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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시 영화들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다시 누군가의 무덤 앞에 도착한다. 그는 바로 오즈 야스지로. 그의 묘비에 적힌 무(無)라는 원류에서 갈라지는 두개의 지류, 빔 벤더스와 짐 자무시는 각각 <돈 컴 노킹>과 <브로큰 플라워>를 들고 2005년 칸국제영화제서 만난다. 정한석 평론가는 두 영화가 서로 반대의 결론을 내린다고 평가했다.
<돈 컴 노킹>은 자아를 찾고 의미의 길로 나아가고, <브로큰 플라워>는 “의미가 끼어들 수도 없고, 그런다고 해봤자 뭔가 바뀔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미정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한석 평론가는 무의미성과 미결을 알아보기 위해 짐 자무시의 초기작으로 돌아가 글을 다시 이어나간다. 이 글은 <다운 바이 로>의 마지막 장면 속 재크처럼 반대 방향으로 가보고자 한다. 이미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영화 속의 무의미한 것들을 엮어 의미망을 짜서 짐 자무시가 가고자
'짐 자무시 모든 것의 절정' 기획전을 통해 만난 그의 데뷔작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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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몰라요>를 보다가 신기한 체험을 했다. 화창한 교실 안, 소녀들은 마치 소꿉놀이를 하듯 귀여운 동작으로 입술 위에 틴트를 바르고 있다. 뒤이어 그 입술에서는 상상할 수 없이 잔인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화창한 교실 가득 폭언이 채워진다. 그 말들은 너무 자연스레 흘러나와서 충격적이다. 중요한 건 다음 장면이다. 아이들이 공터에서 보드를 타고 있다. 자유롭고 유려하게. 카메라도 그들과 함께 보드를 타듯 공터 위를 미끄러지며 이곳의 풍경을 담는다. 유명 휴대폰 광고를 연상시키는 이 아름다운 장면은 아름다울 수 없는 맥락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에 이르러 즉각적인 메스꺼움과 멀미를 느꼈다. 흔히 멀미는 서로 다른 감각 사이의 괴리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배를 탔을 때 시야는 평온한데 몸은 마구 흔들리는 상황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적인 멀미도 가능할까? 괴롭힘이 난무하는 잔인한 교실과 평화롭고 한적한 공터. 우리는 아무런 통증 없
'어른들은 몰라요' 억지로 채운 결핍이 남긴 파국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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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인권운동가 프레드 햄프턴의 말년을 담은 전기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를 보고, 다소 거친 비교지만 그의 삶이 유관순 열사의 삶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에 닥친 전쟁 같은 상황에서 한 운동의 리더 역할을 한 위인은 여럿 있겠지만 이렇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벌어진 전쟁이 조금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데, 그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도 그들(흑인-백인)이 계속해서 같은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또한 많은 복잡한 요소들을 배제한 채 내린 결론이지만 단순히 말해서 우린 다른 땅에서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척 살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에 프레드(대니얼 컬루야)가 마오쩌둥의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다”는 말을 당원들에게 주지시키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적절하게 보인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가 역사를 구현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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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매드랜드>의 펀(프랜시스 맥도맨드)이 자동차에서 살기 전 머물렀던 곳은 엠파이어라는 이름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주 수입원은 유에스집섬(USG)이라는 석고를 생산하는 회사다. 이 회사가 건축 재료인 석고보드를 생산한다라는 사실과, 주택건설 경기에 영향을 받아서 이 회사가 파산한 후 펀이 자동차에 살고 있다는 영화의 설정은 <노매드랜드>가 ‘집’과 관련된 영화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펀이 살던 마을은 이제 폐허로 변해버렸다. 유에스집섬이 서브 프라임 금융 위기 속에서 파산하고, 이 회사가 수입의 전부였던 마을은 회사와 함께 지도에서 사라져버렸다. 심지어 우편번호마저 삭제되었다. 하지만 죽은 남편과 함께했던 장소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펀은, 밴에서 살면서 자신이 살던 지역을 맴돌고 있다. 자신들이 살던 아파트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환영 플래카드를 거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펀에게 장소는 기억과 동일하고, 장
'노매드랜드'에서 펀의 자동차가 집이 되어가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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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필름 위에 빛으로 새겨낸 역사의 한 페이지. <동주>의 성공 공식을 <자산어보>에서 다시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동주>를 시작으로 <박열> <변산>까지 이준익 감독의 연이은 작품들은 ‘청춘 3부작’이란 카테고리로 묶인다. <자산어보>도 그 명맥을 잇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준익 감독은 왜 청춘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는가? 특히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말이다. 이준익 감독이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바라본 청춘들이 스크린에 맺힐 때, 그것이 동시대 청춘들과 조우할 가능성이 열릴까?
이러한 질문은 <동주>부터 차곡차곡 쌓여 의문의 형태로 <자산어보>에 이른다. <동주>와 <박열>은 색상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방식을 추구한다. 정확히는 <박열>이 <동주>의 성공 공식을 답습한다. <동주>는 나머지 작품들에 비해 가장 탁월하다. 암흑 같은
<자산어보>와 이준익의 ‘청춘 3부작’이 청춘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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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2012)은 조작된 혈액과 세포로 다른 인간과 연결되려는 시도에 관한 이야기다. 흥미로운 소재였으나 이야기가 겉도는 끝에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느낌을 줬는데,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 <포제서>는 주제와 연출 면에서 훨씬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아버지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3)이나 <엑지스턴스>(1999)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서, 기계와 인간의 결합은 단계를 더 나아갔고, ‘왜 인간은 기계와 결합되기를 원하는가’, ‘인간과 기계의 결합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또는 ‘인간과 기계는 어디까지 결합하는 게 가능한가’ 등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질문 속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현실이라는 단어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아들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연결함과 동시에 갈라놓는다.
<비디오드롬>과 <엑지스턴스>에서 인간과 기계가 결합해 진입하는
브랜던 크로넨버그의 '포제서'를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와 나란히 놓고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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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복수극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는 제니퍼 켄트의 <나이팅게일>에 관한 글에서 한번 이야기했으니 이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추가하기로 하자. 하나, 일단 장르가 형성되면 작품이 이 틀에서 벗어나기가 극도로 힘들다는 것. 둘, 관객은 이 소재를 다룬 모든 영화를 장르의 틀 안에 넣어보게 된다는 것.
에메랄드 페넬의 <프라미싱 영 우먼>의 이야기를 맺는 후반부도 이 영화가 강간복수극이고 관객이 이 장르의 규칙 안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장르가 고정된 상태에서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겨우 셋이다. 하나, 주인공은 앞에 선언한 복수에 성공한다. 둘, 주인공은 복수에 실패한다. 셋, 주인공은 복수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성공했다.
영화 후반의 서스펜스는 영화가 이들 중 어느 것을 선택했을지 관객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관객은 1번의 가능성이 사라진 뒤로는 3번이길 바라지만 2번일 가능성은 의외로 높다. 수많
'프라미싱 영 우먼'이 강간복수극 장르의 규칙 안에서 택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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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하고 유려하다. 영화 <미나리>는 삶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선 이민자 가족의 역경을 다룬다. 대부분 한국어로 진행되지만 감성적으로는 만국어로 통역 가능할 보편적인 정서를 펼쳐낸다. 미국 제작 영화임에도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비영어권 언어가 준 이질감 탓이 크다. 이 영화가 폭넓은 감응을 일으키는 지점은 고립된 인간들의 관계성에 주목한 점에 있는 듯하다. 교회와 병원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아칸소 시골의 이동식 주택에 한인 가족이 이주해 온다. 주위엔 마을이라 할 만한 공동체가 없다. 가족은 온전히 그들끼리 삶을 감당해야 한다. 물과 불은 자연이 주는 운명적 고난이며, 병약함과 노쇠는 인간적 가냘픔을 드러낸다.
병아리 감별이라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을 하고 물길을 내어 농장을 일구는 일상 속 곤란은 대부분 좁은 이동식 주택 내부 가족 사이의 미묘한 갈등으로 드러난다. 과장하지 않고 덤덤히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으나 냉소적이지 않으며 그윽하고 깊다. 어
'미나리'의 탈국경적 영화 경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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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철>은 두 남자의 차 사고를 둘러싼 진실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주변인들의 비밀도 들춰보는 서스펜스영화다. 그러나 마치 봉준호 감독의 영화처럼, 진실의 실체보다는 거기에 도착하는 과정에 도사리고 있는 전경들이 빛을 발한다. 봉준호의 서스펜스 뒤편에는 한국 사회의 뒤틀린 구조도가 펼쳐져 있다면, <빛과 철>의 후면에는 진실을 얻으려는 자가 관통해야 하는 엄중한 법칙이 버티고 있다. 진실에 다가서는 자와 그 주변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배종대 감독은 자신이 축조한 영화적 세계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영화는 묘한 영상으로 시작된다. 도로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이미 두대의 차가 파손된 사고 현장에 도착한다. 막 사고가 난 듯 열기가 가득한 현장. 여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도로의 질료마저 감각할 수 있는, 현장의 생생한 현실감이다. 이 장면의 생생함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돋보
'빛과 철'의 냉혹한 성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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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화면 안에 두 소녀가 밤길을 달리고 있다. 조그만 아이의 손을 꼭 붙든 조금 더 큰 소녀의 몸짓은 불안하며, <세자매>를 열고 있는 이 밤은 불길하다.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내의 차림의 아이들이 차가운 겨울밤을 달려야 하는 상황적 배경이 밝을 리는 없다. 하지만 더 암담한 사실은 두 소녀가 언젠가 이 밤을 다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설명하는 장면이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게다가 플래시백의 한 부분이라면, 이 밤 속으로 영화의 감정들이 고여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자매>의 서사를 복기한 결과가 아니다.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전개다. 영화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플래시백 장면이 인물들의 현재와 동떨어져 기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 상태의 징후로서 기능하든 기원으로서 작동하든, 그것은 대개 현재와 과거 사이의 인력을 형성한다.
인물들의 온갖 기행을 나열하며 세상의 보편적인 감정에 기어코 다다르려 하는 이승원 감독 역시 인물들의
'세자매'가 감정을 분출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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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옥 월드는 기본적으로 ‘집’을 빼앗는 자와 되찾으려는 자의 싸움이다.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인물들이 지닌 욕망의 궁극으로 그려진다. 이 세계의 입문작인 <아내의 유혹>(SBS)과 최근작인 <펜트하우스>(SBS)가 모두 부동산 투기로 부를 축적한 상류층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김순옥 월드를 향한 뜨거운 반응의 핵심에는, 갈 데까지 간 막장의 재미보다 부동산공화국 한국의 욕망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순옥 월드의 3단 진화
김순옥 월드의 역사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아내의 유혹>, <왔다! 장보리>(MBC), <황후의 품격>(SBS)이 각 시기의 출발점이다. <아내의 유혹>으로 시작된 김순옥 월드 1기가 복수 위주의 이야기라면, <왔다! 장보리> 이후는 기존 복수에 성공의 욕망이 더해지고, <황후의 품격>부터는 그 욕망의 서사가 블록버스
김순옥 월드의 종합판 '펜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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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영 앤 뷰티풀> 개봉 당시, 어느 인터뷰에서 프랑수아 오종은 “성매매에 종사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의 판타즘을 건드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의 인터뷰어는 왜 하필 ‘욕망’과 연계되는지를 물었고, 이에 감독은 “섹스의 객체가 되는 것은 추정컨대 매우 분명한 무언가가 있는 경우다”라고 답했다. 한동안 나는 이 인터뷰 내용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두 가지로 그의 대답을 이해했다. 먼저 감독이 설명하듯 인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감정의 속성 중에는 분명 ‘수동성의 부류’라 언급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다만 영화가 극단적으로 특정한 상황에 몰두하기에 이해가 난해할 따름이다.
둘째로 섹슈얼리티 자체가 간접적인 목적으로서 이를테면 추상적 ‘자본의 영역’에 귀속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두 번째가 더 흔한 추론일 것이다. 하지만 <영앤 뷰티풀>의 캐릭터는 두 번째 추정에 대해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마린 백트가 연기하는 17살
프랑수아 오종의 '썸머 85'가 절망에 빠진 세계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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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켄트 감독의 <나이팅게일>에는 두개의 장르가 공존한다. 하나는 강간복수극이고 다른 하나는 서부극이다. 강간복수극 이야기를 먼저 하자. 이름에 속한 두 단어로 쉽게 정의될 수 있는 장르다.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배우자 또는 연인이 강간당한다. 주인공은 강간범들을 한명씩 최대한 잔인하게 죽인다. 20세기 중후반 여성 주도 액션물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이 장르를 피할 수가 없다. 주연이 팸 그리어건 라켈 웰치건 가지 메이코건 여자주인공이 남자들을 살육하는 액션을 시작하는 동기로 거의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강간이 등장했다. 이 리스트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가이드를 따라 챙겨보다보면 한 없이 길어질 수 있고, 그 리스트의 총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킬 빌> 시리즈다. 현란한 액션과 재미에도 불구하고 <킬 빌> 시리즈가 갑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1960, 70년대 선정영화의 정서에 지나치게 충실해 발전 없이 그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
강간복수극과 서부극이 공존하는 '나이팅게일'이 택한 최소한의 윤리적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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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부부 흥주(양흥주)와 은주(서영화)는 택시 안에 있다. 멀미가 날 것 같은 구불구불한 곡선의 도로 위를 달리며 택시 기사와 흥주는 30년 전 흥주가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춘천을 방문했던 기억을 회고하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1988년, 서울에서는 올림픽이 열렸고 청평사 근처에서 소라를 팔았던 노점상들은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모두 철거를 당했노라고 택시 기사는 말한다. 택시 기사의 이 말은 부부를 인도하여 30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게 하는 발화점이다.
그때 은주는 핸드폰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뒤를 이어 정체불명의흰색 밴이 위협적으로 클랙슨을 울리더니 택시를 앞질러 간다. 외견상 피상적이고 우연한 이 도입부의 삽화는 회복할 수 없는 과거의 메아리를 되짚어가는 이 영화의 주제에 대한 메타포이다. 소거당한 기억과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차를 돌려 되감기는 시간(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판본에는 택시가 중앙선을 넘어 유턴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개봉 버전에서는 삭제되었다), 사랑이
장우진이 '춘천, 춘천' '겨울밤에'에서 계절과 풍경을 관계의 우화로 조형하는 방식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