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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극장 출구를 향해 나가는 다른 관객들을 보면서 저이들은 어떻게 저런 힘이 남아 있나 싶었다. 그것이 질문의 시작이었다.
<레벤느망>을 처음 본 날 탈진하고야 말았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몸이 축나버린 느낌이 들었다. 한 인물이 겪는 육체적 경험을 스크린 밖에서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다니. 극장을 나온 이후로도 한참 동안 손끝이 떨렸고, 이 영화를 반복해 본다 해도 두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감각이 그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듯했다. 영화를 관람하던 어느 순간부터 주먹을 너무 꽉 쥐었던 탓일 테다. 언제부터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주인공 안(안나마리아 바르토로메이)이 임신 중단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뜨개질 바늘을 몸 안으로 넣으려는 때, 객석의 여기저기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올 때, 나 또한 꼭 쥐고 있었던 주먹을 요란스럽게 떨며 안의 육체가 전하는 전압을 견뎌보려 했으니 말이다.
단어와
'레벤느망'의 몰입도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저항하고 싶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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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심판>의 판사는 기록 뒤에 숨겨진 진실을 위해 현장을 뛰어다닌다. 이는 분명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훼손하는 월권 행위이지만, 그 속에서 <소년심판>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소년심판>의 홍보 문구이자 주인공의 대사,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는 명백히 관객에 대한 도발이다. 사전 홍보만 보면 해당 대사가 마치 심은석(김혜수)이라는 인물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실제 그가 보여주는 행동은 소년범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곧 자세히 보겠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소년범이 저지른 행동의 진실을 밝혀내고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 최선의 처분을 고민하는, 차라리 ‘소년범을 사랑하는 판사’에 더 가깝다. 이렇게 <소년심판>측은 실제 인물과 맞지 않는 자극적인 대사로 드라마를 홍보했지만 그것을 넷플릭스 재생 건수를 올리기 위한 상술이라고만 하면 불공평하리라. 소년범을 혐오한다는 대사는 단순한 홍보 외에도 또 한 가지 중
'소년심판'이 지적한 사법제도의 모순과 한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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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마준보>를 비롯한 매체에 기고하는 일본의 영화평론가. 필자가 달아온 이 글의 영문 제목은 ‘You have No Time To Die in Squid Game’이다.
*이 글은 <오징어 게임>이 공개된 직후인 2021년 10월 초에 쓰였다.-편집자
<오징어 게임>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을 시작한 후 2주도 안돼 세계는 녹색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는 SNS의 세계, 라고 말해야 할까. 아직 일본에서 그 녹색 체육복을 입은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분명 핼러윈 시기에는 현실에서도 넘쳐흐를 거라 생각한다. 핑크색 점프 슈트와 함께 말이다. 어째서 <오징어 게임>은 이렇게나 급속도로 온 세상에 퍼지게 된 것일까?
A. 스토리가 재밌는가? - YES. 두말할 것 없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만큼 재밌다. 다 보고 나니 수많은 복선이 깔려 있었다는 걸 발견하고 다시 한번 보고 싶어졌다. ‘그
참신함과 익숙함의 조화라는 키워드로 읽는 '오징어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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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는 역시나 괴생물체와 만나고 탐색하고 동경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우정을 나눌 때 진정으로 생동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내게 <나이트메어 앨리>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최고작이 아니다. 물론 관객은 저마다 다른 판단을 내릴 것이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그에 대한 논의는 내게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못 된다. 오히려 영화를 본 순간부터 나의 관심을 강하게 잡아끄는 요소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영화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감지되는 어떤 ‘주저함’이다. 그래, 주저함. 몇번을 다시 보아도 나의 생각은 같다. 영화가 예정된 파멸을 향해 달려갈 때, 거기에는 나아가다 멈춰서고 나아가는 순간조차 발소리를 줄이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포착된다. 단순히 전개 속도가 느리다거나 톤이 건조하다는 뜻이 아니다. 파멸에 대한 저항. 추락을 향한 머뭇거림. <나이트메어 앨리>에 대한 나의 평가는 상당 부분 이러한 주저함과 관련이 있다. 이 글이 영화의 독
'나이트메어 앨리'의 서사와 정서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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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거듭 관람해도 등장인물들이 시침 떼고 식자재 거래를 마치 약물 거래 대하듯 하는 태도에 혀를 내두르는 건 변함이 없었다. 여기서 비롯한 심리적 반동은 이 영화가 무협이라는 판단으로까지 나아갔다.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본 덕(?)에 3막으로 이뤄진 작품에서 2막이 다 지나갈 때까지 이야기가 나아가는 길을 확신하지 못했다. 요리와 식재료를 소재로 한 작품은 아닐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요리 분야에 무지한 탓에 그때까지 트러플을 마약의 원료 정도로 짐작했다. 괴한들이 트러플 돼지를 훔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고, 롭(니콜라스 케이지)이 돼지를 되찾으려고 떠난 여정에서 파이트클럽을 방문하거나 모두가 쉬쉬하는 인물에게 다가가는 선택을 하는 일들을 근거로 누아르와 범죄 스릴러의 향취가 묻어나는 액션을 기대했던 것도 같다. 관객 사이에도 <존 윅>(2014) 같은 작품을 언급하는 것을 보니 혼자만의 오인은 아닌 듯했다. 아니, 이러한 오인은 분명 의도된 면이
'피그'가 그리는 요리 무협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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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세컨드>를 ‘장이머우의 <시네마 천국>’쯤으로 생각한다면 아쉬운 일이다. 오랜 시간 필름으로 작업해온 장이머우가 필름과 영화를 소재로 작품을 만든 이유를 생각해봤다.
오지 혹은 고립된 공간에 대한 장이머우 감독의 관심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는 공간 속에 운명처럼 갇힌 인간에게 극단의 정서를 입혀놓는다. 그들은 고립돼 외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건강하고 질기다. 장이머우의 카메라는 오지의 정서를 깊이 있게 표현해내기로 유명한데,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지점은 그가 카메라맨으로 참여한 천카이거의 <황토지>(1984)다. 영화의 엔딩에서 황하의 누런 격류가 도저하게 흐른다. 격류는 (믿음을 저버린) 팔로군 병사에 대한 그리움을 하얗게 태운 시골 소녀의 슬픔을 대신 품는다. 다시 오지로 카메라를 들이댄 <원 세컨드>의 주인공은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오지의 삶에 내몰린 자들이다. 문화대혁명 시기를 다루는 태도는 별반다르지 않지만,
'원 세컨드', 필름의 의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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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신선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작품과의 만남은 분명 반가운 경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학교는>은 그 즐거움을 오래 이어가지 못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의 4부쯤을 보며 생각했다. ‘꼭 12부작이어야 했을까?’ 그 후 같은 의문이 수차례 떠올랐다. ‘진정 12부작이어야만 했나?’ 그리고 11부가 끝나는 순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다고?” 물론 60분물 16부작 ‘미니시리즈’에 단련된 한국인에게 709분의 러닝타임이 절대적으로 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우학>은 질주하는 좀비 떼의 속도와 별도로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유독 강한 인내심이 필요한 시리즈다. <씨네21> 송경원 기자는 1342호에서 “이 빤한 시리즈의 속도는 약간 이상하다”라고 지적하며 “의도와 달리 전체적으로는 그렇게 빠르다는 인상을 받지 못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에피소드들이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이 원작 웹툰에서 버리고 취한 것들이 만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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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의 ‘비극’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다 실로 가까운 곳에서 그 비극을 보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또다시 스크린으로 옮겨진다 해도 우리는 더이상 놀라지 않는다. 그의 희곡들은 스크린 위를 끈질기게 파고들었고, <맥베스> 또한 수차례 영화화되었다. 그중에는 오손 웰스, 로만 폴란스키,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진지한 거장들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조엘 코엔이 이 유명한 비극을 다시 영화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저 거장들 못지않게 양식적인 작품을 만들어왔지만, 그들과는 달리 빼어난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코엔 형제의 형 조엘이 과연 어떤 모습의 비극을 완성해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사실 코엔 형제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장르영화의 문법만큼이나 문학작품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형제는 제임스 M. 케인과 레이먼드 챈들러
'맥베스의 비극' 조엘 코엔이 만들어낸 비극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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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어떤 틈새들을 생각하며 ‘구찌’가 걸린 아이러니의 덫은 무엇일까 곱씹어보았다.
<하우스 오브 구찌>에는 톰 포드가 등장한다. 당시 톰 포드는 구찌가 낡고 한물간 브랜드로 쇠락해갈 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아 반등의 기회를 마련하면서 스스로도 유능한 디자이너로 인정받았고, 영화에도 이에 관한 일화가 삽입된다. 사실 포드 개인에 관한 서사는 그다지 많이 할애되지 않아 그저 소소한 에피소드쯤으로 그치는 듯한 인상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존재가 패션에 다문한 관객층을 위해 새겨진 이스터 에그 정도로만 기능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관객 개개의 배경과 맥락에 따라 정보의 입지가 달라진다는 엄연한 사실 위에서) 파트리치아나 마우리치오, 알도, 파올로의 이름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조금 생소하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이름이 ‘이름’ 이상으로 받아들여질 때는 성(姓) 구치를 함께 언급할 때이며 심지어 그럴 때조차 그들의 존재감은 브랜드 구찌라는 네
'하우스 오브 구찌', 구치는 어떻게 구찌에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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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이항의 대립 관계에 관한 영화다. 스필버그는 인종과 인종, 토착민과 이민자, 가진 자와 없는 자, 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관계를 단순한 대결 구도로 재현할 마음이 없다.
뛰어난 예술 작품은 또 다른 창작의 토양이 된다. 무대에서 위대한 뮤지컬의 여정을 밟아온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아서 로렌츠의 책에 제롬 로빈스와 레너드 번스타인, 그리고 젊은 시절의 스티븐 손드하임이 가세한 뮤지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의 옷을 입는다. 어니스트 리먼이 작가로 참여한 영화 버전이 거둔 성공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뮤지컬과 별개로 1960년대부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교향적 무곡>을 수차례 녹음했던 번스타인은 1984년에 키리 테 카나와와 호세 카레라스 등을 불러들여 스튜디오 버전의 2장짜리 음반을 만들었다. 어떤 관객은 그 음반이 사운드트랙인 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개성 넘치는 변화를 가져온 음반은 앙
스티븐 스필버그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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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문연구원 우주탐사그룹 선임연구원. 영화 속 혜성 충돌은 오늘날 우리 인류가 맞닥뜨린, 그러나 애써 무시하고 있는, 전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문제들로 치환해볼 수 있다. 위기의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대처하는 자세는 비슷할 것 같다.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돈 룩 업>을 봤다. 영화를 먼저 본 지인들은 내게 구체적인 힌트는 주지 않고 추천만 했다. 재밌는데 무섭다고 했다. 과학자와 정치가가 등장한다는 말에, 그거 참 재밌겠다 싶어 무선 이어폰을 끼고 개수대 맞은편에 태블릿을 올려두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고무장갑을 꼈다. 여느 때처럼 설거지를 해치우는 동안 가볍게 영화나 보며 집안일의 지겨움을 쫓을 요량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찻주전자에 물이 끓는 휘파람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공포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찰나, 뜨거운 차 한잔과 간식을 들고 모니터 앞에 앉아 음악으로 지루함을 쫓으며 관측을 시작하는 천문학자가 보였다. 아니구나. 곧이어 기이한 소
천문학자가 본 '돈 룩 업', 신중한 과학적 묘사보다 눈길을 끈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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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두운 시기에 이 영화를 보고 위로를 받았다. 처음엔 끔찍한 상상이 제공하는 웃음을 통해, 마지막엔 기도로.
애덤 맥케이의 모든 작품을 보지는 못했음을 고백한다. 다만 그의 널리 알려진 최근 두 작품 <빅쇼트>와 <바이스>만을 놓고 생각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특징 하나는, 영화가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제4의 벽을 넘고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이나 커트(제시 플레먼스)처럼 픽션 속 캐릭터가 관객을 향해 자신의 속마음을 직접 밝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빅쇼트>에선 이상한 표현이지만 ‘배우 마고 로비가 마고 로비로 등장’하여 어려운 경제 용어를 설명하기까지 한다. 오직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자료화면 같은 이 신은 사실상 그대로 들어낸다 하더라도 극의 전개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혹은 극단적으로 말해 자막 처리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자막 자체가 시간의
'돈 룩 업'에 즐비한 들어내도 되는 장면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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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시리즈의 팬으로서 이번 영화에 대해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에 대해서 짚어보았다.
과거의 대중문화들이 현재로 다시 소환되고 있다. 사이먼 레이놀즈의 저서 <레트로 마니아>에 달린 부제처럼 ‘중독’에 가까운 수준으로 말이다. 음악으로 국한해서 보자면 ‘쎄시봉’을 필두로 7080이 붐이었다가 ‘토토가’의 90년대를 거쳐 이젠 ‘싸이월드’의 2000년대 초중반까지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닿을 곳까지 왔다. 콘텐츠를 향유했던 장소는 물리적 공간에서 가상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공간에서의 공통의 추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가 마지막 시기이자 무대가 아닐까 싶다. 그 시기에 진행된 PC의 광범위한 보급과 이후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콘텐츠를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즐기게 되었고 사회는 전보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되기 시작한다.
이 마지막 시기에 등장했던 영화 중 문화 현상을 일으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실패한 속편이 된 두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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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뭘 믿고 살아요?” “그건 저도 모르죠.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아죠.” 믿음을 잃은 사제에게 건네는 정신과 의사의 이 말이 어쩐지 조용한 위안으로 다가왔다.
무표정한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안, 한 남자가 흐느낀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고 적막만이 그의 울음소리를 감싼다. 남자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근처 승객들에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여러 번 외쳐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의 울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을 때, 건너편 창가에 앉은 다른 남자가 말한다. “불쌍한 인간. 자기 집에서 슬퍼할 것이지 왜 여기서 저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끝없음에 관하여>를 만들기 이전 15년에 걸쳐 로이 안데르손 감독이 선보여온 ‘인간 3부작’을 가득 채운 불안과 소외의 정서를 드러낸다. 안데르손은 ‘인간 3부작’을 통해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삶의 부조리를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도시의 냉담한 풍경을 그
작은 몸짓: '끝없음에 관하여'가 보여준 삶의 단면들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