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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이야기가 메마르고, 질문이 없어진 자리에서 묻다
온몸이 마비된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작)의 육체가 발가벗겨진 채 의자에 묶여 있다. 런웨이 무대처럼 길게 뻗은 테이블 맞은편엔 하코넨 남작(스텔란 스카스가드)이 전리품을 감상하듯 적수의 패배를 음미 중이다. 축 늘어진 빨래마냥 의자에 간신히 걸쳐 있음에도 레토 공작의 몸은 잘 빚은 조각품처럼 탄탄한 생기를 잃지 않는다. 이윽고 하코넨 남작이 풍선처럼 괴이한 몸을 띄운 채 허공을 미끄러져 다가오자 레토는 마치 황소를 잡는 투우사처럼 이빨 사이 감춰두었던 독안개를 뿜는다. 넓고 황량하고 검은 방은 순식간에 독 안개에 뒤덮이고 어느새 현장을 벗어난 카메라는 바깥에서 문이 닫히는 걸 가만히 지켜본다. 마치 무대의 막이 내리듯. 하나의 세계가 종언을 고하듯. 눈꺼풀이 감기듯.
황망한 기습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레토가 하코넨과 대치하고 마침내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이 시퀀스는 한폭의 그
3인3색 비평, 송경원 기자의 '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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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이 21세기에 부활한다면
인간을 중심에 두는 드니 빌뇌브의 스펙터클과 <듄>의 사막
드니 빌뇌브와 크리스토퍼 놀란이 친밀한 관계라는 말을 들었다. 연출자의 궤적을 보면 비슷한 부분이 많은 두 사람이다. 각각 캐나다와 영국에서 작은 영화로 시작했지만, 영화적으로 인정받으면서 할리우드로 이동해 점점 더 대작의 영역을 장식하는 감독으로 변했다. 윌리엄 와일러가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를 못 이기는 것처럼, 구로사와 아키라가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를 못 이기는 것처럼, 페데리코 펠리니가 루키노 비스콘티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못 이기는 것처럼, 스펙터클을 추구한 감독일수록 현혹의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스펙터클이 죄는 아니다. 스펙터클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어쩌면 죄의 명목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스펙터클을 정의하려는 의도는 없다. 말하려는 것은 빌뇌브의 스펙터클이다. 나는 그의 스펙터클이 놀란의 그것이나 그들의 위대한 선배인 스탠리 큐브릭의
3인3색 비평, 이용철 평론가의 '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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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를 넘어설 각오가 필요해
프랭크 허버트의 <듄>영상화와 관련된 신화와 진실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1965년에 처음 출간된 뒤로 두 가지 미신을 끌고 다녔다. 하나는 SF 역사상 최고 걸작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화가 불가능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듄>이 최고의 SF 소설 또는 소설 중 하나라는 주장은 거의 직관적으로 반박될 수 있다. 일단 몇 페이지만 읽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대단한 야심작이기는 하다. 적어도 첫 번째 책은 재미있다. 장르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하지만 걸작이 되기엔 문제가 많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책이 결국 한 무더기의 패스티시 덩어리라는 것이다. <듄>의 세계는 어떤 곳인가. 인류가 항성간 여행을 통해 전 은하계를 커버하는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 세계에서 백인 남자들이 공후백자남 놀이를 하며 만년의 시간을 날리고 있다. 이 자체가 통탄할 일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
3인3색 비평, 듀나 평론가의 '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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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이 창궐한 시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집과 근무지 사이만 맴도는 생활을 하다 보니 변화라는 건 당최 감지할 수가 없다. 영화만이 변화를 인지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도 그 통로의 갈래 중 하나였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변하는 것들을 문득 떠올리게 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덕수궁 돌담길 같은 것이다. 돌담길 곁을 수없이 지나는 동안 어린아이는 키가 좀더 자랐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여러 차례 바뀌고, 청년은 노인이 되고,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다시 돌아왔다. 변하는 것들은 박형서 작가의 산문집 제목 <뺨에 묻은 보석>의 보석처럼 여느 때는 알지 못하다가 덕수궁 돌담처럼 변하지 않고 계속 버티고 서 있는 존재를 의식할 때 뺨을 한번 훑어보면 언제 어디서 흘렸는지 없어져 있다. 공연히 애꿎은 빈 볼만 매만질 때 느끼는 감정은 기쁨이나 환희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회한, 그리움, 씁쓸함에 더 가깝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이별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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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산골영화제는 2019년부터 상영작에 대한 비평적 지지를 통해 영화제의 생산적 역할을 강화하고, 영화비평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비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영화평론가상"을 신설했다.
2021년 제9회 무주산골영화제의 세 번째 영화평론가상 수상의 기쁨은 이동우 감독의 <셀프-포트레이트 2020>에게 돌아갔다.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남다은, 이나라, 이도훈 평론가는 영화제 이후 수상작을 포함하여 이란희 감독의 <휴가>와 권민표, 서한솔 감독의 <종착역>에 대한 비평을 각각 작성했다.
씨네21는 무주산골영화제가 보내온 영화평론가상의 결과물인 3편의 비평을 소개한다. 동시대 한국영화를 대표할 만한 3편의 영화를 깊이 들여다보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2021년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으로 이동우의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선정되었다. 심사과정에서 이 영화와 함께 최종까지 언급된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남다은 평론가의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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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산골영화제는 2019년부터 상영작에 대한 비평적 지지를 통해 영화제의 생산적 역할을 강화하고, 영화비평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비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영화평론가상"을 신설했다.
2021년 제9회 무주산골영화제의 세 번째 영화평론가상 수상의 기쁨은 이동우 감독의 <셀프-포트레이트 2020>에게 돌아갔다.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남다은, 이나라, 이도훈 평론가는 영화제 이후 수상작을 포함하여 이란희 감독의 <휴가>와 권민표, 서한솔 감독의 <종착역>에 대한 비평을 각각 작성했다.
씨네21는 무주산골영화제가 보내온 영화평론가상의 결과물인 3편의 비평을 소개한다. 동시대 한국영화를 대표할 만한 3편의 영화를 깊이 들여다보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프롤로그
어떤 영화들은 우리의 시선에 사라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남긴다. 이동우의 영화가 그렇다. 펑크밴드 스컴레이드의 멤버이기도 한 이동우의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셀프-포트레이트 2020> : 불타는 우정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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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의 초반부는 전학생 시연(설시연)이 사진 동아리 ‘빛나리’ 부원인 세 친구 틈으로 합류하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시연이 동아리실로 들어서고, 화면의 왼편에서는 눈에 처음 렌즈를 끼느라 긴장한 송희(한송희)와 렌즈를 직접 끼워주는 연우(배연우),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서서 상황을 중계하는 소정(박소정)이 있다. 렌즈가 떨어져 세 친구가 교실 바닥을 헤매자, 멀찍이 자리에 앉아 있던 시연이 그들쪽으로 다가가 휴대폰으로 빛을 더해준다. 덕분에 렌즈를 찾은 이들은 하던 일에 마저 돌입하고, 소정이 시연의 옆자리에 (그러나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으면서 한 프레임 내에 네 친구의 형상이 나란히 이어진다. 시연이 세 친구의 자리에 완만하게 입장하는 이 장면은 이들이 넷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이 거리 조절이라는 일상적인 방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증한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는 행위는 사춘기 여중생들이 미용에 갖는 관심을 드러내는 익숙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
'종착역'이 네명의 주인공을 담아내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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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넷플릭스는 극장과 대결한 적이 없었다. 심심한 저녁에 넷플릭스를 보는 관객의 기대와 극장을 찾아가는 관객의 기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넷플릭스 드라마의 흥행 요소는 영화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그것과 유사하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강점은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은 비교적 예측 가능한 서사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는 <오징어 게임>이 가진 장점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반복되는 기시감과 클리셰들은 텔레비전 드라마로서 크게 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징어 게임>은 단순한 서사와 눈을 끄는 미장센, 끝내 다음 화를 보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이 드라마에 팝콘 무비 이상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오징어 게임>의 장르적 단순함을 지적하고 싶다. <오징어 게임>은 <도박묵시록 카이지>나 <라이어 게임>과는 결이 다르다. <오징어 게임&g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 '인간수업' 때처럼 회피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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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산골영화제는 2019년부터 상영작에 대한 비평적 지지를 통해 영화제의 생산적 역할을 강화하고, 영화비평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비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영화평론가상"을 신설했다.
2021년 제9회 무주산골영화제의 세 번째 영화평론가상 수상의 기쁨은 이동우 감독의 <셀프-포트레이트 2020>에게 돌아갔다.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남다은, 이나라, 이도훈 평론가는 영화제 이후 수상작을 포함하여 이란희 감독의 <휴가>와 권민표, 서한솔 감독의 <종착역>에 대한 비평을 각각 작성했다.
씨네21는 무주산골영화제가 보내온 영화평론가상의 결과물인 3편의 비평을 소개한다. 동시대 한국영화를 대표할 만한 3편의 영화를 깊이 들여다보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한 편의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동원되는 용어들이 도리어 낭패를 부르는 경우가 있다. 권민표, 서한솔 감독이 공동 연출한 <종착역>이 그렇다. 이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이도훈 평론가의 <종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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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하 <샹치>)에서는 샹치(시무 리우)와 케이티(아콰피나)가 친구들 앞에서 지난 일을 얘기하는 장면이 두번 나온다. 한번은 영화 초반 샹치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 샹치와 케이티의 학창 시절을 말하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말미 샹치와 케이티가 영화를 관통하면서 겪은 무용담을 말하는 장면이다. 흔한 수미상관의 형식인데, 두 장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앞선 대화의 내용은 오로지 샹치와 케이티의 말로만 전해지지만 두 번째 대화의 내용은 관객도 같이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두 번째 대화에 이르기 전까지 모든 장면을 하나의 긴 플래시백으로 볼 여지도 있다.
이 판단은 <샹치>가 많은 플래시백을 품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 영화는 나아갈 만하면 한번씩 뒤를 돌아본다. 자주 뒤돌아보다 보니 샹치와 케이티가 친구들 앞에서 무용담을 얘기하는 장면이 지나갈 찰나 방금 전까지 보았던 것도 모두 플래시백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플래시백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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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병영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들을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D.P.>가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까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세대를 불문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모양새다. 최근 공군과 해군에서 연이어 성범죄 피해자들이 극단적 선택을 함에 따라 국민적 공분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드라마가 출시되었다는 점, 더불어 사실에 기반을 둔 김보통 작가의 탄탄한 시나리오가 큰 반향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탈영병 잡는 군무 이탈 체포조 안준호 이병 역을 맡은 배우 정해인의 연기 변신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가 전작 멜로드라마에서 보여주었던 달달한 연기와 다소 거리가 있는 무거운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는 세평이 있다. 그런데 사실 정해인은 이미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통해 군인 연기를 선보인 적 있다. 군대 내 인권침해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징역살이를 하는 유정우 대위 역을 잘 소화했다는 점에서 안준호 이병 역도 잘 소화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촬영이 시작될 무렵,
'D.P.'를 보며 군대가 좋아졌다는 착시에 대해 거듭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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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가 재미있게 잘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군 내부에 고착화된 부조리를 성공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D.P.>의 장점은 명확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군 내부폭력에 대한 신랄한 고발을 통해 공감과 호응을 일으킨다는 것. 여기에 버디물과 형사물을 섞어놓은 D.P.요원 안준호(정해인)과 한호열(구교환)의 활약상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다양한 군인 캐릭터, 군대 내 참으로 다채롭게 서식 중인 빌런들을 통해 끊임없는 잔재미를 선사하는 것도 즐거움의 요소 중 하나다. 한편 일부에서 제기되는 아쉬움들은 대부분 동전의 앞뒷면마냥 장점과 연결된다. 우선 군대 내 폭력을 전시하듯 반복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D.P.>에는 폭력적인 상황 그 자체를 전시, 과시하는 것 같은 태도가 깔려 있다.
이렇게 재미있어도 괜찮은가
'D.P.'가 너무 많이 보여주는 것과 끝내 드러내지 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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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종종 감춰진 진실을 찾아 끝내 드러내곤 하지만, 누군가 감춘 적이 없는데도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성실히 전하기도 한다.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2019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바쿠라우>는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기생충>이 한국의 반지하 문화를 모르더라도 세계 관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오늘날의 현실이라면, <바쿠라우>는 브라질의 정치사회적 실상을 모를 경우 존 카펜터 혹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영향을 받은 유혈 복수극으로만 보일 수 있다. 실태를 알고 보면 <바쿠라우>는 지금 거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야만의 현장이다. 중요한 점은, 이게 브라질 안에서만 끝나고 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브라질 동북부를 비추는 도입부에서 비포장길을 달리는 급수 트럭에 테레사(바바라 콜렌)가 타고 있다. 테레사는 백신 몇병을 구해 고향 마을 바쿠라우로 가는 길이다. 길에는 관을
'바쿠라우'가 브라질의 현실을 투영한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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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자마>를 처음 보았을 때 약간은 당혹스러웠다. 영화가 끝날 무렵 자마(다니엘 지메네스 카초)에게 가해지는 비쿠냐(마데우스 나츠테르가엘레) 무리의 느닷없는 처형. 이 장면의 서사도, 정서적인 흐름도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영화를 거듭 보며 깨달았다. <자마>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서사도, 정서도, 다른 무엇도 아닌 감각이라는 것을. 이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건’이라기보다 ‘자연현상’에 가까워서, 머리로 이해하거나 납득하는 대신 순수하게 관찰하고 감각할 것을 요청해온다. 그것들을 따라가며 체험하는 것만이 영화에 제대로 접속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 <자마>가 소환해 일깨우려는 감각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스멀스멀 다가오는 미지의 무언가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자마가 이곳에서 힘과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가 원주민의 뺨을 때
'자마'가 소환해 일깨우려는 감각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