 대만 2 : 괴담기몽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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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호 지음 비채 펴냄
웹소설은 제목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제목만 봐도 어떤 이야기인지 ‘기대’할 수 있게 만들어야 독자의 ‘유입’이 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 낚시가 중요하다고 하고, 특정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인기 있는 키워드는 그 시기의 웹소설 트렌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나 혼자’, ‘악녀’ , ‘복수’ 같은 단어들은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키워드들이었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는 제목부터 신기하다. 무슨 내용인지 도통 추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연재가 시작되고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연산호 작가는 큰 반응 없이 연재를 쌓아갔는데, 눈 밝은 독자들이 ‘어바등’(<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를 줄여 부르는 말)의 진가를 발견하면서 ‘SF 어워드’ 웹소설 부문 대상과 ‘리디 어워즈’ 판타지 e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의 절반 정도 분량인 4권까지가 먼저 출간되었다. 땅의 자원은 고갈되고
씨네21 추천도서 -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세트(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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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원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소설집을 덮으면서 그림자들이 걸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소설 속 인물의 명확한 생김새가 아니라 희미한 그림자 발소리다. 다행히 그림자는 혼자가 아니라 그 옆과 뒤를 다른 이가 함께 걷는다. 그러니까 그 소리는 조용하지만 수런수런대기도 한다. 김채원 소설집 <서울 오아시스>에는 여덟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등단작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와 표제작 <서울 오아시스>를 비롯해 <빛 가운데 걷기> <럭키 클로버> <외출> 등이다. 당연히 별도의 소설들이고 인물들에는 모두 이름이 별도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들은 이름이 있음에도 자기만의 개성을 갖기보다는 상실감을 가장 중요한 고유성으로 지닌다. 이상하다. 현재는 상실된 것이 자기의 가장 큰 특징이라니.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의 동우, 석용, 성아는 얼마 전 유림을 잃었다. 이들의 친구 유림은 자살했다. 이들은 정처 없이
씨네21 추천도서 - <서울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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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창비 펴냄
정확히 이 책의 도발적인 제목처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남자 친구에게 가졌던 비슷한 의문이 있다. 왜 그는 10대 때 만난 사람만 친구로 여기는가. 한 부서에서 일하며, 일주일에 세번 술잔을 기울임에도 그 사람은 직장 동료지 친구는 아니라고 하는 그에게 “고등학교 친구들은 1년에 두번 만나고, 회사 동료는 일주일에 두번 만나는데, 누가 더 가까운 거냐?”라고 반문하고 싶었다.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의 저자 맥스 디킨스는 인류학 박사도 아니고 연구자나 인문학자도 아니다. 영국의 스탠딩 코미디언이다. 저자의 정체성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을 불러오는데,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는 무엇보다도 끝내주게 웃기다. 남자가 쓴 ‘본격 남성 탐구 보고서와 에세이 그 사이 어디쯤’의 성격 때문에 대부분은 자조적인 유머로 설을 푸는데, 맥스의 약혼자 나오미가 매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기는 왜 친구에게 먼저 만나자고
씨네21 추천도서 -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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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 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창비 펴냄
<서울 오아시스> - 김채원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세트 (1~4)> - 연산호 지음 비채 펴냄
<요괴 나라 대만 1 : 요귀신유권>, <요괴 나라 대만 2 : 괴담기몽권> - 허징야요 글 장지야 그림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펴냄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2월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