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태인(유아인)을 바라보던 영화가 블랙아웃된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이 잠깐 떠올랐다가 태인과 등장인물들의 한때 행복했던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에필로그로 이어진다. ‘블랙아웃-에필로그’ 방식은 여러 영화들이 영화를 마무리하며 활용하는 익숙한 방식이다. 그러나 <소리도 없이>에서만큼은 이 방식이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영화의 중반쯤 등장하는 즉석카메라로부터 비롯된다. 초희(문승아)의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창복(유재명)은 즉석카메라를 준비해온다. 그런데 창복과 태인이 카메라 작동법을 알지 못하자 초희가 직접 나서서 즉석카메라의 작동 원리를 알려준다. “원래 처음엔 까매요. 좀 있으면 사진 보이거든요.”
<소리도 없이>의 엔딩 방식은 즉석카메라의 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홍의정 감독이 태인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을 찍었더니, 잠깐 까매졌다, 한때의 행복했던 추억이 현상(現像)된다. 그러나 이 추억이 행복한 것이 맞는 것인지, 이 이야기가 이렇게 아름답게 포장돼도 되는 것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이 현상 자체는 명백한 오류처럼 보인다. 만약 마지막의 카메라가 태인의 머릿속을 찍은 것이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이 순간에 태인이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바로 직전 그가 판타지를 갖고 있던 양복을 버리는 모습에서, 오히려 이 모든게 환상이었다며 후회하는 쪽이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이때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존재는 누구였을까. 그런데 <소리도 없이>를 아름다웠다고 느끼는 것이 정상이긴 한 것일까. 아니 애초에 유괴범 이야기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이상한 것은 맞는 것 같다.
그것이 아름다웠다고 생각하는 존재
추억을 떠올리던 존재가 영화를 보고 있던 나(관객)는 아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가 이상하게도 그것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소리도 없이>는 관객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신기한 체험을 제공하는 영화다. 이는 다름 아닌 유괴범에게 감정 이입하게 만든다는 것인데, 영화에는 이를 위한 노력이 느껴지는 장치들이 있다. 촬영 과정에서 특히 많은 노력이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장면들은 유괴 과정의 배경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풍광들이다. 태인이 자전거 뒤에 초희를 태운 채 집에 돌아갈 때엔 어김없이 하루에 짧은 시간 동안만 허락된다는 ‘매직 아워’가 펼쳐지고, 그외의 일상적인 시간들에서도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맑다. 태인에게 초희 또래의 여동생이 있다는 설정은 관객이 태인에게 다가갈 수 있게끔 하는 또 다른 영리한 설정이다.
또 한명의 피해자인 줄 알았던 아이가 태인의 친동생으로 밝혀지는 순간, 태인은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은 사람으로 느껴지며, 무엇보다 사회 밖에 있는 태인이 초희에게 상식 이상의 마음을 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제거시킨다. 영화 중반 초희와 태인 일행이 평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유사 가족처럼 보이는 이유는 복합적이겠지만, 만약 이곳에 태인의 동생과 맑은 날씨가 없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영화가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유괴범의 사정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분명 <소리도 없이>가 이뤄낸 성취다. 그러나 민감한 만큼의 리스크가 있는 소재인 것도 사실이다. 관련하여 에필로그의 주체가 관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영화에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위험 조절 실패’의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초희의 탈출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뒤, 역시 아름다운 보름달을 배경으로 초희와 태인이 재회한다. 집으로 돌아온 태인은 또다시 화장실 앞에서 박수를 치며 둘만의 교감을 나누는데, 그 소리에 반응한 경찰이 태인에게 말을 건네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태인에겐 위기이자 초희에게는 엄청난 기회인 이때에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초희가 경찰을 통해 안전히 사회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과 그렇지만 태인이 처벌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상충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장면 직전에 있었던 영화가 꾸준히 제시해온 ‘아름다운 배경’이, 초희가 태인과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것은 초희의 선택이다. 여태껏 여러 번의 탈출을 시도했었던 초희가 눈앞에 진짜 경찰(의심스러웠던 경찰과 달리 여자다)이 나타났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찰이 죽은 줄 알고 패닉에 빠진 태인을 다독이며 상황을 수습하고, 나아가 경찰을 묻고 있는 태인에게 박수로 화답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초희가 태인과 같은 범죄자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버릴 때, 여태껏 ‘악의 없음’을 전제로 태인의 범죄 행위를 조금 더 지켜보려 했던 관객의 마음은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초희가 마침내 태인의 손을 뿌리치고 자신의 진짜 보호자인 선생님에게로 향할 때, 관객 역시 초희와 함께 태인의 손을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초희는 영화 속에서 관객을 대변하는 캐릭터로도 볼 수 있다. 의도적이지 않게 범죄자가 되어버린 태인에게 어느 정도 연민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태인의 편을 들어줄 수 없는 관객의 마음은, 초희가 태인과 함께 있을 땐 가족인 척 연기하다 결국엔 태인의 손을 뿌리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 초희가 절대 이때를 호시절로 추억할 리가 없듯, 영화가 끝난 뒤 재생되는 회상 또한 관객의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현상되지 않았더라면
그 회상의 주인이 태인도, 초희도, 관객도 아니라면 남은 것은 감독뿐이다. 그렇다면 감독이 이 이야기를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여전히 의심스러운 것은 이 추억이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 맞냐는 것이다. 영화엔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장면이 있다. 자신이 지금 찍히고 있는 사진이 자신의 몸값을 받아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괴범의 카메라 앞에서 초희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러자 창복은 초희에게 “최대한 슬프게” 표정 지을 것을 요구하고, 그 결과로 거짓의 슬픈 사진이 탄생한다. 이 ‘거짓 사진’이 섬뜩한 것은, 아무리 이것이 누군가가 악의 없이 만든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겐 정말로 ‘최대한의 슬픔’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그렇게 집착했던 아름다운 풍광들 역시 전부 거짓을 말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어떤 영화보다 어두운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반대로 아름다운 하늘을 담는 것에 올인한 것처럼 느껴지는 영화. 나는 이 영화를 관습적인 이미지, 혹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의심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했었다. 태인이 집착했던 양복 역시 이것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화가 끝까지 이 이야기를 정말로 아름다웠던 추억이라는 식으로 마무리 짓는 것을 보며, 나의 해석이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한 것임을 깨달았다. 때로는 현상되지 않는 것이 나은 사진도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