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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연대기적으로는 <에이리언> 오리지널 시리즈 1편과 2편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에이리언> 프리퀄 시리즈 이후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번 작품은 어쩔 수 없는 ‘핸디캡’을 하나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더이상 영화 속 ‘에일리언’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공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프리퀄 시리즈에서 ‘제노모프’의 기원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프리퀄 시리즈가 인류의 기원과 함께 제노모프의 기원을 파고들기 시작하며 1979년 처음 스크린에 등장한 이 괴물의 신비함이 많이 희석됐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페데 알바레스 감독은 이러한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이미 성공을 거둔 바 있는 익숙한 공식을 극에 끌어들인다. 먼저 남루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누구도 그들을 도울 수 없는 고립된 공간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청년 무리가 있다. 이들은 고립된 공간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비평] 잊혀진 공포의 그림자, <에이리언: 로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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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적 차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이상 구경거리가 되지 못하는 미래가 바로 <미래의 범죄들>이 그리는 시대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는 보디 호러 장르의 <비디오드롬>에서 <엑시스텐즈>에 이르기까지 신체와 기계라는 물질과 그를 통해 보는 환각과 꿈이라는 비물질을 탐구해왔다. 비물질인 환각 이미지마저도 신경전달물질의 이상 체계로 인해 망막에 맺히는 영상이라고 본 크로넌버그에게 있어 정신은 내부와 외부로 나눌 수 없기에 그의 세계에서 내면은 인체의 내부, 장기가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또 <미래의 범죄들>에서 예술로 규정하는 해부와 그 행위자는 <네이키드 런치>의 괴물 형상을 한 타이프라이터로 글을 쓰는 작가 윌리엄과 문학적 행위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네이키드 런치> 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 윌리엄은 아넥시아의 경계에 이르러 작가임을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는 품 안에서 펜을 꺼내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평] 포스트 포르노 시대의 새로운 쇼, <미래의 범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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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적 리얼리즘 영화들의 계보 속에 있으면서도 고유한, 그래서 정말로 귀중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더 원더스>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 여기에 로르바케르의 첫 ‘마술’이 있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답사할 가치가 있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미래의 시점에서 무언가의 처음을 목격한다는 건 늘 생경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데, 심지어 그 무언가가 마술이라면 보는 이의 입장에서 놀라움을 느낌과 동시에 마음의 벽까지 허물 수도 있다. <더 원더스>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마술이 그렇다. 이 쇼의 마술사는 가족의 대표 젤소미나(마리아 알렉산드라 룬구)이고, 관객은 젤소미나 가정에 위탁된 외부인 마르틴(루이스 휠카)이다. 젤소미나는 마르틴의 호감을 얻기 위해 입에서 벌을 꺼내는 마술을 선보인다.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상대의 긴장을 풀기 위해, 그럼으로써 관계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되는 이 마술이 알리체 로르바케르 영화의 본질이라는
[비평] 모든 성장 서사는 마술적이다, <더 원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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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현실이고, 현실은 환상이다. 이렇게 말하면 동의할 사람은 잘 없다. 지어내어서 거짓이고, 따라 해서 모방이며, 있지 않아서 허상인 영화가 현실일 리가. 그래서 때때로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어떤 영화를 두고 걸작의 칭호를 부여하는지 모른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영화는 환상에 가까운데 현실과 환상 사이의 낙차로 울림을 준다. 마치 물웅덩이에 물체를 떨어뜨릴 때 더 높은 곳에서 낙하시킬수록 물웅덩이에서 벌어지는 파탄의 정도가 다른 것처럼. 아니 그건 파탄일까. 물웅덩이 주변으로 흐트러지고 난잡한 사태는 누군가에겐 축복이다. 또 낙차가 크면 클수록 축복의 크기도 커진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이 낙차의 크기를 최대치로 가져가는 영화다. 최대한 현실에 천착하고, 있는 힘껏 환상을 키운다. 그 끝은 환상일까, 현실일까.
영화는 먼저 현실에 밀착하는 방안으로 몸을 택한다. 재키(케이티 M. 오브라이언)가 등장할 때 관객 다수는 그의 신체에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비평] 현실로 그리고, 환상으로 본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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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정치드라마 <돌풍>에 대한 칼럼 제안을 받고 잠시 머뭇거렸다. 12화를 전부 보기 위해 들여야 할 시간이 아까운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긴 시간을 들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것을 알았고, 그런 불쾌함을 표현한 글이 또 다른 이들을 불쾌하게 할까봐 미리 불편해지는 게 싫었다. 요즘의 비평 세태가 종종 그렇듯, 나와 비슷한 감상을 가졌던 이라면 ‘불쾌함의 이유’에 공감하겠지만, 재밌게 본 이들이라면 자신이 느낀 ‘유쾌함’에 찬물을 끼얹는 글을 접하고는 필경 ‘586 꼰대’를 운운하며 불화살을 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주변에 물어봤다. <돌풍>이 어떻더냐고. 다수는 아직 보지 않았는데, 그 보지 않은 이유가 나와 비슷했다. 보았던 소수는 나와 비슷한 이유로 불쾌감을 느꼈다. 그 와중에 그럭저럭 재밌게 본 이들도 없지 않았다. 소수 중의 소수에 해당했지만 말이다. 흥미롭게도, 결국 <돌풍>을 보고 난 내 감상의 구성비와 비슷했다.
[비평] 과잉으로 허술함을 가리다, <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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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빚어내는 단언적 인상에 비해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속 히라야마의 일상엔 순환의 피로감과 은근한 불화가 가득하다. 당초 공중화장실 개선 작업인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발한 영화는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의 일이 더러움에서 깨끗함이라는 일회적 전환이 아닌 그 두 상태의 지속적 순환임을 절감시킨다. 히라야마는 마치 정화를 목표로 도를 닦는 일종의 ‘수행자’처럼 정성껏 화장실을 쓸고 닦는다. 그런 히라야마의 모습을 카메라는 장인의 기예를 관찰하듯 공들여 포착한다. 말하자면 히라야마는 내일이면 더러워져 있을 공간을 오늘 깨끗이 하는 일에 온 힘을 쏟는 자다. 동료 타카시가 궁금해하는 것처럼 다분히 호기심을 자아내는 히라야마와 그의 사연에 대해 영화는 히라야마의 과묵함을 반영하듯 그저 그의 일상을 조용히 담아내며 그가 듣고 읽는 노래와 소설을 통해 그의 전사를 종종 은유할 뿐이다.
노동만큼 중요한 일상과 루틴
히라야마의 일상엔 노동만큼 중
[비평] 지극히 영화적 순간들, <퍼펙트 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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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결론부터 말한다면, <더 에이트 쇼>는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각 시대에는 나름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있다. 우리의 인식이나 생각이 만들어지는 틀로서의 패러다임 말이다. 우리는 그 틀 덕분에 특정한 생각이나 개념을, 심지어는 ‘나’라는 자아를 구성할 수 있지만, 또한 바로 그 틀 때문에 그 외부를 향하는 사유가 가로막히곤 한다. 가능성이자 한계로서의 패러다임. <더 에이트 쇼>는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임을, 그리고 자신이 그에 포섭되어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울 만큼 자본주의 체제가 견고해진 지금의 상황을 두고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라고 칭한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제 체제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비평]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우울한 초상, <더 에이트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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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아웃2>는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전편의 맥을 잇는 준수한 여운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나도 이 평가에 동의하지만 지면의 한계상 아쉬움을 상쇄했다고 거론되는 종막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을 계획이다. 여기서는 속편의 상상력이 전편보다 부족하게 느껴진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그 아쉬움은 제작진의 역량 부족이라는 단순한 이유보다는, 이 연작이 근간을 두는 원칙의 한계 자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1편과 2편의 차이에 주목하며 그 한계를 둘러싼 논점을 숙고해보도록 하자.
<인사이드 아웃2>는 전편에서 라일리의 성격 섬 중 가장 큰 크기를 차지했던 가족 섬이 가장 왜소해진 정경을 비추며 시작한다. 속편이 전편과 달리 안정적인 가족 공동체 바깥을 다룰 것임을 암시하는 이 변화는 주제의식의 측면을 넘어 미장센의 전반적 변화와 직결된다. 1편은 식탁과 같은 전통적 가족의 공간에 주목했으며, 주로 화면 중앙에 놓인 라일리를 양쪽의 부모가 둘러싸는 구심적 미장
[비평] 근본적인 불안의 정체에 관하여, <인사이드 아웃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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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유럽의 두 가지 질서는 영화와 강제수용소에 있다. 영화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기록하는 특권적인 재현 체계라면, 절멸의 수용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기록을 은폐하고 소각한 체계적 기관이다. 한쪽에선 이미지를 구현하고, 다른 한쪽에선 이미지를 말살한다. 영화가 역사를 창조한다면, 강제수용소는 역사에 구멍을 낸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체계는 그러나 유사성을 공유하면서 대립한다. 영화와 강제수용소는 시야 바깥에 있던 세계를 내부로 가져와 관측하고 편집하고 분류하는 절차로 만들어진다. 열차의 도착과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행렬을 상징적 기원으로 삼는 영화와 수많은 희생자를 열차로 태워 나르며 노역과 학살을 강제한 강제수용소는 제국주의의 열망이 깃든 발명품이자 세계를 포획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장 뤽 고다르가 지적한 것처럼 영화는 강제수용소의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표상과 기록장치로서 영화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말해지곤 했다. 수용소 내부의 이미지는 영화에 남겨진 공백
[비평] <존 오브 인터레스트>, 수용소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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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볼 수 있어도 향기는 맡을 수 없다. 피부에 닿는 감촉과 존재의 무게 역시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시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뇌로 전달해 인지와 수용을 거쳐 감정과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지각 과정이다. 움직이는 영상과 음향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받아들일 때 그래서 가장 먼저 강조되는 감각 체계는 시각과 청각이다. 영화에서 타인의 꿈이 펼쳐지거나 정신분열을 예견하는 이명의 사운드는 들려올 수 있어도 냄새나 감촉은 후각과 촉각의 감각경험으로 전달될 수 없다. 오늘날 영화적 체험을 보다 많이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까. 스크린X와 아이맥스에서 강조하는 압도적인 시각 스케일이나 4D 상영처럼 눈으로 보는 동시에 신체의 다른 외부감각을 자극하려는 ‘체험’적 관람은 영화의 선천적 결핍을 메워보려는 스크린 바깥의 기술적 시도다. 시각과 청각 외 감각의 증폭과 확장으로 향하는 영화(기술)의 열망은 인간의 오감을 모두 아우른 뒤에야 멈출 수 있는 것일까. <프렌치 수프>와
[비평] 부재하는 것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프렌치 수프>와 <원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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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8개 부문을 수상했고, 오스카 시각효과상까지 거머쥔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결국 국내 극장에 걸리지 못했다. 물론 이는 괴수물이 꾸준히 국내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몬스터버스의 다섯 번째 영화 <고질라X콩: 뉴 엠파이어>는 북미에서의 성공과 달리 국내에선 51만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앞선 세편의 몬스터버스 고질라 영화도 100만 관객 동원에 실패했다. 2016년 개봉 당시 일본 흥행 2위를 기록한 <신 고질라>는 국내 관객 7592명이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았다. 봉준호의 <괴물>이나 심형래의 <디 워>, 혹은 피터 잭슨의 <킹콩>처럼 흥행에 성공한 괴수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흥행이 하나의 현상처럼 여겨졌음을, 나아가 <고질라> 시리즈와 같은 전통적인 ‘거대 괴수물’의 흥행이 없다시피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
[비평] ‘고지라’의 타임 패러독스, <고질라 마이너스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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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도시의 발생 이전에 살았던 이들이 경험했을 소리의 세계를 상상해본다. 기계의 소음보다 자연의 음향이 친숙했을 세계. 거리를 거닐면 물론 그때도 사람들은 떠들고 장난치고 싸웠겠지만, 철도가 발명되고 공장이 세워지면서 도시가 갖게 된 음역과는 차원이 달랐을 터다. 이 추측은 활자와 사진을 통해 짐작할 따름이라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대자연이라는 원형으로 섣불리 감응하고 낭만화한다는 한계가 있겠다. 그럼에도 “귀가 먹먹해지는 시대”(데이비드 헨디)의 도입에서, 세상에 없던 것의 소리가 불현듯 우리를 침범하던 순간 인류가 느꼈을 당혹스러움에는 의심이 들지 않는다.
여기에는 당연히 증기기관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다. 영화의 시원적 피사체라 부를 만한 열차는 수많은 (서부)영화에서 반복되어온 이미지다. 우리는 열차의 거친 운동, 위아래로 혹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액션’(action)의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칙칙폭폭, 덜컹덜컹, 이 격렬한 공간이
[비평] 전기 바깥의 전기, <차이콥스키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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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이 곧 무기가 되는 삶. 누군가가 여기 존재한다는 단순한 현실이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이미지는 저항의 수단이 된다. 르포르타주는 사회적인 현실에 대해 보고자의 주관을 섞지 않은 객관적 서술과 그 자료들을 가리키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두운 이면을 탐사하는 이미지는 결코 객관적인 상황만을 보여주도록 길들여지지 않는다. 19세기 뉴욕 로어 이스트사이드를 촬영한 제이컵 리스의 사진은 단순히 빈민가의 실태를 알린다는 목적을 넘어 그 자체로 정치적 효과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둠으로부터 가려져 있는 것을 드러내려는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저항적인 성격을 띤다.
낸 골딘의 삶-투쟁을 다초점의 이미지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가 향하는 곳 또한 어둡고 눅눅한 암실이다. 70년대 뉴욕 바워리의 밤, 지하 클럽에 모여 취해 있는 사람들,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음악과 함께 슬라이드 쇼가 시작되면 관객들은 사진에 등장한 자신
[비평] 암실, 영화, 그리고 몸에 남는 것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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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필요>. 자꾸 다시 읽어보게 된다. 어쩌면 의도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필요’도 사실 어색하다. ‘요구’가 좀더 어울리지만 가장 적당한 건 영어 단어 ‘니즈’(Needs)다. 어느새 한글보다 익숙한 이 외래어에서 프랑스 대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모습이 엿보인다. 영화 속 그녀의 모습에 대다수의 관객은 아낌없는 환대를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어색함을 남긴다. 모종의 이질감이 <여행자의 필요>가 지닌 감각의 덩어리다. 홍상수 감독은 근린공원을 비롯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흔해 빠진 풍경 속에 이방인 이자벨 위페르를 배치하고 익숙지 않은 감정 들을 끌어올린다. 그의 방식은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 이리스의 프랑스어 수업 방식과 흡사하다. 그녀의 수업은 수강생에게 상처를 내는 방식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첫 번째 수업에 등장한다.
수강생(김승윤)은 손에 났던 상처에 새살이 돋은 것을 이리스에게 말한다. 얼핏 보면 잉여
[비평] 소통의 과정, 소통의 방식, '여행자의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