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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말을 하지만, 루카(제이콥 트렘블레이)만큼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소년은 바다에서는 초록색 생물이고, 육지에서는 인간이다. 그는 바다에 살면서 육지 위의 세계를 동경한다. 루카 안에는 여러 가지 정체성이 있고 그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자식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엄마에게, 오래 살며 여러 꼴을 목격했던 그녀에게 자식의 호기심은 공포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녀는 미지의 세계를 투박하고 자극적인 용어들로 환원해 자식의 호기심을 잠재우려 한다. 괴물. 위험. 우리를 죽이러 오는 자들. 그럼에도 어린 소년은 이세계(異世界)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을 감추지 못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 다양한 정체성을 품고 있고, 누군가는 당신의 여러 조각들 중 하나를 싫어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스스로를 적당히 감추고 사회에 녹아들기
'루카'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대면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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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신체의 감각을 차단하는 방식을 영화의 주된 설정으로 잡은 영화들이 있었다. <버드 박스>(2018)의 사람들은 미지의 존재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눈을 가린다. <런>(2020)에선 삐뚤어진 모정으로 인해 딸이 다리의 감각을 잃고 휠체어를 탄다. 눈과 다리를 쓸 수 없다는 것은 다름 아닌 이동 제한을 의미한다. 차단된 감각으로 인해 심해지는 답답함은 생존과 탈출에 대한 압력을 높이게 만든다. 영화는 종국에 주인공의 감각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버드 박스>에선 주인공이 어떤 장소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안심하며 안대를 벗는다. 전보다 자유롭지만, 여전히 새장이다. <런>은 지팡이를 짚고 걷게 된 딸이 자신을 가뒀던 어머니가 있는 감옥에 면회를 가 복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감시를 받았다는 입장에서 시각을 오감 중 최종 심급으로 여기고 있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은 곧 통제를
'콰이어트 플레이스2'가 공포를 구축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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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죽었다. 직업 군인 마르쿠스(매즈 미켈슨)는 훈련을 마치고 기지로 돌아온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군인의 표정과 걸음걸이만 보고도 그 사실을 직감한다. 이는 수년간 타지에서 가족과 떨어진 상태로 단체 생활을 했던 그가 보고 들은 수많은 사례를 통해 얻게 된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마르쿠스가 처음 겪는 일이다. 결과를 인정할 수 없는 마르쿠스는 영화 초반부 아내에게 ‘일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어기고 아내에게로 향하고, 그렇게 아내의 손을 만져보고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한 뒤에야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같은 이야기를 겪고 있는 두 번째 시선이 있다. 그 시선은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된다. 아빠와 통화하고 있는 엄마의 표정만 보고도 아빠가 집에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틸드(안드레아 하이크 가데버그)는 아빠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사고를 겪은 마틸드 역시 마르쿠스처럼 주어진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가 보여준 명확한 오프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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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길레스피의 <크루엘라>는 몇년 전 나온 <조커>와 습관적으로 비교되는데, 유명한 악역 캐릭터의 전사를 다룬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이 둘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조커>를 보면, DC 캐릭터를 80년대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 보다 정확히 말해 <코미디의 왕>스러운 유사 리얼리즘의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다는 착안이 독창적으로 여겨지지만, 이 캐릭터를 구성하는 재료는 이미 수많은 코믹북과 각색물을 통해 꾸준히 만들어졌다.
미래의 조커가 아서 플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우린 이 남자의 내면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택한 길은 조커를 통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지만(<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 놀런은 조커에게 어떤 사연도 주지 않는 보다 영리한 길을 택했다) 그래도 익숙한 캐릭터가 나오는 익숙한 길이다.
성장할 수 없는 주인공
<크루엘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 영국 작가 도
'크루엘라'를 <101마리 강아지>의 프리퀄이라 말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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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장커 감독은 전작 <산하고인>(2015)에서 멜로드라마 형식을 빌려 중국 인민들이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며 자본주의에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한 여성의 일생(1999년부터 2025년까지)을 통해 비판적으로 다뤘다. 이번 영화 <강호아녀>(2018)에서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아내이자 뮤즈인 자오타오를 내세워 현대 중국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멜로드라마 형식에 더해 갱스터 또는 필름누아르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감독은 왜 다시 과거(2001년)에서 영화를 시작하는 것일까? 이는 <강호아녀>가 감독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로 만들어진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전작들이 겹치기 때문이다. 특히 <임소요>(2001)와 <스틸 라이프>(2006)의 그림자를 지워버릴 수 없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비슷한 머리 모양과 의상을 입고 재등장한다.
장르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지아장커의 '강호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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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동안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하필 그녀는 ‘국수’를 택했을까. 다른 식당에 갈 수도, 혹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단 한 차례, 그녀의 국수 먹기가 주저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후반부에서 진아(공승연)는 툭 끊긴 국수 가락을 삼키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결말을 향한 도약을 진행한다. 가족의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았던 그녀가 작은 식당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관객은 이 지점에서 일상적 삶의 균형이 깨어진 것을 깨닫는다. 조금이라도 귀찮아질 여지가 있는 것은 모두 차단한 그녀였지만, 반복되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면서 그간 이룩한 ‘혼자 살기의 법칙’은 뿌리까지 흔들린다.
내부의 평온함, 외부의 두려움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는 특이점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매일 걷는 복도의 끝에 위치한 그녀의 공간, 그녀가 머무는 방 안의 디자인이 특별하다. 의도적으로 거실을
<혼자 사는 사람들>이 ‘사랑’을 노출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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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시 영화들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다시 누군가의 무덤 앞에 도착한다. 그는 바로 오즈 야스지로. 그의 묘비에 적힌 무(無)라는 원류에서 갈라지는 두개의 지류, 빔 벤더스와 짐 자무시는 각각 <돈 컴 노킹>과 <브로큰 플라워>를 들고 2005년 칸국제영화제서 만난다. 정한석 평론가는 두 영화가 서로 반대의 결론을 내린다고 평가했다.
<돈 컴 노킹>은 자아를 찾고 의미의 길로 나아가고, <브로큰 플라워>는 “의미가 끼어들 수도 없고, 그런다고 해봤자 뭔가 바뀔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미정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한석 평론가는 무의미성과 미결을 알아보기 위해 짐 자무시의 초기작으로 돌아가 글을 다시 이어나간다. 이 글은 <다운 바이 로>의 마지막 장면 속 재크처럼 반대 방향으로 가보고자 한다. 이미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영화 속의 무의미한 것들을 엮어 의미망을 짜서 짐 자무시가 가고자
'짐 자무시 모든 것의 절정' 기획전을 통해 만난 그의 데뷔작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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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몰라요>를 보다가 신기한 체험을 했다. 화창한 교실 안, 소녀들은 마치 소꿉놀이를 하듯 귀여운 동작으로 입술 위에 틴트를 바르고 있다. 뒤이어 그 입술에서는 상상할 수 없이 잔인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화창한 교실 가득 폭언이 채워진다. 그 말들은 너무 자연스레 흘러나와서 충격적이다. 중요한 건 다음 장면이다. 아이들이 공터에서 보드를 타고 있다. 자유롭고 유려하게. 카메라도 그들과 함께 보드를 타듯 공터 위를 미끄러지며 이곳의 풍경을 담는다. 유명 휴대폰 광고를 연상시키는 이 아름다운 장면은 아름다울 수 없는 맥락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에 이르러 즉각적인 메스꺼움과 멀미를 느꼈다. 흔히 멀미는 서로 다른 감각 사이의 괴리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배를 탔을 때 시야는 평온한데 몸은 마구 흔들리는 상황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적인 멀미도 가능할까? 괴롭힘이 난무하는 잔인한 교실과 평화롭고 한적한 공터. 우리는 아무런 통증 없
'어른들은 몰라요' 억지로 채운 결핍이 남긴 파국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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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인권운동가 프레드 햄프턴의 말년을 담은 전기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를 보고, 다소 거친 비교지만 그의 삶이 유관순 열사의 삶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에 닥친 전쟁 같은 상황에서 한 운동의 리더 역할을 한 위인은 여럿 있겠지만 이렇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벌어진 전쟁이 조금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데, 그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도 그들(흑인-백인)이 계속해서 같은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또한 많은 복잡한 요소들을 배제한 채 내린 결론이지만 단순히 말해서 우린 다른 땅에서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척 살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에 프레드(대니얼 컬루야)가 마오쩌둥의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다”는 말을 당원들에게 주지시키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적절하게 보인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가 역사를 구현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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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매드랜드>의 펀(프랜시스 맥도맨드)이 자동차에서 살기 전 머물렀던 곳은 엠파이어라는 이름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주 수입원은 유에스집섬(USG)이라는 석고를 생산하는 회사다. 이 회사가 건축 재료인 석고보드를 생산한다라는 사실과, 주택건설 경기에 영향을 받아서 이 회사가 파산한 후 펀이 자동차에 살고 있다는 영화의 설정은 <노매드랜드>가 ‘집’과 관련된 영화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펀이 살던 마을은 이제 폐허로 변해버렸다. 유에스집섬이 서브 프라임 금융 위기 속에서 파산하고, 이 회사가 수입의 전부였던 마을은 회사와 함께 지도에서 사라져버렸다. 심지어 우편번호마저 삭제되었다. 하지만 죽은 남편과 함께했던 장소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펀은, 밴에서 살면서 자신이 살던 지역을 맴돌고 있다. 자신들이 살던 아파트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환영 플래카드를 거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펀에게 장소는 기억과 동일하고, 장
'노매드랜드'에서 펀의 자동차가 집이 되어가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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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필름 위에 빛으로 새겨낸 역사의 한 페이지. <동주>의 성공 공식을 <자산어보>에서 다시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동주>를 시작으로 <박열> <변산>까지 이준익 감독의 연이은 작품들은 ‘청춘 3부작’이란 카테고리로 묶인다. <자산어보>도 그 명맥을 잇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준익 감독은 왜 청춘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는가? 특히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말이다. 이준익 감독이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바라본 청춘들이 스크린에 맺힐 때, 그것이 동시대 청춘들과 조우할 가능성이 열릴까?
이러한 질문은 <동주>부터 차곡차곡 쌓여 의문의 형태로 <자산어보>에 이른다. <동주>와 <박열>은 색상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방식을 추구한다. 정확히는 <박열>이 <동주>의 성공 공식을 답습한다. <동주>는 나머지 작품들에 비해 가장 탁월하다. 암흑 같은
<자산어보>와 이준익의 ‘청춘 3부작’이 청춘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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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2012)은 조작된 혈액과 세포로 다른 인간과 연결되려는 시도에 관한 이야기다. 흥미로운 소재였으나 이야기가 겉도는 끝에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느낌을 줬는데,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 <포제서>는 주제와 연출 면에서 훨씬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아버지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3)이나 <엑지스턴스>(1999)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서, 기계와 인간의 결합은 단계를 더 나아갔고, ‘왜 인간은 기계와 결합되기를 원하는가’,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또는 ‘인간과 기계는 어디까지 결합하는 게 가능한가’ 등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질문 속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현실이라는 단어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아들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연결함과 동시에 갈라놓는다.
<비디오드롬>과 <엑지스턴스>에서 인간과 기계가 결합해 진입하는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포제서'를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와 나란히 놓고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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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복수극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는 제니퍼 켄트의 <나이팅게일>에 관한 글에서 한번 이야기했으니 이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추가하기로 하자. 하나, 일단 장르가 형성되면 작품이 이 틀에서 벗어나기가 극도로 힘들다는 것. 둘, 관객은 이 소재를 다룬 모든 영화를 장르의 틀 안에 넣어보게 된다는 것.
에메랄드 페넬의 <프라미싱 영 우먼>의 이야기를 맺는 후반부도 이 영화가 강간복수극이고 관객이 이 장르의 규칙 안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장르가 고정된 상태에서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겨우 셋이다. 하나, 주인공은 앞에 선언한 복수에 성공한다. 둘, 주인공은 복수에 실패한다. 셋, 주인공은 복수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성공했다.
영화 후반의 서스펜스는 영화가 이들 중 어느 것을 선택했을지 관객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관객은 1번의 가능성이 사라진 뒤로는 3번이길 바라지만 2번일 가능성은 의외로 높다. 수많
'프라미싱 영 우먼'이 강간복수극 장르의 규칙 안에서 택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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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하고 유려하다. 영화 <미나리>는 삶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선 이민자 가족의 역경을 다룬다. 대부분 한국어로 진행되지만 감성적으로는 만국어로 통역 가능할 보편적인 정서를 펼쳐낸다. 미국 제작 영화임에도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비영어권 언어가 준 이질감 탓이 크다. 이 영화가 폭넓은 감응을 일으키는 지점은 고립된 인간들의 관계성에 주목한 점에 있는 듯하다. 교회와 병원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아칸소 시골의 이동식 주택에 한인 가족이 이주해 온다. 주위엔 마을이라 할 만한 공동체가 없다. 가족은 온전히 그들끼리 삶을 감당해야 한다. 물과 불은 자연이 주는 운명적 고난이며, 병약함과 노쇠는 인간적 가냘픔을 드러낸다.
병아리 감별이라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을 하고 물길을 내어 농장을 일구는 일상 속 곤란은 대부분 좁은 이동식 주택 내부 가족 사이의 미묘한 갈등으로 드러난다. 과장하지 않고 덤덤히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으나 냉소적이지 않으며 그윽하고 깊다. 어
'미나리'의 탈국경적 영화 경험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