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엘리멘탈>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6월14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24일째인 7월8일 토요일에 자신의 일일 최다 관객수(33만명)를 경신했다. 종전의 기록은 7월1일(개봉 17일차)의 28만명이었는데, 이 수치는 개봉 후 주말마다 우상향하는 중이었다. 개봉 31일차인 7월15일 토요일엔 그 기세가 26만명으로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이는 여전히 개봉 첫주 토요일의 수치(17만명)보다 높다. 이 숫자들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엘리멘탈>은 지금 역주행 중이다.
<엘리멘탈>과 관련해 두 번째 흥미로운 사실은 개봉 한달이 지난 시점에 새롭게 열린 특별 상영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극공감에프(F)관’이다. 이는 CGV에서 마련한 특별 상영으로, 7월15일과 16일 이틀간 수도권 5개 관에서 하루 1~2회차씩 진행됐다. 이 기획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MBTI 성격 유형 검사에 익숙한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것으로, 예매 진행 시 안내되는 ‘극 F인 웨이드에 공감하여 입장 시 휴지가 제공’된다는 멘트가 이 기획의 전부였다. 마치 <보헤미안 랩소디>가 국내에서 n차 관람으로 역주행에 성공했을 때 싱어롱 상영이 유행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치볼 필요 없이 다 함께 눈물을 흘리며 관람하는 ‘크라이-어롱’ 상영관이 <엘리멘탈>의 역주행과 더불어 등장한 것이다.
<엘리멘탈>의 역주행 수치와 MBTI 관련 특별관이 등장한 현상을 그저 재밌는 이야깃거리로만 소개하려던 것은 아니다. 대신 말하고 싶은 건 이 영화의 역주행이 정점에 달했을 때 마케팅으로 활용된 MBTI가, <엘리멘탈>을 향한 뒤늦은 환호의 근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극공감에프관은 단순 재밌을 것 같아서, 혹은 그저 MBTI의 인기를 빌려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엘리멘탈>이 품고 있는 주제의 메커니즘이 (젊은 세대가 특별히 열광하는) MBTI가 선사하는 재미 포인트와 궤를 같이하고 있기에 탄생한 무언가라는 것이다.
그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엘리멘탈>이 왜 한동안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지 못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두르고 있던 이민자 서사의 외피가 홍보 단계에서 지나치게 부각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의 입장에서 <엘리멘탈>이 지닌 외적 정보는 영화의 성격을 <미나리>와 같은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영화로 규정짓게 하는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피터 손 감독이 한국계 이민 가정 2세라는 사실이 그런 섣부른 짐작을 불러일으켰을 확률이 높다. 이는 감독의 입을 통해 설명되기도 한다. 피터 손은 디즈니 코리아 공식 유튜브의 ‘300만 관객 돌파 축하 영상’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자신의 영화를 규정짓는다. “<엘리멘탈>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신 부모님께 보내는 러브레터입니다.”
이런 규정이 옳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규정된 성격이 픽사 애니메이션에 대한 대다수 관객의 기대와 달랐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픽사 영화를 보면서까지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기를 원치 않는다. 걱정 없이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는 영화들만이 계속해서 관객의 선택을 받고 있는 요즈음의 상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유효한 사회적 메시지를 훌륭하게 전달하여 박수를 받았던 애니메이션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관객이 편히 찾게 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다룰 것이라 예상되는 영화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엘리멘탈>이 역주행하게 된 경위는 심플하다.
<엘리멘탈>이 사회문제를 다룰 것이라 예상하고 관람을 미뤘던 관객이, 이 영화의 진짜 매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뒤늦게 극장을 찾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엘리멘탈>은 이제 곧 픽사 스튜디오의 최고 흥행작이었던 <인사이드 아웃>의 흥행 기록(497만명)까지 넘볼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단순한 역주행을 넘어 이렇게까지 많은 한국 관객의 사랑을 받는 <엘리멘탈>의 진짜 매력은 무엇일까. 서두에서 밝혔듯, 그 중심엔 MBTI에 대한 한국인들의 각별한 사랑이 있다.
서로 다른 존재들간의 사랑
<엘리멘탈>은 불 원소 앰버와 물 원소 웨이드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다시 한번, 이 영화는 겉으로는 현실의 이민자 1세대의 정착기를 그린 작품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론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인물들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서로 다른 성질’이라는 개념이 MBTI의 핵심 전제이다. MBTI는 총 8가지 특성이 조합되어 인간의 성격을 구분 짓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특성의 퍼센티지에 따라 세분화할 여지가 있긴 하지만, MBTI는 하나의 특성이 50%만 넘어가도 대상자를 ‘특정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분류해버린다. 예컨대 F가 과반수인 인간은 모두 ‘F인간’이고, T가 과반수인 인간은 ‘T인간’이다. 이는 MBTI가 과도한 일반화라는 비판을 받는 주 근거이긴 하나, 동시에 애호가들의 열광 포인트이기도 하다. 특정 그룹에 속해 자신의 행동에 대한 공감을 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이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MBTI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엘리멘탈>은 매 장면이 공감의 순간들이다. 일단 4원소인 물, 불, 공기, 흙을 MBTI의 특성 중 하나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불 원소들은 불 100%인 불 인간이고, 물 원소들은 물 100%인 물 인간이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엘리멘탈> 속 캐릭터들은 대부분 극단적으로 일반화된 성격을 갖고 있다. 물인 웨이드와 불인 앰버는 말 그대로 성격이 물과 불 같다. 웨이드는 감정이 물처럼 잘 흡수되는 성질로 인해 쉽게 눈물 흘리고, 앰버는 불처럼 끓어오르는 성질을 억제하지 못하고 늘 폭발한다. 모든 상황에서 일관된 반응을 보이며 심지어 외모마저 일체화된 웨이드와 앰버는 그렇게 특정 성격의 대표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남은 것은 그들과 나,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들을 비교하며 우리를 이루고 있는 원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엘리멘탈>이 다른 사랑영화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이 설명되기도 한다. 로맨스영화는 주인공들이 서로 사랑하기 위해 넘어야 할 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 측면에서 불과 물의 관계처럼 극악의 상성인 앰버와 웨이드가 서로의 소멸까지 각오하며 마침내 서로를 품는 장면은 그들이 만든 수증기만큼이나 아름답다. 영화를 보며 계속해서 내가 아는 사람들을 떠올리던 우리는, 그 순간 내가 도저히 품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누군가를 떠올린다. 내가 생각하는 MBTI의 가장 큰 순기능은, MBTI가 내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것. 그 사람을 이루는 원소와 나를 이루는 원소의 배합률이 다를 뿐이라는 것. <엘리멘탈>은 그렇게 ‘요즘 관객’들의 마음을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