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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빛’이 있는 그곳을 향하여,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흐르는 물처럼 시작된다. 수평 트래킹으로 담은 인도 뭄바이의 밤거리는 눈앞에서 쉴 새 없이 지나간다. 그러다 카메라는 때때로 속도를 늦춰 거리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바라본다. 이런 진행은 이 영화에 대해 붙는 수식어들, ‘몽환적’이라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담았다는 말을 불러오는 이유 중 하나다. 물 같이 흐르고 또 고이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 무렵, 성급한 판단을 멈춰 세우는 하나의 숏이 등장한다. 그것은 달리는 버스에 타고 있는 한 여인에 관한 숏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동공이다. 한곳을 부드럽게, 그러나 또렷하게 응시하며 형형하는 동공. 그것은 흔들리는 배를 붙드는 단단한 바위처럼 영화를 이곳에 정박시킨다. 그 눈이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물결처럼 우아하게 넘실대는, 그래서 몸을 내맡겼다가 영영 빠져버릴 것만 같은 영화의 흐름 안에서, 그 눈만은 우리를 불러 세워 단단하게 붙든다는 점만은 일러두고 싶다.

접속의 감각과 “함께 가자”는 고백

빛나는 눈은 다시 등장한다. 병원 침상에 힘없이 앉아 있던 노파는 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눈을 번쩍인다. 자꾸만 악몽을 꾼다는 노파의 말에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겠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죽은 것으로 추측되는) “남편이 찾아온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녀의 말은 질환으로 취급되는 악몽을 살아 있는 현실로 돌려놓는다. 이토록 마술 같은 전환은 그녀의 번쩍이는 안광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에서 눈은 때때로 현실 너머를 본다. 그 눈이 목격하는 상은 비록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의 중요한 조각들을 모아 새롭게 조립하며 우리의 세계를 재구성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간호사들이 깔깔대며 등장해 “영화나 빨리 고르자”며 떠든다. 이런 연결은 그녀들이 노파의 말을 황당무계한 영화쯤으로 여기고 비웃는 것처럼 느끼지게 한다. 동시에 이것은 파얄 카파디아 감독의 영화에 대한 뭇사람들의 냉소를 은유한다. 그러나 카파디아에게 영화가 사실 아닌 진실을 포착하는 도구이듯,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속의 눈도 얄팍한 현실 너머 숨겨진 이면을 본다.

간호사로 일하는 프라바(카니 쿠스루티)는 퇴근길에 같은 병원 의사를 만난다. 함께 비를 맞으며 지속되는 걸음. 간간이 이어지는 대화. 남자는 한권의 시집을 건넨다. 그 시집은 이토록 섬세하게 진동하는 밤의 시간 끝에 프라바에게 도착한다. 한편 그녀가 집에 오자 아마도 남편이 보낸 것 같은 밥솥이 있다. 보낸 이도, 이곳에 온 경로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밥솥은, 긴 시간을 견뎌 그녀에게 전해진 시집과 대비된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들지 못한 채 깜빡거리는 프라바의 눈. 그녀의 시선은 밥솥을 무심히 지나쳐 시집을 찾는다. 거기에는 ‘당신은 밝게 타오르는 불빛’이며 ‘나는 그 빛을 보며 온기를 느낀다’고 적힌 구절이 있다. 이 순간 프라바의 눈은 남자가 품어온 진실과 만난다. 혹은 빛이라 상상한 그 무언가가 이곳에서 잠시 명멸했다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영화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동시에 중요한 장면이 있다. 프라바의 동료 아누(디브야 프라바)는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의사를 보고 웃으며 그의 손을 끌어 고양이 위에 올린다. 이 짧은 장면에서 고양이-의사-아누를 관통하는 접촉이 생겨난다. 고양이의 따끈한 체온이 공유될 것만 같은 접촉. 이를 두고 프라바는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며 아누를 나무란다. 하지만 그녀를 정말 당황하게 만든 것은 갑작스레 눈앞에서 펼쳐진 접촉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접속의 감각’이다. 그것은 프라바가 보이지 않는 남편에게 바라지만 끝내 누를 수밖에 없었던 감정이고, 열기가 묻은 뜨끈한 시집을 건네받은 순간에 다시 되살아난 감각이다. 그럼에도 남자의 고백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프라바는 차가운 밥솥을 껴안으며 누군가와의 접촉을 염원한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불안, 원망, 죄책감 따위 없이 온전히 몸을 맡기며 체온을 나누는 순간이다. 한편 속이 상한 아누는 남자 친구 시아즈(흐리두 하룬)와 버스에서 대화를 나눈다. 그때 이들 사이에 유지되는 거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사랑하는 연인이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마음 편히 껴안지 못한다. 그날 저녁 아누와 화해한 프라바는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서 남편에 관한 속이야기를 나눈다. 낮에 촉발된 날카로운 감정은 이 순간 다정하게 오가는 대화 안에서 녹아내린다. 고요한 어둠 안에서 조명처럼 깜빡이는 눈. 서로를 향하는 말.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두 여자는 버스 안에 나란히 앉아 서로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다. 이토록 편안하며 안온한 접촉. 그것은 남편과 떨어진 프라바도, 연인을 편히 만나지 못하는 아누도 기다려왔던 순간이다. 서로의 몸을 맞대고 안식을 취하는 기적은 이 장면에 도달하여 마침내 이뤄진다. 그것은 물처럼 아름답게 부유하지만 때때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 불안한 세계에서 흔치 않게 단단하고 강력한 순간이다.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삶을 응시하던 두 여자의 눈은, 그녀들의 염원을 현실 안에 불러와 조촐하고도 따스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다시 한번 수평의 트래킹숏이 등장한다. 이제 카메라는 뭄바이의 밤거리 대신 눈부신 바다를 담는다. 어디에나 밝은 빛이 넘실대는 이곳은 사랑의 낙원일까? 아누와 시아즈는 도둑 데이트를 멈추고 밝은 빛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며, 프라바는 바다에서 온 사내와 입을 맞추고 “함께 가자”는 고백을 듣는다. 이상한 하루 끝에 밤바다 해변에서 만난 그녀들. 다시 그들을 덮친 깜깜한 어둠 속에서 프라바와 아누는 또 한번 서로를 바라본다. 그 눈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이제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오래 상상해온 ‘빛’이 있는 그곳.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조촐한 공간. 서로를 응원하는 네명이 모여 앉은, 어둠 속에 홀로 반짝이는 작은 가게를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포기하지 않음으로 인해 도달하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이라는 어여쁜 제목에는 어딘가 모를 슬픔이 묻어 있다. 그것은 ‘상상’이라는 단어의 양면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상상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이 아니다. 이미 빛을 가진 이들은 그것을 상상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녀들이 빛이라 상상하는 그 모든 것은 역설적으로 빛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조명, 희미하게 점멸하는 그것은 ‘빛’이라 부르기에 너무 연약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 깜깜한 어둠 안에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이토록 아름다운 결말이 이들에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마지막 장면은 감독의 배려로 이곳에 삽입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프라바와 아누가 포기하지 않고 지속한 어떤 활동으로 이곳에 도착했다. 어둠을 고요히 견디며 세계의 이면을 응시하는 눈. 서로를 부르고 응답하는 다정한 시선. 그 눈길을 따라 빛나는 상상은 현실에 도착하고, 아프고 어두운 세계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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