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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비장하게 휘두르는 한 남자와 리스트의 <Liebesträume> 3번이라는 기괴한 조화의 오프닝. <실종>에서 인상적인 순간들은 이렇게 의아한 선택과 급작스러운 변조(modulation)에 있다.
가타야마 신조의 <실종>에는 속박을 이탈하고 회피하는 몸들이 그려진다. 인물들은 죽음을 간절히 원한다. 삶을 중단함으로써 완전한 정지로 이행하려 열망하는 이들은 제각각 가능한 방법으로 자살을 기도한다. 지난 <씨네21> 1359호 프런트 라인에서 김병규 평론가가 쓴 비평 ‘이미지의 조건, 영화적 몸짓’에서는 인물들의 신체가 고정됨으로써 죽음이 도출되는 사례를 열거했다면, <실종>은 몸들이 불가피하게 장치와 분리됨으로써 죽음이 유예되는 사태를 형상화한 방식이라 일컬을 만하다. 가령 카에데(이토 아오이)의 엄마는 루게릭병을 앓아 스스로 목을 밧줄에 걸 수조차 없어 자살에 실패한다. 온갖 방법으로 죽기를 시도했던 ‘찌르레기’는
이보라 평론가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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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키 기린이 없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라니. 관객의 헛헛한 심정은 결코 감독의 마음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부재한 존재를 별처럼 떠올리며 썼다.
<브로커>는 가족 이야기에 천착해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의 연장선에서 대안가족 형성 가능성을 타진한 다른 버전의 영화 정도로 이야기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가족의 의미가 핏줄이나 유전자보다 ‘기른다’는 행위에 있음을 드러낸 데 이어 <어느 가족>에서 아이를 학대하고 방치하는 친부모보다 아이에게 좀도둑질을 가르치는 양부모가 낫지 않으냐고 도발적으로 질문한 감독은 <브로커>에 이르러 ‘낳기 전에 죽이는 것이 낳은 뒤에 버리는 것보다 죄가 덜해?’라는 질문을 던진다. 앞선 작품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해소된 데 비해 <브로커>의 질문은 유독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그 이유는 전작과 달리 영화에서 ‘낳기 전에 죽이는 것’에 대입되는 인물이나 상황
김소희 평론가의 '브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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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담보하진 않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브로커>는 좋은 의미와 시선을 지닌 영화지만 설득의 태도와 과정에 동의하긴 어려웠다. 좋은 장면, 좋은 연출, 좋은 연기가 있지만 그 총합이 반드시 좋은 영화이리란 법은 없다.
송강호의 캐스팅은 실패다. 잔인하지만 그게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상현은, 정확히 송강호의 상현은 <브로커>의 세계 안에 좀처럼 섞이지 않는다. 그는 차라리 송강호 월드에 속해 있다. 송강호가 그간 축적해온 세계는 언뜻 평범하고 소시민적이라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낯설고 서늘한 순간을 들이미는 캐릭터들의 역사다. 송강호는 일상의 표정, 인간적인 감정을 순식간에 좁히고 들어와 장르의 얼굴로 바꾸어놓고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킨다. 나는 아직 <기생충>에서 케첩 묻은 휴지를 손에 쥐고 인상을 찌푸리던 기택(송강호)의 얼굴을 기억한다.
송경원 기자의 '브로커' 반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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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속 가족은 곁을 지켜주는 관계의 유지와 거리가 멀다. 누군가가 머물다 떠나갈 때, 또 다른 이가 개입한다. 꼭 가족이 아닐수도 있어서, 그것은 흡사 한쪽 문이 닫히는 순간 다른 문이 열리는 것과 같다.
평단과 관객의 <브로커>에 대한 평가 내리기가 한창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고 작품은 아니다, 라는 쪽으로 평가가 모이는 모양이다. 동의하는 바다.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나도 고레에다의 최고작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의 영화답지 않게 몇몇 엉성함이 돌출하는 영화다. 거기에는 언어를 포함한 문화와 환경의 차이가 적잖이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일본영화와 한국영화의 이질적인 부분도 한몫한다. 브로커를 쫓는 두 형사의 묘사에서 드러나는 빈틈은 일본 영화 속 유머였다면 더 이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조차 고레에다의 섬세함을 제거할 정도는 아니다. 언어가 바뀌어도 가로막을 수 없는 감정의 결은 여전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이 영화는
이용철 평론가의 '브로커' 찬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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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이나 꿈이 아닌, 순수한 내면이 감지되는 영화다. 구닥다리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완전히 현대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토록 쿨한 흑백영화라니.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저 권투 선수가 코뮤니스트라던데?”라고. 이들의 대화에 영화는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 만일 올리 마키(야르코 라티)의 관점에서 지난 상황을 되돌아본다면, 이야기의 굴곡이 더 강해질 것만 같다. 미국의 복싱 챔피언을 무너뜨리는 국가적 영웅의 위상을 포기하면서까지 그가 얻고자 한 성취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지방의 제빵사 출신 아마추어 권투 선수가 스타가 될 찰나에, 그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언뜻 전기영화의 방식을 취한 듯 이야기가 나열되지만, 결과적으로 짐작하지 못한 방향에서 플롯은 무너진다. 그리고 처음 접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전체가 재조합된다. 흑백 화면의 사실적인 질감은 이 과정에서 드라마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흑백의 감각적 비주얼이 정서
이지현 평론가의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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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품이 지닌 결여가 다른 작품에는 과잉돼 있다. 또 충만함은 결핍돼 있기도 하다. 우연찮게 유사한 시기에 방영된 두 드라마를 번갈아 보면서 뜻 모를 균형감을 느꼈다.
임지은의 시 <대체>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행을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있다면/ 여행도 여행을 떠날 거에요.” 그리고 시의 후반부는 이렇게도 말한다. “모든 게 빠르게 수리되는 세계에서/ 여행은 얼마간 고장이라는 말로/ 대체될 거라더군요.” 시집에 수록된 해설도 동의하는 바대로 이 시는 언어의 고정된 의미를 떠나 새로운 지점에 안착하는 시의 본질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여행’이 ‘고장’으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또 <우리들의 블루스>는 ‘여행’은 자고로 ‘여행’이라고 강조하는 드라마다.
시 또는 연구 보고서
수많은 사람이 언급한, ‘추앙’이라는 말의 새로운 용법이 가리키는 것처럼 <나의 해방일지>는 지금껏 한
김성찬 평론가의 '나의 해방일지' '우리들의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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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디아스포라적 고민을 부자 관계로 풀어낸 작품이라면, <애프터 양>은 그것을 인간과 안드로이드간의 차이를 통해 그린 작품이다.
코고나다 감독이 연출한 <애프터 양>의 오프닝 시퀀스는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한 다문화 가족이 가족사진을 찍고 식사를 한 뒤, 함께 춤을 춘다. 경쾌한 전자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다양한 4인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가 시작될 때, 분명 처음 접한 비주얼이 ‘신선하다’는 감상을 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단순하다. 오프닝의 춤을 본 순간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같은 감독의 작품 <파친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나친 끼워 맞추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댄스 시퀀스가 끝나면 약간의 작동 오류, 즉 춤을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하는 증상을 보였던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H. 민)이 갑자기 작동을 멈춘 상태로 한 남자의 어
김철홍 평론가의 '애프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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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은 세상의 악을 모두 물리치겠다는 욕망을 분출하고, 관객은 주먹의 효과음에 도취된다. <범죄도시2>를 보는 데는 어떠한 상상력도 필요하지 않다.
마석도 형사(마동석)는 도주한 용의자를 인도받으러 베트남으로 떠난다. 무시무시한 사건이 바탕인 영화인데 분위기는 유쾌하다. 슈퍼히어로급 인물이 주인공이니 두려운 마음이 생길 틈이 없다. 유머러스함은 되레 늘었다. 마 형사가 용의자와 만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타지라서 ‘진실의 방’을 찾지 못한 그는 음향과 분노라는 새 방식을 구한다. 그가 탁상을 두드리면 엄청난 음향이 울려 퍼진다. 어디서 공룡이 다가오나 싶은 소리, 그 분노의 소리에 기겁한 용의자는 진실을 털어놓는다. <범죄도시2> 제작진은 전편과 비교해 훨씬 강력한 사운드 효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듯하다. 그 결과, 리얼리즘 영화가 속편에 와 <원펀맨> 수준의 판타지로 변했다. 마동석은 짧은 시간에 스스로 장르를 일군 배우다. 관객이 그의
이용철 평론가의 '범죄도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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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나무라는 빈틈을 찾아낸 것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한국의 재개발 다큐멘터리는 그동안 무엇을 담아왔을까? 재개발 지역으로 선포되고 자신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의 상실감과 주거권을 위한 투쟁의 장을 먼저 담아내왔다. 그런데도 그곳에 가장 먼저 지워지는 존재는 사람이었다. 재개발 지역은 건물 벽면에 스프레이로 적힌 단어대로 ‘공가’가 된다. 카메라는 아직 떠나지 못한 존재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영역성 동물인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움직이지 않는 사물에도 관심을 보였다. 아파트 내부나 곧 철거될 건물의 불안감을 담아내는 재치도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 감독의 모습도 다양해졌다. 한때 감독은 주민들과 함께 투쟁하는 카메라를 든 액티비스트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다 어느새 카메라 앞에서 뒤로 물러나며 최근엔 비인칭적인 시선으로 재개발 지역을 담아내며 현대미술 작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화 제목은 비워뒀다. 수많은 영화가 스쳐 지나갔
오진우 평론가의 '봉명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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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리듬이 좋고, 대사가 좋은 영화다. 짧고 일상적인 문장이 리듬을 형성한다. 영화 전체가 마치 하나의 음악 같다.
누군가 ‘러브 게임’이라 불러도 상관없을 정도로 <파리, 13구>의 인물들은 소란스럽다. 에밀리(루시 장), 카미유(마키타 삼바), 노라(노에미 메를랑), 세 사람의 모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각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친구’나 ‘연인’이란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에밀리는 “장례식에 참석하면 우린 사귀는 거야”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효력도 믿을 수 없다. 실상 영화 속의 인물들과 ‘약속’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노라와 앰버 스위트(카미유 베토미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잘 지낼 수 있을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 후자의 커플은 ‘한동안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게 만든다. 참으로 이상한 상상이다. 긍정의 대사를 듣고 파탄을 수긍하게 되고, 육체가 쓰러지는 추락의 장면을 보고 행복을
이지현 평론가의 '파리, 13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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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도식성이 아니라 그를 통해 표현되는 삶의 무게와 다양성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생방송 5분 전, 방송국 간판 앵커 세라(천우희)는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제보 전화를 받는다. 장난전화로 여기고 무시하려 했지만 찜찜함을 거둘 수 없었던 세라는 이것이 너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엄마 소정의 말을 듣고 제보자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제보자와 어린 딸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 정도면 정지연 감독의 <앵커>가 하려는 이야기의 방향성이 그려진다. 살인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추리물이 될 것이고,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기자로도 인정받으려는 세라의 야심은 오히려 이 추적에 방해가 될 것이고, 범인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고, 클라이맥스는 방송국의 생방송 현장에서 벌어질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난다. 단지 우리가 예상했던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영화의 예고편이 나오는 순간부터 허물어진다
듀나 평론가의 '앵커', 우린 아직 이 이야기에 지칠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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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포착하는 진정한 공포의 실체에 가까워지기 위해 글을 썼다.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은 오프닝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참혹한 살인이 벌어지는 현장. 한 소녀가 겁에 질린 채 그 광경을 훔쳐보고 있다. 살인을 마친 살인마는 유유히 희생자의 집 밖으로 빠져나와 담배를 피운다. 바로 그 순간 실수로 인기척을 낸 소녀. 소리를 감지한 살인마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희생자의 집 문을 두드린다. 짐짓 정체를 숨긴 채. “문 열어. 경찰이다.” 장면이 전환되면, 신입 수사관 셰르(아스카르 일리아소브)가 경찰서에 첫 출근한다. 그가 선배 경찰들에게 꾸벅 인사한다. “수습으로 일하게 된 셰르입니다.”
이 인상적인 장면에서 ‘경찰’은 살인마가 새로운 희생자를 찾기 위해 꺼내든 미끼이자, 셰르가 조심스레 소개하는 자신의 정체성이다. 이때 경찰이라는 단어는 살인마와 신입 수사관 사이를 단숨에 관통하며 그들을 하나로 연결짓는다. 그러나 이 연결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 담긴 공포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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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친근하고 쓸쓸한 감정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 영화에 복잡한 심경을 안고서 무언가라도 뱉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이토록 <소설가의 영화>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이렇게 편안하게 보아도 되는 걸까. 분명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극장을 나온 길수(김민희)가 홀로 복도를 서성일 때,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모습을 감출 때에, 마치 영화가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 말할 수 없이 쓸쓸해졌는데도, 어째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친근함과 편안함이 충만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질문이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나오며 떠올린 즉각적인 감상에 가까웠다.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세계를 줄곧 좇아온 관객에게 넌지시 대화를 걸어오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전작들과 새로운 영화를 비교하며 그 세계의 변화를 느껴보려는 관객, 그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걸 인식하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삶의 변화를 체감하거나 감지하게
'소설가의 영화'가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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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에덴을 상상하는 한 인간을 추방하려는 영화의 연약한 안간힘을 지켜본 것 같다.
숀 베이커 감독의 <레드 로켓>을 재고하는 길은 마이키(사이먼 렉스)의 경로를 그려보는 일이다. 시작은 그의 귀환이다. (스스로 말하길) 잘나가는 포르노 스타였던 그는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부인 렉시(브리 엘로드)와 장모 릴(브렌다 데이스)의 집으로 방금 막 되돌아왔다. 숀 베이커의 영화는 이따금 다른 곳에 있던 인물(들)이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서 서사의 물꼬를 트곤 했다. <탠저린>에서 라즈믹의 처갓집 식구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찾아오듯,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젠시가 퓨처랜드 모텔로 방을 잡아 들어오듯, 도착을 통해 하나의 갈래가 그어진다. 물론 이 도착은 정착이 아닌 기착이라 늘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다. 이는 (숀 베이커가 자주 그려온) 홈리스의 삶에 있어 불가피한 상태이기도 할 터이다. <레드 로켓>의 초반부에서 마이키 또한 텍사스에 도착한다.
'레드 로켓'에서 '야생성' 혹은 '야만성'을 처리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