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감독의 <로비>는 국책 지원사업을 따내려는 한 스타트업 회사의 작전기로 접대 골프라는 관행적 악습에 (영화의 대사를 빌려오자면) ‘명랑’한 접근을 시도한다. 이 영화에서 신선하게 여겨지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한국 누아르와 범죄영화에서 밀실로 변형되었던 전통 누아르의 암흑가를 골프장의 필드로, 부정함을 드러내는 부수적 수단으로 단 몇신에 불과했던 부당거래 장면을 100분 가까운 러닝타임으로 펼쳐내 장르의 요소를 영화 전체로 확장한다. 주 소재가 골프이기 때문에 전략 세우기와 심리전을 다룬 <1승>과 같은 스포츠영화의 변주로도 보인다. 일견 장르에 충실한 이 영화를 따르다 보면 갈등이 해소되기를 기대하는 시점에 놓이는데 서사가 봉합될 때 <로비>는 대체 어떤 연유로 장르영화의 기대에 반하는 선택을 내렸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그 첫째는 코미디에 덧입혀진 이 영화의 또 다른 장르 규범이 주인공의 도덕적 선택과 정면으로 충돌함에 있다. 여기에는 장르 쾌감과 도덕적 책임을 지닌 주인공의 미덕, 둘 중 하나의 필패가 예정되어 있다.
충돌하고 분열하는 장르 전략
코미디 장르로서 <로비>는 하정우의 데뷔작 <롤러코스터>의 성격을 연장하면서 서사적으로 보완한다. 발단-전개-위기-절정의 극적 마디가 희미한 대신 작은 소동극의 연쇄로 이끌어간 <롤러코스터>에 비하면 <로비>는 접대 골프의 계획과 실행, 실패와 봉합으로까지 장르영화의 서사적 굴곡이 있다. 초반에 <로비>는 학연, 지연, 혈연의 인물 구도를 조성해 이미 익숙한 사회 부조리를 풍자한다. 전기차 매립형 보조배터리 기술을 개발 중인 윤인터랙티브사 대표 윤창욱(하정우)과 대척점에 있는 로비의 경쟁자 손광우(박병은)는 창욱과 오랜 친구이자 대학 동문이며 4조원 규모의 국가지원사업 결정권을 지닌 조향숙 장관(강말금)과 부하 직원 최우현 실장(김의성)은 이혼소송 중에 있는 부부 사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사촌 동생의 취업을 청탁받아 낙하산 인턴으로 창욱의 회사에 입사한 호식(엄하늘)까지 더하면 <로비>의 코미디 모체에는 풍자의 의도가 깔린다.
이러한 코미디 성격은 데뷔작이었던 <롤러코스터>에서 진화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우선 강렬한 캐릭터의 인상에 기댄 다음 그 인상을 전복시켜 웃음을 갈구했던 <롤러코스터>의 표면에는 빠른 템포의 말장난과 상황의 부조화가 있다. 막말하는 한류 스타와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승무원을 비롯해 뒤집힌 스테레오타입이라는 상상적 반전 아래에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의 도덕적 해이가 드러난다. 황당무계한 상황 전개와 말의 액션-리액션이 중요하게 기능하는 <롤러코스터>는 난센스 코미디에 가깝다. 사회의 단면을 비틀어 꼬집는 <로비>에서도 이 코미디 요소는 부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의 열렬한 팬인 어머니에게 미국프로농구(NBA) 유니폼을 수의로 입혀 입관하는 장면은 스테레오타입의 전복과 난센스 코미디에 기댄 상황 설정이다.
<로비>가 장르영화로 야심을 품고 있다고 설득되는 순간은 정치인의 등장으로 권력구조가 등장하면서다. 비판할 수 있는 권력 대상을 찾아낸 언어유희는 말장난을 넘어 블랙코미디의 조건을 갖춘다. 난센스와 블랙 유머를 종횡하던 영화는 주인공 창욱의 목표가 국가 지원금을 확보하는 로비의 성사에 있음을 드러내면서 또다시 전환된다. 이 전환으로 ‘접대 골프’라는 부정한 거래를 중심에 두고 평범한 인물들이 머리를 맞대며 계획을 수립하는 케이퍼 무비의 구도가 마련된다. 그러나 창욱이 노루와 두 차례 마주치며 도덕적으로 각성하게 되는 순간, 영화에 대입되었던 케이퍼 무비의 공식은 맥없이 중단되고 만다. 케이퍼 무비의 핵심은 도덕적 회색 지대에 있는 주인공의 작전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관객의 기대로 완성되며 이 장르가 약속하는 쾌감도 그러한 결말에 있다. 이 지점에서 <로비>가 실패로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가 차용한 장르 문법을 충실히 따르다 마지막에 그것을 외면해버렸기 때문이다.
옳은 선택을 내리는 창욱은 영화가 취하는 장르 전략과 공존할 수 없어 서로를 밀쳐낼 수밖에 없다. 물론 주인공의 올바른 입장 고수가 장르 쾌감과 반드시 충돌한다고만 볼 수는 없다. 누군가는 여러 장르의 변환으로 리듬을 타던 영화가 창욱의 선택을 기점으로 오히려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여기서 그가 감행한 판단이 정말로 영화를 추동하는 발판을 무너뜨렸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겨진다. 그러나 창욱의 선택과 별개로 <로비>에는 여전히 또 다른 서사가 축적되고 있다. 진세빈 선수(강해림)를 향한 최 실장의 수작이 라운딩 코스를 돌며 농도 짙은 추파로 수위를 점점 높여갈 때 이 장치는 후에 올 갈등 해소에 당위성을 부여하도록 설계된 서사 구조라는 믿음이 쌓인다. 이렇게 고조시킨 갈등을 다시 외면함에 <로비>의 두 번째 패착이 있다.
그 균열은 누가 감내하는가
케이퍼 무비 장르와 창욱의 각성이 충돌하여 빚어진 균열을 감내하는 것은 결국 진세빈의 몫으로 남는다. 접대 골프 무대의 완성에 필요한 인물을 섭외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인 윤창욱도, 최 실장도, 박 기자(이동휘)도 모두 골프 라운딩에 서야 할 각자의 동인이 있다. 그러나 진세빈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창욱의 삼고초려로 정치가 개입된 부당거래에 소환되었을 뿐인 인물이다. 필요에 의해 불려나와 적절한 때에 무대에서 퇴장한 진세빈의 쓰임을 영화가 어중간한 화해로 봉합하며 서사의 쾌감은 유보된다. 필요에 의해 불려온 인물은 창욱의 사촌 동생 호식 또한 마찬가지다. 대신 그는 슬럼프에 빠진 프로 골프선수와는 반대로 사건의 해결사로 등장한다. 낙하산인사에다 사회 초년생이기에 미덥지 않아 보이는 호식은 알고 보니 수완과 유능함을 갖췄다는 반전을 가진다. 데우스엑스마키나에 버금가는 해결사의 등장과 구원으로 극적 쾌감을 주고자 하지만 프로와 아마추어의 역전 구도는 오히려 <로비>가 <롤러코스터>에서 보인 전형성의 전복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가해자와 방관자들에 둘러싸여 추행과 모욕을 견디던 진세빈은 마침내 잔디 위에 구토를 쏟아내고 몇 마디 대사를 외친다. 그러나 그 외침을 차마 이 모든 설계의 회피적 당위성을 뒤집는 일격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진세빈이 보인 온건한 반응은 해소를 기대하게 만드는 서사에 <로비>가 가진 코미디의 성격(말의 액션과 리액션)이 대입되어 단순한 반응 그 이상으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준다. 구토는 피해자와 목격자의 반응일 뿐 통쾌한 반격은 아니다. 진세빈에게 허락된 것은 사과 편지를 받고 미소 짓는 일뿐이다. 애매한 봉합 이후 엔딩크레딧에서 다시 강조되는 화해의 제스처에 웃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코미디 취향 차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괴로울 정도로 부조리하게 쌓아올린 갈등이 끝내 해소되지 못한 채로 장르 전략과 각성 사이에서 힘없이 떠밀려 끈적하게 남겨진 미온한 카타르시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