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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훈(이정재)이 깨어났다. <오징어 게임> 시즌1 게임의 최종 승자로 456억원의 상금을 수령한 기훈은 죽음의 게임을 아예 끝낼 목적으로 게임에 다시 참가한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게임 룰이 생겼다. 이 룰은 5~6개의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각 게임의 생존자들끼리 다음 게임의 진행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찬반 투표를 도입한다는 내용이다. 겉으로 보기엔 민주적 투표 절차에 따른 공정한 룰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번외 게임이다. 게임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참가자들은 반대표를 던질 사람들을 협박하고 심지어 목숨을 끊어놓아 투표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절하게 살인도구에 쓰일 포크도 나눠준다.
딱 한명의 선택을 두고 투표의 향방이 팽팽하게 갈리는 장면을 보면서 누군가는 정치 이념의 왜곡된 갈등이 선거철마다 펼쳐지는 51 대 49 선거 국면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상의 게임 속행 여부를 두고 대립하는 갈등 양상과 현실의 복잡미묘한 갈등을 단순
[비평] 성기훈은 오징어 게임을 끝낼 수 있을까?, <오징어 게임>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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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가두려는 걸까? 영화를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애니멀 킹덤> 속 프랑스의 수인 대책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이들은 마치 수인이 너무 위험해서 가둘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굴고 있다. 그러나 영화상 묘사에 따르면 수인은 인간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 한 굳이 인간을 찾아와 공격하진 않을뿐더러 인간이던 시절 깊은 교감을 쌓은 인물과는 어느 정도 소통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화감은 영화에서 ‘수인화’를 전염병처럼 다루기보다는 일종의 비감염성 질환처럼 다루고 있기에 더 크게 느껴진다. 작품 내에서는 아마도 수인화가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이 규명된 상태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노르웨이에서는 수인과 인간의 공존을 추구하고 있다”라는 대사가 나올 리 없고, 수인과 마스크 하나 쓰지 않고 만날 리가 없다. 즉 수인화는 코로나19, 독감, 수두 같은 것이 아니라 파킨슨병, 암, 백내장과 비슷한 무언가다. 최소한 아직 ‘수인’이 되지 않은 사람 처지에서는 그렇다. 비전염
[비평] 작은 나사와 도르래, <애니멀 킹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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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매캐한 매연과 천둥 같은 엔진 소리, 세상 쿨한 카레이서들의 목숨을 건 경주와 사업가들의 냉철한 비즈니스 담판…, 같은 것들보다 진정 즐거운 <페라리>의 순간은 바나나 한개에 있다. 페라리사의 명운을 건 1천 마일 레이스 ‘밀레 밀리아’ 도중 페라리사의 카레이서 피터(잭 오코넬)는 주유 지점에 내려 잠깐 쉬면서 바나나 한개를 까고 급히 한입, 두입 해치운다. 그리고 반쯤 남은 바나나를 엔초 페라리 회장(애덤 드라이버)에게 마치 버리듯 툭 건네준다. 평소 꽤 권위적인 엔초이지만 경주 중인 선수에겐 별다른 말도 못한다. 대신 엔초는 이 바나나를 자연스레 회사 직원에게, 직원은 정비공에게, 정비공은 카레이싱 구경 나온 동네 아이들에게 떠넘긴다. 130분짜리 <페라리>에 겨우 10초쯤 차지하는 이 웃긴 바나나 숏, 일련의 자그마한 몸짓들에 어떤 의미를 덧댈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거창한 의미나 상징을 이 바나나 자체엔 부
[비평] 장난질과 낙관,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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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그림 찾기. <리얼 페인>의 시작과 끝은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룬다. 카메라는 동일한 동선을 따라 뉴욕 공항 로비를 훑고 동일한 좌석에 앉아 있는 벤지(키런 컬킨)의 얼굴로 다가간다. 차이점은 셔츠 착의 유무, 가방의 위치, 쇼팽의 곡, 영화 타이틀의 위치 등이 있다. 여기에 추가할 것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다. 공항은 목적지를 둔 사람들의 설렘, 긴장감 그리고 피곤함이 교차하는 장소다. 사람들 자체가 계속해서 바뀌는 풍경으로 존재하는 이곳에서 벤지 혼자 멈춰 있다. 통유리창으로 내리는 햇볕 때문에 달라진 그의 낯빛에서 시간대가 달라졌음을 알 뿐이다. 원테이크로 촬영된 이 두개의 장면 중 무엇을 기준 삼아 ‘다름’을 판별할 수 있을까? 두 얼굴 사이에 놓인 것은 사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함께 떠난 폴란드 여행이다.
이토록 특이한 우울감
<리얼 페인>은 한국 시장을 겨냥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한국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MBTI적인 캐릭터로 두 인물
[비평] 타인의 고통, <리얼 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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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거사를 다룬 대작 <하얼빈>이 흥행 중이다. 뛰어난 영상미와 압도적인 화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명암 대비로 17세기 명화를 보는 듯한 장면들, 광활한 자연을 담은 아이맥스 화면, 부감숏 등 촬영이 훌륭하다. 그러나 단선적인 캐릭터와 연극적인 대사는 지적할 만하다. 가장 큰 문제는 서사이다. <하얼빈>은 안중근의 고결함에 집중하다 안중근이란 인물에게서 놓치지 말아야 할 주제인 ‘만국공법’과 ‘동양평화’를 고찰하지 못하고, 영상미에 도취되어버린 패착을 저질렀다.
하얼빈 총격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를 놓치다
<하얼빈>의 화면은 아름답지만, 배경용 걸개그림일 뿐 서사에 밀착하는 맛이 없다. 인물은 평면적이고 대사는 뮤지컬적이다. ‘거룩한 아이맥스!’랄까. 지나친 험구라고?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이런 식이다. 안중근(현빈)이 얼어붙은 강을 헤매다 동지들에게 돌아왔을 때, 첨예한 갈등이 오가는 장면이지만, 대사와 장면
[비평] 오늘날 안중근을 기린다는 것은, <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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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안은수)은 전과가 있다. 이 정보는 영화 초반부, 지각한 영진이 진현(윤혁진)에게 핀잔을 들은 뒤 밖으로 나가면 옆자리 이 과장의 빈정대는 대사(“전과 하는 애들은 다 이유가 있어”)로 전달된다. 이런 대사가 영화의 도입에 한번 기입되고 나면 관객은 그 내막을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움직임은 굼뜨고 말은 어눌하며 늘 무표정한 영진은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복지관장이 매일 캠코더를 들고 다니는 영진을 수상하게 여기며 ‘몰래카메라’를 연상하듯이, 자신을 변호하기는커녕 모든 종류의 오해와 왜곡에 스스로를 내놓는 이 미심쩍은 청년에게 혹시 험악한 폭력의 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는 내내 은밀하게 짐작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진현의 말마따나 “잡범”이었다. 텔레마케팅 일을 하던 친구의 작업대출에 연루되어 6개월간 징역을 살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행위는 공적인 언어로는 사기이고 불법이지만, 동시에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유감스러운 사태의 일면
[비평] 모눈을 벗어나는 얼음처럼, <부모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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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알레고리를 걷어내고 나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룸 넥스트 도어>는 곧 죽음을 맞이할 육신과 그 죽음 앞에 놓여 있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영화로 보인다. 여기에는 전장을 누비고 사랑을 나누며 펜을 쥐고 글을 쓰던 몸의 확실한 죽음이 있다. 마사(틸다 스윈턴)가 사후 세계의 유령처럼 보이는 순간이 몇초간 있다고 하더라도 <룸 넥스트 도어>에서의 죽음은 관념적 사유를 활보하던 한 존재와 그 세계의 끝이라기보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육신의 종언에 더 가깝게 그려진다.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필름영화에서 디지털영화로 전환되는 한 시절을 소환한다. 기억을 잃은 배우 훌리오(호세 코로나도)와 작품을 완성하는 데 실패한 영화감독 미겔(마놀로 솔로)이 저물어가는 필름영화 시대를 바라보며 이제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려거든 두눈을 감으라 요청한다.
디지털시네마 패키지 이전에 셀룰로이드 필름 릴은 오랜 세월 영화의 몸과도 같이 여겨졌으므로 <
[비평] 어느 육신의 죽음, <룸 넥스트 도어>와 <클로즈 유어 아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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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물었다.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요?”
달마 대사가 답했다. “알지 못합니다(不識).”(<벽암록> 제1칙)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14:9)
<알레고리>가 레오스 카락스를 ‘동굴의 비유’ 속 철인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내세워 짐짓 멋들어지게 예술가의 존재론을 설파하는 것과 달리 <잇츠 낫 미>는 상당히 정의 내리기 힘든 사적인 작품이다. 일단 이 영화의 제목부터가 엉뚱하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잇츠 낫 미>는 파리 퐁피두센터 요청에 따라 제작된 현대 미술작품으로, 본래 퐁피두센터가 ‘자화상’을 주제로 작품을 의뢰하며 던진 질문은 영화 초반에 나오다시피 “레오스 카락스, 어디 계신가요?”였다고 한다. 레오스 카락스는 이에 대해 “그건 내가 아니다”(It’s not me)라고 답하고 있는데, 보통 어디 있냐고 물으면 ‘여기 있다’고
[비평] 휘갈겨 쓴 작가 노트, 이병현 평론가의 <잇츠 낫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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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마음에 안정을 주는 짤”이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이미지를 자주 본다. 종류, 색상, 크기별로 잘 진열된 판매대나 오와 열을 맞춰 정돈된 서랍장 등이 그렇다. 또 같은 제목임에도 반어적으로 다른 이미지를 노출하기도 한다. 음료수 캔이 배출구 앞에서 막혀버린 자판기라거나 바닥에 빽빽하게 들어찬 타일 중 하나가 색깔이나 모양이 다르거나 해서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거스르는 이미지다. 엇나간 타일 조각을 볼 때 정말 그 타일만 제자리에 놓으면 마음이 정화될 것 같다. 그래도 <서브스턴스>에 등장하는 오디션 심사위원이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의 분신 격인 수(마거릿 퀄리)를 두고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건 지독하다.
<서브스턴스>를 미추 관념에 근거한 에이지즘과 루키즘 비판으로 독해하는 일도 옳다. 다만 미추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규격, 정연, 정돈, 통제, 지침 등의 개념이 주로 작동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서브
[비평] 규격과 파격, <서브스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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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채>에 대한 소개는 ‘집 한채를 얻기 위해 위장결혼에 나선 가난한 이웃을 건조하게 그린 영화’로 요약된다. <한 채>는 부동산 문제를 소재로 삼은 다큐멘터리 시선의 영화로 호평받으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2관왕에 올랐다.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 채>는 부동산 문제는 맥거핀으로 활용했을 뿐, 주제는 기독교적 가부장제 혼인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이다.
1. ‘부동산 영화’가 아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드림팰리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은 부동산 문제를 통해 계급적, 사회적 갈등을 파헤치는 ‘부동산 영화’로, 부동산 난제와 부동산을 둘러싼 욕망을 구체적으로 그린다. <한 채>는 신혼부부 특별공급을 노린 위장결혼을 소재로 사용했지만, ‘부동산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듯하지만, 청약 사기를 엉터리로 묘사하며 ‘엉터리니까 믿지 말라’며 일부러
[비평] 역사의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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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ck Resume: 이전 플레이 지점에서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8년 전, 모아나와 마우이가 작별할 때 “빠이~ 안녕~” 대신 “또 만나”라고 인사를 건넨 건 이들의 여정이 거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흘렸다. 기실 그대로 영영 작별하고 이야기를 끝내기에는 모아나와 마우이의 합이 꽤 근사했다. 낭만적인 사랑이 빠진 자리에는 끈끈한 전우애가 들어섰다. 속편은 전작의 인기에 기반하는 만큼 그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않다. 무엇을 유지했고, 무엇을 바꾸었고, 무엇을 발전시켰는지…. 대응하는 각도를 조금 바꾸면 새로운 감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아나2>를 통해 오히려 전작 <모아나>에서 놓쳤던 점을 조명할 수 있지 않을까?
<모아나>는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어필했다. 린마누엘 미란다의 존재감이 컸다(그래서 <모아나2>에서 그의 이름이 빠졌을 때 맥 빠져 하는 반응도 나왔다). 뮤지컬 넘버의 중요성을 부각하려는 의도였는지, “노
[비평] 레디 플레이어 모아나: 게임 시네마틱을 닮아가는 어드벤처 애니메이션, <모아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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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이후 21년 만에 영화 <위키드>(2024)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고전영화의 명작 반열에 오른 <오즈의 마법사>(1939)에 등장하는 바로 그 마녀들로, 도로시의 집이 깔아뭉개버린 서쪽 마녀 엘파바의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에 놓인다. 착한 마녀 글린다의 관점에서 ‘엘파바가 왜 나빠졌을까’에 대한 원인이 소개된다. 모든 아이러니는 그녀가 실은 그다지 사악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서사를 중심으로 영화는 뮤지컬의 모든 넘버를 차례로 배치해 들려준다. 초록으로 치장된 엘파바, 그에 반해 영화에서 글린다는 금발의 분홍 요정으로 소개된다. 서사 초반에는 누구도 이 두 인물이 가까워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하지만 둘은 이내 친구가 된다. 그리고 서로에게 숨겨진 놀라운 자질을 끌어내는 동반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이 간략하고 진부한 주제에 동의하며 관객들은 영화 <위키드>에 빠져든다. 이 영화의 원작인
[비평] 미움과 사랑은 어떻게 나열되는가, <위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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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러셀 크로)가 목숨을 바쳐 폭군 콤모두스의 시대를 종식시켰음에도 폭력이 또다시 로마를 지배한다. 24년 만에 돌아온 <글래디에이터Ⅱ>는 이 비정한 소식을 알리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로마인들은 막시무스의 희생으로 모두 감화된 게 아니었던가. 모든 게 리셋됐다면 <글래디에이터>는 무엇을 위한 설화인 걸까. 전작의 감동을 단박에 무너뜨리는 고대 로마로부터의 단신(短信). 믿을 수도 인정할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일들은 현실에서도 일어난다. 과거가 <글래디에이터>의 엔딩처럼 찬란했어도 그렇다. 지구 도처에서 밀려드는, 그 인과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뉴스를 우리는 영화의 자막처럼 속수무책으로 접한다. 이때 가장 비극은 사람들이 현실을 향한 관심을 포기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광스러운 그 순간 자체가 무가치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의 씨앗이 자라나는 거다. 과격한 차별/혐오 발언을
[비평] 자신의 최고 영화를 건 위험한 검투, <글래디에이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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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익의 두 번째 장편 <폭설>은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없는 무능의 소산이란 오해를 받기 십상인데 스토리가 드라마가 되는 관성이나 기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세개의 굵은 챕터와 에필로그로 나뉜 스토리는 사춘기 때 만난 두 소녀가 10년의 터울을 두고 다시 만나는 상황을 보여준다. 주연을 맡은 한소희와 한해인의 물리적 존재감이 주는 스크린의 박력에 의존하던 영화는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 그들의 존재를 풍경 안에 몰아넣고 그들의 육체적 시련이 심리주의 묘사를 대체하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나는 최근의 한국영화 가운데 배우의 클로즈업이 이토록 강력한 아우라를 자아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특히 이 영화로 데뷔해서 지금은 유명해진 한소희의 얼굴이 주는 힘은 어떤 이야기의 세공력보다 인상적이다. 5년 전 촬영을 시작했던 영화가 난산을 겪고 마침내 완성되었을 때 스크린 안의 캐릭터와 스크린 바깥의 배우가 기묘한 동질감을 띠는 것도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윤수익의 연출은 거두절미하고
[비평] 한소희의 클로즈업이 준 감흥, 단출한 이야기, 거대한 이미지 <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