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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에게>의 세상에는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시리아 내전의 한복판. 우유와 기저귀, 채소나 과일처럼 자라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전쟁터에서 태어난 아기에겐 보통의 사람에게 있는 청각적 반사신경이 없다. 지척에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에 엄마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장면에서 어린 딸 사마는 태연하다. 포탄이 쏟아질 때 터지는 굉음과 진동이 이곳 아이들에겐 그저 환경의 일부다. 포격 소리에 엄마가 놀란 순간 움직임이라곤 없는 사마를 보는 관객은, 저 고유한 움직임에서 그간 보기 어려웠던 전쟁의 한쪽 면을 목격한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자리가 촬영될 수 있던 것은 ‘엄마의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이 카메라를 들 수 없었던 순간
전쟁은 엄마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사마의 엄마인 와드 알카팁 감독에게 중요한 건 정파 갈등도 아니고 오일머니도 아니다. 전쟁의 스펙터클은 물론, 반전(反戰)의 프로파간다도 아니다. 그녀의 관심은 자신
‘가족 다큐’ <사마에게>가 안내하는 목격자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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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이전에 응시가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선의 대상을 보여주기 이전, 아직 형상이 되기 전인 자국들과, 대상과 화지 사이 부지런히 시선을 오가는 여성들의 얼굴 몽타주로부터 시작한다. 그녀들을 지도하는 목소리는 그 실체를 드러내기 전에 화면 밖 목소리로 먼저 도착한다. “날 천천히 관찰해”라는 말이 들려오면, 지시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다름아닌 관찰 대상임이 드러난다.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학생들에게 미술 선생인 자신을 그려보게 한다. 지도하는 말이 눈앞의 모델에게서 들려올 때 그 말은 뻔한 훈계가 아니라 이상한 마력으로 작용한다. 이는 시선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능동/수동이라는 오랜 허구적 구획을 무너뜨린다. 그림의 대상은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지금 내가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꿰뚫어보는, 나를 마주한 시선이 된다. 그러나 영화는 교차하는 시선의 바깥에 다른 층위의 시선을 개입시킨다. 그림 그리는 여성들 뒤로 그림 하나가 마리안느를 바라보고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고착된 시선을 해방하는 현란한 얼굴의 비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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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슬픈 영화였다. 순옥이라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슬플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린 배우인 김시아가 순옥을 연기했다. 전에 그를 두번 보았음을 기억했다. 그는 부모의 존재가 아쉬운 역할을 내리 맡았다. <미쓰백>(2018)에서 친부로부터 폭력을 당하며, <우리집>(2019)에서는 부모의 존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아예 버림받은 순옥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른 영화들이 떠올랐다. 부모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영화가 슬프다고 생각했다.
국가간에 존재하는 상하관계
재난영화에 있어 한국은 아찔한 공간이다. <대지진>(1974)이나 <샌 안드레아스>(2015)의 지진이 한국의 일이라면? <백두산>은 그런 그림을 그린다. 백두산의 폭발이 4차까지 이어질 경우, 한반도의 아래 일부분만 존재할 거라는 예측이 나온다. 땅이 꺼지고 빌딩이 무너지는 액션영화를 하도 경험하다 보니 어지간한 재난의 광경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던 차에
<백두산>의 재난 앞에서 무력한 소녀를 보며 슬픔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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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제작되는 남북 분단 소재의 영화 중 관객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유형은 현재의 남북 관계를 토대로 ‘만약에’라는 서사적 가정을 결합시키는 작품들이다. <강철비>와 <백두산>은 모두 현 남북 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인 북핵 문제를 중심에 두고 쿠데타와 백두산 폭발이라는 서사적 가정을 결합하여 겨울 시즌 흥행작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이 두 작품 모두 재난영화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를 경유해 서사를 전개하지만, 한반도를 위협하는 사건의 해결에 다가갈수록 ‘버디무비’의 특징을 강화해간다. 버디무비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두 인물이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주어진 난관을 함께 극복하는 특징을 갖는 것처럼, 이들 영화의 남북 요원들 역시 한반도를 덮친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지워내고 ‘우정’을 쌓아간다. 이 글은 이 우정에 대한 의심이자 그 우정의 수사에 내재한 우리의 정치적 무의식에 관한 것이다.
우정이라는 착시효과
버디무
<백두산>의 우정을 의심하며 영화에 내재한 정치적 무의식을 숙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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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v 페라리>(2019)의 배경인 1960년대 중반은 레이싱 장르의 영화가 폭발했던 시기다. 1966년 존 프랑켄하이머가 <그랑프리>로 금자탑을 세운 뒤, 레이서로도 유명한 폴 뉴먼의 <위닝>(1969)이 나왔고, 그들에게 질세라 스티브 매퀸은 <르망>(1971)의 주인공을 고집했다. 만듦새에서 <위닝>이 다소 밀리는 편인데, <그랑프리>와 <르망>은 양극에서 레이싱 영화에 접근했다. 전자가 첨단의 시청각 표현에 낭만적인 톤을 더했다면, 후자는 르망 매뉴얼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사실적이고 건조한 레이싱영화였다. 두 영화에는 특이한 구석이 몇 가지 발견되는데, 그중 하나가 공히 언급하지 않는 이름이다. 레이싱카가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두 영화에서, 레이싱의 역사를 쓴 페라리가 계속 언급되는 것은 당연하다. 포르셰의 영광이 열린 즈음에 제작된 <르망>에서 매퀸이 포르셰를 모는 것도 수긍이 간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포드 v 페라리>를 통해 드러낸 미국 영화산업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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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80년대에 오페라영화를 만들려는 유행이 잠시 분 적 있었다. 잉마르 베리만, 조셉 로지, 프란체스코 로시, 프랑코 제피렐리와 같은 쟁쟁한 감독들이 이 유행에 참여했고 상당히 좋은 작품들을 냈다. 카라얀 역시 이 시도에 관심을 가졌고 직접 감독작을 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소련에서는 이미 나와 있는 녹음 위에 새 배우들이 립싱크하는 방법으로 오페라영화를 만드는 시도가 있었다. 이는 논리적이었다. 오페라영화는 기본적으로 후시녹음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 유행은 당시 기대만큼 오래가지는 못했다. 하나의 종합예술을 다른 종합예술로 전환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인기 있는 대부분의 오페라들은 20세기 이전 작품으로 무대에 종속되어 있다(“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이라고 묻지 마시길. 셰익스피어의 시공간은 <토스카>의 시공간보다 훨씬 융통성이 있다. 다시 말해 더 영화적이다). 오페라 가수의 연기를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페라 팬들에
<캣츠> 톰 후퍼 감독의 잘못된 선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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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틱스>를 관람한 이들은 아마도 비슷한 이유로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 것이다.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를 기어이 찾아보고자 했다면, 거기엔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경력이 많은 부분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티 디옵은 그 이름이 익숙하지 않을 뿐, 이미 단편 작품들로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클레르 드니의 <35럼 샷>(2008)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네갈의 대표적인 감독이자 시인이었던 지브릴 디옵 맘베티의 조카인데, 그가 만들었던 <투키 부키>(1988)를 모티브로 해 <천개의 태양>(2013)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감독의 수상 경력이나 유명세가 아니다. 세네갈계 프랑스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지니고 있을 감독의 깊은 정체성이 <애틀랜틱스>의 기저에 깔려 있음을 우선 언급해야 할 것 같았다. 더욱이 동명의 단편 다큐멘터리 &
<애틀랜틱스>가 선보이는 이미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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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이야기>는 집요할 만큼 ‘대칭적인 하나의 짝’으로 구성된 영화다. 전반적으로 결혼과 이혼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물론이고,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찰리(애덤 드라이버)라는 주인공들이 그러하며, LA와 뉴욕이라는 배경 또한 대립적으로 비친다. 가족드라마인 동시에 매력적인 법정 영화인 이 영화에서 찰리가 만나는 두명의 남자 변호사 또한 서로 다른 상징성을 지닌 하나의 짝이다. 잘나가는 만큼 냉정하고 몰인정한 변호사 제이(레이 리오타)에게 당황했던 찰리가 인간미 넘치는 변호사 버트(앨런 알다)를 만나고 감동해 그를 선임했다가 법정 싸움에서 불리해지자 버트를 자르고 제이를 선임하는 과정은 관객에게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결혼과 이혼 과정에서 찾아온 삶의 균열
영화와 마찬가지로 결혼 또한 서로 다른 두개의 세계가 하나의 짝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혹은 하나의 세계가 관계의 불균형을 깨닫기 시작하면 그 결혼에 문제가 생기기 시
<결혼 이야기>가 섬세하게 쌓아올린 시간의 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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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팀의 크리스마스 파티, 디에고가 구석 테이블에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다. 항상 축제의 중심에서 좌중을 장악하던 이전과 상반된 모습이다. 사운드가 페이드아웃되고 디에고가 공허한 눈빛으로 바닥을 응시한다. 혼자만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듯이. 1990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가 아르헨티나에 패배한 이후 급변한 디에고의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난 숏이다. 미디어가 축구의 신 ‘마라도나’의 흥망성쇠에 집중할 때,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은 그 속에서 인간 ‘디에고’의 모습을 건져올린다. 그의 세심함은 전작 <세나: F1의 신화>(이하 <세나>)와 <에이미>에서도 돋보인다. 레이싱 도중 사망한 동료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아이르통 세나, 망연자실한채 무대 뒤에 앉아 있던 에이미 와인하우스. 이러한 필드 밖의 순간들이 모여 인물에게 입체감을 부여한다. 부와 명성, 빛나는 천재 타이틀 뒤편의 그림자를 짚어내는 예리한 시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아시프 카파
<디에고> <세나: F1의 신화> <에이미>를 통해 본 아시프 카파디아의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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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30분에 달하는 <아이리시맨>의 기나긴 상영시간에서, 주요 인물인 지미 호파(알 파치노)는 영화 시작 45분 뒤에야 등장한다. 그는 영화가 언급하는 것처럼 실제 미국의 역사에서 “1950년대의 엘비스보다 1960년대의 비틀스보다 유명하고 심지어 대통령만큼이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호파는 일찍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는 했지만 1932년 디트로이트의 트럭기사노조 299지부에 노동조직가로 초대받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03년에 창설된 국제트럭기사노조(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 이하 IBT)는 1933년에 7만5천명의 노조원을 보유한 데 지나지 않았지만 호파가 이 노조에 들어와 맹활약하면서 1951년에는 100만명의 노조원을 거느리는 미국 최대 노조 중 하나가 되었다. ‘팀스터’란 일반적으로 트럭기사를 뜻하지만, IBT에는 일반 차량 기사뿐 아니라 창고업자와 그 밖의 운송 관련 노동자들까지 가입할 수 있었다.
“망할
영화 <아이리시맨>과 역사 속 국제트럭기사노조, 마피아, 그리고 미국 대통령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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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기억의 진실에 관한 영화였다면,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그저 평범한 영화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매력은, 실제와 허구가 뒤엉키며 존재하는 기억의 논리가 영화의 존재 방식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의 리얼리티와 맞물린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연기자가 ‘가짜 눈물’의 힘을 빌려 슬픔을 연기한다면 그 슬픔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그리고 그 가짜 눈물에 속아 눈물을 흘리는 관객의 감정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진실과 허구 사이를 끊임없이 진자운동해야 하는 영화의 운명.
파비안느가 리허설 장면에서 얼어붙은 이유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인 ‘카트린 드뇌브’가 자신과 유사한 입장의 파비안느를 연기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가 카트린 드뇌브이고 어디까지가 파비안느인지 확신할 수 없다. 실제의 배우와 가상의 인물이 혼재되며 구현된 형상을 만나는 것, 그럼으로써 영화 그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카트린 드뇌브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 영화의 진실을 보여주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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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현실을 수선하기.” <아이리시맨>을 보다가 문득 로베르 브레송의 저 유명한 문구가 뇌리를 스쳤다. 3시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영화에 매몰됐다가 잠시나마 영화 바깥으로 의식이 빠져나간 건 늙은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니로)이 딸에게 냉혹한 현실을 전해 듣는 장면 때문이었다. 평생을 마피아의 히트맨으로 일했던 프랭크는 말년에 요양원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영화 내내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던 둘째딸 페기(안나 파킨)가 이제 자신을 만나주지도 않자 프랭크는 답답한 마음에 다른 자식에게 하소연을 하러 간다. 그때 또 다른 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자신들은 아버지한테 혼날까 평생을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다고. 그걸 여태껏 몰랐냐고.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순간 나는 내가 이 영화에, 그리고 프랭크라는 인물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프랭크의 시점에서 전개되던 영화는 페기의 순진무구한, 혹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시선을 잠깐씩 보여주는 게 전부다
<아이리시맨>에서 <겨울왕국2>까지, 2019년 시네마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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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은 주인공 카티아 세케르지(다이앤 크루거)가 어떤 중요한 선택을 하면서 끝이 난다.
백인 카티아는 터키 이주민 출신 누리(누만 아차르)와 결혼해 6살 난 아들 로코(라파엘 산타나)를 두고 독일에 살고 있다. 카티아의 삶은 의문의 폭탄테러로 남편과 아들이 희생된 후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다. 폭탄테러를 수사하는 경찰들은, 마약 거래로 수감 생활을 했던 누리가 마약 밀매조직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원한 관계인 터키계 마피아가 폭탄테러를 저질렸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가족을 잃은 처참한 고통 속에서 카티아는 이주민에 대한 편견과도 마주하게 된다.
신나치주의를 신봉하는 폭탄테러 용의자 부부가 드러난 후, 카티아는 폭탄테러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 남편의 사무실 앞에서 마주친 여자가 용의자 중 한명임을 확신한다. 삶을 포기하려 했던 카티아는 법정에서 이들을 단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그러나 용의자들의 알리바이가 한 그리스 신나치주의자에 의
<심판>의 이중구조를 숙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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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감독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이하 <코끼리>)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 사이에는 몇 가지 접점들이 있다. 제목에 ‘코끼리’가 포함되어 있지만 두 영화에는 코끼리가 나오지 않는다. 후보의 영화 마지막에 울부짖는 코끼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두 영화는 다중 캐릭터 서사의 전범이 될 만한 모델로, 복수(複數)의 인물들이 그들 각자의 삶을 전환시키는 사건을 중심으로 교차하면서 부딪히고 순환하는 관계를 그린다는 점에서도 같은 맥락을 가진다. 형식에 관해 말하자면 저들은 하염없이 길게 늘어지는 롱테이크와 각자의 스토리를 갖는 인물들의 뒤를 좇는 유려한 스테디캠 촬영으로 각별한 시각적 인상을 창조한다는 점에서도 가까이 있다.
<코끼리>와 <엘리펀트>는 공통점이 더 있는데, 공히 ‘죽음’을 중심 모티브로 하여 서사가 짜였고, 모든 죽음이 해명할 길 없는 부조리의 냄새를 풍긴다는 점에서도 같다. 더하여 후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가 고독과 소외, 분쟁, 광기에 싸인 현실 세계를 모자이크하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