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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작은 나사와 도르래, <애니멀 킹덤>
이병현 2025-02-12

대체 왜 가두려는 걸까? 영화를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애니멀 킹덤> 속 프랑스의 수인 대책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이들은 마치 수인이 너무 위험해서 가둘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굴고 있다. 그러나 영화상 묘사에 따르면 수인은 인간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 한 굳이 인간을 찾아와 공격하진 않을뿐더러 인간이던 시절 깊은 교감을 쌓은 인물과는 어느 정도 소통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화감은 영화에서 ‘수인화’를 전염병처럼 다루기보다는 일종의 비감염성 질환처럼 다루고 있기에 더 크게 느껴진다. 작품 내에서는 아마도 수인화가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이 규명된 상태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노르웨이에서는 수인과 인간의 공존을 추구하고 있다”라는 대사가 나올 리 없고, 수인과 마스크 하나 쓰지 않고 만날 리가 없다. 즉 수인화는 코로나19, 독감, 수두 같은 것이 아니라 파킨슨병, 암, 백내장과 비슷한 무언가다. 최소한 아직 ‘수인’이 되지 않은 사람 처지에서는 그렇다. 비전염성 질병 환자에 대한 집단적 혐오 반응이 나타나고, 심지어 그것이 격리시설을 지어야 한다는 식의 사회적 차별 수준으로 드러나는 일이 드물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영화 속 프랑스의 수인 정책은 유별난 점이 있다.

정책을 떠나 작품 내 일부 등장인물이 보이는 적개심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멀쩡하게 대화하고 함께 파티를 즐기던 지인이 수인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짐승’ 취급하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은 합리적인 반응이 아니다. <애니멀 킹덤>의 설정상 수인에 대한 혐오 유무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은 수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다. 수인화는 성별, 인종, 국적, 나이, 계급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찾아온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재수 없으면 폐암에 걸리듯이, 재수가 없으면 수인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수인이 된 어머니와 거리감을 느끼던 주인공이 수인이 되자마자 어머니를 이해하는 듯한 묘사나 주인공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공격한 수인을 향해 ‘짐승’이라고 욕하는 장면은 작중에 나타나는 수인 혐오가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물론 이것은 영화 그 자체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설정과 전개를 보여준단 뜻이 아니다. 원래 혐오에는 딱히 이유라는 게 없다. 생각해보면 굳이 콘크리트 건물을 크게 지어 모든 수인을 그곳에 가둔다는 발상은 국경에 방벽을 지어 불법 이민자를 막는다든가 하는 현실 속 망상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영화에 나타나는 혐오는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치는 혐오와 똑같은 수준으로 비합리적이다. 수인을 현실 속 소수자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면, 이 작품은 영화 속 수인 혐오의 비합리성을 통해 현실 속 혐오의 비합리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영화를 사회적 알레고리를 담은 SF로만 해석하기엔 어딘가 곤란한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애니멀 킹덤>은 늑대로 변해가는 주인공이 들판에서 울부짖으며 해방감을 만끽하거나 네발로 뛰고 물고기를 잡으며 즐거워하는 장면에서 수인화를 일종의 존중받아야 하는 정체성에 가깝게 묘사한다. 그런데 이 영화 속 수인은 현실 속 특정한 소수자와 일대일로 대응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작중 수인 해방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주인공 친구가 주장하듯이, 국립공원 일부를 수인들에게 내어준다면 그들이 사는 곳을 뭐라고 이해해야 할까? 원주민 보호구역? 게토? 자연보전지역? 생추어리? 한센병 환자 수용소? 소수민족 집단체류지역? 자비에 영재학교? 어느 쪽이든 100% 만족스러운 설명은 아니다.

결말 직전 주인공이 숲 한구석에 커뮤니티를 이루고 살아가는 수인들을 보는 장면이 이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해당 장소는 지브리풍 자연세계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신비롭고 아름답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 이곳은 얼마 가지 않아 군인의 습격을 받으며 해산된다. 즉 이곳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으로서의 ‘동물의 왕국’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숲속으로 달려나갈 때, 우리는 그가 바로 유토피아를 찾아 달려가고 있다고 믿게 된다. 결말이 주는 해방감은 그래야만 비로소 이해된다. 우리가 수인을 현실의 소수자와 대응시킨다면 이 결말은 다소 나이브한 동시에 문제적이다. 저편의 유토피아를 찾아 인간 사회에서 달아나는 것이 본질적으로 수용소에 갇히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건 공존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격리, 좋게 봐줘도 개인적 도피는 아닐까? 소수자 정치의 핵심은 개인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을 넘어서, 약자끼리 단결해 인간 사회 그 자체를 변혁하는 것에 있다. 인간 외 생명체나 돌연변이 인간이 투쟁하는 이야기를 다룬 <혹성탈출>이나 <엑스맨>과 비교할 때 <애니멀 킹덤>의 결정적 차이는 수인이 인간에 비해 무력한 존재라는 점이다. 이 영화 속 수인은 ‘신인류’가 아니기에, 신세계 건설이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영화는 이런 비판을 클리셰 비틀기와 장르 혼합을 통해 영리하게 비껴간다. <프랑켄슈타인> 이래 억울하게 박해받는 괴물을 다룬 작품에서 일반적으로 돌연변이 잡종의 탄생 경로는 ‘미친 과학자’로 형상화된 ‘인간의 오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대로 <애니멀 킹덤>의 수인화는 ‘불가사의한 자연적 힘’으로 묘사된다. 유구한 SF 소재인 ‘수인’이나 ‘돌연변이 잡종 괴물’을 중심 소재로 다루는 이 영화가 장르 내 선행 작품들과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지점이 이곳이기도 하다.

이 사소한 클리셰 비틀기는 영화를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식 보디 호러와 늑대인간물을 거쳐 점차 학원·청춘·성장 드라마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인간의 오만이 탄생시킨 괴물은 설령 아무리 불쌍하더라도 오만에 대한 본보기로서 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괴물이 자연의 소산이라면, 그는 더러운 문명을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다. 괴물이 사춘기 소년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성장이라는 보편적 테마를 통해 관객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 따라서 자유롭게 달리는 주인공을 담은 마지막 트래킹숏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을 있는 그대로 실체화시킨 것으로서 ‘고귀한 야만인’ 신화를 연상시키는 의문스러운 숏이 되는 대신, 소년의 성장을 담은 숏이 된다. 혹자는 이것이 거창한 테마를 훑고 지나간 SF영화치고는 너무나 소박한 결론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처음 볼 때 나는 자연으로 떠난 이의 질주가 아니라 아직 인간인 자의 얼굴이 더 궁금했다. 애초에 “대체 왜 혐오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애니멀 킹덤>은 답 없는 문제에 답변하는 대신 질문 그 자체가 자유롭게 탈주하도록 둔다.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는 곧 경찰 취조를 마치고 홀로 긴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가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현실의 혐오와 싸우는 것은 영화의 몫이 아닌 관객의 몫이라는 점만은 명확하다. 나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몽블랑보다 작은 나사와 도르래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 소품을 지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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