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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사회. 정제된 표현으로 감쌌지만 결국 ‘늙었다’는 속삭임이다. 지난 몇년간 우리는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내는 데 몰두했다. 늙음은 자주 수술대에 오르듯 공론의 장에 올라 이리저리 들춰지고 해부된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노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 적 있었나? 적어도 나는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활자와 숫자를 넘어, 뜨거운 숨을 내쉬는 이들에 대한 응시가 필요한 때. 이 시기에 노년의 마지막을 다룬 두편의 영화, <소풍>과 <플랜 75>가 우리를 찾아온 것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소재는 비슷하지만, 두 작품은 서로 닮은 점이 없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은밀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누워 있는 노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꿀 같은 잠이나 편안한 휴식은 아니다. 그들은 몸이 망가져서, 혹은 일어나지 않기로 결심해서 누웠다. 이 상태는 죽음을 향해 가는 길목에 있다. 그래서 누운 노인의 형상은 죽음에 대한 인
[비평] 눕고 일어나는 생의 행위, <플랜 75>와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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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웹소설이 원작인 드라마가 늘어날수록 ‘드라마 덕후’는 바빠진다. 예전에는 드라마만 보면 되었지만, 이제는 ‘쿠키’를 굽고, 코인을 구매해 원작을 정주행한 후 드라마를 영접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드라마를 먼저 보고 원작을 순례할 때도 있다). 드라마와 원작을 함께 보는 건 ‘제3의 눈’을 가지게 된 것과 같다고나 할까? 하나의 작품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어서 유익할 때가 많다. 물론 ‘선악과’를 먹어버린 것처럼 ‘차라리 원작을 안 봤더라면 재미있게 봤을 텐데’라는 후회가 몰려올 때도 있다.
웹툰의 질문, 드라마의 질문
시청자뿐 아니라 창작자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의 눈’으로 원작과 비교 분석하는 깐깐한 원작 팬들을 설득시켜야 함과 동시에 드라마 팬들도 만족시켜야 하기에 마치 저글링하듯 드라마를 제작하지 않을까? 원작이 소위 ‘레전드’ 반열에 오른 유명한 작품일수록 그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넷플릭스 시리즈 <살인자ㅇ난
[비평] 복잡하고 난감한 질문은 어디로, <살인자ㅇ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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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센과 서사가 명백히 지시적인 영화가 지닌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클럽 제로>에 대해 할 말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말들은 이 영화가 특별한 감응을 불러일으키기에 파생되기보다는 영화가 요청하고 있는 사회적 시각 때문이다. 예시카 하우스너는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약점을 지적하는 데 관심이 있다”라고 밝히며, “<클럽 제로>는 영양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곧 너무 지나쳐서 학생들의 생각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바뀌며 급진화와 조작”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실로 영화는 국적이 불분명한 엘리트 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양 교사 노백(미아 바시코프스카)이 새로운 식사법을 가르치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의 합리적인 생각을 점차 급진적으로 바꾸어가는 데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엄밀하게 다루며 그에 따른 결과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 결과란 아이들이 금식을 하는 ‘클럽 제로’의 회원이 되어 노백이 이끄는 그림 속 저편의 낙원을 향해 가고
[비평] 충격의 두께, <클럽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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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해부>를 비평하는 방법은 간단해 보인다. 영화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사뮈엘의 돌연사를 두고 아내인 산드라의 연루 여부를 파헤치는 법정 공방을 다룬다. 그런데 종막에 이르기까지 진상을 밝히지 않고 여러 인물의 변론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니 진실이란 모름지기 모호한 것이며, 이 영화는 인간의 주관성이 얼마나 연약한지 보여주는 영화라고 요약하면 깔끔한 정리가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이 작품의 전부인가.
김철홍 평론가는 <씨네21> 20자평(1442호 참조)에서 인간 주관의 불완전성을 까발리는 기획이 이제 진부하게 느껴진다고 썼다. 그러게 말이다. 현실의 복수성을 지목하며 주관적 인식의 한계를 지목하는 전략은 이제 꽤 익숙한 화법이 됐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그 익숙함을 근거로 <추락의 해부>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추락의 해부>에는 쥐스틴 트리에가 법정 공방을 통해 최종적 진실에 도달하거나, 반대로 그 도달에 실패
[비평] <추락의 해부>를 감싸고 있는 피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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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환기 감독의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은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진부하다는 걸 일깨운다. 김대중을 존경하든, 김대중을 증오하든 오랫동안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입장은 선입견으로 단단해져 불변의 것이 되었다. 어느 편이건 초기에 형성된 관점은 새롭게 다듬어지지 않고 굳어졌다. 존경도, 증오도 다 진부하다. <길위에 김대중>은 다큐멘터리의 근본을 지킴으로써 우리를 진부함에서 구해낸다. 그에 관한 팩트에서, 팩트의 구성에서 차곡차곡 그의 일대기를 역사에 포개놓는다. 팩트의 구성 다음엔 주석과 해석이 남는다. 그 단계에서 굳은 관점을 해체하고 새롭게 보기 위해 우리는 다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길위에 김대중>은 그 나침반이다.
민주주의자로서의 일관된 자기 정체성
김대중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연대기순으로 전개하는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를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 기초적인 전기적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그에 관
[비평] 부재했지만 존재할 가치를 위해, <길위에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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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시>는 디즈니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100’이라는 숫자는 월트 디즈니의 탄생 100주년은 아니다(그는 1901년에 태어났다). 디즈니의 첫 애니메이션 커리어 100주년도 아니다(1919년에 처음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다). 그가 세운 첫 스튜디오도 아니다(‘래프 오 그램’(Laugh-O-Gram)이라는 스튜디오를 1921년에 만들었다). 미키마우스가 탄생한 100주년도 아니다(미키마우스는 1928년에 세상에 나왔다). 그렇다고 첫 장편애니메이션의 100주년도 아니다(<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1937년에 개봉했다). 그러니까 ‘디즈니’라는 말로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가 여럿 있는데, 인간 월트 디즈니와 그의 분신인 미키마우스,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100주년의 당사자가 아니다. 100주년은 ‘월트디즈니 컴퍼니’ 설립 100주년에 해당한다(처음부터 그 이름은 아니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는 ‘디즈니 브러더스 스튜디오’였고, 19
[비평] 디즈니가 디즈니했습니다만?, <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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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의 SF영화 <외계+인> 2부작에서 내가 가장 싫었던 게 뭐였는지 말해볼까. 바로 외계인의 촉수다. 보존법칙을 위반하며 끊임없이 생성되어 늘어나고,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기에서부터 USB 연결성까지 온갖 기능을 수행하고, 주인공이 한번 휘두른 칼에 잘려나가는 바로 그것.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자기 몸무게의 몇배나 되는 신체기관이 갑자기 생겨나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갈 때 배우가 그 조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는지 묻고 싶다.
요샌 다들 최소한의 물리법칙을 지키는 데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최근 마블 영화를 보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차라락 헬멧이 나타나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물리법칙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없이 그럴싸한 그림에만 집착한다면 결국 액션은 붕괴된다. 최근 마블 영화 <더 마블스>는 CG가 들어간 액션에 반영된 물리법칙이 너무 랜덤이라 이 우주에서 중력이 유지되는 것 자
[비평] <외계+인> 시리즈가 시도한 ‘한국형 SF’의 한계, <외계+인>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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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 하면 두 가지를 자주 말한다. 하나는 한국형 케이퍼 무비의 대가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 다수를 포함해 예사 영화보다 더 많은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등장인물의 앙상블이다. 그러나 <외계+인> 연작을 보면서 그의 작품이 품은 장소에는 관심이 적었단 생각이 든다. 더 정확히는 다양하게 꺼내고 빈번하게 바꾸는 장소를 바라보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이건 단순히 하이스트 영화라면 여러 인물 군상을 드러내고 강탈 과정을 풀어내느라 필연적으로 많은 장소를 제시할 수밖에 없어서는 아니다. 그의 영화는 직관적으로 땅으로 인식되는 곳에 국한하지 않고 예기치 못한 대상도 장소로 삼는다. 또 그가 잘 구현하는 활극은 장소를 관장하는 주체인 인물이 장소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웅을 겨루는 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달리 보면 그의 영화만큼 장소 대결이 이뤄지는 각축장도 없다. 대결 양상은 다름 아닌 점유와 점거, 퇴각과 이탈이다.
<외계+인> 1부 시작에서 그간
[비평] 장소 바꾸기에 주목하기, <외계+인>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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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이 영화는 유럽 사회의 어느 단면을 서늘한 시선으로 지켜보거나 도난 사건을 발단에 둔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다다를 법한 결말로 향할 것이라 믿게 만든다. 1.37:1의 화면비와 핸드헬드 카메라가 빚어낸 <티처스 라운지>의 화법은 이따금 다이렉트 시네마를 모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일게 한다. 그렇지만 두말할 것 없이 이 영화는 일정 부분 장르 법칙을 따르고 있다. 관계의 정치학과 그 반응의 화학작용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은 한편의 심리 드라마다. 이런 점을 제외한다면 영화는 대체로 자연 발생한 듯한 사건들이 연쇄되며 파문에 파문을 일으키는 듯한 양상을 띠며 카메라는 그런 현상의 관찰자처럼 행동한다. 공들여 살펴보지 않더라도 드러나는 건 독일 학교와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이민자 차별이라는 유럽 정치 사회의 민낯이다. 그러나 <티처스 라운지>는 사안의 핵심에서 비켜서 세워진 세계다. 당연한 세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오랜 시간 우리
[비평] 진실의 윤리학, ‘티처스 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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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 실린 기왕의 <서울의 봄> 평론들을 읽었는데 다들 대체로 박한 평가를 담았다. 천만 관객을 넘기며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이 영화에 대해 나는 좀 후한 평가를 내리고 싶다. 장병원, 안시환, 김예솔비 등 <서울의 봄> 개봉 초기에 이 영화를 논한 평자들은 공통적으로 12·12 반란 세력의 봉기를 막지 못한 기성 권력의 실패를 남성성의 신화로 위무한다고 비판했는데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공허한 권력의 실체
이 영화 후반부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들로 시작하고 싶다. 반란 성공이 확실해지고 수괴 전두광 장군(황정민)은 일행과 함께 본부로 돌아가려다 혼자만 차에서 내려 걸어간다. 그는 승리를 혼자만의 시간으로 만끽하고 싶다(전두광 혼자 돌아가는 장면을 찍어둔 것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환희와 고독이 동시에 휘몰아치는 그의 내면의 기운에 카메라가 동참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는 것은
[비평] 관료주의의 무능, 권력자의 광기, 그리고 인간의 존엄 - <서울의 봄>이 상기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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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 인물들이 옷을 갈아입는 행동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곤 했다. 카우리스마키는 평소에 존경한다고 밝힌 오즈 야스지로의 인물들이 옷을 입는 동작을 오마주하듯, 환복과 같은 일상의 동작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곤 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오즈와 카우리스마키의 옷 입는 행위에 부여된 속성은 다르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거의 반자동적으로 수행되는 나른한 일상의 운문적 리듬을 조탁했던 오즈는 남루한 생활감이 표백된 세련된 부르주아 가옥으로 향했다. 이와는 달리 카우리스마키의 노동자들에게 현재의 일상이란 관능적 매혹이 결여된 공장에서의 지루한 노동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늘의 버거운 일상을 벗어나 특별한 미래를 꿈꿀 때 옷을 갈아입는다. 그 미래는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이 기다리는 시간이다. <성냥공장 소녀>의 소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데이트를 준비하며 비싼 옷을 사입고, <희망의 건너편>에서 핀란드로 밀항한 난민 칼리드는 이민청에 망명
[비평] 쓰라린 과거를 뒤로한 채, 우리는 영화를 본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시제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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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하며 상반된 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충실히 거장의 경전 구절에 복무한다. 그래서 모호하다. 음악 팬들은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는 25살 레너드 번스타인(브래들리 쿠퍼)의 모습에 가슴이 뛰다가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브로드웨이 하이라이트와 베를린장벽 붕괴 기념 음악회 등 중요한 순간이 축소된 영화를 당황스럽게 바라본다. 번스타인이 1973년 케임브리지 일리 대성당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말러 교향곡 2장 롱테이크 신 정도를 제외하면 클래식 애호가들의 구미를 당기는 장면은 거의 없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연극 혹은 뮤지컬처럼 느껴진다. 극의 주인공은 번스타인 혼자가 아니다. 번스타인과 그의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캐리 멀리건)의 부부 관계가 핵심이다. 매튜 리바티크가 촬영하고 미셸 테소로가 편집한
[비평] 거장의 어깨 옆에서,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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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상업영화라도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취하는 영화는 과거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형식적 고민 없이 성립되기 어렵다. 대다수의 상업영화에서 그러한 형식은 주로 이야기의 시점을 표명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역사가 소시민의 일상을 통해 비치는지, 의사 결정권을 가진 자들의 권력 다툼으로 묘사되는지, 혹은 시민과 공권력의 부딪힘을 통해 촉발되는 이야기인지에 따라 영화가 수행하는 재현에 대한 충실도가 달라진다. 물론 여기 언급한 사례들이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영화가 구할 수 있는 시점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역사와 픽션을 접속시키는 데 필요한 형식적 절차에 대한 고민을 서사적 시점의 문제로 치환하는 경향이 있고, 영화의 초반부에 결정된 시점은 관객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이태신과 전두광
<서울의 봄>은 명백히 두 번째 사례에 해당한다. 즉, 정권을 둘러싼 군대 조직 내부의 권력 다툼과 파열을 충실히 중계하는 영화다. 영화
[비평] 사유하지 않는 시대의 징후 - <서울의 봄>이 요청하는 관습적 보기를 의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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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이랜드>는 하이더르(알리 준조)가 유령 역할을 맡아 흰 천을 뒤집어쓴 채 조카들과 유령놀이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소 범박하지만 흰 천에서 영화관의 스크린을 떠올려볼 수 있다면, (극)영화 또한 배우들에게 개별 역할을 부여하여 작동되는 일종의 역할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이랜드> 속 인물들은 그 어떤 극의 배우들보다도 더 엄격한 사회적, 가족적, 관습적 역할극에 복무해야 하는 처지다. 문제는 그 역할극이 지극히 경직된 채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화면비가 강조하듯 그들은 억압과 속박, 구속과 굴레로 유지되는 역할극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파키스탄 아만(살만 파르자다) 집안의 차남 하이더르는 어느 날 백업 댄서 일자리를 얻는다. 미용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열정과 자부심을 지닌 하이더르의 아내 뭄타즈(라스티 파루프)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취업 선언과 함께 강제로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때 뭄타즈의
[비평] 속박의 역할극이 막을 내리면, ‘조이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