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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를 보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에 대한 표준적인 평가와는 무관한 생각이다. 특별히 제목에 ‘아이’라는 단어가 명시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신카이가 전작에 이어 버려진 아이들을 스크린에 들여온다는 점에 이끌렸다. <너의 이름은.>에서 어머니가 없는 가족의 형태로 예고되었던 미묘한 고아의식은 이 영화에서 부모로부터 방치된 아이, 버려지거나 갈 곳을 잃은 아이들의 모습으로 전면에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아이들은 도피와 순응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야기상의 불가피한 결과였다면 이는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영화는 어른의 규칙에 진입하기 전 단계의 아이들이 교환하는 감정과 행동에 주목한다. 서둘러 말하자면, <날씨의 아이>는 버려진 아이와 괴물이 된 아이가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계의 빈틈을 응시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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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의 연장선에서 생각하는 <날씨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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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계선>에 대해 말하면서 ‘아름답다’는 표현을 써도 될까? 극장을 나오면서 이 질문이 자꾸 마음을 눌렀다. 사실 잘 모르겠다. 이 질문을 뒤집어본다. <경계선>을 아름답지 않은 영화라고 말해도 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답해야 한단 점이다. 몇몇 화면들이 꾸준히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토록 불쾌한 모습에서도 관객은 조금씩 감동적인 정서를 느끼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꼽자면 물속에서 상대를 끌어안고 포효하는 두 남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장면은 사랑하는 연인을 그렸다기보다는 흡사 포효하는 동물의 에너지를 표현한다. 사실 <경계선>은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패러독스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티나(에바 멜란데르)의 얼굴이, 그리고 보레(에로 밀로노프)의 표정이 기존 영화에서 보지 못한 ‘추(醜)의 미학’을 직접 드러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경계선>의 원작은 욘 아이비데 린드크 비
<경계선>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해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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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은 ‘영화’비평이 불가능하도록 찢긴 영화다. 영화의 운명은 영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영화는 영화를 수용하는 사람에 의해 재창조되기 마련이다. 영화의 텍스트성이라 할 이것이 대개는 새로운 담론을 탄생시키는 긍정적인 행위라고 나는 여겨왔다. 그러나 영화를 둘러싼 이해할 수 없는 반응들은 때로는 수용자가 영화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행위가 내포한 부정적인 측면을 씁쓸하게 깨닫게 한다. 영화에 관한 생각은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를 보는 다른 시각을 던져주는 차원이 아니라 반대의 목소리마저 자신의 논리로 환원시키거나 영화를 왜곡한다면 그것은 묵과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영화를 둘러싼 오해와 논란들은 대부분 원작 소설 <82년생 김지영>으로부터 연속되었으므로, 논란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원작 소설을 언급해야 한다. 그중 서사를 둘러싼 대조적인 비판의 동시성에 관해 말해보려고 한다. 하나는
<82년생 김지영> 현실이 삼킨 존재를 비추는 허구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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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은 벌레를 먹지 않던 티나(에바 멜란데르)가 아기에게 벌레를 먹이며 끝나는 영화다. 티나가 트롤이라는 것은 티나의 독특한 외형이나 감정을 읽어내는 후각 능력으로도 표현되지만, 벌레에 주목하고 싶은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고독하게 서 있던 티나가 집어올렸다 내려놓은 벌레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다시 등장해 티나가 그것을 트롤 아기에게 먹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티나가 자신이 인간이 아닌 트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최초의 순간이 보레(에로 밀로노프)가 건네준 구더기를 먹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티나에게 벌레는 그의 취향이면서 본능이면서 곧 정체성인 셈이다.
그런데 벌레와 관련해서 한 가지 의아한 장면이 있다. 앞뒤 장면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아동 포르노 제작자의 살인 현장을 목격한 티나는 그 공간에서 보레의 냄새를 맡는다. (2) 보레는 티나에게 자신이 주기적으로 낳는 아기 모양의 난자 히시트를
<경계선>에서 티나는 왜 냄새를 맡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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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영화의 클리세가 지워진 영화, 그것이 바로 <하이 라이프>다. 클레르 드니는 일반적인 SF영화의 관습을 따라갈 마음이 없다.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는 우주선의 정원을 비추며 시작한 영화는 자신만의 창세기를 써내려간다. ‘종의 종말’의 위기, 새로운 ‘종의 기원’을 모색하는 창세기, 그것이 바로 <하이 라이프>다.
자폐적 욕망의 창조주
7호 우주선에 탑승한 승무원들은 모두 사형수다. 죽음이 예정된 이들은 ‘재활용’이라는 미명하에 우주 실험에 동원된다. 그들의 첫 번째 임무는 블랙홀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것이고, 두 번째 임무는 인공수정을 통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도구로서의 삶’을 택함으로써 죽음을 잠시 미룬다. 영화는 왜 그들에게 이러한 임무가 부여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어쩌면 이 임무 자체가 인류가 처한 위기의 징표일 것이다. 실제로 플래시백을 통해 보이는 지구의 풍경은 사멸의 계절을 맞은 듯 삭막하고 을씨년스럽다. 우주선 안에
<하이 라이프>, 새로운 창세기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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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최근 어떤 영화나 TV프로그램이 가장 재미있었냐는 내 질문에 한 친구가 “뉴스”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금세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떠한 영화도 그렇게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하루 만에 다 보여주지 못할걸?”
이때 특히 난처해지는 건 ‘사회고발’ 성격을 띤 영화일 것이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대신 현실이 영화를 앞서갈 때(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널리 알리려는 ‘고발’성 영화는 자연히 그 힘을 잃고 만다.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의 영화 <신문기자>는 그 난처함과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담고있다. 일본 정권에 쓴소리를 마다지 않던 기자 모치즈키 이소코의 동명 소설을 모티브로 한 <신문기자>가 다루는 소재, 그러니까 ‘현실’은 일본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지금의 전세계, 어느 국가의 이름을 붙인다고 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민간
영화 <신문기자>가 실화와 실화 바탕 소설과 어떻게 다른 길을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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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중년 남자들은 늘 쓸쓸해 보였다. <색, 계>(2007)의 마지막 장면,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는 국가, 정치, 신념, 권력이라는 거대 가치 속에 가까스로 고독한 자아를 감춰오다 왕치아즈(탕웨이)를 만난다. 진짜 자기를 알아본 유일한 타자, 그녀를 숙청함으로써 그는 “유일한 동지이자 적”을 잃는다. 이 영화의 길고 처절한 섹스 신은 에로틱한 감각을 자극하기보다 살아남기 위한 욕망 투쟁처럼 보였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인정하는 데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려버린 <브로크백 마운틴>의 애니스(히스 레저)도 마찬가지다. 그는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품었던 감정의 근원과 깊이를 헤아리게 된다.
자아와 자아 사이
리안의 영화에서 사회적으로 보이는 자아와 내적으로 감춰진 자아 사이의 간극이 빚어내는 존재론적 고독은 기본적으로 깔린 배경 같다. 쉴 새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날카로운
리안 감독의 <제미니 맨>이 서사를 단순화하고 액션을 추가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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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에서 엑스레이 사진은 기존의 목적과 다르게 사용된다. 인물들은 육안으로 확인 불가한 인간 내면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고 현상을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뼛속까지 드러난 부분적 신체들의 외적 행위에 주목한다. 즉 ‘밖에서 안으로’ 향해야 할 시선이 도리어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인물들의 시선은 섹스라는 자극적 정황에 현혹되어 외부로 향한다. 그들은 해당 사건을 쾌락적으로 소비하는데 이는 곧 행위의 주체를 찾는 ‘탐정 놀이’로 이어진다. 윤영(이주영)은 사진 속 주인공이 자신이라 의심하고 여러 버전의 사직서를 작성하며 퇴사를 고려한다. 반면 허락 없이 타인의 사생활을 기록한 촬영자는 이 과정에서 생략된다.
<메기>는 여러 내러티브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영화는 개개의 내러티브를 심도 있게 조명하기보다 주로 사건의 일면만을 제공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 일면들은 독창적인 위트와 재기발랄한 미장센을 통해 인물과 관객을 매료시킨다.
<메기>가 세상을 구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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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자이언트>를 접하는 순간, 우리는 두개의 과거 시간대 사이에 놓인다. 하나는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시기인 1999년, 즉 세기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1957년, 즉 냉전의 긴장이 한껏 팽팽해지던 때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21세기의 첫 20년에 다다르고 있다. 주인공이 겪는 1957년과 우리가 살고 있는 2019년 현재 사이에는 대략 60년, 그러니까 두 세대의 간극이 있고, 작품이 제작된 해와 아이언 자이언트가 지구에 불시착한 시기 사이에는 약 40년의 차이가 있으며, 첫 개봉 시기에서 2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영화관에서 이 작품을 접할 수 있다.
연착된 시간이 야기한 착시효과
그렇다면 <아이언 자이언트>는 뒤늦게 비로소 우리에게 당도한 것일까? 물론이다. 연착된 시간이 제법 길다. 그사이에 시네마는 바뀌었다. 물론 새로운 시네마는 <아이언 자이언트> 이전에 시작되었다. 바로 <토이 스토리&g
20년이 지나 우리에게 당도한 <아이언 자이언트>가 현재에도 유효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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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나 힐의 감독 데뷔작 <미드90>은 90년대 중반 미국 LA를 배경으로 한 13살 소년 스티비(서니 설직)의 성장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는 같은 시기 뉴욕 빈민가 10대 청소년들의 방황과 갈등을 그린 래리 클라크 감독의 <키즈>(1995)와 맥을 같이한다. 또한 그 이후에 만들어진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2003)와 <파라노이드 파크>(2007)를 떠올리게 한다. <미드90>이 흥미로운 것은 90년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비디오테이프의 4:3 화면비로 촬영했다는 것이다. 이 프레임은 인물을 집중해서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카메라는 주인공 스티비가 스케이트보드에 입문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변화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영화는 방에서 뛰쳐나오는 스티비가 그의 형 이안(루카스 헤지스)에게 붙잡혀 일방적으로 맞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왜 느닷없이 스티비가 맞는 장면에서 시작하는가? 이는 감독이 형
<미드90> 속 특정 상황이 반복되는 이유를 숙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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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재기발랄한 상상력’, ‘새로움’ 같은 것들이다. 평가의 주된 이유는 영화가 보여주는 유희적인 코드 때문이다. 유희의 감각은 전혀 다른 것들이 유사성의 목록 속에 배치되면서 두드러진다. 교회의 붉은 십자가와 병원의 녹색 십자가. 비슷한 색깔과 두께의 손반지와 발반지. 엑스레이와 우주선. 한국어, 영어, 한자어로 표현된 사직서. 그럴듯한 동시에 황당무계한 유사성과 차이가 웃음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러한 유희성의 형식들은 과연 생각만큼 새로운 걸까. 윤성호와 곡사를 들어 ‘유희적 모더니즘 세대’라고 통칭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문관규, ‘한국 독립영화에 나타난 자기반영적 미학과 희극 전략 연구’, 2012), 이들의 영화는 2000년대 작품들이다. 유희성을 분석할 때 활용된 자기반영성의 코드는 그보다 오래되었다. 우리는 마치 돌림노래 같은 유희성의 환영에 현혹되는 것은 아닌가. 유희성이 정말로 새로운 것이라면 우리는 유희의 변화상도 함께 생각
<메기>, 자유로운 목소리와 속박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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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헬터 스켈터>(1976)는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을 다룬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담당 검사였던 빈센트 불리오시가 직접 쓴 사건 일지를 바탕으로 톰 그리스가 TV용으로 만든 영화다.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건조하리만큼 또박또박 사건과 재판 과정을 기록했다. 찰스 맨슨이 2017년에 죽기까지 여러 인터뷰를 남겼기에 <헬터 스켈터>의 일부 진술 등은 시간이 흐르면서 진실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하 <인 할리우드>)가 당시의 시간과 사건에 다가서는 방식은 정반대다. 감독으로서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사건이 할리우드에 미친 영향이 왜 본격적으로 이야기되지 않는지 의문을 품는다. <헬터 스켈터>는 맨슨과 추종자들의 재판에 비중을 둔 작품이어서 폴란스키 부부측 인물에 대한 접근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슨 웰스 이후 최고의 천재가 창작의 곤혹을 겪었는데, 그 시간은 바로 미국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와 쿠엔틴 타란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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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블록버스터를 좋아하는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으나, <애드 아스트라>는 분명 제임스 그레이 세계의 자장 안에 있는 작품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주에서조차 제임스 그레이의 인장이 고스란히 찍힌 영화다. 오랜 시간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를 따라온 관객이라면 그가 SF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리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레이에게 장르영화를 만드는 세공술이 장기라면 인물들의 심연을 그리는 건 태생적인 재능이다. 그의 영화의 중핵은 언제나 인물들의 심연에 있었다. 그러니 장르의 외피에 상관없이 인물 내면의 심연에 몰두해온 감독이 우주라는 심연을 만난다면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자재로 유영하고 다니지 않을까, 하고 나는 내심 기대했다. 스스로의 좌표를 잃어버린 인물들이 광활한 우주를 부유하며 우리의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겠지. 표현하기도 힘든 감정들이 온 곳에 스며들어 눅진해진 몸을 의자에서 일으킬 수도 없게 만들겠지. 적재적소에 들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애드 아스트라>에서 다시 한번 이방인의 서사를 보여주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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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부, 배우지망생 파트너와 지루한 섹스를 치르면서 샘(앤드루 가필드)은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분산시킨다. 벽에 붙은 커트 코베인 포스터에 관해 이야기하고, TV에 나오는 도시의 대부호 제퍼슨 세븐스의 실종 뉴스에 눈을 돌리는 식이다. 산만한 보기, 또는 성기와 눈이 따로 움직이는 분열적인 신체의 활동이라 말하고 싶다. 이런 증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눈앞의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원인을 유추하는 것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분명치 않다. 이미지의 과포화 속에서 성애의 환상은 비루한 감각(너무 쉽게 ‘지리는’)으로 주어지고 있다. 섹스의 실패, 이것이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언더 더 실버레이크>가 제기하는 단순하지만 치명적인 구속의 상태다.
그들의 섹스가 불만족스럽다면 그건 무언가의 결여 또는 과잉으로 인한 결과인 걸까. 영화는 ‘왜’라는 문제를 질문하는 대신 샘이 처한 조건에서 몇 가지 변수를 작동시킨다. 첫 번째는 죽음과의 결합을
<언더 더 실버레이크>, 미스터리를 통해 이뤄낸 세계와의 접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