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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죽음과 삶, 그리고 이야기, <더 폴: 디렉터스 컷>
오진우(평론가) 2025-02-26

타셈 싱 감독의 <더 폴: 디렉터스 컷>(이하 <더 폴>)도 한국에 부는 재개봉 광풍 대열에 합류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영화는 11만 관객을 돌파했고 뒤늦게 흥행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컬트영화를 벗어난 것은 아닐까? 고백하자면 최초 개봉했던 2008년 당시에 나는 이 영화를 몰랐고 재개봉한 지금 또한 지나칠 뻔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작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보다 이 영화의 ‘제작기’가 앞서 우리를 반기기 때문이다. NO CG, 판권 구입까지 15년, 총 28개국 로케이션, 장소 섭외에만 17년, 주인공을 찾는 데 7년, 실제 촬영 기간 4년 반. 감독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영화에 올인했다. 신화처럼 들리는 전무후무한 도박 같은 프로덕션이다. <더 폴>의 컬트화를 이끈 이유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때문에 영화가 겉만 번지르르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진실과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

타셈 싱의 영상미에 대한 집착은 광고와 뮤직비디오로 커리어를 시작한 것에서 비롯할 것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영상미에 비해 스토리가 다소 부족하다는 것이다. 타셈 싱의 필모그래피 중 <더 폴>만이 유일무이하게 그 잡기 힘들다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영화 시작과 함께 우리가 보는 것은 두 감독의 이름이다. 데이비드 핀처스파이크 존즈는 <더 폴>의 제작자다. 커리어상 공통점을 갖는 이들만이 타셈 싱의 비전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개봉 당시 CG를 적극 활용해 불가능한 영역을 구현하는 데 열중했던 할리우드영화들 사이에서 <더 폴>은 실제 장소를 촬영해 초현실적인 영화적 장소로 재창출했다. 김혜리 기자는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와닿는 한줄 평을 남겼다. “살바도르 달리와 셰에라자드가 만난다면.”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가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천일 동안 이야기를 만들어낸 스토리텔러라면, <더 폴>의 로이(리 페이스)는 죽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이 글에서는 타셈 싱이 구현한 수려한 이미지보다는 영화를 채우는 이야기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로이와 5살 소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언타루)가 처음 만난 장면으로 가보자. 알렉산드리아가 간호사에게 던진 편지가 우연히 로이가 있는 병실로 들어가면서 이들의 만남은 시작된다. 편지를 찾아 도망가는 알렉산드리아를 멈춰 세운 것은 로이가 꺼낸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다. 이때부터 영화는 그림자를 통해 현실과 픽션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앞으로 어떻게 영화가 전개될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문의 열쇠 구멍으로 빛이 들어온다. 영사기처럼 구멍 사이를 통과한 빛은 알렉산드리아가 서 있는 벽면에 투사된다. 한 마리의 말이 그림자로 벽면에 맺힌다. 그것도 거꾸로 말이다. 알렉산드리아는 그 그림자를 보며 신기해하다가 이내 문이 열리고 똑바로 서 있는 말의 실체를 마주한다. 그때 로이가 알렉산더 이야기를 시작하고 알렉산드리아는 눈을 감고 상상한다. 알렉산드리아는 최근 한국에 최초 개봉한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의 아나와 흡사하다. 둘 다 5살 소녀이고 각각 영화와 이야기에 빠져 있으며 이를 현실에 중첩시킬 정도로 픽션이 지닌 위력을 몸소 체험하고 보여주는 캐릭터다. 그렇다고 알렉산드리아가 이야기로부터 단순히 영향만 받는 것은 아니다. 로이가 시작한 ‘사랑과 복수의 대서사시’에 적극 개입해 공동창작을 이어 나간다.

<더 폴>은 명실상부 이야기에 관한 영화다. 더 정확하게는 진실과 거짓말에 관한 영화다. 첫 개봉 당시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라는 부제가 달렸었다. 이 부제보다 ‘거짓말의 탄생’이란 부제를 달고 싶다. 이 영화의 묘한 지점은 진실과 거짓이라는 두 영역의 교집합에 서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어른과 아이의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가 되고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작품이다. 그렇게 순수하게 이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하지만 한끗이라도 의심을 가하면 영화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둘이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는 허구이자 거짓이다. <더 폴>은 그 거짓의 역량으로 죽음에 사로잡힌 로이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지에 관해 그린다. 두 주인공은 이야기(거짓)를 만들면서 자신의 현실(진실)을 투영한다. 그렇게 만들어낸 이들의 모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이야기가 중단될 때다.

스턴트맨인 로이는 추락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병실에 누워 있다. 아마도 로이가 꺼낸 이야기가 영화에서 화려하게 구현되는 것은 병실에 초라하게 남겨진 그의 현실과 이야기 사이의 낙차를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그는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수인(囚人)의 서사를 만들어간다. 그는 현실에 있는 것들을 긁어모아 이야기를 창조한다. 그에게 이야기란 자유를 향한 생의 몸짓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영원한 탈출이다. 로이는 더 깊은 수렁으로 잠기기 위해 이를 정당화하고자 이야기를 쓰고 있다.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은 강렬해진다.” 철학자 한병철은 <불안사회>에서 그것이 희망의 변증법이라 말한다. <더 폴>에서 희망은 두 세계(이야기와 현실)를 오가며 생기는 낙차 속에 만들어진 틈새로 들어온다. 알렉산드리아는 추락하는 로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의 손을 잡고 구원을 받기 위해선 이들이 만드는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 여기서 거짓을 믿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이야기가 처음 중단된 순간이다. 로이는 재밌어질 부분에서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알렉산드리아에게 퀴즈를 낸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가 로이의 발가락을 만지면 몇 번째 발가락인지 맞히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거짓말을 한다. 이때 둘 사이에 놓인 것은 커튼이다. 커튼으로 가려 보이지 않는 진실과 알렉산드리아의 믿을 수 없는 말. 로이는 가려진 커튼을 젖히고 틈 사이로 실체를 본다. 그것은 진실과는 무관한 거짓이다. 이는 현실에서 알렉산드리아가 지어낸 ‘이야기’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에게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가 사실을 말했다면 로이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을까? 로이는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거짓말은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허구이자 거짓인 이야기는 다르다. <더 폴>은 그것을 이야기가 가진 힘이라 말한다.

영화를 통해 로이를 되살리기

커튼으로 현실과 분리시킨 둘만의 공간은 하나의 영화관이다. 커튼은 이들의 이야기가 영사되는 하나의 스크린이다. 하지만 여긴 1인실이 아니다. 다인 병실이고 언제든, 누구든 커튼을 열어젖힐 수 있다. 둘이 쌓는 공든 이야기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런 취약성과 함께 이 얇은 막을 통해 현실과 이야기라는 두 세계는 상호 침투하며 서로를 물들기 시작한다. 커튼 밖 현실과 알렉산드리아의 개입으로 이야기는 실시간으로 각색되고 간섭을 받으며 중단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멈추는 주요한 분기점은 이야기를 시작한 로이 때문에 발생한다. 로이가 꺼낸 이 대서사시는 알렉산드리아를 유혹하기 위한 미끼다. 이야기가 멈추면 로이는 죽음을 향한 실질적인 밑 작업을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는 움직일 수 없는 로이의 수족이 돼 이 작업에 투입된다. 로이가 이야기를 중단하고 알렉산드리아에게 알파벳을 읽을 줄 아느냐고 묻는다. 그는 종이에 모르핀(MORPHINE)이라고 쓰고 이를 약국에서 구해달라며 알렉산드리아에게 부탁한다. 알렉산드리아는 E를 3으로 읽는다. 그녀가 유머로 한 말이지 알파벳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약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목도한 것은 죽음의 이미지다. 뱀에 물려 거품을 문 채 의식이 없는 소년을 본 알렉산드리아는 오줌을 지릴 정도로 놀란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꽉 찬 알약 통을 비우고 단 3알만 남긴 채 로이에게 건넨다. 자살의 실패. E를 3으로 봤다고 그녀는 5살의 순진함을 내세워 거짓말을 밀어붙인다. 알렉산드리아가 로이에게 하는 거짓말은 죽음에 사로잡힌 로이를 멈춰 세우는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로이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쉽게 죽을 수도 없는 처지다. 그에게 자살은 실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애초에 시도조차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래서 상상으로라도 죽고 싶은 것이다. 로이 자신이 내뿜는 죽음의 기운과 이야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에 처한다. 알렉산드리아는 다시 약을 구하러 갔다가 추락 사고로 머리를 다친다. 현실에서 죽음을 본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에게 찾아가 이실직고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야기를 마저 듣는 것이었다. 모두가 죽는 새드 엔딩인 이야기 속 주인공인 ‘블랙 밴디트’는 알렉산드리아의 희생으로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다. 로이는 없애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을 알렉산드리아를 통해서 마주한다. 그렇게 둘은 공동창작을 거쳐 로이를 소생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각색한다. 둘의 서사 창작은 이야기와 현실, 두 세계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대서사시는 죽음을 삶으로 역전시킨 우정의 이미지가 된다.

웬만한 영화라면 여기서 끝을 내겠지만 <더 폴>은 그러지 않고 더 밀어붙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붙는 시퀀스는 좋은 의미로 이상하다. 영사기가 가동되고 한편의 영화가 병원에서 상영된다. 그것은 로이가 스턴트맨으로 참여해 추락 사고를 겪었던 영화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가 함께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시간이 흐른 뒤 퇴원한 알렉산드리아는 오렌지 농장을 뛰어다닌다. 그녀는 엄마가 영화에 로이가 나왔다고 말했을 때 믿지를 않았고 그가 맞는지 영화를 보고 또 봤다고 고백한다. 영화는 그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슬로모션까지 걸어서 보여준다. 1920년대 할리우드에 사는 그녀는 비디오처럼 영화를 멈춰 세울 수 없다. 우리가 본 것처럼 그녀는 영화를 되돌려 감상할 수 없다.여기서 드는 의문은 그가 과연 로이일까?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으로 로이인지 장담할 수 없다. 5살의 아이의 기억 속에 점차 흐려졌던 로이는 영화에서 다시 살아난다. 알렉산드리아의 말을 믿고 무성영화 속 액션 장면들의 몽타주를 본다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면 우리는 순수하지 못한 세계의 이면을 마주하는 것이다. 자식을 안심시키려는 엄마의 거짓말일까? 알렉산드리아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로이가 회복하여 두발로 일어서기 위해선 기적이 필요하다. <더 폴>은 인간 시각의 불완전함을 전제로 하는 ‘영화’를 통해 로이를 되살리려고 하는 것이다. 5살 소녀의 망각으로부터 건져 올린 로이는 영화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각인된다.

사라짐으로써 기억되다

의심하지 않고 <더 폴>을 감상한다면 아름답고 감동적인 우정의 대서사시가 된다. 하지만 영화가 그렇게만 설계된 것 같지는 않다. 의심을 가하는 순간 타셈 싱이 만든 이 영화적 세계는 쪼개져 우리에게 다른 얼굴을 들이민다. <더 폴>은 진실로 가득 찬 이야기와 거짓으로 가득 찬 현실을 보여준다. 거짓이 온전히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고 살아가는 힘이 된다. 영화에선 같은 병실을 쓰는 할아버지의 틀니로 이를 표현했다. 의사의 말을 엄마에게 다르게 통역했던 알렉산드리아도 마찬가지다. <더 폴>은 이러한 거짓을 믿을지에 대한 선택으로 가득 차 있다. 5살 소녀 알렉산드리아는 다른 사람을 위해 거짓말을 계속한다. 비록 자신의 몸이 부서지더라도 그녀는 자신이 아끼는 세계를 지키려고 부단히 애쓴다. 하지만 어른인 로이는 자신을 위해 거짓(이야기)을 만들면서 의심하고 누구보다 더 거짓을 믿으려고 한다. 로이의 모순이 곧 영화가 보여주려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순이다.타셈 싱의 중단된 필모그래피 중 그의 존재도 모른 채 봤던 두편의 영화가 있다. 무의식에 영향을 미쳐 현실을 바꾸는 <더 셀>과 누군가의 몸에 정신을 이식해 영생을 꿈꾸는 <셀프/리스>. 이 두편과 <더 폴>의 공통점은 ‘사라짐’에 있다.

<셀프/리스>에서 한몸을 두고 두개의 정신이 자리를 다툰다. 영생을 꿈꿨던 노인은 꿈을 포기하고 몸의 주인을 위해 소멸을 택한다. <더 셀>은 무의식의 세계를 잠시 공유하고 치유의 이미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사라짐으로써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것. 로이 역시 실체가 아닌 영화 이미지로 알렉산드리아의 기억에 자리한다. 실제 로이였을 수도 있다. 여전히 확답할 수 없다. 화려한 이미지로 가려진 <더 폴>의 숨은 매력은 진실과 거짓이란 두 층위를 유동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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