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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신선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작품과의 만남은 분명 반가운 경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학교는>은 그 즐거움을 오래 이어가지 못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의 4부쯤을 보며 생각했다. ‘꼭 12부작이어야 했을까?’ 그 후 같은 의문이 수차례 떠올랐다. ‘진정 12부작이어야만 했나?’ 그리고 11부가 끝나는 순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다고?” 물론 60분물 16부작 ‘미니시리즈’에 단련된 한국인에게 709분의 러닝타임이 절대적으로 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우학>은 질주하는 좀비 떼의 속도와 별도로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유독 강한 인내심이 필요한 시리즈다. <씨네21> 송경원 기자는 1342호에서 “이 빤한 시리즈의 속도는 약간 이상하다”라고 지적하며 “의도와 달리 전체적으로는 그렇게 빠르다는 인상을 받지 못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에피소드들이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이 원작 웹툰에서 버리고 취한 것들이 만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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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의 ‘비극’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다 실로 가까운 곳에서 그 비극을 보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또다시 스크린으로 옮겨진다 해도 우리는 더이상 놀라지 않는다. 그의 희곡들은 스크린 위를 끈질기게 파고들었고, <맥베스> 또한 수차례 영화화되었다. 그중에는 오손 웰스, 로만 폴란스키,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진지한 거장들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조엘 코엔이 이 유명한 비극을 다시 영화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저 거장들 못지않게 양식적인 작품을 만들어왔지만, 그들과는 달리 빼어난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코엔 형제의 형 조엘이 과연 어떤 모습의 비극을 완성해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사실 코엔 형제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장르영화의 문법만큼이나 문학작품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형제는 제임스 M. 케인과 레이먼드 챈들러
'맥베스의 비극' 조엘 코엔이 만들어낸 비극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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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어떤 틈새들을 생각하며 ‘구찌’가 걸린 아이러니의 덫은 무엇일까 곱씹어보았다.
<하우스 오브 구찌>에는 톰 포드가 등장한다. 당시 톰 포드는 구찌가 낡고 한물간 브랜드로 쇠락해갈 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아 반등의 기회를 마련하면서 스스로도 유능한 디자이너로 인정받았고, 영화에도 이에 관한 일화가 삽입된다. 사실 포드 개인에 관한 서사는 그다지 많이 할애되지 않아 그저 소소한 에피소드쯤으로 그치는 듯한 인상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존재가 패션에 다문한 관객층을 위해 새겨진 이스터 에그 정도로만 기능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관객 개개의 배경과 맥락에 따라 정보의 입지가 달라진다는 엄연한 사실 위에서) 파트리치아나 마우리치오, 알도, 파올로의 이름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조금 생소하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이름이 ‘이름’ 이상으로 받아들여질 때는 성(姓) 구치를 함께 언급할 때이며 심지어 그럴 때조차 그들의 존재감은 브랜드 구찌라는 네
'하우스 오브 구찌', 구치는 어떻게 구찌에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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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이항의 대립 관계에 관한 영화다. 스필버그는 인종과 인종, 토착민과 이민자, 가진 자와 없는 자, 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관계를 단순한 대결 구도로 재현할 마음이 없다.
뛰어난 예술 작품은 또 다른 창작의 토양이 된다. 무대에서 위대한 뮤지컬의 여정을 밟아온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아서 로렌츠의 책에 제롬 로빈스와 레너드 번스타인, 그리고 젊은 시절의 스티븐 손드하임이 가세한 뮤지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의 옷을 입는다. 어니스트 리먼이 작가로 참여한 영화 버전이 거둔 성공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뮤지컬과 별개로 1960년대부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교향적 무곡>을 수차례 녹음했던 번스타인은 1984년에 키리 테 카나와와 호세 카레라스 등을 불러들여 스튜디오 버전의 2장짜리 음반을 만들었다. 어떤 관객은 그 음반이 사운드트랙인 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개성 넘치는 변화를 가져온 음반은 앙
스티븐 스필버그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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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문연구원 우주탐사그룹 선임연구원. 영화 속 혜성 충돌은 오늘날 우리 인류가 맞닥뜨린, 그러나 애써 무시하고 있는, 전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문제들로 치환해볼 수 있다. 위기의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대처하는 자세는 비슷할 것 같다.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돈 룩 업>을 봤다. 영화를 먼저 본 지인들은 내게 구체적인 힌트는 주지 않고 추천만 했다. 재밌는데 무섭다고 했다. 과학자와 정치가가 등장한다는 말에, 그거 참 재밌겠다 싶어 무선 이어폰을 끼고 개수대 맞은편에 태블릿을 올려두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고무장갑을 꼈다. 여느 때처럼 설거지를 해치우는 동안 가볍게 영화나 보며 집안일의 지겨움을 쫓을 요량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찻주전자에 물이 끓는 휘파람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공포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찰나, 뜨거운 차 한잔과 간식을 들고 모니터 앞에 앉아 음악으로 지루함을 쫓으며 관측을 시작하는 천문학자가 보였다. 아니구나. 곧이어 기이한 소
천문학자가 본 '돈 룩 업', 신중한 과학적 묘사보다 눈길을 끈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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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두운 시기에 이 영화를 보고 위로를 받았다. 처음엔 끔찍한 상상이 제공하는 웃음을 통해, 마지막엔 기도로.
애덤 맥케이의 모든 작품을 보지는 못했음을 고백한다. 다만 그의 널리 알려진 최근 두 작품 <빅쇼트>와 <바이스>만을 놓고 생각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특징 하나는, 영화가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제4의 벽을 넘고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이나 커트(제시 플레먼스)처럼 픽션 속 캐릭터가 관객을 향해 자신의 속마음을 직접 밝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빅쇼트>에선 이상한 표현이지만 ‘배우 마고 로비가 마고 로비로 등장’하여 어려운 경제 용어를 설명하기까지 한다. 오직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자료화면 같은 이 신은 사실상 그대로 들어낸다 하더라도 극의 전개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혹은 극단적으로 말해 자막 처리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자막 자체가 시간의
'돈 룩 업'에 즐비한 들어내도 되는 장면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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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시리즈의 팬으로서 이번 영화에 대해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에 대해서 짚어보았다.
과거의 대중문화들이 현재로 다시 소환되고 있다. 사이먼 레이놀즈의 저서 <레트로 마니아>에 달린 부제처럼 ‘중독’에 가까운 수준으로 말이다. 음악으로 국한해서 보자면 ‘쎄시봉’을 필두로 7080이 붐이었다가 ‘토토가’의 90년대를 거쳐 이젠 ‘싸이월드’의 2000년대 초중반까지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닿을 곳까지 왔다. 콘텐츠를 향유했던 장소는 물리적 공간에서 가상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공간에서의 공통의 추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가 마지막 시기이자 무대가 아닐까 싶다. 그 시기에 진행된 PC의 광범위한 보급과 이후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콘텐츠를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즐기게 되었고 사회는 전보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되기 시작한다.
이 마지막 시기에 등장했던 영화 중 문화 현상을 일으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실패한 속편이 된 두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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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뭘 믿고 살아요?” “그건 저도 모르죠.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아죠.” 믿음을 잃은 사제에게 건네는 정신과 의사의 이 말이 어쩐지 조용한 위안으로 다가왔다.
무표정한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안, 한 남자가 흐느낀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고 적막만이 그의 울음소리를 감싼다. 남자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근처 승객들에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여러 번 외쳐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의 울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을 때, 건너편 창가에 앉은 다른 남자가 말한다. “불쌍한 인간. 자기 집에서 슬퍼할 것이지 왜 여기서 저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끝없음에 관하여>를 만들기 이전 15년에 걸쳐 로이 안데르손 감독이 선보여온 ‘인간 3부작’을 가득 채운 불안과 소외의 정서를 드러낸다. 안데르손은 ‘인간 3부작’을 통해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삶의 부조리를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도시의 냉담한 풍경을 그
작은 몸짓: '끝없음에 관하여'가 보여준 삶의 단면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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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데타는 성녀일까 사기꾼일까. 영화의 마지막, 페샤에서 도망친 베네데타가 다시 페샤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녀를 의심했던 나의 과오를 깨달았다.
여자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무언가에 탄 상태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폴 버호벤 감독의 두편의 영화 <베네데타>와 <쇼걸>은 비슷하게 출발한다. 또한 영화의 전반적인 부분이 서로 닮아 있다. 두 주인공은 욕망을 추진체 삼아 앞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뒤를 돌아보는 플래시백도 없다. 그렇게 영화가 끝에 다다르면 두 주인공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쇼걸>의 노미(엘리자베스 버클리)는 라스베이거스의 쇼 비즈니스 중심에서 스스로 나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해 히치하이킹을 한다. <베네데타>의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는 자신이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쳐온 페샤로 발걸음을 다시 옮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베네데타는 왜 자신에게 지옥이 된 그곳으로 스스로 걸어간
'베네데타' 접속에서 접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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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최근 부흥하고 있는 새로운 철학적 주제들, 이를테면 신유물론이나 사변적 실재론 등에 감화된 듯한 인상이 짙다. <티탄>의 등장은 이른바 ‘인류세’를 자각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려는 영화적 노력의 일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보았다.
지난 비평(<씨네21> 1317호 ‘올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티탄>을 기다리며 <로우>를 말하다’)에서 나는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작품 두편, <주니어>와 <로우>를 경유하여 <티탄>을 점쳐본 일이 있다. 뒤쿠르노의 세계는 심화하는 자폐의 공간이며 여성인 주인공과, 조력자 또는 조련사로서 남성의 관계 양상이 <티탄>에서 어떤 식으로 다시 그려지고 규정될지 기대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후 국내 개봉한 <티탄>을 보니 뒤쿠르노의 세계는 더욱 확장되고 심화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무엇보다 새롭게 눈에 들어왔던 건 전작들에서 발견하기
'티탄' 탈인간 중심의 서사를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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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낄대고 주접을 부리며 성장하기를 거부하던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가 사뭇 진지해지고 있는 것 같다. 다음에는 예전의 가벼움으로 돌아와도 좋을 것 같다.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들은 늘 내게 어쩐지 덜 자란 어른이 꾸는 행복한 꿈, 혹은 망상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영화에 좀비, 로봇처럼 비현실적인 것들이 잔뜩 출몰하기 때문도 아니고, 주인공이 초인적인 액션을 가뿐하게 소화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늘 누군가 염원할 만한 ‘판타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서 좀비를 물리치고 여자 친구와의 행복한 일상을 되찾고 싶어 하고(<새벽의 황당한 저주>), 파트너와 함께 멋진 경관이 되고자 한다(<뜨거운 녀석들>). 친구들과 온 동네 맥주를 거덜내고 싶고(<지구가 끝장 나는 날>), 멋진 차를 타고 여자 친구와 드라이브를 떠나고 싶다(<베이비 드라이버>). 얼핏 소박해 보이지만 삶에서 쉽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는 이
불온한 판타지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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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페데리코 펠리니를 떠올렸다. 펠리니 영화의 자전적 성향을 <신의 손>은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펠리니에 대한 오마주 그 자체로 보인다.
이 영화의 시작부는 다소 기이하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서 바라본 나폴리의 풍경이 나타난 이후, 카메라가 곧장 비추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파트리치아(루이자 라니에리)의 모습이다. 버스를 기다리던 파트리치아는 다소 몽환적인 상황을 겪는다. 그녀가 경험하는 사건 때문에 주인공 파비에토(필리포 스코티)의 가족들이 한데 모이지만, 그곳에서 파트리치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는 없다. 오직 파비에토만이 파트리치아가 어린 수도승을 만나서 두 시간이나 귀가가 늦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영화의 관전 포인트가 형성된다. <신의 손>은 훗날 감독으로 성장하는 파올로 소렌티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따라서 ‘영화에 대한 영화’이며, 욕망에 관한 자서전
화려한 만큼 정직한 욕망에 대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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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워 미드나잇>은 어느 순간 환상이 현실에 힘이 되어줄지 확신하며 환상을 작동시키는, 용기 있는 영화다.
소박하고도 강인한 영화를 만났다. 어느 순간에 환상성을 불어넣어야 할지 확신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르는 영화, 그 경계 사이로 감정이 흘러갈 수 있도록 고무하는 영화, <아워 미드나잇>은 건강해서 아름답고 유연해서 강하다. 어떤 영화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영화의 미학적 형식을 상찬하는 표현으로, 강인하다는 건 인물들과 서사를 다루는 영화의 태도에 대해 이르는 표현으로 읽히기 쉽지만, 사실 둘을 분리하는 작업은 어렵고 대체로 무용하다. 형식과 태도는 하나다. 허울만 좋은 이미지 안에서 인물들이 생생히 살아나기는 어렵고, 주제에 몰입하는 서사는 영화가 지닌 환영성의 가치를 종종 무시한다. 영화의 환상성을 사랑하되, 현실의 무게를 저버리지 않는 임정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아워 미드나잇>은 단출하지만 강력한 형식을 구사하며 특별해진다. 그
코끼리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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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디스패치>에 관한 작품비평이라기보다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에 관한 노트가 되었다. 눈길을 끄는 외관보다 더 독특한 내부를 생각해보았다.
웨스 앤더슨이라는 연출자에 관해 비평하는 것은 은근히 까다로운 일이다. 그는 명성과 성취에 비해 늘 덜 회자된다. 정확히는 특정한 화제에서만 동어반복되는 편이다. 인상적인 ‘영상미’와 화려한 ‘색감’은 그의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나오는 소리이지 않은가. 물론 감독 스스로가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화면을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데 천착하니 정녕 피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미장센은 즉각적으로 아름다우며 이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가 영화의 외피를 현란하게 재단하는 만큼 영화의 내부 질서 또한 능란하게 조직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유난히 비주얼리스트로서의 면모만 부각되는 것은 다소 억울한 일이다.
그가 20년 전 연출한 <로얄 테넌바움>은 거짓말에 관한 영화였다. 오랫동안 머물던 호텔에서 쫓겨날 신세가
허구와 인공의 앤더슨 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