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를 향한 사랑의 시도
관음과 절시는 영화에서 대상을 훔쳐보는 행위, 더 나아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을 말할 때 소환되곤 한다. 6부작 시리즈 드라마 <LTNS>를 말하려는데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함께 떠올랐다. 영화에서 청년 토멕은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여인 마그다를 매일 밤 망원경으로 지켜본다. <LTNS>의 우진(이솜)과 사무엘(안재홍) 또한 불륜 남녀를 미행하고 잠복하며 대상을 몰래 지켜본다. 이들의 훔쳐보기에 프로이트적 결론을 동원하기보다 도시(盜視) 행위 그 자체를 돌아보면 보이는 것이 있다. 토멕의 훔쳐보기의 끝에는 마그다를 향한 순애가 있고, 우진과 사무엘의 훔쳐보기에는 영화를 기억하고 떠올리게 만드는 짙은 향수가 배어 있다. 증거 수집을 위해 우진과 사무엘이 끌어오는 방법 중에 어떤 단서는 분명하게, 또 어떤 단서는 희미하게 이것이 바로 영화에서 태어나 영화를 회고하는 장면임을 지시한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영화의 끝에 이르러 마그다를 기어이 토멕의 자리에 앉혀놓는다. 망원경 렌즈 너머로 마그다가 환상을 목격하면, 토멕이 한차례 전했던 사랑이 버려진 뒤에 시간차를 두고 마그다에게서 사랑이 피어난다. 망원경 속 렌즈를 통해 펼쳐지는 영화적 환영을 사이에 두고 보는 자와 관찰되는 자가 있다. 훔쳐보기의 대상이었던 마그다가 토멕의 자리에 앉은 이유는 결국 이쪽의 추를 움직여 저쪽의 추를 움직이게 만드는 사랑의 진자운동을 그리기 위해서다. <LTNS>는 보는 자와 관찰되는 자 사이의 필름에 관한 짧은 사랑을 두고 시청자와 공명하기를 시도한다. 이 드라마의 두 연출자(전고운, 임대형)가 모두 영화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 글의 시작을 망설이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LTNS>에서 가리키는 단서를 이어 붙여 이렇게 확대해석해볼 것이다. 스트리밍으로 공개된 이 짧은 시리즈 드라마는 영화라는 매체와 그 원형의 모든 것을 그리워하는 중이다.
두대의 카메라, 두개의 화면
우진과 사무엘, 그들이 지켜보는 대상 사이에는 토멕의 망원경 대신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이 주어진다. 현대의 디지털기기가 출력하고 양산해내는 이미지의 결과물은 <LTNS> 안에서 증거물로 사용된다. 그 종류는 대상이 등장하는 동영상과 일련의 사진이다. 사진이 협박의 증거로 쓰일 경우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한 봉투에 담긴다. 불륜의 정황증거를 단박에 이미지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이미지의 나열로 기능하는 것이다. 또 사무엘이 디지털카메라로 연속 촬영한 사진을 슬라이드하며 우진에게 보여주며 한장의 사진이 그다음 사진과 연결되어 보이는 장면은 익숙하게 영화의 모태, 활동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이미지의 발달사라는 과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이 시리즈의 처음을 여는 어떤 장면에 있다.
1화의 오프닝크레딧 바로 직전 우진과 사무엘은 함께 아파트 현관을 나선다. 두 사람이 집을 나온 시각은 깊은 밤이어서 주변이 어둑하다. 갑자기 어둠을 침투해오는 것은 이 둘을 비추는 거대한 스포트라이트다. 보이는 그대로 보자면 이는 우진과 사무엘,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시청자의 존재를 의식하며 간단하게 강조하는 연극적 연출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아파트 전체 조망이 담긴 익스트림롱숏에서 스포트라이트는 여전히 두 사람을 비추며 따라간다. 이 장면에서 아파트가 거대한 흰 벽의 스크린처럼 보이기 때문에 스포트라이트와 그 안의 두 인물은 마치 스크린에 환등기로 비춘 빛 안의 슬라이드 이미지처럼 보인다.
위 장면이 이미지 영사 장치의 시초를 연상시킨다면 또 어떤 장면은 그 자체로 촬영 과정과 결과물인 영상을 직접 드러내며 편집 과정을 상상해볼 여지를 남긴다. 2화에서 우진과 사무엘이 뒤쫓는 대상은 가영(정재원)과 병우(김우겸)다. 직장 동료인 이들은 한낮에 주차장에 세워둔 병우의 차 안에서 정사를 벌인다. 우진은 가영과 병우가 탄 차를 마주 본 자리에서 현장을 녹화하고, 사무엘은 그 자동차의 바로 옆에서 커튼이 벌어진 틈으로 스마트폰 렌즈를 들이밀어 영상을 촬영한다. 우진과 사무엘이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결과물은 각각 한 신(scene)의 마스터숏과 클로즈업숏이 된다. 시선을 끄는 것은 이 둘의 합작이 드러날 때다. 병우에게 전달된 아이패드에는 하나의 영상파일이 담겨 있다. 이 영상은 자세히 보면 기이하지만 결국 병우와 시청자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영상 전체는 우진이 촬영한 마스터숏으로 구성된다. 이 영상에서 이상하게 여겨지는 한 요소는 플레이되는 영상에서 들려오는 사운드다. 차 안에서 가영과 병우가 은밀하게 나눈 대화가 마스터숏의 화면과 함께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진은 차량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도록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촬영했다. 게다가 우진 역시 자신의 자동차 안에 숨어서 가영과 병우를 지켜보았기 때문에 우진의 카메라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녹음될 리 만무하다. 그러니 파일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근접한 거리에서 촬영한 사무엘의 영상에서 넘어온 사운드라 할 수 있다. 다른 요소는 프레이밍의 변화다. 가영과 병우의 대화가 멈춘 뒤, 차에서 함께 내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동일한 마스터숏에서 프레임을 조금 더 타이트하게 재조정한 영상에 그친다. 사무엘이 촬영한 클로즈업숏은 이 영상에 사용되지 못하고 버려진다.
현실에서 이 영상을 보게 된다면 조작된 영상이라 말할 확률이 높다. 이 영상의 진위를 누구도 의심하려 들지 않는 이유는 이미 드라마 안에서 한 차례 목격한 바 있는 서사의 개연성 덕이다. 우진과 사무엘, 그리고 그들을 보는 시청자는 그 영상파일 속의 장소에 누가 등장하고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이미 알고 있다. 우진과 사무엘의 대사처럼 ‘필요한 장면은 다 따’고 복수의 카메라에서 영상과 사운드를 추출해 하나의 프레임 안에 정리하는 작업은 개연성을 갖춘 드라마 안에서 조작이 아닌 편집이라 불린다. 여러 대의 기기로 촬영하여 분리된 영상과 사운드가 하나로 합쳐진 이 영상은 다시 5화의 어떤 장면과도 대비를 이룬다.
이웃에 사는 민수(옥자연)와 사무엘의 관계를 의심한 우진은 집 앞 현관에 CCTV를 설치하고 스마트폰으로 그 영상을 실시간 확인한다. 우진이 보는 CCTV 영상은 어쩐지 프레임 수가 모자란 옛 필름처럼 동작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 게다가 이 컬러 화면은 사운드가 제거된 무성 영상이다. CCTV 영상 속에서 소리 없이 집을 지나쳐 민수의 집 앞에 선 사무엘을 확인한 우진은 역시 화면 속에서 들을 수 없는 그의 목소리를 현장에서 직접 엿듣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무엘을 가까이 보기 위해 우진이 선택한 방법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그를 줌인하는 것이다. 브라운관으로 우진이 녹화 중인 스마트폰 화면이 직접 드러나는 이 순간에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다큐멘터리 촬영 장면이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지금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담은 영상은 다큐멘터리 장르 그 자체다. 남편의 연애를 확인하고 무너지는 마음의 우진이 한밤중 아파트 복도 끝에 서서 들고 있는 스마트폰, 그 화면과 렌즈 너머로 벌어지고 있는 사무엘과 민수의 사건, 다시 그것을 바라보는 우진이 드라마의 프레임 안에서 휘몰아친다.
필름에 관한 짧은 사랑
마지막 에피소드인 6화에서 드라마는 우진과 사무엘의 과거로 돌아간다. 이 시리즈 드라마에서 쓰인 모든 플래시백에 필름 질감 효과를 채워넣어 과거 회상임을 강조했던 연출과는 달리 이번에는 2년 전의 두 사람을 지켜보는 어떤 이가 끼어든다. 그는 바로 우진 자신이다. 이제껏 사무엘과 우진이 함께 뒤쫓아 지켜보던 대상의 자리에 마침내 과거의 그들이 세워진다. 플래시백을 재생하는 또 다른 카메라의 현현처럼 보이는 우진은 기나긴 회상의 시퀀스에 앞서 그것을 바라보는 얼굴에 어떤 표정을 띤다. 전개에 앞서 시청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표면을 먼저 마주 본다. <LTNS>는 영화에서 잠시 외출한 두 연출자가 ‘본다’는 동사를 메타 필름적 연상과 장면에 기대어 사유하는 드라마다. 무언가를 보는 일에는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 물리적 접촉이 없을지라도 발생하는 마음이 있다. 시리즈 드라마 <LTNS>와 아무런 접점이 없을 것처럼 여겨지는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나란히 두고 보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그다를 지켜보는 토멕의 사랑이 비틀린 욕망이 아니었음을 마그다는 토멕의 자리에 앉았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영상매체를 생각할 때 적어도 시선의 대상의 자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LTNS>는 하나의 심장으로 두 사람을 가슴에 품는 일의 가치판단보다 영화와 다양한 형태의 영상매체를 향한 사랑에 관하여 묻는다. 디제시스와 보는 이의 마음이 서로 진자운동하고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