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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을 보며, 이상했다. 영화는 시종 벨라(에마 스톤)를 화려하게 비추지만, 진짜 보여주려는 건 따로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뭔가가 더 있다는 묘한 기분. 영화의 숨겨진 이면을 보기 위해, 한 여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영화의 초반, 벨라의 사랑스러운 순수는 돋보인다. 그런데 벨라의 순수함을 좀 유심히 뜯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순수는 물들지 않은 공백의 상태. 그러니까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벨라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즉각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녀에게 없는 것은 과거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있는 자신만의 역사가 벨라에겐 없다. 그러므로 지식과 교양도 없다. 세상을 모른다. 이것은 <가여운 것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으로 작동한다. 벨라는 좌충우돌하며 세상을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코미디와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표면에 드러난 벨라의 공백이다.
매력적인 몸을 가진 성녀, 벨라
하지만 그게 다인가?
[비평] 반복된 것이 본질에 가깝다, <가여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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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는 영화의 의도적 성취와 무관하게 동시대 영화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아날로그적 감각을 소환한다. 멀티버스를 통한 부활을 종용하고, 모든 것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려는 영원주의의 강박은 영화의 생애주기를 무한에 가까이 연장하면서 영화산업을 언제나 젊은 것으로 가장하려 할 뿐 아니라 화면에 출현하는 죽음마저도 불확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반대로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이라는 불교의 메타포에 기대고 있기는 하지만 관계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가능세계를 뒤에 두고 빠져나온다. 이러한 순응의 태도를 아날로그적 감각의 (재)출현이라 부를 수 있을까.비슷한 맥락에서 겹쳐보고 싶은 것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심도>다. <심도>의 마지막 장면에서, 함께 떠날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은 결국 엇갈린다. 한 사람은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다른 사람은 건너편 차선을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남자가 그의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비평] 아날로그적 영원을 헤아리기, <패스트 라이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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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는 관객의 굳은 선입견을 점잖게 훈계하는 대사를 초반부에 배치하고 시작하는 <파묘>는 바로 그 전제에 고통받는 척하면서 뻔뻔스럽게 그 전제를 배반하고 심지어 거기에 고상한 명분을 칠하면서 영화적 자살과도 같은 과도한 장식의 전시로 나아가는데, 오컬트에 특화된 재능의 소유자로 주목받던 장재현 감독은 이로써 오컬트와 괴수물을 난폭하게 결합했는데도 상찬받으며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영광의 월계수를 쓰게 되었다. 내게는 얼빠진 소리처럼 들리는 이 영화에 대한 온갖 고급한 비평적 담론과 SNS를 통해 넘쳐나는 진영 논리에 기반한 (좌파 반일영화라는 모 다큐멘터리 감독의 비난에 대한 대중의 응징이라는 투의) 찬가를 존중하면서도 이 영화에 대한 보다 담백한 접근이 필요한 건 아닐까라는 의문에서 이 글을 쓴다.
싸움의 비장한 명분
<파묘>는 변칙이라고 지적해도 무방한 과격한 서사의 뒤틀림
[비평] 악의 존재를 전면화한 쾌락의 후유증, <파묘>가 내세우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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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 말할 필요 없이 <파묘>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화두는, 오니의 출현을 기점으로 서사가 급격하게 굴절된다는 점이다. 영화를 비판하는 측은 이 비약을 용인하지 못하며, 호의적인 측은 이 비약을 납득시키는 감독의 과단성에 매혹된다. 나는 후자에 해당하지만, 비평이란 예술가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긍정하는 대신 작품의 구체적 효과가 그 의도를 정당하게 납득시키는가를 논하는 작업이므로 감독의 뚝심이 기특하다는 식의 말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파묘>의 도발적인 전략이 지니는 시의성을 논하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잠시 우회해 그 전략을 시의성 있게 만드는 동시대 픽션의 상황을 간략하게 점검해보자.
앙드레 바쟁은 새로운 매체와 예술이 부상하면, 그것이 기존의 예술과 상호 간섭하며 새로운 스타일을 창출한다고 말했다. 가령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냉엄한 문체가 카메라를 연상하는 비인간적인 객관주의를 체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미디
[비평] 있어선 안될 존재를 직시하는, 알려지지 못할 싸움에 대하여, <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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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은 노동자계급을 주로 다룬 그의 다른 작품들과 결을 달리한다. ‘영국인’으로서 자국의 식민 지배로 인한 아일랜드 내전을 다룰 때, 감독의 포지션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테리 조지 감독의 <호텔 르완다>(2004)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벨기에의 분할 지배의 결과로 후투족과 투치족은 1994년 100만여명이 사망하는 상호 학살극을 낳았다. <호텔 르완다>는 강대국을 상대로 피식민 주체의 협상 전략을 다룬다.
두 작품은 제국주의로부터 형식적인 독립을 이룬 국가들의 식민성(콜로니얼)과 그 유산(포스트 콜로니얼)에 관한 텍스트다.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해방 후 국가 건설 방식과 통치 시스템을 둘러싸고 혼란과 분열을 겪었고, 급기야 침략자에게 향했던 총을 ‘동족’에게 겨누었다. 한국전쟁은 그중 가장 큰 규모의 비극이었다. 8·15 해방과 함께 시작된 제노사이드인 4·3은 “일정(
[비평] 르상티망의 정치와 진영 논리, 영화 <건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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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에서 끔찍한 노인 혐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플랜 75> 속 세상은 평화롭다. 특정 세대를 향한 증오가 살인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발현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계속하며 각자의 미래를 계획 중이다. 영화의 첫 번째 주인공인 미치(바이쇼 지에코)는 건강검진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두 번째 주인공인 청년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는 친절한 태도를 유지한 채 노인들을 응대한다. 세 번째 주인공인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 역시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노동을 멈추지 않는다. <플랜 75>의 전반부는 이 이상한 지속 때문에 서늘하다. 분명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이에 관해 말하지 않아서. 말하자면 사람들 모두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눈을 뜬 기분이 드는 것이 <플랜 75>의 전반부의 인상이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가 오프닝에서 제공하는 또 하나의 끔찍함은, 이 나라가
[비평] 영화가 고약한 냄새를 풍길 때, <플랜 75>와 <오키쿠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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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를 향한 사랑의 시도
관음과 절시는 영화에서 대상을 훔쳐보는 행위, 더 나아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을 말할 때 소환되곤 한다. 6부작 시리즈 드라마 <LTNS>를 말하려는데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함께 떠올랐다. 영화에서 청년 토멕은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여인 마그다를 매일 밤 망원경으로 지켜본다. <LTNS>의 우진(이솜)과 사무엘(안재홍) 또한 불륜 남녀를 미행하고 잠복하며 대상을 몰래 지켜본다. 이들의 훔쳐보기에 프로이트적 결론을 동원하기보다 도시(盜視) 행위 그 자체를 돌아보면 보이는 것이 있다. 토멕의 훔쳐보기의 끝에는 마그다를 향한 순애가 있고, 우진과 사무엘의 훔쳐보기에는 영화를 기억하고 떠올리게 만드는 짙은 향수가 배어 있다. 증거 수집을 위해 우진과 사무엘이 끌어오는 방법 중에 어떤 단서는 분명하게, 또 어떤 단서는 희미하게 이것이 바로 영화에서 태어나 영화를 회고하는 장면임을 지시한다.
[비평] 시네마를 향한 사랑의 시도, 'LT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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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사회. 정제된 표현으로 감쌌지만 결국 ‘늙었다’는 속삭임이다. 지난 몇년간 우리는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내는 데 몰두했다. 늙음은 자주 수술대에 오르듯 공론의 장에 올라 이리저리 들춰지고 해부된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노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 적 있었나? 적어도 나는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활자와 숫자를 넘어, 뜨거운 숨을 내쉬는 이들에 대한 응시가 필요한 때. 이 시기에 노년의 마지막을 다룬 두편의 영화, <소풍>과 <플랜 75>가 우리를 찾아온 것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소재는 비슷하지만, 두 작품은 서로 닮은 점이 없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은밀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누워 있는 노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꿀 같은 잠이나 편안한 휴식은 아니다. 그들은 몸이 망가져서, 혹은 일어나지 않기로 결심해서 누웠다. 이 상태는 죽음을 향해 가는 길목에 있다. 그래서 누운 노인의 형상은 죽음에 대한 인
[비평] 눕고 일어나는 생의 행위, <플랜 75>와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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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웹소설이 원작인 드라마가 늘어날수록 ‘드라마 덕후’는 바빠진다. 예전에는 드라마만 보면 되었지만, 이제는 ‘쿠키’를 굽고, 코인을 구매해 원작을 정주행한 후 드라마를 영접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드라마를 먼저 보고 원작을 순례할 때도 있다). 드라마와 원작을 함께 보는 건 ‘제3의 눈’을 가지게 된 것과 같다고나 할까? 하나의 작품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어서 유익할 때가 많다. 물론 ‘선악과’를 먹어버린 것처럼 ‘차라리 원작을 안 봤더라면 재미있게 봤을 텐데’라는 후회가 몰려올 때도 있다.
웹툰의 질문, 드라마의 질문
시청자뿐 아니라 창작자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의 눈’으로 원작과 비교 분석하는 깐깐한 원작 팬들을 설득시켜야 함과 동시에 드라마 팬들도 만족시켜야 하기에 마치 저글링하듯 드라마를 제작하지 않을까? 원작이 소위 ‘레전드’ 반열에 오른 유명한 작품일수록 그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넷플릭스 시리즈 <살인자ㅇ난
[비평] 복잡하고 난감한 질문은 어디로, <살인자ㅇ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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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센과 서사가 명백히 지시적인 영화가 지닌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클럽 제로>에 대해 할 말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말들은 이 영화가 특별한 감응을 불러일으키기에 파생되기보다는 영화가 요청하고 있는 사회적 시각 때문이다. 예시카 하우스너는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약점을 지적하는 데 관심이 있다”라고 밝히며, “<클럽 제로>는 영양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곧 너무 지나쳐서 학생들의 생각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바뀌며 급진화와 조작”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실로 영화는 국적이 불분명한 엘리트 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양 교사 노백(미아 바시코프스카)이 새로운 식사법을 가르치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의 합리적인 생각을 점차 급진적으로 바꾸어가는 데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엄밀하게 다루며 그에 따른 결과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 결과란 아이들이 금식을 하는 ‘클럽 제로’의 회원이 되어 노백이 이끄는 그림 속 저편의 낙원을 향해 가고
[비평] 충격의 두께, <클럽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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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해부>를 비평하는 방법은 간단해 보인다. 영화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사뮈엘의 돌연사를 두고 아내인 산드라의 연루 여부를 파헤치는 법정 공방을 다룬다. 그런데 종막에 이르기까지 진상을 밝히지 않고 여러 인물의 변론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니 진실이란 모름지기 모호한 것이며, 이 영화는 인간의 주관성이 얼마나 연약한지 보여주는 영화라고 요약하면 깔끔한 정리가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이 작품의 전부인가.
김철홍 평론가는 <씨네21> 20자평(1442호 참조)에서 인간 주관의 불완전성을 까발리는 기획이 이제 진부하게 느껴진다고 썼다. 그러게 말이다. 현실의 복수성을 지목하며 주관적 인식의 한계를 지목하는 전략은 이제 꽤 익숙한 화법이 됐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그 익숙함을 근거로 <추락의 해부>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추락의 해부>에는 쥐스틴 트리에가 법정 공방을 통해 최종적 진실에 도달하거나, 반대로 그 도달에 실패
[비평] <추락의 해부>를 감싸고 있는 피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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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환기 감독의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은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진부하다는 걸 일깨운다. 김대중을 존경하든, 김대중을 증오하든 오랫동안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입장은 선입견으로 단단해져 불변의 것이 되었다. 어느 편이건 초기에 형성된 관점은 새롭게 다듬어지지 않고 굳어졌다. 존경도, 증오도 다 진부하다. <길위에 김대중>은 다큐멘터리의 근본을 지킴으로써 우리를 진부함에서 구해낸다. 그에 관한 팩트에서, 팩트의 구성에서 차곡차곡 그의 일대기를 역사에 포개놓는다. 팩트의 구성 다음엔 주석과 해석이 남는다. 그 단계에서 굳은 관점을 해체하고 새롭게 보기 위해 우리는 다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길위에 김대중>은 그 나침반이다.
민주주의자로서의 일관된 자기 정체성
김대중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연대기순으로 전개하는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를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 기초적인 전기적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그에 관
[비평] 부재했지만 존재할 가치를 위해, <길위에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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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시>는 디즈니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100’이라는 숫자는 월트 디즈니의 탄생 100주년은 아니다(그는 1901년에 태어났다). 디즈니의 첫 애니메이션 커리어 100주년도 아니다(1919년에 처음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다). 그가 세운 첫 스튜디오도 아니다(‘래프 오 그램’(Laugh-O-Gram)이라는 스튜디오를 1921년에 만들었다). 미키마우스가 탄생한 100주년도 아니다(미키마우스는 1928년에 세상에 나왔다). 그렇다고 첫 장편애니메이션의 100주년도 아니다(<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1937년에 개봉했다). 그러니까 ‘디즈니’라는 말로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가 여럿 있는데, 인간 월트 디즈니와 그의 분신인 미키마우스,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100주년의 당사자가 아니다. 100주년은 ‘월트디즈니 컴퍼니’ 설립 100주년에 해당한다(처음부터 그 이름은 아니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는 ‘디즈니 브러더스 스튜디오’였고, 19
[비평] 디즈니가 디즈니했습니다만?, <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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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의 SF영화 <외계+인> 2부작에서 내가 가장 싫었던 게 뭐였는지 말해볼까. 바로 외계인의 촉수다. 보존법칙을 위반하며 끊임없이 생성되어 늘어나고,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기에서부터 USB 연결성까지 온갖 기능을 수행하고, 주인공이 한번 휘두른 칼에 잘려나가는 바로 그것.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자기 몸무게의 몇배나 되는 신체기관이 갑자기 생겨나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갈 때 배우가 그 조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는지 묻고 싶다.
요샌 다들 최소한의 물리법칙을 지키는 데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최근 마블 영화를 보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차라락 헬멧이 나타나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물리법칙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없이 그럴싸한 그림에만 집착한다면 결국 액션은 붕괴된다. 최근 마블 영화 <더 마블스>는 CG가 들어간 액션에 반영된 물리법칙이 너무 랜덤이라 이 우주에서 중력이 유지되는 것 자
[비평] <외계+인> 시리즈가 시도한 ‘한국형 SF’의 한계, <외계+인>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