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공포에 질린 조피아(래피 캐시디)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일그러진 얼굴 위로, 그녀의 희미한 얼굴이 한겹 더해진다. 중첩된 이미지이자 분열된 상. <브루탈리스트>는 대상이 온전한 상으로 스크린에 고착되는 것을 애써 우회하는 분열증적 영화이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서사와 이미지를 양분하여 세공하는 방식만이 이 영화를 창조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길이라 믿은 것 같다. 서사는 1, 2부로 쪼개져 있으며,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설계한 센터는 데칼코마니처럼 좌우대칭의 형상일 뿐만 아니라, 오전과 오후를 가르는 정오가 되어야만 건물의 틈으로 빛이 내리쬐는 것을 허락한다. 라즐로의 사촌 아틸라는 본명 위에 ‘밀러’라는 미국인스러운 가명을 덧씌워 생계를 이어 나가며, 미국의 뒤틀린 자화상을 표상하는 해리슨(가이 피어스)의 자녀들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이란성쌍둥이이다.
라즐로 토스와 라즐로 토스
에르제벳(펄리시티 존스)과 재회한 라즐로가 도면을 함께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뭐하는 거냐는 라즐로의 물음에, 그녀는 도면을 계속해서 응시하며 “당신을 보고 있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코베는 라즐로를 육체와 정신, 이원론적으로 분열시킨다. 해리슨이 의뢰한 문화센터는 질곡의 시간을 거친 비운의 예술가가 자신의 정신을 환원시키고 운명을 일임한 육중한 사물로 작용한다. 라즐로는 참혹한 전쟁에서도 자신이 설계한 건물들은 살아남았다고 해리슨의 서재에서 고백한다. 이것은 해리슨과 스크린 밖 관객을 향해 자신의 정체성과 여정을 예견하는 메타적인 발언이다. 그때 둘의 대화에 난입한 한 남자가 해리슨의 서재가 자신이 읽었던 <끝없이 이어지는 도서관>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책을 그저 취미로 수집하는 해리슨은 알 길이 없을 이 레퍼런스는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연상시킨다. 초판본을 사들이며 이야기의 기원을 물질적으로 소유하려 한 해리슨과 대조적으로, 라즐로는 건축을 통해 ‘무한으로 확장되는 육각형의 진열실’이자 자신의 예술가적 인장을 영속적으로 남기려 한다.
이것은 라즐로의 생존과 직결되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가 어둠만이 가득 찬 증기선의 내부를 비집고 나와 처음 맞닥뜨린 것은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지극히 징후적인 이 숏은 그가 결코 미국의 올곧음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며, 미국 역시 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불안하게 예고한다. 이윽고 라즐로의 시선이 정면으로 음미하는 것은 매춘부의 매끈한 몸이다. 이후, 해리슨과의 첫 만남에 앞서 사촌인 아틸라가 라즐로에게 요구한 것은 ‘웃음을 팔라’는 것이었다. 그의 욕망도, 예술가적 재능도 미국에선 거래의 대상이다. 라즐로는 줄곧 음울한 어둠 속에 머문다. 그는 마약과 술에 빠져 있으며,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에서 일시적으로 지낸다. 영화는 라즐로의 육체는 어둠과, 정신은 빛과 결부시킨다. 그렇기에 라즐로는 해리슨의 서재를 재설계하는 과정에서 빛이 들어오는 천장을 교체하는가 하면 문화센터의 가장 높은 곳에 틈을 내고, 분열된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십자가를 창조하려 한다. 예산이 초과되는 상황 앞에서, 그는 자신의 돈으로, 다시 말해 자본주의국가인 미국의 방식을 통해서라도 그 빛을 소유하려 한다. 해리슨에게 구두닦이, 밤거리의 매춘부, 병들고 늙은 개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그토록 우러러보고자 한 빛은 그를 구원의 길로 이르게 할 수 있을까?
분열하는 서사, 애도 없는 회고록
<브루탈리스트>에서 발현되는 라즐로의 예술가적 성취는 그가 해리슨의 서재를 설계하면서 최초로 가시화되며, 에르제벳에 의해 만행이 까발려진 후 돌연 사라진 해리슨의 공백을 제단 위에 새겨진 십자가 형상의 빛이 메우면서 상징적으로 완수된다. 해리슨이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 기획했던 센터는 사실은 미국의 추함을 매장하는 거대한 묘지였던 것일까. 라즐로가 끝내 쌓아올린 것은 미완의 건축물이자, 한 예술가의 고결한 정신이었던 것일까. 그러나 영화는 완성된 센터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며, 관객은 브루탈리즘으로 대변되는 그의 작품이자 예술가적 정신의 집약체를 보지 못한다. 오히려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이라는 제목과는 대비되게, 2부에서 우리가 줄곧 목격한 것은 건축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와 추한 장면들이다. 그렇다면 이 센터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이 될 에필로그는 20년이 흐른 1980년, 햇볕이 내리쬐는 베니스의 오래된 건물 사이를 곤돌라가 여유롭게 유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두컴컴한 증기선을 타고 뉴욕에 도착했던 프롤로그와 대구를 이루는 이 숏은 누구의 시점일까. 이 여정은 결국 누구의 이야기일까. 조피아는 늙은 라즐로를 휠체어에 태운 채,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제1회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전시장에 도착한다. 그녀는 밴 뷰런 인스티튜트가 라즐로가 머물렀던 수용소의 독방과 똑같은 크기의 폐쇄적 공간을 재현했다고 밝히며, 이는 새롭게 쓴 역사라고 진술한다. 영화는 수용소의 재현을 애도의 목적이 아니라, 동시대의 스펙터클인 대규모 전시장에서 드러냄으로써 비극의 잔해를 탐미적인 것으로 교묘하게 탈바꿈시킨다. 조피아는 라즐로를 인용하며 “중요한 건 목적지이지 과정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조피아의 이 발언은, 밴 뷰런 인스티튜트는 한 미국인 사업가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마련한 땅 위에, 뛰어난 기량을 가진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지만 결국 이를 완성하는 것은 유대인 수용소를 완벽하게 재현해냈다는 과시적인 증언이라는 점에서 섬뜩하다. 그리고 침묵하는 예술가를 청중으로 전락시키고 이것은 새로운 역사라며 자랑스럽게 설파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수용소를 재현하며 쓸 수 있는 역사란 무엇인가. 모방된 수용소를 채우는 사람은 누구여야 하는가. 이것은 영화가 암시했던 시오니즘을 떠올리게 한다. 라즐로가 영화에서 처음 스케치를 하며 미래의 건축물을 구상하는 동안, 보이스오버로 1947년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이 통과됐다는 소식과 이스라엘 국가 건립을 다짐하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이 뉴스에 조응하는 것은 남편과 함께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로 돌아갈 것임을 통보하는 조피아의 행위이다. 우리는 이때 처음으로 그녀가 침묵을 깼다고 착각하지만, 그녀는 사실 1부에서 라즐로의 꿈속에 등장하여 그에게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이라고 속삭인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은 2부의 제목이 된다. 그렇다면 <브루탈리스트>는 결국 조피아의 애도 없는 회고록일지도 모르겠다. 이 가설은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한번, 조피아의 얼굴을 중첩시키며 이야기의 끝과 시작을 하나로 매듭짓는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이 영화가 폭력의 대상이었다가 역사의 새로운 화자가 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도약을 말하는 잘 설계된 야심일지언정 조피아의 시선이 향하는 외화면에서 지금도 진행 중인 가자 지구 전쟁을 생각하면 분열적인 창조물인 이 영화를 새로운 고전이라 상찬하는 움직임에 동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