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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 하면 두 가지를 자주 말한다. 하나는 한국형 케이퍼 무비의 대가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 다수를 포함해 예사 영화보다 더 많은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등장인물의 앙상블이다. 그러나 <외계+인> 연작을 보면서 그의 작품이 품은 장소에는 관심이 적었단 생각이 든다. 더 정확히는 다양하게 꺼내고 빈번하게 바꾸는 장소를 바라보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이건 단순히 하이스트 영화라면 여러 인물 군상을 드러내고 강탈 과정을 풀어내느라 필연적으로 많은 장소를 제시할 수밖에 없어서는 아니다. 그의 영화는 직관적으로 땅으로 인식되는 곳에 국한하지 않고 예기치 못한 대상도 장소로 삼는다. 또 그가 잘 구현하는 활극은 장소를 관장하는 주체인 인물이 장소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웅을 겨루는 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달리 보면 그의 영화만큼 장소 대결이 이뤄지는 각축장도 없다. 대결 양상은 다름 아닌 점유와 점거, 퇴각과 이탈이다.
<외계+인> 1부 시작에서 그간
[비평] 장소 바꾸기에 주목하기, <외계+인>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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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이 영화는 유럽 사회의 어느 단면을 서늘한 시선으로 지켜보거나 도난 사건을 발단에 둔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다다를 법한 결말로 향할 것이라 믿게 만든다. 1.37:1의 화면비와 핸드헬드 카메라가 빚어낸 <티처스 라운지>의 화법은 이따금 다이렉트 시네마를 모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일게 한다. 그렇지만 두말할 것 없이 이 영화는 일정 부분 장르 법칙을 따르고 있다. 관계의 정치학과 그 반응의 화학작용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은 한편의 심리 드라마다. 이런 점을 제외한다면 영화는 대체로 자연 발생한 듯한 사건들이 연쇄되며 파문에 파문을 일으키는 듯한 양상을 띠며 카메라는 그런 현상의 관찰자처럼 행동한다. 공들여 살펴보지 않더라도 드러나는 건 독일 학교와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이민자 차별이라는 유럽 정치 사회의 민낯이다. 그러나 <티처스 라운지>는 사안의 핵심에서 비켜서 세워진 세계다. 당연한 세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오랜 시간 우리
[비평] 진실의 윤리학, ‘티처스 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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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 실린 기왕의 <서울의 봄> 평론들을 읽었는데 다들 대체로 박한 평가를 담았다. 천만 관객을 넘기며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이 영화에 대해 나는 좀 후한 평가를 내리고 싶다. 장병원, 안시환, 김예솔비 등 <서울의 봄> 개봉 초기에 이 영화를 논한 평자들은 공통적으로 12·12 반란 세력의 봉기를 막지 못한 기성 권력의 실패를 남성성의 신화로 위무한다고 비판했는데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공허한 권력의 실체
이 영화 후반부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들로 시작하고 싶다. 반란 성공이 확실해지고 수괴 전두광 장군(황정민)은 일행과 함께 본부로 돌아가려다 혼자만 차에서 내려 걸어간다. 그는 승리를 혼자만의 시간으로 만끽하고 싶다(전두광 혼자 돌아가는 장면을 찍어둔 것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환희와 고독이 동시에 휘몰아치는 그의 내면의 기운에 카메라가 동참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는 것은
[비평] 관료주의의 무능, 권력자의 광기, 그리고 인간의 존엄 - <서울의 봄>이 상기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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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 인물들이 옷을 갈아입는 행동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곤 했다. 카우리스마키는 평소에 존경한다고 밝힌 오즈 야스지로의 인물들이 옷을 입는 동작을 오마주하듯, 환복과 같은 일상의 동작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곤 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오즈와 카우리스마키의 옷 입는 행위에 부여된 속성은 다르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거의 반자동적으로 수행되는 나른한 일상의 운문적 리듬을 조탁했던 오즈는 남루한 생활감이 표백된 세련된 부르주아 가옥으로 향했다. 이와는 달리 카우리스마키의 노동자들에게 현재의 일상이란 관능적 매혹이 결여된 공장에서의 지루한 노동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늘의 버거운 일상을 벗어나 특별한 미래를 꿈꿀 때 옷을 갈아입는다. 그 미래는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이 기다리는 시간이다. <성냥공장 소녀>의 소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데이트를 준비하며 비싼 옷을 사입고, <희망의 건너편>에서 핀란드로 밀항한 난민 칼리드는 이민청에 망명
[비평] 쓰라린 과거를 뒤로한 채, 우리는 영화를 본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시제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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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하며 상반된 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충실히 거장의 경전 구절에 복무한다. 그래서 모호하다. 음악 팬들은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는 25살 레너드 번스타인(브래들리 쿠퍼)의 모습에 가슴이 뛰다가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브로드웨이 하이라이트와 베를린장벽 붕괴 기념 음악회 등 중요한 순간이 축소된 영화를 당황스럽게 바라본다. 번스타인이 1973년 케임브리지 일리 대성당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말러 교향곡 2장 롱테이크 신 정도를 제외하면 클래식 애호가들의 구미를 당기는 장면은 거의 없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연극 혹은 뮤지컬처럼 느껴진다. 극의 주인공은 번스타인 혼자가 아니다. 번스타인과 그의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캐리 멀리건)의 부부 관계가 핵심이다. 매튜 리바티크가 촬영하고 미셸 테소로가 편집한
[비평] 거장의 어깨 옆에서,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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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상업영화라도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취하는 영화는 과거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형식적 고민 없이 성립되기 어렵다. 대다수의 상업영화에서 그러한 형식은 주로 이야기의 시점을 표명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역사가 소시민의 일상을 통해 비치는지, 의사 결정권을 가진 자들의 권력 다툼으로 묘사되는지, 혹은 시민과 공권력의 부딪힘을 통해 촉발되는 이야기인지에 따라 영화가 수행하는 재현에 대한 충실도가 달라진다. 물론 여기 언급한 사례들이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영화가 구할 수 있는 시점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역사와 픽션을 접속시키는 데 필요한 형식적 절차에 대한 고민을 서사적 시점의 문제로 치환하는 경향이 있고, 영화의 초반부에 결정된 시점은 관객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이태신과 전두광
<서울의 봄>은 명백히 두 번째 사례에 해당한다. 즉, 정권을 둘러싼 군대 조직 내부의 권력 다툼과 파열을 충실히 중계하는 영화다. 영화
[비평] 사유하지 않는 시대의 징후 - <서울의 봄>이 요청하는 관습적 보기를 의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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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이랜드>는 하이더르(알리 준조)가 유령 역할을 맡아 흰 천을 뒤집어쓴 채 조카들과 유령놀이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소 범박하지만 흰 천에서 영화관의 스크린을 떠올려볼 수 있다면, (극)영화 또한 배우들에게 개별 역할을 부여하여 작동되는 일종의 역할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이랜드> 속 인물들은 그 어떤 극의 배우들보다도 더 엄격한 사회적, 가족적, 관습적 역할극에 복무해야 하는 처지다. 문제는 그 역할극이 지극히 경직된 채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화면비가 강조하듯 그들은 억압과 속박, 구속과 굴레로 유지되는 역할극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파키스탄 아만(살만 파르자다) 집안의 차남 하이더르는 어느 날 백업 댄서 일자리를 얻는다. 미용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열정과 자부심을 지닌 하이더르의 아내 뭄타즈(라스티 파루프)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취업 선언과 함께 강제로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때 뭄타즈의
[비평] 속박의 역할극이 막을 내리면, ‘조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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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프레디의 피자가게>는 11월15일 개봉 이후 현재(11월21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일 관객수 1위를 이어가며 약 37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물론 최근 극장가가 침체에 빠진 상황인 만큼 절대 수치는 높지 않다. 다만 <씨네21> 1432호 기획 기사 ‘마블은 길을 잃었나’가 확인해주었듯 <더 마블스>가 맥을 못 추는 건 이해가 가는 구석이 있는 것과 달리, 절대적 인지도가 부족한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흥행 1위를 이어가는 현상은 분명 주목을 요한다. 이건 북미에서 더욱 눈에 띄는 상황으로 영화는 10월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1위는 물론 제작사 블룸하우스 역대 오프닝 1위를 기록했다. <더 마블스>가 흥행 부진에 빠진 것도 비슷한 양상이다. 이쯤에서 궁금하다. 대체 이 작품의 무엇이 까다로워진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었을까.
게임이 영화가 된다는 건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건 게임을
[비평] 영화 위에 관객, 김성찬 평론가의 <프레디의 피자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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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진행한 ‘독립영화 쇼케이스’에 비평으로 참여한 나는 <괴인> 안에 한국영화 속 인물들이 관류한다고 평하며 명장들의 영화와 연결지었다. 특히 이창동의 <버닝>과 봉준호의 <기생충>을 결합한 형태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유는 인물 구성과 특정 세대의 감각 그리고 건축의 형태와 계급성이 <괴인>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웃음을 유발하는 특정 상황과 대화에서 홍상수의 영화 같다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는데 이후에 <괴인>에 대해 곱씹을수록 그 인상은 사라졌고 구체적으로 단 하나의 작품만이 떠올랐다. 그것은 홍상수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다. 따라서 <괴인>을 두고 “계보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영화”라고 평한 것은 반 정도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계보학적으로 추적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눈에 띄지 않는 새로운 영화다.
불안이 건져올린 비일상성
다
[비평] ‘괴인’에 녹아든 시대 감각, <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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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후반부, 나츠코를 찾아 탑 안의 세계로 떠나온 마히토는 마침내 히미의 도움을 받아 나츠코가 잠들어 있는 산실에 도착한다. 마히토는 나츠코를 깨워 데려가려 하지만 눈을 엘 듯 춤을 추는 종잇조각이 둘의 접촉을 가로막고, “나츠코 엄마!”라고 외친 마히토는 의식을 잃는다. 종잇조각의 우윳빛 색감이 산실의 적막한 어둠과 대조를 이루는 이 장면은, 마히토가 전쟁의 화마 속에서 어머니를 상실하던 도입부의 장면과 포개어지며 시적 서정을 새기고 간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런데, 작화의 매혹을 잠시 차치하고 곱씹어본다면 이 장면의 감흥은 얼마간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 마히토는 이세계에 잠입하기 전까지 별다른 접점도 없던 나츠코를 왜 돌연 엄마라고 부르는 걸까? 마찬가지 이유로 마히토에게 별 감정이 없을 나츠코는 왜 그의 애절한 외침에 “너 같은 건 정말 싫어!”라고 쏘아붙이는 걸까? 마히토가 탑에 잠입하기 전까지인 1부의 세계에서 가족이라고 말하기
[비평] 미야자키 하야오의 우정, 그리고 식탁의 소멸에 관하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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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마이클 패스벤더)는 타깃(엔드리 휼즈)이 맞은편 건물로 들어서기를 기다리며 명상적 독백을 쏟아낸다. 그중에는 청부살인을 수행하는 킬러 자신의 작업 계율도 있다. 그렇지만 첫 번째 챕터를 지나 여섯 번째 챕터에 이르기까지 그가 벌이게 될 싸움에는 보수가 따르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더 킬러>는 타깃 사살 임무에서 실패했으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을 사살하는 킬러의 이동 경로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끊임없이 되뇌는 계율은 진심이 아니거나, 언제든 위반할 수 있는 한낱 독백에 불과하다. 제거하라, 나의 실패를 알고 있는 자들을. 이것이 영화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킬러의 0순위 행동 강령이다. 그는 자신의 실패사를 하나둘 지워나간다. 그리고 최종 관문이자 실제로 보수를 지급하는 자인 클라이언트(알리스 하워드)와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을 때 킬러는 클라이언트를 향해 겨눴던 총구를 내려버린다.기이한 양가성의 인물
짙게 드리운 히치콕의 그림자 아래에
[비평] 실패사를 지우는 이 자의 정체는, ‘더 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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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를 처음 본 건 지난해 부산영화제를 통해서였다. 때는 2022년 10월 초였고, 이번 극장 개봉을 맞이해 또 한번 영화를 보게 되었다. 관람 시기를 밝히는 이유는 그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처음 영화를 보고 떠올린 사건과, 이번에 다시 영화를 봤을 때 떠올린 사건이 달라졌다. 두 사건 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참사였으며, 남겨진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도 사회의 제대로 된 위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두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닐 수 있었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너와 나>를 보며 이 영화가 소재로 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10·29 이태원 참사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질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조심스레 해야만 하는 이 생각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떠올랐다. 죄책감을 가진 채
[비평]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기,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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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찾지 마.” 삶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이며, 진리는 무엇이냐, 묻는 재원(하성국)에게 홍의주 시인(기주봉)이 단호하게 말한다. 무언가를 정의하기보다는 무언가의 표면을 바라보고 느끼고 틈을 내며, 온전히 존재하거나 존재감이 희박해질 때까지 밀어붙였던 방식은 홍상수의 세계를 따라온 관객에게도 체험되어온 양식 아닌가. 그래서일까. 재원이 술기운이 도는 채로 진지하게 삶과 사랑과 진리와 같이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를 물을 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관객인 ‘우리’는 관성의 힘으로 웃었던 건 아닐까. 재원의 치기 어리고도 아름다운 질문에 언젠가 나도 되뇌었을 질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서도, 홍상수의 영화에 익숙해져 웃는다는 의미에서도 말이다.
물론 이 신에서 웃지 않은 이들도 많았을 테고 더욱이 홍상수 감독이 유머를 구사하고자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웃음은 즉흥적이지만 때론 덩달아 웃는 경우도 있는지라 부산국제영화제라는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화를 관람한
[비평] ‘우리’라는 따뜻하고 연약한 말, ‘우리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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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거미집>에서 김열 감독(송강호)이 집착해 마지않았던 플랑 세캉스(시퀀스 숏)는 이충현 감독의 시작이었다. 데뷔작 단편 <몸 값>을 향한 찬사와 환호는 14분 분량의 러닝타임이 전부 플랑 세캉스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비롯한다는 데 이견이 많지 않을 것이다. 원조 교제 현장이 실은 장기 매매 장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끝나는 영화에서 플랑 세캉스가 주는 마법은 리얼리즘에 있다. 하나는 사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실시간의 리얼리즘, 다른 하나는 소품이나 배경, 인물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느끼게끔 하는 현장감의 리얼리즘, 또 관객이 범죄 서사를 허구가 아닌 현실로 수용하게 하는 내러티브의 리얼리즘이 그것이다.
여기에 더해 <몸 값>은 하나의 숏-시퀀스가 전체 작품 속 복수의 시퀀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작품으로 독립한 ‘몽타주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을 곱씹을 만하다. 물론 ‘몽타주 없는 영화’라는 말은 하나의 시
[비평] 몽타주 없는 몽타주, ‘발레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