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비평
[비평] 픽션을 흔드는 현실, 김성찬 평론가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

몇년 전 이 영화를 접했다면 감회가 달랐겠다. 작품 속 불법 체포된 2022년 이란 히잡 반대 시위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도록 사법부를 압박하는 검사, 여기에 독립적이기는커녕 순응하는 사법부, 현실과 다른 보도를 일삼는 매스미디어와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세속적인 군중의 모습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저 멀리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스펙터클로 즐겼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 얼마나 시의적절한 등장인가. 현실을 반영한 영화의 시차적 성격은 자주 잊힌다. 앞서 당도하거나 뒤늦게 도착할 영화는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현전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무해한 픽션이 아니라 엄습하는 현실로 우리의 감각을 괴롭힌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픽션에서 출발해 현실로 나아가는 경로에서 현실을 비추는 일을 넘어 성찰과 반성을 개입시키며 현실을 더욱 매섭게 감각하도록 한다.

이 영화의 존재 이유가 고발에 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런 만큼 작품에서 현실은 픽션에 거울처럼 비친다. 수사판사로 승진한 남편 이만(미사그 자레)에게 아내 나즈메(소헤일라 골레스타니)는 어지러운 사회상 따위는 개의치 않고 더 넓은 집이나 식기세척기를 바란다. 이건 엄혹한 현실을 배경으로만 두는 군중 일부의 세속적인 욕망을 곧바로 그려내는 일이다. 고민하지만 결국 사형 판결 다수에 서명하는 이만의 모습은 이른바 사회 지도층의 위선을 찍어내듯 드러낸다. 큰딸 레즈반(마흐사 로스타미)이 이만에게 그(사회질서) 안에 있으니 모순됨을 정당함으로 뒤바꾼다고 일갈하는 건 저항집단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는 셈이다. 다만 영화는 픽션의 형식을 두드러지게 활용했을 뿐인 다큐멘터리의 형태로 가까워지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고발은 픽션만으로도 가능하고, 현실을 원하는 만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도 성공한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여기서 좀 남다른 특징을 드러내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은 픽션과 현실을 느슨하게 이분화한 상태로 다룬다. 픽션은 대개 사회 지도층 가족이 주도하는 실내극이며, 그들의 이미지는 일반 스크린 크기의 균질한 바탕 위에 나타난다. 현실은 대부분 실내가 있음으로써 짐작되는 저 바깥 광장이며, 스마트폰 액정 화면 크기의 불균질한 파운드 푸티지 이미지로 대변된다. 매스미디어가 작품 속에서 일컬어지듯 사회질서와 계급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서 픽션을 상징한다면, 그 맞은편 스마트폰 액정 화면 속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전제하는 저항 이데올로기의 시민 기구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구도에서 감각은 현실이 픽션에 침투하는 독보적 방식으로 인해 예민해진다. 레즈반과 동생 사나(세타레 말레키)가 집 안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바깥의 시위 현황을 살펴볼 때 실제인 듯한 시위의 소음이 창문 바깥에서 안쪽으로 동기화해 전해지면 현실과 별개로 여겨졌던 픽션의 방/실내는 흔들리면서 안온함이 잠시 붕괴한다. 절정은 레즈반의 친구 사다프가 시위대에 휘말렸다가 산탄총에 맞아 부상을 입은 얼굴로 레즈반의 집에 침입하듯 들어올 때다. 현실의 흔적을 체화한 인물이 균질한 실내의 픽션에 불운한 기운을 몰고 온다. 카메라는 이 불순한 얼굴을 긴 시간을 들여 고정된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나즈메가 사다프의 얼굴에 박힌 산탄 총알을 골라낼 때마다 관객은 픽션에 침범한 현실의 존재감을 뼛속까지 느끼거나, 그렇게 되기를 영화는 바란다. 이러한 순간들은 영화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도록 하면서 성찰과 반성을 유도해 윤리의식을 건드린다.

이 작품에서 발견하는 픽션과 현실의 관계는 영화 후반부에서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표면적으로는 픽션의 세계로 구성된 후반부에서 현실의 논리에 감염된 인물 이만이 지옥도를 펼쳐낸다. 국가가 쥐여준 권총을 잃어버린 그는 즉각 가족을 의심한다. 이만은 지배층에 속한 이유로 익숙한 심문과 검열이라는 억압의 원리를 가족에게 적용하기로 결정한다. 권총 분실이 징역형을 예비한다 해도 의심의 방향이 쉽사리 가족에게 향하는 건, 또 그들 가운데서 범인을 색출해내려는 방법이 현실의 불법행위를 답습하는 일이라는 건 관객으로선 감당하기 힘든 사태다. 무엇보다 다정한 이웃의 얼굴이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심문 기술자로 분해 이만의 아내와 자식을 마치 불법체포한 시위자들인 양 취급하는 상황은 부조리하기 그지없다. 실체가 불분명한 현실이 지닌 영향력이 인물의 육체와 정신을 피폐화하는 방식으로 픽션의 세계를 안쪽으로부터 파괴하려는 광경의 한 단면이다. 관객이 느낄 불안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실내/픽션의 존재로 더듬어보던 현실이 픽션의 세계를 좀먹기 시작하자 인물은 병들고 급기야 세계 자체가 파멸되려 할 때, 관객은 스크린 너머의 평온한 자신의 자리까지 저 현실이 마수를 뻗치지 않을까 몸을 움츠리고, 잔잔하던 공기는 금세 무거운 긴장감으로 표변한 뒤 관객의 가슴을 짓누른다. 다만 그럼에도 영화는 적확한 동시에 날카로운 희망의 씨앗을 관객에게 남기는 걸 잊지 않는다.

총을 훔친 사람을 찾는 플롯 구조는 자못 부자연스럽다. 관람 경험에 따라 이견이 있겠지만 범인을 오인한 자는 자신의 무지 탓에 벌어진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절망하는 게 더 자주 본 장면이 아닐까. 그러나 이 작품 속 오인은 다분히 의도된 터다. 사나가 실제로 총을 감췄기에 심문과 감금은 분명 지나쳤을 수 있지만 이만의 최초 의심은 반드시 그의 탓만은 아니다. 국가가 마련한 호신의 물리력인 권총은 그 의미를 즉각 알 수 있는 상징과 기호를 나타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작품의 기조에 따라 사회의 기틀이자 기득권의 바탕인 종교, 지배계급, 가부장제를 뜻한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총의 부재는 지배 집단의 불안 요소가 되고, 억압의 근거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저항을 의미하는 딸은 의도적으로 기득권의 공황을 유도한 것과 다름없다. 불안과 공황에 허덕이는 신권정치 집단에 이 사건은 정당함으로 오도된 폭압을 발동시킬 계기가 되지만, 도리어 그들의 뿌리를 은유하는 유적지에서 그들이 땅속으로 꺼져버리는 일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견고해 보였던 그들의 요새가 권총을 감추는 간단한 조치만으로도 쉬이 무너지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단언. 이러한 희망마저 소박하고 단선적이라고 지적할 수 있겠으나 안전한 자리에서 관망하며 즐기던 억압과 고통의 스펙터클이 실제라는 암운으로 짙게 드리워지는 요즘, 희망은 생명을 얻어 우리를 격렬히 뒤흔든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