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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통속성과 현실성은 서로를 구하는가, <에밀리아 페레즈>

영화 이전에 영화를 둘러싼 논란이 먼저 도착했다. 개봉을 앞둔 <에밀리아 페레즈>를 둘러싸고 영화 안팎으로 논란이 제기되었다. 주인공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이 과거 SNS에 남긴 문제적 발언을 둘러싼 논란을 비롯해 멕시코와 트랜스젠더 여성의 묘사 방식에 관한 비판 등 쟁점은 다양하다. 뮤지컬을 차용한 자크 오디아르의 가장 비현실적인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현실적인 논란에 직면했다.

여러 비판 가운데 핵심은 배우를 둘러싼 논란이다. 재현의 윤리 혹은 진정성과 관련된 부분은 실제 사건이나 지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반복해서 마주하는 논의에 속한다. <에밀리아 페레즈>가 이를 논하기에 가장 적절한 사례는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여기에서는 이를 반복하지 않겠다. 반면 영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배우를 둘러싼 논란은 영화가 지닌 특수성을 가리키기에 살펴볼 만하다. 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혼종적 형식과 클리셰가 작동하는 허구의 세계 안에서 현실성을 담보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영화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배우의 과거 행적을 영화의 논란거리로 삼는 것은 과도하지만, 실제 트랜스젠더인 그의 삶이 녹아든 영화의 특성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MTF 트랜스젠더인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이 영화에서 역시 MTF 트랜스젠더를 연기한다. 실제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에밀리아 페레즈>에서 그는 젠더를 전환하기 이전 남성의 역할까지, 1인2역을 도맡는다. 물론 배우가 연기하는 대상에는 근본적으로 제약이 없다. 배우는 분장을 통해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넘나들 수 있다. 특히 얼굴이 잘 알려진 배우가 분장을 통해 다른 성별을 가장할 때 그의 비밀을 아는 적극적인 공모자로서 관객이 갖는 의심과 만족감은 장르를 가능케 하는 필수적 요소다. 하지만 실제 트랜스젠더인 배우가 이전 성별을 연기하는 것은 여성배우가 남성을 연기하는 것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이 경우 배우는 조금의 분장과 조명의 트릭만으로 ‘지나치게’ 남성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승인해야 한다. 물론 배우는 그 과정 자체를 충분히 즐길 수 있으나, 일단 배우가 연기를 하면서 겪는 심리 상태와는 무관할 수도 있을 관객(인 ‘나’)의 입장에 집중하겠다.

사전 정보를 모른 채 감상한 이들에게 마니타스를 연기한 배우의 실제 성별이 남성으로 인식되리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마초적 남성이며, 리타(조이 살다나)를 납치하기까지 한 참이다. 극에 몰입한 관객은 마니타스가 병실에서 여자의 몸으로 깨어나는 순간, 배우가 영화를 위해 자신의 몸에 영구적 변형을 가하는 외과적 수술을 했거나 혹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성별 전환 과정을 공개했다고 느껴질 만큼 그 장면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배우의 신체가 CGI에 의한 트릭이라고 가정할 수 있지만, 비윤리적이고도 저열한 재현 방식이 용인되진 않았으리라는 결론에 가닿는다. 감독의 전작 <러스트 앤 본>에서 마리옹 코티야르가 연기한 스테파니의 몸이 실제에서 허구(신체의 일부를 잃은 상태)로 이동한 것과는 반대로, <에밀리아 페레즈>에서 배우의 몸은 허구(남성의 얼굴)에서 실제(수술 이후)로 돌아온다. 관객은 에밀리아의 존재를 습득하는 동시에 앞서 실제라고 생각한 이미지를 교정해야 한다.

분열하는 관계의 멜로드라마

실제 자신의 젠더를 바꾼 배우가 극 중 잠시나마 이전의 젠더로 돌아가겠다는 선택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비밀리에 여성이 되기 위해 이미 호르몬 시술을 시작한 캐릭터로 등장했다고 해도, 남성이 된 자기 모습과 화해할 수 있었을까. 물론 남성 되기의 과정은 과거의 나였던 친숙한 것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전혀 낯선 것으로의 탐험에 가까울 것이다.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인터뷰를 통해 마니타스를 연기하는 작업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에게 (현재의) 자기 신체와 영혼을 부여한 과정이라 말했다. 이는 추상적인 발언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감독과 대화하는 가운데 캐릭터의 행동 양식에 변경을 가했다. 범죄에 연루된 자가 탈피할 명목으로 성전환수술을 감행하는 애초의 동기는 어렸을 때부터 가져온 억눌린 소망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진정성을 얻는다. 물론 극 내부에서 마니타스의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수는 있는가 하는 의심은 남는다. 범죄에 연루된 자가 위험을 회피할 목적으로 변장을 시도하는 것은 흔한 클리셰이며, 성전환수술 역시 변장의 극단적인 형태로 이용된다. 이러한 클리셰가 마약왕으로 군림하던 남성이 갑자기 여성이 되겠다는 서사보다 매끄러울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트랜스젠더인 배우가 이러한 설정을 용인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투신한다는 건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에밀리아 페레즈를 연기한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의 존재는 설득력을 고민할 필요 없는 통속극의 세계 속에 침투한 설득력이자, 비현실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영화에 침투한 리얼리티다. 배우의 실존적 경험은 마니타스를 넘어 에밀리아 캐릭터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들어 외과적 수술 후에도 성적 지향이 곧바로 변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득해(이를 외과적 수술이 억압된 성적 지향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공익사업을 하면서 만난 여성 에피파니아(아드리아나 파스)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로 변형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에밀리아가 맺은 관계의 이름을 고민하고, 그 고민을 폐기하는 과정이 남아 있다. 에밀리아와 에피파니아의 관계는 단순히 ‘두 여성’의 결합으로만 치부되진 않는다. 영화 내부에는 4년의 세월이 흐른 뒤로 설정되었지만, 관객에게는 조금 전까지 남성이었던 그의 모습이 현재의 관계에도 지속적인 그림자를 만든다. 둘의 관계를 단지 동성애라고도, 이성애라고도 확언하기 힘들며 무수한 성별 전환 드라마의 동성애를 이성애의 일종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남성이었던 에밀리아의 과거를 이용해 둘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들이 트랜스젠더와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들어 소수자의 연대와 같은 동지애로 의미화하거나, 그저 에밀리아와 에피파니아의 사랑일 뿐이라며 정의 내리기를 회피할 수도 있다. 성애 장면을 과감하게 묘사해온 자크 오디아르는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생략적인 스케치로, 모호함을 허용한다.

에밀리아와 다른 여성이 맺는 관계를 명료하게 정의할 수 없음은 에밀리아와 마니타스의 부인 제시(설리나 고메즈)와의 관계에서 더욱 분명하게 체감된다. 남편 혹은 아빠였던 사람이 성별을 바꾸고 정체를 숨긴 채 남편의 누이이자, 아이들의 고모로 곁에 머물 때, 그들은 여자로 변한 남편 혹은 아빠를 알아볼 수 있을까. 제시가 과거 외도했던 상대와 다시 만날 때, 이를 에밀리아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도 불안의 요소다. 그가 별안간 폭력성을 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두 사람이 부부였음을 아는 관객은 제시의 마음을 떠보는 에밀리아의 긴장감 넘치는 탐색 아래에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부부의 감정이 여전히 잠재함을 알고 있다.

감옥과 은신처

남장 여자 혹은 여장 남자의 이야기가 종종 코미디의 형식을 띠는 이유는 그들이 관객에게 완벽히 여성 혹은 남성처럼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코미디 형식은 관객과 제작진간에 맺어지는 모종의 양해각서다. <에밀리아 페레즈>의 음악극 형식 역시 성별 전환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코미디 형식을 차용하는 것에 견주어볼 수 있다. 물론 <에밀리아 페레즈>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시니컬한 뮤지컬 톤에 장중한 오페라 톤을 혼합한다. 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이 지닌 진지한 이미지가 장중함과 결부된다면, 춤과 노래를 혼합한 뮤지컬 장면은 배우 조이 살다나를 위해 마련된다.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이 움직임을 거의 취하지 않은, 말하기에 가까운 노래를 들려준다면, 조이 살다나는 랩에 가까운 빠른 비트와 격렬한 동작을 소화하며 시선을 끈다.

에밀리아와 리타의 대조된 주제곡은 극적 효과를 위해 마련된 것만은 아니다. 리타는 극 중 마니타스/에밀리아의 조력자일 뿐만 아니라 극 바깥에서 캐릭터의 진정성을 강화하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리타는 유일하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권한을 지닌다. 변호사인 리타는 한 여성의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남편을 변호해야 할 처지에 있다. 그는 용의자의 결백을 믿지 않지만, 결국 재판에서 승소를 끌어낸다. 이러한 상황에 개입하는 보이스오버와 뮤지컬로의 전환은 범죄자를 변호해야 하는 리타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드러내고, 동료와 의뢰인을 조롱한다. 의아하게도 마니타스의 등장 이후 리타의 자조적인 혼잣말과 확장된 혼잣말로서 뮤지컬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마저도 마티아스/에밀리아에 대한 리타의 속마음은 아니다. 성전환수술에 대한 가벼운 묘사로 비판받은 방콕 장면은 다소 경박해 보이기는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 리타가 압박감을 느끼는 가운데 내달리는 일종의 한풀이처럼 보인다.

마니타스/에밀리아와 리타의 관계는 영화 속에서 가장 개연성이 떨어지는 설정 중 하나다. 마니타스는 왜 하필 리타를 고용했는가. 단지 그가 유능한 변호사이기 때문에? 리타가 처음 마니타스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막 아내를 죽인 남자의 승소를 끌어낸 직후였다. 마니타스는 용의자 편에서 변론했던 리타를 벌하는 정의로운 존재인가, 그의 능력을 착취하는 다른 가해자인가.

둘의 관계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건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 세계다. 자크 오디아르는 인간의 내밀한 관계에 관한 드라마를 만들어왔다. 그의 영화에서 대개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감옥 혹은 구원자다. 리타의 행동을 조절하고, 리타의 환상을 잠식하는 마니타스/에밀리아는 리타의 감옥이다. 마니타스의 전화를 받을 때나 그와 대화할 때, 리타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거나 현실의 스위치가 꺼진 무대화된 감옥에 갇힌다. 왜 마니타스를 만난 뒤 리타의 개인적인 푸념은 사라지고, 후원 파티에 초대된 이들을 풍자하는 역할에 그치는가. 마니타스는 리타의 영혼을 흡수한 것인가, 리타가 마니타스에게 육체를 내어준 것일까. 에밀리아가 죽음을 맞았을 때, 리타는 조금은 놓여난 기분을 느꼈을까 아니면 영혼을 잃은 것처럼 허전했을까. 그리하여 현실성은 통속성을 구속하고, 통속성은 현실성을 구원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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