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밝히겠다. 나는 일본 문화의 열성적인 팬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사로잡혀 <사유리>를 보았고 흥미로웠다. 기대감과 데이터베이스가 없어서 그렇게 봤을 수도 있다. 이 글은 무지로부터 출발한다. <사유리>는 이질적인 두개의 장르를 꽤 잘 어울리게 접목한 형태의 영화다. 두개의 장르 중 하나는 호러고, 다른 하나는 열혈물이다. 개인적으로 2부에 펼쳐지는 후자를 일본의 전통 장르라 부르기도 하고 ‘희망’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충분한 논의가 있기를 바라며 잠깐 적어보자면 일본의 현실 세계와 유리된 채 상당히 오랜 세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영화는 무모하리만치 희망을 품는다. 전후 폐허가 된 일본이 겪은 괴리를 픽션으로 극복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그때로부터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왜 이러한 양상이 진행 중인지에 대해 궁금하지만 내 몫은 아닌 것 같다.
<사유리>가 심리-액션 활극으로 변모하는 순간
다시 돌아와 <사유리>를 보며 ‘공포’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공포감에 사로잡히기 위해 스스로 영화관에 들어간다. 스크린에 비치는 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무언가가 튀어나올 기미가 보이면 손으로 스크린을 가린다. 무엇이 보기 싫었던 것일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그 존재는 단숨에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는 정보를 제한하여 그 존재를 파편화된 퍼즐로 관객에게 제시한다. 영화를 보면서 보기 싫었던 것은 그 존재의 얼굴이다. 구로사와는 하나의 불투명한 막을 두고 그 뒤에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들이민다. 그 막이란 유리창(<클라우드>) 혹은 모니터(<회로>)일 수도 있다. 그 위로 비친 얼굴들은 불투명하다. 구로사와가 생각하는 타자의 이미지다. 설령 그 존재가 선명하게 드러나도 불가해함은 여전히 찜찜하게 남는다.
사유리의 모습 역시 파편화된 신체로 조각나 등장한다.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사유리의 모습은 육중한 장딴지다. 하지만 이후에 집에 등장한 또 다른 귀신은 머리 긴 어린 소녀다. 그녀는 누구일까? ‘귀신 들린 집’의 본 주인일까? 그 소녀에게 사유리가 저주에 걸린 것일까? 이 집으로 이사 온 카미키 가족의 둘째 아들 노리오(미나미데 료카)는 학교에서 귀신을 보는 한 친구를 만난다. 스미다(곤도 하나)는 노리오에게 “으스스하고 흉악한 애”가 보인다고 경고한다. 눈치가 빠르지 않은 관객이라도 둘이 하나라는 것은 금방 깨닫게 된다. 동일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두 존재로 분열한 하나의 인물. <사유리>는 두 존재 사이의 변화, 즉 사유리의 시간을 탐색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알 수 없는 존재인 사유리를 이해하려고 드는 희망의 영화다. 따라서 끝없는 절망에 사로잡힌 공포의 대상인 사유리는 영화의 끝에서 선명하게 규명되며 으스스함은 해소된다. <사유리>는 관객이 불가해한 존재에 완전히 압도되어 무력감을 느끼는 형태의 호러영화는 아니다. 호러로 시작한 <사유리>는 열혈물을 비롯한 온갖 장르의 이종교배를 통해 심리-액션 활극으로 변모한다. 이 대전환의 순간이 바로 <사유리>의 호불호를 가르는 하나의 벽이다.
영화에서 사유리가 이해해야만 하는 존재로 바뀌면서 더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게 된다. 감정이 투사되는 이해의 대상이 된다. 장르가 대전환하는 순간 영화의 톤도 한층 경쾌해진다. 동시에 호러 장르의 매력은 반감된다. 이때부터 불가해함은 할머니 하루에(네기시 도시에)가 담당한다. 치매를 앓던 할머니는 어느 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할머니는 자신의 특기인 태극권을 통해 사유리 때문에 줄초상이 난 카미키 가족을 재건하기에 이른다. 할머니는 하나 남은 손자 노리오와 함께 특훈에 들어간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카미키 가족은 집을 떠나지 않고 죽음에 맞서 저항하는가다.
<사유리>가 소재로 삼은 ‘귀신 들린 집’의 운명은 폐허다. 그 집은 시간이 멈춘 공간이다. 저주가 퍼진 바로 그 파멸의 순간은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 오면 언제나 그렇듯 귀환한다. 그 누구도 이 집을 소유할 수 없다. 저주의 에너지로 가득 찬 공간이자 공허 그 자체다. 억울하게 죽은 자의 원한이 물든 곳이다. 따라서 이곳으로 이사 온 사람들은 빠른 시일에 다시 이사를 하거나 죽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다. 이것이 귀신 들린 집이 만든 악의 순환이다. 무고한 희생자들이 지난 10년간 배출된 이 살육의 공간에서 할머니 하루에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각성하기 전 치매를 앓고 있을 때부터 할머니는 사유리를 보고 있었다.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 저술가 마크 피셔는 으스스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기억상실증 환자의 당혹스러운 눈”(<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을 언급했다. 치매로 할머니의 기억은 붕괴한 상태다. 할머니는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손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녀는 기억의 붕괴로 계속해서 파편화되는 세계를 재구성하여 인식한다. 아이러니하게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눈은 사유리라는 비존재만 정확하게 인식한다.
교환 끝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생명력 넘치는 태극권 수련, 균형 잡힌 식사 그리고 긍정적인 사고와 올바른 태도. 할머니의 가르침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법이지 근원적으로 사유리를 없애는 방법은 아니다. 할머니의 미션은 사유리를 발본색원하여 아들이 어렵게 산 이 집과 남은 가족을 지키는 것이다. 할머니는 수소문하여 사유리를 죽인 후 이 집에 버리고 도망친 남은 가족을 납치하여 사유리와 대면시킨다. 이 대면식에서 사유리는 특이한 행동을 보인다. 사유리는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아버지와 자신을 죽이려고 처음 달려든 동생에게 시원한 응징을 하지만 방관자였던 엄마 앞에선 머뭇거린다. 사유리는 엄마의 두눈을 찌르지만 죽이지는 못한다. 사유리는 엄마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과 연민을 품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엄마는 어린 딸을 향해 기어가 더듬어 안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 그녀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결국 두눈을 잃게 된다. 할머니와 손자의 적극적인 행동, 사유리의 머뭇거림 그리고 시력을 잃은 엄마를 통해 영화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사유리>에선 많은 것들이 교환된다.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복수와 용서 등 여러 번 교환 끝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염치라는 마음이다. 손으로 영화는 가릴 수 있지만 현실은 가릴 수 없다. 우연이지만 <사유리>는 지금의 한국 상황과 묘하게 겹친다. 후안무치한 얼굴 없는 자들에게 몇 개월간 무방비로 노출된 한국에서 ‘공포’라는 감각은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이러한 비상사태가 오래 진행될수록 점점 무감각해질지도 모른다. <사유리>에서 장르가 바뀌는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침대 아래에 숨은 노리오는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다가오는 사유리를 보고 겁에 질린다. 반대편에서 할머니는 동트는 햇빛과 함께 등장하여 침대를 뒤집어엎어버린다. 그리고 손자에게 말한다. “생각해, 생각하는 걸 멈추지 마.”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희망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