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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이나 꿈이 아닌, 순수한 내면이 감지되는 영화다. 구닥다리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완전히 현대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토록 쿨한 흑백영화라니.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저 권투 선수가 코뮤니스트라던데?”라고. 이들의 대화에 영화는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 만일 올리 마키(야르코 라티)의 관점에서 지난 상황을 되돌아본다면, 이야기의 굴곡이 더 강해질 것만 같다. 미국의 복싱 챔피언을 무너뜨리는 국가적 영웅의 위상을 포기하면서까지 그가 얻고자 한 성취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지방의 제빵사 출신 아마추어 권투 선수가 스타가 될 찰나에, 그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언뜻 전기영화의 방식을 취한 듯 이야기가 나열되지만, 결과적으로 짐작하지 못한 방향에서 플롯은 무너진다. 그리고 처음 접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전체가 재조합된다. 흑백 화면의 사실적인 질감은 이 과정에서 드라마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흑백의 감각적 비주얼이 정서
이지현 평론가의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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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품이 지닌 결여가 다른 작품에는 과잉돼 있다. 또 충만함은 결핍돼 있기도 하다. 우연찮게 유사한 시기에 방영된 두 드라마를 번갈아 보면서 뜻 모를 균형감을 느꼈다.
임지은의 시 <대체>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행을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있다면/ 여행도 여행을 떠날 거에요.” 그리고 시의 후반부는 이렇게도 말한다. “모든 게 빠르게 수리되는 세계에서/ 여행은 얼마간 고장이라는 말로/ 대체될 거라더군요.” 시집에 수록된 해설도 동의하는 바대로 이 시는 언어의 고정된 의미를 떠나 새로운 지점에 안착하는 시의 본질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여행’이 ‘고장’으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또 <우리들의 블루스>는 ‘여행’은 자고로 ‘여행’이라고 강조하는 드라마다.
시 또는 연구 보고서
수많은 사람이 언급한, ‘추앙’이라는 말의 새로운 용법이 가리키는 것처럼 <나의 해방일지>는 지금껏 한
김성찬 평론가의 '나의 해방일지' '우리들의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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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디아스포라적 고민을 부자 관계로 풀어낸 작품이라면, <애프터 양>은 그것을 인간과 안드로이드간의 차이를 통해 그린 작품이다.
코고나다 감독이 연출한 <애프터 양>의 오프닝 시퀀스는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한 다문화 가족이 가족사진을 찍고 식사를 한 뒤, 함께 춤을 춘다. 경쾌한 전자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다양한 4인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가 시작될 때, 분명 처음 접한 비주얼이 ‘신선하다’는 감상을 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단순하다. 오프닝의 춤을 본 순간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같은 감독의 작품 <파친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나친 끼워 맞추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댄스 시퀀스가 끝나면 약간의 작동 오류, 즉 춤을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하는 증상을 보였던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H. 민)이 갑자기 작동을 멈춘 상태로 한 남자의 어
김철홍 평론가의 '애프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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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은 세상의 악을 모두 물리치겠다는 욕망을 분출하고, 관객은 주먹의 효과음에 도취된다. <범죄도시2>를 보는 데는 어떠한 상상력도 필요하지 않다.
마석도 형사(마동석)는 도주한 용의자를 인도받으러 베트남으로 떠난다. 무시무시한 사건이 바탕인 영화인데 분위기는 유쾌하다. 슈퍼히어로급 인물이 주인공이니 두려운 마음이 생길 틈이 없다. 유머러스함은 되레 늘었다. 마 형사가 용의자와 만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타지라서 ‘진실의 방’을 찾지 못한 그는 음향과 분노라는 새 방식을 구한다. 그가 탁상을 두드리면 엄청난 음향이 울려 퍼진다. 어디서 공룡이 다가오나 싶은 소리, 그 분노의 소리에 기겁한 용의자는 진실을 털어놓는다. <범죄도시2> 제작진은 전편과 비교해 훨씬 강력한 사운드 효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듯하다. 그 결과, 리얼리즘 영화가 속편에 와 <원펀맨> 수준의 판타지로 변했다. 마동석은 짧은 시간에 스스로 장르를 일군 배우다. 관객이 그의
이용철 평론가의 '범죄도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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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나무라는 빈틈을 찾아낸 것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한국의 재개발 다큐멘터리는 그동안 무엇을 담아왔을까? 재개발 지역으로 선포되고 자신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의 상실감과 주거권을 위한 투쟁의 장을 먼저 담아내왔다. 그런데도 그곳에 가장 먼저 지워지는 존재는 사람이었다. 재개발 지역은 건물 벽면에 스프레이로 적힌 단어대로 ‘공가’가 된다. 카메라는 아직 떠나지 못한 존재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영역성 동물인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움직이지 않는 사물에도 관심을 보였다. 아파트 내부나 곧 철거될 건물의 불안감을 담아내는 재치도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 감독의 모습도 다양해졌다. 한때 감독은 주민들과 함께 투쟁하는 카메라를 든 액티비스트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다 어느새 카메라 앞에서 뒤로 물러나며 최근엔 비인칭적인 시선으로 재개발 지역을 담아내며 현대미술 작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화 제목은 비워뒀다. 수많은 영화가 스쳐 지나갔
오진우 평론가의 '봉명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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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리듬이 좋고, 대사가 좋은 영화다. 짧고 일상적인 문장이 리듬을 형성한다. 영화 전체가 마치 하나의 음악 같다.
누군가 ‘러브 게임’이라 불러도 상관없을 정도로 <파리, 13구>의 인물들은 소란스럽다. 에밀리(루시 장), 카미유(마키타 삼바), 노라(노에미 메를랑), 세 사람의 모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각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친구’나 ‘연인’이란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에밀리는 “장례식에 참석하면 우린 사귀는 거야”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효력도 믿을 수 없다. 실상 영화 속의 인물들과 ‘약속’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노라와 앰버 스위트(카미유 베토미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잘 지낼 수 있을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 후자의 커플은 ‘한동안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게 만든다. 참으로 이상한 상상이다. 긍정의 대사를 듣고 파탄을 수긍하게 되고, 육체가 쓰러지는 추락의 장면을 보고 행복을
이지현 평론가의 '파리, 13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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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도식성이 아니라 그를 통해 표현되는 삶의 무게와 다양성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생방송 5분 전, 방송국 간판 앵커 세라(천우희)는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제보 전화를 받는다. 장난전화로 여기고 무시하려 했지만 찜찜함을 거둘 수 없었던 세라는 이것이 너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엄마 소정의 말을 듣고 제보자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제보자와 어린 딸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 정도면 정지연 감독의 <앵커>가 하려는 이야기의 방향성이 그려진다. 살인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추리물이 될 것이고,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기자로도 인정받으려는 세라의 야심은 오히려 이 추적에 방해가 될 것이고, 범인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고, 클라이맥스는 방송국의 생방송 현장에서 벌어질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난다. 단지 우리가 예상했던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영화의 예고편이 나오는 순간부터 허물어진다
듀나 평론가의 '앵커', 우린 아직 이 이야기에 지칠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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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포착하는 진정한 공포의 실체에 가까워지기 위해 글을 썼다.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은 오프닝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참혹한 살인이 벌어지는 현장. 한 소녀가 겁에 질린 채 그 광경을 훔쳐보고 있다. 살인을 마친 살인마는 유유히 희생자의 집 밖으로 빠져나와 담배를 피운다. 바로 그 순간 실수로 인기척을 낸 소녀. 소리를 감지한 살인마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희생자의 집 문을 두드린다. 짐짓 정체를 숨긴 채. “문 열어. 경찰이다.” 장면이 전환되면, 신입 수사관 셰르(아스카르 일리아소브)가 경찰서에 첫 출근한다. 그가 선배 경찰들에게 꾸벅 인사한다. “수습으로 일하게 된 셰르입니다.”
이 인상적인 장면에서 ‘경찰’은 살인마가 새로운 희생자를 찾기 위해 꺼내든 미끼이자, 셰르가 조심스레 소개하는 자신의 정체성이다. 이때 경찰이라는 단어는 살인마와 신입 수사관 사이를 단숨에 관통하며 그들을 하나로 연결짓는다. 그러나 이 연결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 담긴 공포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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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친근하고 쓸쓸한 감정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 영화에 복잡한 심경을 안고서 무언가라도 뱉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이토록 <소설가의 영화>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이렇게 편안하게 보아도 되는 걸까. 분명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극장을 나온 길수(김민희)가 홀로 복도를 서성일 때,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모습을 감출 때에, 마치 영화가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 말할 수 없이 쓸쓸해졌는데도, 어째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친근함과 편안함이 충만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질문이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나오며 떠올린 즉각적인 감상에 가까웠다.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세계를 줄곧 좇아온 관객에게 넌지시 대화를 걸어오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전작들과 새로운 영화를 비교하며 그 세계의 변화를 느껴보려는 관객, 그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걸 인식하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삶의 변화를 체감하거나 감지하게
'소설가의 영화'가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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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에덴을 상상하는 한 인간을 추방하려는 영화의 연약한 안간힘을 지켜본 것 같다.
숀 베이커 감독의 <레드 로켓>을 재고하는 길은 마이키(사이먼 렉스)의 경로를 그려보는 일이다. 시작은 그의 귀환이다. (스스로 말하길) 잘나가는 포르노 스타였던 그는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부인 렉시(브리 엘로드)와 장모 릴(브렌다 데이스)의 집으로 방금 막 되돌아왔다. 숀 베이커의 영화는 이따금 다른 곳에 있던 인물(들)이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서 서사의 물꼬를 트곤 했다. <탠저린>에서 라즈믹의 처갓집 식구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찾아오듯,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젠시가 퓨처랜드 모텔로 방을 잡아 들어오듯, 도착을 통해 하나의 갈래가 그어진다. 물론 이 도착은 정착이 아닌 기착이라 늘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다. 이는 (숀 베이커가 자주 그려온) 홈리스의 삶에 있어 불가피한 상태이기도 할 터이다. <레드 로켓>의 초반부에서 마이키 또한 텍사스에 도착한다.
'레드 로켓'에서 '야생성' 혹은 '야만성'을 처리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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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상수의 영화에 관해 쓰면서 이런 경고 문구를 넣어야 하나 고민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영화관의 관객이 백지상태의 얼얼함을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믿기 어렵겠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끝을 맺는 반전(反轉) 영화다. 이때 반전이란 서사의 비밀을 뒤늦게 노출하는 방식에 관한 것일 리는 없다. 반전은 영화의 구조에서 온다고 정리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영화는 구조 자체가 두드러지기보다 마지막에 이르러 구조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것은 퇴로가 보이지 않는 영화라는 구조다. 반전은 구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조가 곧 반전이다. 구조를 만든 것은 두번의 크레딧이다. 크레딧은 잠깐의 사이를 두고 두번 이어진다. 크레딧이 두번 혹은 그 이상 흐른대도 이상한 건 아니다. 옴니버스영화의 경우 개별 영화가 끝날 때마다 크레딧이 흐른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카리스마의 형식으로서 영화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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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지닌 애도와 위로의 힘이 꽤 고맙게 느껴졌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패러렐 마더스>는 주인공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스)가 고향의 집단 무덤을 발굴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발굴에 성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다. 그 과정 중간에 자리한 ‘뒤바뀐 아이’ 클리셰는 알모도바르식 서스펜스를 위한 장르적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풍긴다. 그럼에도 알모도바르는 기어이 (집단 무덤 발굴 서사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아이가 바뀐 야니스와 아나(밀레나 스밋)의 관계를 쌓아나간다. 영화는 두 어머니가 아기를 갖게 된 사연을 의도적으로 축약한 뒤 두 어머니를 마주치게 만든다. 예컨대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니스와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가 은막을 닮은 하얀 커튼이 나부끼는 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꿈결처럼 지나가면, 어느새 야니스는 출산이 임박한 임신부가 되어 병실에 있다. 그곳에서 야니스는 어린 임신부
'패러렐 마더스'가 죽음을 잊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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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두고 에릭 로메르를 언급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 글에도 썼듯이 기원을 따지기보다 단독 작품으로 살피는 게 더욱 영화와 맥을 같이한다고 믿는다.
영화 후반부 배우이자 축제에서 바텐더 일을 하는 아고스의 딸 비올레타가 임신한 에바(잇사소 아라나)에게 아이의 아빠가 누구냐고 묻자 에바는 아빠가 없다고 말한다. 비올레타가 동정녀 마리아 같은 거냐고 되묻자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 대화가 종지부를 찍기 조금 앞서, 에바의 입에서 임신 사실이 탄식하듯 나오면서부터 영화는 재정립되기 시작한 터다. 영화 제목이 ‘어거스트 버진’인 이유, 배경으로 기능하는 8월의 성모승천 대축일 광경, 에바가 박물관에서 임신 중 네로에게 살해당한 포파이아의 흉상을 물끄러미 보던 장면, 또 등장인물들과 나눴던 생리, 달, 육아, 임신에 관한 이야기 등도 아귀가 맞는다. 그런 점에서 아이의 아버지는 영화관 앞에서 우연히 만난, 3개월 전 헤어진 남자 친구인 듯 암시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합리적인
'어거스트 버진'이 시공간을 재창조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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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배신으로 가닿은 절벽 너머에도 삶이 있음을, <사랑 후의 두 여자>를 보며 깨달았다.
슬픔을 가눌 수 없다. 기도에 신이 응답할 리 없다. 신의 목소리 대신 여자에겐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절벽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 하지만 백악의 절벽은 붕괴하고 회벽의 천장은 무너지는 중이다. 이것은 메리의 환상인가? 회복될 수 없는 상실 이후 고요히 그녀의 삶은 해체되고 있다.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는 영국의 신예 알림 칸의 장편 데뷔작이다. 단편 <삼형제>(2014)로 주목받은 후 BBC필름과 영국영화협회의 지원으로 제작된 영화는 영국독립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주연을 맡은 요안나 스찬란은 런던비평가협회상을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무너져내린 절벽 가까이
영국계 백인 이슬람교도 메리(무슬림 이름으로는 파히마)는 남편 아흐메드의 유품을 정리
'사랑 후의 두 여자'가 절망에서 연대로 나아가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