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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웨일>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렇다. 다만 그것은 <모비딕>이 고래에 관한 이야기라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스스로 <모비딕>을 인용하고 있는 <더 웨일>은 <모비딕>과의 관계를 통찰할 때 다양한 상징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모비딕>이 그러했듯이 <더 웨일>을 미국, 그리고 현대사회에 관한 알레고리로 볼 수도 있다. <더 웨일>을 거울처럼 반전된 <모비딕>이라고 본다면, <더 웨일>의 찰리(브렌던 프레이저)는 고래 모비딕이 아니다. 찰리는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모비딕을 잡으려는 선장 에이해브를 닮았으며,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려 하는 오디세우스와도 유사하다. 내면의 어두운 곳에서 죽음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오디세우스의 욕망이 삶보다 거대한 무엇에 대한 갈망인 것처럼, 찰리의 죽음을 향한 갈망 또한 단
[비평] ‘더 웨일’, 숭고함이 침묵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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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사과집 방송국 시사 PD이자 에세이스트.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 <싫존주의자 선언> <공채형 인간> 저자.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송혜교)이 학교 폭력의 복수를 결심한 가해자는 다섯명이다. 생사 여부로 복수를 결산해보자. 두명의 남자 가해자는 모두 목숨을 잃은 반면, 세명의 여자 가해자는 살아남았다. 왜 그들은 죽지 않았을까?
가해자들 사이의 젠더라는 위계
문동은이 박연진(임지연)에게 주려고 한 것은 ‘사회적 죽음’이다. ‘너의 아주 오래된 소문’이 되는 방식으로. 오늘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라는 체육관에서의 경고는 연진이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수상할 만큼 대중적인 인물이기에 더 효과적이다. 특히 젊고 아름다운 기상 캐스터일수록, 흉흉한 소문으로 인한 추락의 낙차가 크다. 전재준(박성훈)은 공사 중인 건물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지만, 연진은 사회적 지위, 명예, 영광(glory)으로부터 추락한다. 그건 ‘여성’이 대상일
[비평] ‘더 글로리’의 복수는 가해자의 성별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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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가 끝난 시점에 되묻고 싶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에 어떤 화두를 던졌나. 동은(송혜교)을 괴롭힌 가해자들은 저마다 저주의 신탁이라도 받은 양 과시적인 형벌을 보여주지만 나는 냉동된 소희(이소이)의 시신이, 재준의 옷가게에서 숙식하다가 간신히 고시원으로 도망친 경란(안소요)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온 생을 걸어 복수를 준비해온 주인공의 치밀한 설계도가 학교 폭력의 방지와 처벌에 어떤 사회적 나비효과를 일으켰는지 조금의 묘사도 보지 못했다. 대신 내가 본 것은 저마다 여러 층위의 고통 속에 놓인 피해자들이 한데 뭉쳐지고, 저마다 양상이 다른 가해자들이 깡그리 지옥에 던져지는 광경이었다. 집단화된 증오와 단죄 속에서 한쪽은 분열했고 한쪽은 지옥에서도 지켜낸 선의와 믿음으로 연대했다. <더 글로리>의 쾌감이자 아름다움이면서, 찝찝함을 지울 수 없는 편의적 이분법이기도 한 이 거대한 피해자-가해자 구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비평] ‘더 글로리’ 속 뭉뚱그려진 피해자들과 해결되지 않은 폭력의 잔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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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복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측정 불가능한 광기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복수를 할 땐 두개의 무덤을 파라’는 말처럼 복수는 근본적으로 자기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다. 그만큼 제대로 된 복수를 달성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상 복수를 통해 보상되거나 회복되는 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효용에 눈이 멀어 복수를 갈망한다. 하나는 감정의 분출이다. 사적 영역에서 복수는 회복과 치유라기보다는 증오의 발산과 분노의 해소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복수는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랄 뿐 정확히 계산될 수 없다. 그나마 근사치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원시적인 형태의 정의,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일대일 대응이다. 이 순간 복수는 사적 감정에서 공적인 기능으로 치환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최소한의 정의. 언젠가는 대가를 치른다는 사회적 안전장치(혹은 경고)라 해도 좋겠다.
<더 글로리>의 복수는 나름 합리적으로 보인다. 들끓는 감정에 매몰되었다
[비평] ‘더 글로리’, 그 복수는 진짜 통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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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나미(천우희)는 사건에 휘말린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이하 <스마트폰>)의 후반부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범죄자 준영(임시완)을 대면한 나미는 준영에게 묻는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억울하게 피해자가 된 나미의 입장에선 생략할 수 없는 질문일 테지만, 이를 들은 준영은 코웃음을 치며 싱거운 대답을 들려줄 뿐이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거기엔 대단한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때 준영과 함께 코웃음을 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건 바로 화면 밖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다. 이미 오프닝에서 모든 이야기의 시작을 목격한 우리는, 나미의 질문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이유를 아는 것이 나미의 상황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억울함에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은 주인공이 오히려 더 위태로워지는 것을 다른 영화에서 본 적도
[비평]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와 ‘서치2’, 카메라를 맡겼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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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예술을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는가? 세계적인 지휘자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에게 물어보자.
<뉴요커>의 애덤 고프닉과 함께하는 대담에서 리디아는 두 사상을 소개한다. 첫째는 음악을 연구하다 만난 시피보 코나보 부족의 가르침이다. 그들은 노래를 만든 영혼과 같은 편에 있는 사람만이 노래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둘째는 스승 번스타인이 가르친 유대교의 개념 ‘테슈바’와 ‘카바나’다. 테슈바는 회개, 귀환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카바나는 방향성, 집중, 의도다. 기도하는 이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신성한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깨끗한 의식을 확립하는 과정이다. 리디아는 거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창작가의 의도와 삶, 심지어 영혼까지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 4악장
<TAR 타르>의 중심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있다. 클래식 세계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비평] ‘TAR 타르’, 불편해야 했던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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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여러 요인 중 하나는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몽타주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모아 몽타주한 것은 의외였다. 그의 영화의 특징은 연속성에 있었다. 원테이크로 찍은 듯한 <라라랜드>의 오프닝 신이 그 예다. 그에게 편집술은 숏과 숏의 경계를 지우고 하나의 연속적인 시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활동사진부터 3D영화 <아바타>까지 짧지만 강렬한 영화의 역사를 몽타주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빌론> 말미에 등장한 몽타주는 두개로 나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몽타주는 매니(디에고 칼바)가 영화를 보는 것이다. 1952년 매니는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할리우드로 여행을 와서 한 영화관에 들러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본다. <바빌론>은 이 영화의 리믹스다. 매니는 이 영화를 보며 과거를 반추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
[비평] ‘바빌론’, 결국, 구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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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소피가 스크린에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영화는 넘실대는 기억의 주인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애프터썬>은 기억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 차 있지만 회상을 드러내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식인 플래시백의 관습적 표기만큼은 숨긴다. 물론 곳곳에 힌트가 산재해 있다. 영화는 서사의 주도적 인물이 11살 소피(프랭키 코리오)이며, 또한 기억의 주인이기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둔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며 성에 눈뜨기 시작한 소피의 여름은 선명한 성장담의 구조를 갖고 흐른다. 반면 31살의 젊은 아빠 캘럼(폴 메스칼)의 사연은 인과적으로 전개되기보다는 불안한 파편들로 조각나 있다. 심지어 영화의 오프닝에는 노골적으로 어른 소피(셀리아 롤슨 홀)의 실루엣과 얼굴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영화를 처음 대면한 관객에게는 아직 해석할 수 없는 주인 없는 정보들일 뿐이다.
다시 말해 <애프터썬>은 영화적인 기법으로 플래시백을 보여주는 것을 꽤나 오랫
[비평] ‘애프터썬’, 액체적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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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복수극과 로맨스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서사의 주요 동력이 대개는 불평등한 계급 관계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가장 사랑받는 복수극 유형은 가진 것 없는 약자가 부패한 거대 자본 권력을 응징하는 이야기이고, 제일 흔한 로맨스 서사는 가난한 여성이 부유한 남성과의 연애로 신분 상승을 실현하는 신데렐라 이야기다. 요컨대 두 장르에는 사회적 약자의 계급 질서 흔들기라는 판타지가 반영되어 있다.
계급 격차가 한층 심화된 요즘에는 이같은 판타지도 변하는 추세다. 단순한 환상과 욕망의 차원이 아니라, 주인공이 다시 태어나는 본격 판타지 장치를 통해서만 복수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가 하면(<재벌집 막내아들>),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에서나 신데렐라 스토리가 가능해진다(<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 아예 판타지를 제거한 작품들도 등장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와 JTBC 금토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여기에 해당
[비평] ‘더 글로리’와 ‘사랑의 이해’가 그리는 격차 사회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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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오해하려 들지 않는 한, <유령>이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말은 농담으로 넘겨들을 일이다. 몇몇 실증적 역사의 지표들, 조선총독부 건물, 남산의 신사, 황군 군복과 일본어, 영화가 배경으로 삼은 1933년과 비슷한 시기에 (하지만 정확하게는 1932년에) 조선에서 개봉했던, <상하이 익스프레스>를 홍보하는 영화관의 대형 간판 이미지 등이 일반적으로 훈련된 관객의 기억을 자극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여기에서 상기된 과거는 역사를 구성하는 시간의 한 단면이 아닌, 집단의 기억으로부터 몇 가지 요소들을 추출하고 새롭게 배치하여 만들어낸 추상적인 시간이다. 고증에 대한 열망과 그것의 오류에 대한 지적, 또는 인위적인 시간으로 인해 발생한 영화의 빈틈을 뛰어넘어 역사와 성급하게 대화하려는 시도가 때로는 영화에 대한 논의를 위태롭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가 마크 페로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과거를 다룬 영화의 이미지들이
[비평] ‘유령’, 한국영화의 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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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영화는 도입부부터 실수를 저지른다. 설정 자막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설정 자막이나 내레이션 자체가 절대악인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엔 최소한의 문장으로 의미 있는 정보를 전달하면서 관객을 새롭고 낯선 곳에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오리지널 <스타워즈> 3부작의 도입부 자막은 얼마나 효과적인가. 하지만 그 설정이 지루하고 진부하다면 시청자들은 시작하자마자 탈출을 생각하게 된다.
설정에 확신이 서는 순간 결말까지 내용이 다 보인다
설정이라는 건 이렇다. 해수면 상승 기타 등등으로 지구는 끔찍한 곳이 됐다. 인류는 달과 지구 사이에 스페이스 콜로니들을 만들었고 그중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전쟁이 난다. 이제 반쯤 지옥 같은 곳이 된 지구는 콜로니에 자원을 공급하는….
하나도 안 맞는다. 지구온난화, 해수면 상승 기타 등등 온갖 재난을 다 합쳐도 지구인에게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지구다. 스페이스 콜로니 사람들이 부럽다고? 지구에 똑같은 시설을 만들면 된다
[비평] ‘정이’, 너무 오래된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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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공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두고 실패를 운운하는 게 의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인질 두명의 목숨이 희생되긴 했지만 <교섭>은 우여곡절 끝에 나머지 21명을 구출한 성공 이야기 아닌가. 국정원 요원 대식(현빈)만 본다면 영화는 이제껏 봐온 유사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교섭에 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요 인물이 한때 실패한 임무에 따른 트라우마를 극복한 뒤 기어코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성공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대식의 경우에도 적용 가능하다. 이라크 인질 구출 작전에서 실패를 맛본 대식은 그때 생각이 때때로 밀려들어와 괴로운데, 비슷한 사건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면서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손에 쥔다. 비록 두명의 목숨을 잃었지만 나머지를 구출하면서 대식은 과거의 실패를 딛고 성공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에는 성공의 기쁨보다 실패에 짓눌린 무기력감이 더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영화 후반부에 드러난 실패인지 성공인지 단정하기 애매한 순간만
[비평] ‘교섭’, 실패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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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의 기다림>은 이야기의 매혹에 대해 떠드는 적당한 범작으로 취급받다 잊히고 있는 것 같다. 내게는 이런 평가를 움직일 만한 힘도, 의욕도 없다. 다만 이상하게도 영화를 본 뒤부터 자꾸만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 그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호흡하듯 이야기하는 정령의 마음으로. 그 장면은 최고의 장면 뒤에 나온다. 지니(이드리스 엘바)의 이야기에 감명한 알리테아(틸다 스윈튼)는 첫 번째 소원을 말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를 원해요. 둘은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확인하듯 하룻밤을 보낸다. 피어나는 붉은 증기. 반짝이는 검은 밤. 영화의 하이라이트임을 직감하게 하는 아름다운 이미지.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카메라가 그녀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몽환적이었던 지난 밤과 다르게 지나치게 선명하고 또렷한 얼굴. 그것은 간밤의 열기와 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채로 티없이 투명한 아침을 맞이했을 때의 민망함을 상기시킨다. 환상에서 일상으로의 아
[비평] ‘3000년의 기다림’, 홈통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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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일까? 영화를 보고서 그간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고수하던 노아 바움백 감독이 돈 드릴로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유가 궁금했다.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건강을 위협하는 재난을 배경으로 하고 공황에 빠진 군중의 좌충우돌을 담은 원작이 떠올랐을 수 있다. 또 유사한 시기 발달한 인터넷 기술에 따른 소셜 미디어의 확장과 함께 극단적인 우경화와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세태가 원작이 묘사한 히틀러와 우중에 관한 내용을 생각나게 했을 수도 있다. 감독의 관심사인 부부나 가족의 풍경을 그린다는 점도 매력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특히 마지막 추정은,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와 그 사이에서 점증하는 감정을 포획한 블로킹으로 부부와 가족의 심정적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이 이번 작품에도 어김없이 이어진 데서 더욱 심증을 굳히게 한다. 다만 이러한 블로킹과 편집이 영화의 스펙터클과 관계한다는 점이 새롭게 눈에 띈다.
스펙터클이 관념에서 경험으로 내려오면
두 시퀀스를 예로 들어보자.
[비평] ‘화이트 노이즈’, 비극이지만 희극에 가까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