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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이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나 지지부진한 이유는 영화를 감싼 가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 뉘앙스 때문이다. 실제로 비판이 무색할 정도로 거친 보수적 정서가 영화를 두르고 있다. 이 영화를 ‘국뽕영화’라고 정리하고 넘어가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한데 <더 문>은 거시적 이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모호한 균열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 균열이 이 작품을 재평가받게 할 요소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균열을 살펴봄으로써 동시대 이미지에 관한 몇 가지 논점을 환기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더 문>의 흥행 실패가 의미심장한 이유는 더이상 국가주의가 흥행 코드로서도 유효하게 수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텐트폴 영화의 국가지상주의는 호소력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김병규 평론가는 2010년대를 건너오며 한국영화에서 법정과 같은 국민 통합의 장소(<변호인> <아이 캔 스피크>)가 소멸하고, 법 바깥의 폐허가 무대화
[비평] ‘더 문’의 빈틈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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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의 주인공은 구산영(김태리)이다. 그는 가장 많은 러닝타임을 부여받으며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 산영이 과연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산영이 가난에서 자유로워지고 싶고,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으며,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산영의 어릴 적 꿈은 뭐였는지, 그가 즐겨 듣는 음악은 뭔지, 유산을 물려받은 지금은 뭘 하고 싶은지 같은 건 알지 못한다.
사정은 함께 극을 이끌고 가는 염해상(오정세)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어머니(박효주)를 악귀의 손에 잃은 뒤부터 계속 귓것들을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다는 사실, 그래서 악귀를 쫓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외의 욕망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산영과 해상 모두 12회 내내 ‘악귀를 잡아서 봉인하고 주변 사람들을 지킨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하
[비평] 구조를 겨냥했으나 해결하고자 하지 않는, ‘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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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개봉 이후 톰 크루즈가 없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말을 여기저기에서 종종 듣는다. 그 말에 100% 동의하지만 그래도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해하며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다. 오리지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설정은 캐릭터가 몽땅 바뀌어도 이야기 진행에 아무 지장이 없는 종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리즈의 배우들은 꾸준히 바뀌었고 1988년에 나온 속편 시리즈까지 포함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으로 출연한 배우와 캐릭터는 단 한명도 없다. 피터 그레이브스(영화에서는 존 보이트)가 연기한 팀의 리더 짐 펠프스도 시즌2부터 등장했다(첫 번째 리더인 댄 브릭스는 배우 스티븐 힐이 안식일에 일하는 걸 꺼려하는 정통주의 유대교도라 하차했다). 설정에서 캐릭터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캐릭터들의 역할이었다. 리더, 변장의 명수, 테크 전문가, 근육 그리고 여자의 역할만 확
[비평] ‘여자’는 팀이 될 수 있는가,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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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리멘탈>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6월14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24일째인 7월8일 토요일에 자신의 일일 최다 관객수(33만명)를 경신했다. 종전의 기록은 7월1일(개봉 17일차)의 28만명이었는데, 이 수치는 개봉 후 주말마다 우상향하는 중이었다. 개봉 31일차인 7월15일 토요일엔 그 기세가 26만명으로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이는 여전히 개봉 첫주 토요일의 수치(17만명)보다 높다. 이 숫자들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엘리멘탈>은 지금 역주행 중이다.
<엘리멘탈>과 관련해 두 번째 흥미로운 사실은 개봉 한달이 지난 시점에 새롭게 열린 특별 상영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극공감에프(F)관’이다. 이는 CGV에서 마련한 특별 상영으로, 7월15일과 16일 이틀간 수도권 5개 관에서 하루 1~2회차씩 진행됐다. 이 기획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MBTI 성격 유형 검사에 익숙한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것으로, 예매 진행 시 안내되는
[비평] ‘엘리멘탈’의 흥행 역주행에 대하여(feat. MB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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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작성한 메모를 확인해 보니, ‘관객이 웃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정말 웃지 않았을까? 물론 누군가 조용히 폭소를 터뜨렸으나 내가 듣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은 항상 일어난다. 그러나 설령 이 메모가 영화의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날조된 픽션이라 하더라도, 이런 픽션을 쓰게끔 했던 어떤 충동이 영화에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에서. 보(호아킨 피닉스)가 벌거벗은 채로 (화면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남근을 덜렁거리면서 거리를 달릴 때, 자신의 아들 앞에서 한번도 섹스를 한 적 없다고 고백하는 아버지가 등장할 때, 죽은 줄 알았던 보의 아버지가 대뜸 고추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 울부짖을 때. 아리 애스터는 루저 남성의 자아를 박살냈다. 거세공포라는 유산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초라한 파편들로 해체시켜놓고 있다. 분명 이 장면들이 조롱을 동반한 웃음을 유발하는 농담임을 알지만, 관객은 (거의) 웃지
[비평] 영화에 새겨진 감각과 체험의 오차들, ‘보 이즈 어프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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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낭만화되기 십상이다. 한국영화 속 풍경으로 국한하면, 폭력은 학창 시절의 추억(<친구> <말죽거리 잔혹사>)이고, 상처 입은 가여운 영혼의 초상(<아저씨>)이며, 최근 사례로는 능청스러움이나 가벼운 농담과 동일한 값을 지닌다(<범죄도시> 시리즈). 추억과 놀이, 심지어 향수와 애상마저 포괄하는 낭만화한 폭력에 반성이나 통찰 따위는 희미하다. 다르게 말하면 폭력은 주어진 질서 안에서 태생하는 동시에 이 질서를 영속시키는 수단이다. 생각해보라. 농담처럼 가볍고 통쾌한 <범죄도시> 시리즈 속 마석도(마동석)의 펀치가 범죄자를 때려눕혀도 범죄자를 양산하는 사회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참혹한 복수에 나서는 특수부대 출신의 인간 병기는 흠모의 대상이 되고, 학교 폭력 가해자는 우상이 된다. 폭력의 낭만화와 관련해 사회는 분명 개인과 공모 관계에 있다.
오로지 개인만이 낭만화하는 폭력
박훈정 감독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쓰임도
[비평] 폭력을 낭만화하는 또 다른 방식, 박훈정 감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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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해당 영화와 관련된 굿즈를 수령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굿즈의 유형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는 등장인물이 그려진 다양한 형태의 판촉물이고, 둘째는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의 모형)들이다. 지난해 개봉한 <범죄도시2>의 시사회에서 캐릭터 딱지를 제공했던 <범죄도시>는 올해엔 영화에 나온 아주 사소한 소품 몇 가지를 굿즈로 증정했다. 굿즈는 <범죄도시3>에서 형사 마석도(마동석)가 한번쯤 손에 쥐었던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이 글을 통해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두 가지는 바로 손거울과 증거 수집용 지퍼백이다. 그 둘이 어떤 측면에서 올해 첫 ‘천만 영화’ (예정)인 <범죄도시3>의 성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손거울과 지퍼백 같은 영화
둘은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가장 특징적인 것은 두 소품이 영화와 딱히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거울과 지퍼백은
[비평] ‘범죄도시’라는 프랜차이즈와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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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품고 있는 리듬을 담은 영화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공간과 그 안의 사물들과 사람들, 그들의 물질성과 운동이 자아내는 리듬이 하나의 세계를 이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으로 이름 지어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미야케 쇼는 느린 걸음으로 세상을 응시하며 온몸의 감각으로 느낀 세상의 리듬을 영화 속으로 흘려보낸다. 그러고선 도쿄에 자리한 아담한 복싱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리듬을 형성하고, 전철의 기척을 알리는 소리가 도시의 순환하는 리듬을 일깨우며, 도심지의 소음과 작은 동네의 고요함이 개별적인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부드럽게 각인시킨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깊고 단단하며 신비롭다. 이 영화엔 사사롭지만 눈길을 끄는 장면들과 주인공 게이코(기시이 유키노)의 세계를 이루는 순간들이 느슨하게 들어찬다. 영화는 복싱 선수 게이코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게이코의 삶과, 그녀와 이어진 인물들과 그들이 스쳐가는 사람들과 공간의 모습들까지 모든 풍
[비평] 너의 눈에 시간을 새긴다는 것,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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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당시 대학생 한지원은 <코피루왁>이라는 24분(!) 분량의 단편(!)애니메이션을 발표했다. 비유와 상징, 함축 등의 기존 독립 단편애니메이션의 미학에서 벗어나 드라마 연출의 정공법을 택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담뿍 담아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10대 후반 주인공들은 주저 없이 질주했다. 넘치는 에너지와 탄탄한 기본기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작품이었다. 기본기와 연출력은 그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추진력일 뿐이라는 듯, 2013년 <학교 가는 길>은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는 간극을 한껏 벌리면서 한지원만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각인시켰다. 반려견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한지원의 작품들 속 청춘이 겪는 현실 사회의 풍경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것일지니. 학교와 가정이라는 (안정적이면서도 억압적인) 울타리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막연한 기대를 꿈꾸지만, 정작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 그러고는 쉼표도 없이, 대학원 준비생의 고민을 다룬
[비평] ‘그 여름’, 지극히 마술적인, 또한 사실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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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더이상 집이라고만 부를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것이 개인의 경제적 성공에 따른 신분이 드러나는 지표이고, 또한 그 경제적 가치를 재생산하기 위한 투기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공통의 감각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투사되는 선망과 원한은 동시대의 문화적 감정구조에 있어 핵심이다. 지난해 가장 문제적 작품이었던 <안나>와 <작은 아씨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투쟁적 계급의 개념은 유효하지 않으며 그 자리를 회복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자연화된 ‘신분’이 차지한다. 주어진 신분의 극복이 중심 모티프로 작용하는 두 시리즈 모두에서, 아파트는 그에 따른 갈등 상황을 첨예하게 만드는 서사적 장치로 사용된다. <안나>에서 정체가 탄로날 위기에 처한 안나(수지)는 가짜 신분으로 통행증을 얻은 셈인 자신의 아파트 건물에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숨어 다닌다. <작은 아씨들>의 인주(김고은)가 다가올 어떤 위험도 감수하기로 마음먹
[비평] ‘드림팰리스’, 욕망의 성취도, 연대도 실패한 자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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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결말에서 이 영화는 안데르센 원작의 비극이 지닌 공허함을 단호하게 포기하는데, 아마도 30년 전의 문화적 분위기가 동화 속 ‘불가능한 사랑’을 옹호하지 않았기에 관객 다수가 이 애니메이션의 제안을 환영했던 것 같다. 동화란 원래 구전되거나 문서화되며 상황에 맞게 변화되는 특징을 가진 장르다. 따라서 영화화 과정에서 원형의 일부가 훼손되거나 변형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일부 비평가들의 언급처럼, 과거 디즈니의 영상화 작업은 안데르센 특유의 ‘뒤틀린 욕망’이 지닌 환영을 타파해낸 성과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성공했다. 그리고 의도주의 비평의 관점에서, 이러한 개작의 문제는 도덕적으로 텍스트의 합리성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원주의적 해석이 관심을 받으면서 작품 스스로의 ‘지각가능성’ 여부가 창작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실사화된 <인
[비평] ‘인어공주’, 가장 숭고한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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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에는 조명이 깜빡거리고, 남자는 나이 든 여성 동료에게서 약을 받는다. 꺼질 듯하던 전기가 드디어 제대로 들어오고 여성이 화면 왼편으로 나가면, 거기에는 한밤중 노대의 풍경이 담겨 있다. <카일리 블루스>는 <지구 최후의 밤>과 달리 대부분 낮을 배경으로 촬영되었지만 도입부는 밤의 서늘하고 음산한 공기를 충분히 각인한다. 빛을 기다리면서 정작 밤으로 향하는 연로한 여성의 걸음을 따라가며 시작하는 영화는 이처럼 유장한 패닝으로 연결된 흐름 안에 여러 차례의 역설을 배치한다. “오늘이 무슨 날이에요?”, “그냥 평일이야”라는 모호한 뉘앙스의 대화, 혹은 ‘하루에 세번’을 약 복용 주기가 아니라 정전의 횟수로 알아들은 천성(진영충)의 오해, 문과 밤과 빛과 불…. 영화는 단일한 숏 안에서 혼잡하고도 역설적인 정보를 거의 남용하듯 선보인다.
데니스 림은 비간의 롱테이크에 관해 “한숏 안에 쌓이는 강도를 우리가 아는 형태로서 현실의 보호벽이 파열되기 직전 그 한계
[비평] '카일리 블루스', 나의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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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이하 <가오갤3>)가 주는 감동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같은 수사적인 표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가오갤3>의 감동을 설명하는 것에는 말 그대로 물리적인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퀼(크리스 프랫)이 우주에서 돌처럼 굳어가다 아담(윌 폴터)에 의해 극적으로 살아나는 장면이 더 뜨겁게 느껴지는 까닭을 (전편을 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에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던 욘두(마이클 루커)의 모습까지 덧붙여 이야기해야 할 텐데, 문제는 그걸로도 여전히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욘두와 퀼의 길고 긴 사연을 추가로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것이 반드시 설명되어야만, 극 후반 사랑으로 감화되는 아담이라는 캐릭터의 상징성이 제대로 전달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비평]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언어화하기 곤란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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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년들이 맞닥뜨리는 세계의 균열을 극도로 섬세하게 그려내면서도, 끝내 여린 소년의 죄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마는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루카스 돈트의 <클로즈>를 반복해 보며 체념하듯 되뇌었다. 영화를 거듭해 보아도 매 장면에 대한 감응은 다르게 반향하지 않았고, 이 가련하고도 가혹한 영화를 끌어안고픈 마음과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양가적인 감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마음에 걸려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장면은 감상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클로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그 생명력의 근원을 날카롭고도 사려 깊은 시선과, 개인의 얼굴에 무섭도록 집중하면서도 사회상을 영민하게 반영하는 지능적인 면모에서, 단순하게는 관객과 인물을 밀착시키는 강력한 동화력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소년의 세상이 흔들리기 때문만이 아니다. 영화 후반부부터 서사가 도식적으로 구조화되고, 소년이 연약
[비평] ‘클로즈’, 상실이 자아내는 큰 구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