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의 영화 <경주>(2014)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최현(박해일)의 ‘자살’을 목격했다. 그런데 영화를 본 주변에 물으니 아무도 그런 장면을 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수풀에 가려진 물결의 소리 너머로, 마른 강물로 뛰어드는 최현의 뒷모습을 분명 느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 <후쿠오카>(2019)를 보고 나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같이 본 친구에게 “소담 역할은 육체가 있는 귀신이야”라고 말했는데,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 순간, 나는 장률의 최근작을 말하기 위해서 ‘모호함’ 자체를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있어 <후쿠오카>는 추상적인 내용을, 게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영화였다.
두 남자와 이상한 여자
기묘한 에피소드가 영화에 차례로 등장한다. 첫째, 해효(권해효)가 농아라고 소개하는 남자를 만난 소담은 그를 보자마자“말할 것 같은데”라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이 남자는 이내 한국말로 “스스로 말하지 않기를 다짐했었다”고 말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어서 첫사랑 ‘순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녀가 학교를 자퇴하던 날 제문(윤제문)과 해효는 각자 순이와 밤을 지새웠다. 그렇지만 동일한 시간에 한 인간이 다른 장소에 존재할 수는 없다. 이 미스터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풀리지 않는다. 셋째, 후쿠오카에서 가장 큰 중고 책방에 들른 소담에게 서점주인 유키(야마모토 유키)는 인형을 되돌려준다. 하지만 소담은 이번이 첫 후쿠오카 방문이다. 그럼에도 유키는 소담이 부른 노래를 기억하고 있고, 공교롭게도 소담 역시 그 노래를 알고 있다.
이 밖에 모두가 기억하는 ‘사실’도 영화에는 등장한다. 먼저, 해효와 제문의 사이가 나빠진 것은 28년 전의 대학 시절이다. 둘은 당시 같은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다.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들이 그녀를 사랑한 것만은 분명하다. 두 번째, 순이가 사라지자 그들은 상처 입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둘은 모두 첫사랑과 관련된 일을 하는데, 제문은 그녀가 자주 들른 서점의 주인이 되었고, 해효는 그녀의 고향에서 술집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소담은 한마디로 ‘이상한 여자’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또라이라고 부르고, 귀신처럼 바라보거나 신기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소담 스스로도 자신을 모호하게 설명한다. “먹고 자고 싸고, 울고 웃는 사람이다. 아저씨랑 똑같다.” 소담 캐릭터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기이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모호한 사실과 확실한 것들, 몇 가지의 근거를 풀어놓고 <후쿠오카>를 바라보다가, 이 과정에서 배경이 왜 하필 후쿠오카인지 궁금해졌다. 기묘한 모티브들이 반복되며 경계를 흐리고 있음에도, 장소가 후쿠오카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텐진역의 철탑이 어디에서나 보이는 도시 말이다. 이러한 장소 선정에 대해서는 힌트가 등장한다. 바로 ‘윤동주’다. 너무나 짧게 빛난 그의 생애 28년과, 그가 머물던 후쿠오카 형무소를 영화는 애써 감추면서도 동시에 드러낸다. 그 흔적은 간접적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될 만큼 비가시적이지는 않다. 순이의 혼령을 품고 사는 인물들이 만나 이곳은 윤동주 <사랑의 전당> 속의 전(殿)으로 변모한다. 만약 과거 장률의 영화에서 헛것을 본 적 있는 관객이라면, 이 자의적인 해석에 동의할 것이다.
다음 차례는 ‘배우들’이다. 만일 어떤 영화에서 촬영 전 ‘정해진 것’과 ‘정해지지 않은 것’이 있다고 간주한다면, <후쿠오카>는 다른 작품들보다 정해지지 않은 것의 비중이 큰 경우에 속한다. 그러니 미장센의 일부로서 배우의 중요도는 높아진다. 관객이 바라보는 결과물에서 예측되지 않는 결정적 순간들을 배우들이 선점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해효의 역할을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면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아마도 영화의 분위기는 지금과 약간 다를 것이다. 캐릭터들이 배우의 실제 이름을 사용하는 것 또한 흥미롭다. 촬영 전 이미 연출자는 이들의 참여도를 의식한 것 같다. 유키의 서점에서 소담이 부른 ‘노래’ 역시 다른 예가 될 수 있다. 일부 팬들이 기억하듯,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에서 박소담이 부른 곡이 이번에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노래는 시간의 동시성과 리듬감을 감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반대의 경우다. 만약 소담 역을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그 곡은 등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시 말해, 그 노래가 등장한 이유는 배우 박소담이 캐스팅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2009년 <두만강>을 볼 때까지 장률의 영화에서 이런 비교를 하게 될 것이라 상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후쿠오카>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더 이상 ‘불명확성’을 회피하기 어렵단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자유롭게 찍었을 것이란 가정이 아니다. 목표에 경계를 두지 않았기에 <후쿠오카>는 폭넓은 ‘다음’을 허용하는 영화가 된다. 이를테면 존 카사베츠나 스와 노부히로의 방식을, 최근 장률의 작품을 보면서 떠올린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 심증은 굳어진다. 보이지 않는 기억을 설명하는 전반부가 끝이 나면, 스크린의 현재는 막바지에 이르러 더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완벽함을 포기하고 얻은 것은
영화에서 반복된 술책이 지속적으로 등장할 때, 연출자들의 목표는 비교적 명확하다. 대개의 감독들은 어떤 사실을 ‘공식화하지 않기 위해’ 반복이나 변주를 사용한다. 말하고 싶되, 여지를 넓게 두고 싶은 것이다. 커다란 권위로 확인되는 기존의 미학 체계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포기된다. 어떤 이는 이를 ‘임의성’이라 부르고, ‘현대영화의 방식’이라거나 ‘독립영화스럽다’라고도 표현한다. <후쿠오카>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받을 때, 동선이나 장소의 중의적 의미가 명확히 해석되지 않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연출적인 의도라 볼 수 있다. 넓고 중의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모호함의 영역을 현실 속의 배우들이 지탱해낸다.
그렇다면 이토록 추상적인 방식으로 도달하고자 한 영화의 결론은 무엇인가. 영화에는 상처 입은 사랑의 영묘가 등장한다. 바로 ‘윤동주 시의 흔적’이다. 아름다운 시의 존재는 사라진 순이를 통해 기억되고, 소담을 거쳐 육체를 입으며, 두 남자를 통해 인간적인 조건의 불안정함을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후쿠오카>는 공식적인 완벽함을 포기하는 대신에 영원히 기억될 창의력의 강림을 연출하는 영화이다. 관객으로서 이러한 전달방식은 확실히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영화가 지닌 내부적 운명의 예정에 기꺼이 순응하고 싶어진다. 각자 마음에서 일어나는 시의 완성과 그 흔적 찾기의 방식, 이에 대한 경험적인 동의를 영화는 호소한다. 충돌하는 감정과 움직임의 불협화음, 몽타주의 착복으로 생성된 ‘입증되지 않은 구조’를 이곳에서 본다. 단언컨대 명료한 서사성은 이 영화의 목표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이 말은 어느 때보다 지금의 장률에게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