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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 등장하는 최악의 인간은 일단 두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율리에(르나트 라인제브), 다른 하나는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다. 그러나 두 사람이 최악이 되는 사정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에이빈드의 경우, 그 사정은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에 꼭 들어맞아 보인다. 그는 파티에서 율리에를 마주치고, 사랑에 빠진다. 영화의 6장(‘핀마르크 고원’)에서 쓰인 3인칭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에 따르면, 에이빈드는 사랑에 빠진 것이 애인인 수니바(마리아 그라지아 디 메오)를 배신하는 일이지만, 그래서 자신이 최악의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르웨이어 원제인 <Verdens verste menneske>, 즉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을 뜻하는 이 말에는 사랑과 관련한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말일 테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의도한 최악의 인간은 다른 누구보다도 율리에이기
소은성 평론가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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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놉>에 관한 해석들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다. 영향받을까봐 쳐다도 안 보고 나의 영화 체험에서 출발해 글을 썼지만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두 번째 관람하기 전까지 <놉>의 마지막 장면을 OJ(대니얼 컬루야)가 살아 돌아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의 왜곡된 기억이 영화를 약간 다르게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어 다행이었다. 영화에 OJ가 등장하는 숏(이하 ‘OJ 숏’) 다음으로 돈 되는 영상, 일명 ‘오프라 숏’이 등장한다. 그것은 폴라로이드 필름에 인화된 하늘에 떠 있는 외계 생명체의 모습(이하 ‘오프라 숏’)이다. ‘오프라 숏’이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OJ 숏’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OJ 숏’을 다분히 사진처럼 구성하기 때문에 두숏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저 너머 먼 곳’이란 문구가 적힌 사각의 문 프레임 안에 말 ‘럭키’를 타고 서 있는 오빠 OJ의 모습은 동생 에메랄드(키키 파머)의 간절한 믿음
오진우 평론가의 <놉>, OJ는 살아 돌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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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빗줄기를 뚫고 영화관을 찾았다. 스크린엔 또 다른 재난이 있었다.
얼마 전 <비상선언>을 보지 않은 지인과 이 영화에 관한 얘기를 하다 생긴 일이다. <비상선언>을 보고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다소 개략적으로 이 영화가 세월호 참사를 다루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이를 전혀 몰랐다는 말을 하며 다른 영화를 보겠다고 했다. 내가 말한 정보가 그의 선택에 얼마큼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제야 깨달은 것은 <비상선언>의 외피를 이루고 있는 어떤 요소에서도, 세월호 참사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 <비상선언>을 보며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 영화의 어떤 요소가 그러한 감상을 불러일으킨 것인지 설명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실제로 <비상선언>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재난
김철홍 평론가의 ‘비상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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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이나 인터뷰를 더하지 않은 이 영화의 선택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졌다.
안드리아 아놀드의 <카우>는 출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다. 영화의 주인공은 낙농장의 젖소 루마이고, 루마를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삶 자체가 출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기에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구성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루마의 정체성은 동물이라기보단 가축에 가깝다. 그렇기에 오프닝 시퀀스의 극적인 출산 장면이나 엔딩의 충격적인 죽음 장면보단 오히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가축으로서의 범상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이 영화의 성격을 더 잘 설명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농장에서 길러지는 가축에게 자유나 애정은 응당 주어지지 않는다. 숨 막히는 현실과 비극적 운명을 답답해하며 불현듯 이동과 여행, 탈출과 이별을 감행했던 아놀드의 극영화 속 ‘인물’들과 달리, 그의 첫 다큐멘터리 <카우>의 ‘젖소’ 루마는 어딘가로 떠나지 못한 채 농장의 일부로 살아가야만
박정원 평론가의 '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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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용의 출현>의 진정한 주인공은 한산대첩이 아니라 바로 이순신이어야 했다.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이 개봉 이후 놀라운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개봉 8일 만에 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가속도를 감안한다면, <명량>을 넘어설 기세다. 그렇다면 <한산>은 정말 이름값을 하는 역작으로 영화사에 남을 것인가?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한산>에 찬물을 끼얹거나, 대중성이냐 작품성이냐를 따지는 케케묵은 논쟁을 벌이고자 함이 아니다. <한산> 시사회에서 필자는 이 영화가 단순히 이순신을 ‘다룬’, 이순신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데 실망했다. 영화가 정식 개봉을 한 다음날 다시 한번 상영관을 찾았지만 역시 다르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영화비평가와 대중에게 높은 평점을 받고 있는 이 영화가 이순신을 다룬 역사물임에도 이순신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쳤다. 실제로 대중은 9점
남송우 교수의 ‘한산: 용의 출현’, 사실과 허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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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퇴적되는 사건들의 장력은 영화의 끝에 가서 하나의 얼굴로 도착한다. 가뿐함과 충만함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크리스의 얼굴. 그 얼굴을 만들어낸 것들을 헤아려본다.
영화는 비행기를 타고 막 어딘가에 도착한 커플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비행기에서 내린 두 사람은 자동차에 짐을 실은 후 내비게이션을 켜고 목적지를 설정한다. 그러자 안내 음성이 나온다. “1시간48분 뒤에 도착합니다.”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은 절묘하게도 영화 자체의 러닝타임과 조응한다. 안내 음성을 듣고 기대에 찬 얼굴로 웃는 두 사람의 모습 또한 영화의 시작을 마주한 관객의 입장과 묘하게 중첩된다. 여정이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가 출발한다.
우연일지도 모르는 이 사소한 시간 단위의 일치는 앞으로 전개될 ‘영화 속 영화’에 대한 희미한 예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기대감을 더욱 특수하게 만드는 것은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이 거장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성지’와도 같은 포뢰섬이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커플로 등장하
김예솔비 평론가의 ‘베르히만 아일랜드’, 떠남의 몸짓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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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당선자. 20세기의 공포는 끝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이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알려지지 않은 요소로서 무의식을 발견해야만 했다면, <배드 럭 뱅잉>에서 인용된 무의식에 관한 농담은 그것이 또한 사회적인 구성물임을 이야기한다. 다음은 영화의 2부 ‘일화, 기호, 경이에 관한 소사전’의 ‘무의식’ 항목이다. 별다른 의학적 원인 없이 팔을 쓰지 못하던 노인이 정신분석가를 찾는다. 하지만 “하일 히틀러!”라고 정신분석가가 외치자 노인은 팔을 들어올려 나치 경례를 한다.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마비와 정상성의 상태를 오가는 노인의 팔이다. 나치 경례에 대한 금지 유무에 따라 마비되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던 팔이 다시 결합의 상태를 갖는 것처럼, 인간 신체의 부분들은 그것이 기입된 사회적 맥락에 의해 몸에서 분리되기도 하고 결합을 유지하기도 한다. 영화의 도입부, 포르노와 다를 바 없는 섹스 비디오에서 에미(카디아 파스칼리
소은성 평론가의 '배드 럭 뱅잉', 끝나지 않는 폭력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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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다음날 별스럽지 않은 사진 한장을 바라보다 어떤 기억이 떠올라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로스트 도터>가 내 의식과 몸의 감각을 마구 자극한 결과일 것이다.
한 여인이 어둠 속을 서성이다 어느 둔덕에 선다. 배에 상처를 입었는지 블라우스는 피로 얼룩져 있고 몸은 휘청인다. 파도 소리가 가까이 들려온다. 그녀는 심각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러고선 이내 물가에 쓰러지고 만다. 그녀의 이름은 레다(올리비아 콜맨)다. 그녀는 온몸으로 불안을 견뎌내온 강인한 여성이자 명민한 학자이고, 두딸의 어머니이자 모성 신화를 보기 좋게 깨버리는 <로스트 도터>의 주인공이다. 레다는 까다롭지만 올곧고, 냉정하지만 열정적이기도 하며, 이기적이지만 공감력이 뛰어난 다면적인 인물이다. 학업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 젊은 한때는 가정을 버리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향하기도 하며 절대적인 모성애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살았지만, 모녀
홍은미 평론가의 '로스트 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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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와 시각적 기술의 즐거움이 팽배한 <헤어질 결심>은 서사와 테크닉의 이상적인 효율성을 제공한다. 박찬욱의 시각적 레퍼토리는 스토리를 매혹적이고 어지러운 미장센으로 변형한다.
정탐과 수사의 모티프가 멜로드라마의 서사 경로와 교차하는 <헤어질 결심>의 개요는 대중 장르의 전형에 기대어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전통적인 관계는 남자 형사와 그의 여성 용의자 사이의 친밀감이다. 미스터리한 여인에 대한 애착으로 그녀의 뒤를 밟는 탐사 플롯, 미망인과 그녀의 주변을 수사하는 형사의 위험하고 로맨틱한 관계를 다룬 스릴러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다양한 전례들(<현기증>과 <보디 더블>, 심지어 <원초적 본능>)과 견주어지곤 한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의 실질은 이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참조목록들과 변별되는데 그 창의의 바탕이 평행하게 배열된 이야기들의 패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로맨틱 스릴러라는 게임의 규칙을 관
장병원 평론가의 '헤어질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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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 라이트이어>가 돌아보는 시네마의 시간에 대하여.
1995년, 앤디는 버즈 라이트이어라는 장난감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 뿅뽀롱뿅뿅~ 번쩍번쩍하는 제법 근사한 장난감이었다. 구닥다리 카우보이 봉제인형인 우디와는 비교도 안된다. 물론 이 둘은 <You’ve Got a Friend in Me>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멋진 듀오가 된다. <토이 스토리>는 1995년, 100주년 생일을 맞은 시네마에 뜻밖의 선물처럼 등장했다. 아니, 선물이라기보다는 두 번째 세기를 맞이하는 시네마에 주어진 새로운 육신과도 같았다. 시네마는 셀룰로이드 필름이라는 봉제인형의 몸에서 디지털이라는 플라이스틱 보디로 갈아타야 할 시간이었다. <토이 스토리>는 영화 탄생 100주년에 맞춰 등장한 첫 번째 장편 디지털 영화였다. 당시 관객에게 ‘과연 우디와 버즈 라이트이어처럼 시네마도 과거의 필름과 미래의 디지털이 훌륭한 팀워크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나호원 애니메이션 연구가의 '버즈 라이트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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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비장하게 휘두르는 한 남자와 리스트의 <Liebesträume> 3번이라는 기괴한 조화의 오프닝. <실종>에서 인상적인 순간들은 이렇게 의아한 선택과 급작스러운 변조(modulation)에 있다.
가타야마 신조의 <실종>에는 속박을 이탈하고 회피하는 몸들이 그려진다. 인물들은 죽음을 간절히 원한다. 삶을 중단함으로써 완전한 정지로 이행하려 열망하는 이들은 제각각 가능한 방법으로 자살을 기도한다. 지난 <씨네21> 1359호 프런트 라인에서 김병규 평론가가 쓴 비평 ‘이미지의 조건, 영화적 몸짓’에서는 인물들의 신체가 고정됨으로써 죽음이 도출되는 사례를 열거했다면, <실종>은 몸들이 불가피하게 장치와 분리됨으로써 죽음이 유예되는 사태를 형상화한 방식이라 일컬을 만하다. 가령 카에데(이토 아오이)의 엄마는 루게릭병을 앓아 스스로 목을 밧줄에 걸 수조차 없어 자살에 실패한다. 온갖 방법으로 죽기를 시도했던 ‘찌르레기’는
이보라 평론가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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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키 기린이 없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라니. 관객의 헛헛한 심정은 결코 감독의 마음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부재한 존재를 별처럼 떠올리며 썼다.
<브로커>는 가족 이야기에 천착해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의 연장선에서 대안가족 형성 가능성을 타진한 다른 버전의 영화 정도로 이야기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가족의 의미가 핏줄이나 유전자보다 ‘기른다’는 행위에 있음을 드러낸 데 이어 <어느 가족>에서 아이를 학대하고 방치하는 친부모보다 아이에게 좀도둑질을 가르치는 양부모가 낫지 않으냐고 도발적으로 질문한 감독은 <브로커>에 이르러 ‘낳기 전에 죽이는 것이 낳은 뒤에 버리는 것보다 죄가 덜해?’라는 질문을 던진다. 앞선 작품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해소된 데 비해 <브로커>의 질문은 유독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그 이유는 전작과 달리 영화에서 ‘낳기 전에 죽이는 것’에 대입되는 인물이나 상황
김소희 평론가의 '브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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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담보하진 않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브로커>는 좋은 의미와 시선을 지닌 영화지만 설득의 태도와 과정에 동의하긴 어려웠다. 좋은 장면, 좋은 연출, 좋은 연기가 있지만 그 총합이 반드시 좋은 영화이리란 법은 없다.
송강호의 캐스팅은 실패다. 잔인하지만 그게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상현은, 정확히 송강호의 상현은 <브로커>의 세계 안에 좀처럼 섞이지 않는다. 그는 차라리 송강호 월드에 속해 있다. 송강호가 그간 축적해온 세계는 언뜻 평범하고 소시민적이라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낯설고 서늘한 순간을 들이미는 캐릭터들의 역사다. 송강호는 일상의 표정, 인간적인 감정을 순식간에 좁히고 들어와 장르의 얼굴로 바꾸어놓고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킨다. 나는 아직 <기생충>에서 케첩 묻은 휴지를 손에 쥐고 인상을 찌푸리던 기택(송강호)의 얼굴을 기억한다.
송경원 기자의 '브로커' 반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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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속 가족은 곁을 지켜주는 관계의 유지와 거리가 멀다. 누군가가 머물다 떠나갈 때, 또 다른 이가 개입한다. 꼭 가족이 아닐수도 있어서, 그것은 흡사 한쪽 문이 닫히는 순간 다른 문이 열리는 것과 같다.
평단과 관객의 <브로커>에 대한 평가 내리기가 한창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고 작품은 아니다, 라는 쪽으로 평가가 모이는 모양이다. 동의하는 바다.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나도 고레에다의 최고작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의 영화답지 않게 몇몇 엉성함이 돌출하는 영화다. 거기에는 언어를 포함한 문화와 환경의 차이가 적잖이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일본영화와 한국영화의 이질적인 부분도 한몫한다. 브로커를 쫓는 두 형사의 묘사에서 드러나는 빈틈은 일본 영화 속 유머였다면 더 이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조차 고레에다의 섬세함을 제거할 정도는 아니다. 언어가 바뀌어도 가로막을 수 없는 감정의 결은 여전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이 영화는
이용철 평론가의 '브로커' 찬성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