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거사를 다룬 대작 <하얼빈>이 흥행 중이다. 뛰어난 영상미와 압도적인 화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명암 대비로 17세기 명화를 보는 듯한 장면들, 광활한 자연을 담은 아이맥스 화면, 부감숏 등 촬영이 훌륭하다. 그러나 단선적인 캐릭터와 연극적인 대사는 지적할 만하다. 가장 큰 문제는 서사이다. <하얼빈>은 안중근의 고결함에 집중하다 안중근이란 인물에게서 놓치지 말아야 할 주제인 ‘만국공법’과 ‘동양평화’를 고찰하지 못하고, 영상미에 도취되어버린 패착을 저질렀다.
하얼빈 총격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를 놓치다
<하얼빈>의 화면은 아름답지만, 배경용 걸개그림일 뿐 서사에 밀착하는 맛이 없다. 인물은 평면적이고 대사는 뮤지컬적이다. ‘거룩한 아이맥스!’랄까. 지나친 험구라고?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이런 식이다. 안중근(현빈)이 얼어붙은 강을 헤매다 동지들에게 돌아왔을 때, 첨예한 갈등이 오가는 장면이지만, 대사와 장면 구성은 긴장을 담기에 불충분하다. 17세기 명화 같은 화면은 멋지지만, 피상적인 대사 몇 마디가 오갈 뿐이다. 우덕순(박정민)이 “자네 몸이…” 하며 과장된 대사로 안중근을 걱정하지만, 안중근의 초췌함이 클로즈업되진 않는다. 연극무대 같다. 마적단 동굴 장면도 마찬가지다. 멋진 사막 장면이 앞뒤로 배치되어 있는데, 내셔널 지오그래픽 화면을 보는 듯하다. 그렇게 마주한 마적단 두목(정우성)의 과한 분장과 대사는 뮤지컬보다 전형적이다. 러시안룰렛을 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다 공부인(전여빈)이 소리를 꽥 지르니 금방 폭약을 내준다. 인물에 대한 묘사가 거칠고 단순하다. 그나마 <하얼빈>에서 연극적이지 않았던 장면이 있다면 김상현(조우진)이 나오는 장면이다. 그가 스테이크를 손으로 집어 먹으며 모멸감과 자괴감에 눈물을 흘릴 때, 영화는 비로소 시네마틱하다.
우민호 감독은 악역을 잘 만드는 감독인데, 이토 이로부미로 일본의 명배우 릴리 프랭키를 캐스팅했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 분장을 한 채, 해설에 가까운 대사를 몇 마디 할 뿐 연기 분량은 거의 없다. 영화는 안중근의 재판 장면을 모두 생략했는데, 그럴 요량이었으면,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결심하는 대목에서든, 릴리 프랭키의 연기를 통해서든, 왜 그를 죽여야 하는지 설득하는 장면이 들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영화에선 오직 ‘늙은 늑대’로만 지칭될 뿐, 그를 죽여야 하는 이유는 ‘자명한 것’으로 처리된다.
문제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하얼빈>은 안중근의 ‘고결함’에 방점을 찍고, 이토 히로부미는 설명 없이 ‘늙은 늑대’로 평면화시킨 채 사건의 열차를 출발시킨다. 사건을 첩보물처럼 묘사하고, 실제 사건에서는 있지도 않았던 폭약 등으로 사이즈를 키운다. 풍광으로 잔뜩 멋을 부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재판 장면을 빠뜨림으로써 사건에 대한 중요한 해석을 삭제하여,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사건의 세계사적인 의미를 놓아버린다. 즉 ‘왜?’는 빠지고, ‘고결함’과 ‘멋짐’만 남는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사건은 개인 대 개인의 사건이 아니다. 대한제국과 일본간의 국제정치적인 사건이기도 하거니와 현재의 팔레스타인과 연대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영화는 신아산 전투 장면을 공들여 찍었다. 당시 전투가 얼마나 피 튀기는 전투인지를 실감나게 찍었다. 여기엔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첫째는 안중근이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 신분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전에 전투를 하고 있었으며, 하얼빈 의거는 전투의 연장선이었다. <하얼빈>은 안중근이 포로를 놓아준 장면을 영화 <영웅>에 비해 도드라지게 그린다. 동지들의 만류에도 ‘만국공법’(국제법)을 들어 일본군 포로를 놓아준다. 안중근은 당시 특이하게도 이 전투가 국제법의 적용을 받는 국가 대 국가의 전투라고 생각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안중근은 하얼빈 저격에 대해서도 군인으로서 적장을 해한 것으로, 자신은 포로이며, 국제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얼빈>은 일본군 포로를 놓아주는 안중근을 중요하게 비추면서도, ‘만국공법’의 의미는 놓쳐버리고, 안중근의 인격이 고결하다는 것에 매료된다. 영화는 신아산 전투 후 부대원을 잃은 안중근에게 “찰나의 감상주의가 얼마나 조직을 해치는지”라고 역설하던 이창섭(이동욱)이 오히려 “안중근은 고결하다”는 말을 남기고 죽는 것으로 그린다. 영화는 안중근의 ‘고결함’에 방점을 찍고서, 안중근이 밀정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린다. 뮤지컬 <영웅>의 대표 넘버가 <누가 죄인인가>이듯, 안중근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총격 장면이 아니라 법정 장면이다. 그런데 <하얼빈>에서는 법정 장면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앞 대목에서 ‘만국공법’으로 만인에게 버림받은 안중근을 그려놓고, 뤼순 법정에서 ‘만국공법’의 의미를 갈무리할 기회를 잡지 않고 영화를 끝내다니, 이는 안중근의 거사가 지닌 세계사적 의미를 잘 몰랐던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만국공법’을 체화한 세계인이고자 했던 안중근
안중근은 법정 투쟁을 벌였다. 안중근은 “나는 개인으로 사람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제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는 도중에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하얼빈에 와서 공격을 가한 후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뤼순 지방 재판소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 나를 판결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로 그의 15가지 죄악을 열거하였다. 당시 공판 기록에는 안중근과 미조부치 검찰관이 국제 정세와 만국공법을 두고 벌인 논쟁이 남아 있다. 미조부치 검찰관은 안중근이 가톨릭 신자인 것을 들어 사람을 죽인 것은 잘못이 아니냐고 힐책하였는데, 안중근은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라고 답하였다. 안중근은 당시 대외적으로는 온건파로 알려졌던 이토 히로부미가 말하는 ‘동양평화’가 실은 제국주의 침탈임을 설파하고, 동양의 모든 나라가 자주독립한 상태로 발전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라는 ‘동양평화론’을 쓰기 위해 사형선고를 받은 후 항소를 포기했다.
안중근이 믿었던 <만국공법>은 1836년 헨리 휘튼의 저작으로, 서구 열강 중심의 세계관을 담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1907년 만국공법에 기대를 걸고 헤이그 밀사를 파견했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당시 안중근이 만국공법을 믿는 것은 어쩌면 순진한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만국공법의 적용을 받겠다고 주장하는 안중근의 행동은 헤이그 밀사가 하지 못한 것을 했다. 즉 일본의 침략 행위를 조목조목 국제사회에 알리고, 대한제국이 저항세력으로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렸다.
오늘날 안중근을 기린다는 것은 단지 우리 민족의 영웅으로 기리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정확히는 ‘만국공법을 체화한 세계인이고자 했던 안중근’을 기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즉 팔레스타인을 비롯하여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국주의 침탈에 저항하는 민족해방운동과 기꺼이 연대할 수 있는 세계시민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