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안은수)은 전과가 있다. 이 정보는 영화 초반부, 지각한 영진이 진현(윤혁진)에게 핀잔을 들은 뒤 밖으로 나가면 옆자리 이 과장의 빈정대는 대사(“전과 하는 애들은 다 이유가 있어”)로 전달된다. 이런 대사가 영화의 도입에 한번 기입되고 나면 관객은 그 내막을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움직임은 굼뜨고 말은 어눌하며 늘 무표정한 영진은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복지관장이 매일 캠코더를 들고 다니는 영진을 수상하게 여기며 ‘몰래카메라’를 연상하듯이, 자신을 변호하기는커녕 모든 종류의 오해와 왜곡에 스스로를 내놓는 이 미심쩍은 청년에게 혹시 험악한 폭력의 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는 내내 은밀하게 짐작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진현의 말마따나 “잡범”이었다. 텔레마케팅 일을 하던 친구의 작업대출에 연루되어 6개월간 징역을 살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행위는 공적인 언어로는 사기이고 불법이지만, 동시에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유감스러운 사태의 일면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진현이 실소와 함께 영진더러 “잡범이네”라고 말할 때, 이 장면에는 어딘가 안도감이 있다. 진현은 이 순간 그 사실을 조금은 다행으로 여긴 건 아닐까? 진현과 관객이 공유하던 비밀스러운 오류가 정말로 오류였음이 드러나면서 이 장면에서는 희미하게나마 우정 비슷한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음 장면에서 진현이 관장에게 직접 영진의 겸직 허가를 요청하고, 곧이어 그의 생일을 축하하며 푸짐한 식사까지 대접하니 말이다. 달리 말해 <부모 바보>는 ‘잡범’을 위시하여 내 주위에 편재하는, 동의할 수 없는 타자의 이질성을 (재)감각해나가는 과정을 비춘다. 내게 <부모 바보>는 유달리 불화하는 방식으로서 지탱되는 우정을, 그리고 그 우정을 지속하(고 또 어그러뜨리)는 어떤 도덕적 태도를 들여다보는 영화였다.
타자를 내가 어찌 할 수 없다는 감각
잡범답게도 영진은 자주 지각을 한다. 그런데 어딘가에 늦는다는 건 한편으론 적어도 다른 곳에(는)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 늦는다면 거기에는 늦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일종의 말장난이지만, 구태여 곱씹는 이유는 기실 이 영화의 관객이라면 영진이 누구보다 부지런한 인물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이동한다. 방이 없으니 먹고 자고 누울 곳이 없으므로 늘 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러다 어딘가에 (잠시) 정착하면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린다. 이 영화에서 진현이 자는 장면은 나와도 영진은 겨우 졸 뿐이다. 그런데 이렇듯 영진이라는 빈틈을 통해 진현의 일상을 이루던 균열이 드러난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이 잡범의 흔적들이 지금 진현을 깨우고 있다고. 취침이 아니라 기상으로, 안락한 수면이 아니라 불안한 졸음으로 이끌고 있다고. 그러니까 <부모 바보>의 규칙은 이런 것이다. 마치 숨바꼭질처럼, 누군가가 사라지고 다른 이는 그를 찾아 헤맨다. 대개 영진이 뭔가를 (안 하거나) 한다. 그럼 진현이 그를 따라 나선다(와중에 겹쳐지는 순례(나호숙)의 이야기는 이와 반대 방향에 가깝다. 순례는 진현이 원하지 않음에도 그를 계속해서 찾아온다). 이를테면 어쩌다 진현의 집에 얹혀 지내게 된 영진은 자주 생라면을 부숴 먹는데, 그러다 라면 부스러기를 밟은 진현이 영진을 찾으러 주차장으로 나간다.
문제는, 찾더라도 그를 일시적으로 자리에 돌려놓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타자를 내가 어찌 할 수 없다는 감각, 그리고 내가 그를 어찌 할 수 없으므로 그가 타자라는 사실을 이렇게 생경한 감각으로 그려낸 영화를 나는 근래에 본 적이 없다. 이는 <부모 바보>가 사회복지관이라는 장소를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찾는(searching) 여정의 주체가, 다양한 민원인과 지역 주민의 방문을 받는 사회복지사 진현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제도(와 그 바깥)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는 실무자이지만 이 적용과 집행은 탁상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관장은 사무실의 자리 배치가 권위적이니 한번 바꿔보자, 는 말을 매우 권위적으로 한다(게다가 자리 배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이 끄떡없는 무대에서 진현은 누락된 현장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는다.
주체와 타자의 반복되는 대결을 불화라는 조건을 중심으로 다루는 한국 독립영화라는 점에서 얼핏 김덕중 감독의 <에듀케이션>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한다. <에듀케이션>에서 관객은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사회복지학과 졸업생인) 성희(문혜인)를 경유하여 소년 현목(김준형)을 ‘못마땅해하는 동시에 측은해하는’ 양가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부모 바보>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대적으로 어른인 진현의 입장에서 영진을 바라본다. 그러나 <에듀케이션>의 불화가 누적된 갈등을 마침내 물리적 충돌로 터뜨리는 발산으로 귀결된다면, <부모 바보>는 여태 가까스로 적층된 압력을 인물의 실종으로 순식간에 휘발시킨다. 전자는 상대가 여전히 눈앞에 있는 데서 대결하는 와중에 닫히지만, 후자는 그의 존재를 확신할 수조차 없게 된 사태에서 중단된다. 실상 타자와의 문제는 주체 내부의 문제와도 멀지 않다. 내가 주체적인 관찰자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발각될 때, 그야말로 세에서 가장 낯선 자신이 될 때의 까마득함이야말로 진정한 타자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부모 바보>에서 권력적인 시선을 가진 자는 진현이 아니다. 시점숏이 드문 영화이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무언가 렌즈에 담고 포착해내는 인물은 영진이다. 그렇다면 영진이 조는 이유는 그가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가설을 제안해볼 수도 있다. 그가 졸고 있다는 것은 표면적인 진술이다. 그보다 그는 자신의 앞을 회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가령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은 둘의 정면 모습은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반복되는 구도다. 평행하게 앉아 시각적 교류를 포기하기. 또 비슷한 구도의 장면이 등장하는 어떤 날, 진현이 영진을 향해 “차라리 니가 부럽다”라는 말을 던지자 영진은 역시 졸고 있는데, 이를 보고 진현이 자리를 떠나자 별안간 두눈을 뜬 채 앉아 있는 영진의 클로즈업이 담긴다(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는 또 말없이 사라진다). 그는 정말 졸았던 게 맞을까?
존재의 증빙과 사라짐
공간은 주체가 여기에 있을 때나 성립되는 현장이므로, 진현은 당연히 영진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 영진이 아예 사라져버리자 그제야 진현은 영진이 노숙하는 다리 아래로 향한다. 조촐한 침낭과 여행가방, 페트병 등이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쓰레기종량제봉투가 있다. 영진은 왜 그 어둡고 앙상한 곳에서마저 쓰레기를 모아두었을까. 잠깐, <부모 바보>에는 한밤중 청소차가 도시의 쓰레기봉투를 수거하는 장면이 두번 등장한다. 곧장 붙는 것은 진현의 수면 장면이다. 그 시간에 영진은 거처를 찾아 움직였을 것이다. 깊은 밤에 이동하는 자는 제대로 보지 못해 어렴풋한 흔적을 남긴다. 바닥에 떨어진 라면 부스러기, 점차 녹아 농으로 굳는 촛불, 흘러내려 물이 되는 얼음과 같은 상태야말로 영진이 스스로를 존재한다고 증빙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에 가깝다. 제도라는 모눈을 벗어나는 얼음처럼 영영, 그러나 이물을 남긴 채 그는 사라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