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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1985>는 이제까지 반기득권 편에서 나온 정치영화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고 선동적인 영화다. 고 김근태 의원이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겪은 고문에 기초한 이 영화는 매우 명시적인 방식으로 소재를 다룬다. 간단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빼면 주인공 김종태(박원상)가 남영동 분실에서 고문당하는 과정이 영화의 내용 전부다. 명시적이며 동시에 미시적이다. 나는 이 단순한 구조의 영화가 내재한 드라마가 예상 밖으로 많은 겹을 갖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여느 보통 관객과 마찬가지로 100여분 동안 주인공이 고문당하는 스토리에 불편한 죄의식을 예감했던 나는 영화가 재미있었다. 이게 누군가에게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 그랬다. 재미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면 활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전작 <부러진 화살>에서 굳이 숏간의 짜임새에 신경을 쓰지 않은 듯했던 정지영 감독의 연출감은 이 영화, <남영동1985>에선 훨씬 정교하게 느껴진다. 이 활
[신 전영객잔] 공존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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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100년(1995년) 이후 그나마 가장 뚜렷이 부상하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목하 마감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2012년에도 일정한 소산을 낸 서브 장르를 꼽으라면 파운드 푸티지 영화(Found Footage Film)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참 안 어울리는 노장 마이크 니콜스가 파운드 푸티지 기법을 전면구사했다는 <더 베이>의 리뷰가 나오고 있고 인도네시아에서 찍은 <레이드>로 오랫동안 권태에 몸을 꼬던 액션영화광들의 급소를 찔러준 가레스 에반스 감독이 파운드 푸티지 옴니버스 <V/H/S>의 속편 연출자로 물망에 올랐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마이클 베이의 제목 미정 SF가 파운드 푸티지 스타일이란 소문은 좀 됐다. 말할 나위 없이 할리우드의 파운드 푸티지 유행은 투자 대비 수익의 크기와 직접 관련이 있다. ‘파운드 푸티지’라는 항목을 하위 장르의 색인에 등재시킨 <블레어 윗치>(1999)는 6만달러로 찍어 전세계에서 2억5
[신 전영객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영화들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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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사항: 반드시 영화 <도주왕>을 보신 다음에 이 글을 읽으시기를 청합니다. VOD와 DVD로 보실 수 있습니다.
제1부 아르망은 무엇이 되는가
알랭 기로디의 <도주왕>은 시치미 뚝 잡아떼고 웃기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초반부에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배치되어 있다. 한적한 어느 날 밤 영화의 주인공 아르망은 그가 좋아하는 타입의 노신사를 주의 깊게 뒤따라가는 중이다. 그런데 하필 아르망은 그때 한 무리의 십대 불한당 녀석들이 같은 또래의 소녀 한명을 끌고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는 걸 보고 만다. 그는 갈라지는 길 위에 서서 잠깐 동안 망설인다. 어쩌나, 모른 척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하나 아니면 저 소녀를 구해주어야 하나. 아르망은 발길을 돌려 위기에 빠진 저 소녀를 구하기로 한다. 소녀를 강간하려는 십대 녀석들을 향해 딱 버티고 선 아르망의 체격은 건장하다 못해 위협적일 정도로 뚱뚱한 덩치이니 비리비리한 저 녀석들 몇명쯤 겁주거나 패주는 건 일도
[신 전영객잔] 아르망의 기이한 모험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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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특성상 관람 전에 읽으면 감흥이 크게 반감됩니다.
말릭 벤젤룰 감독의 <서칭 포 슈가맨>은 1970년대 초 심금을 울리는 두장의 앨범을 내놓았으나 대중의 철저한 외면 속에 증발해버린 미국의 포크 록 뮤지션 시토 로드리게즈의 정체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미 제3자에 의해 완료된 추적 과정을 복기한 다큐멘터리다. 본국에서 사장된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민들레 홀씨처럼 한 젊은이의 여행 가방에 실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날아들어갔고 악명높은 인종분리 정책과 표현의 자유 탄압에 저항하던 그 나라 사람들의 폐부를 찔렀다. 불법 카피를 통해 들불처럼 번져나간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영화 속 증언에 의하면 정치적 저항운동의 깃발로 옹립됐고 남아공 대중음악의 지형도마저 바꾸어놓기에 이르렀다. 음악은 복음의 반열에 올랐는데 정작 뮤지션 본인의 신상은 알려진바 없는 희한한 상황은 ‘도시 전설’이 싹트는 토양이 된다. 급기야 남아공 국민들은
[신 전영객잔] 아무도 몰랐던, 아무것도 몰랐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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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김기덕은 한국영화 평단에서 무시당해왔으나 그의 영화 <피에타>로 결국 승리했다. 김기덕의 <피에타>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직후 대다수 한국 매체가 그와 같은 논지의 기사를 실었다. 이것이 비록 비평의 영역이 아니며 이미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일이라 해도 짚고 넘어가야 할 하나의 전제는 될 것이다. 몇 가지 간단한 사실만으로도 이 의견들은 반박이 가능하다. 그가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전문 영화 저널과 주요한 저널리스트들이 그를 특별히 주목하기 시작한 일은 이미 오래되었고 한해의 중요한 영화를 선정하는 자리에서 김기덕의 영화는 자주 선정되거나 적어도 후보에 올랐다. 더군다나 그는 동세대 한국 감독 중 온전히 감독 개인 한 사람의 영화 세계에 관한 비평 연구서를 헌정받은 드문 예에 속한다(<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 정성일 엮음, 행복한 책읽기 펴냄). 그러니 그가 받았다는 한국 영화 평단에서의 냉대란 어디서 받은 것이며 <피
[신 전영객잔] 흥미롭지만 퇴행적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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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멸 감독은 내가 지난 몇년간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전주국제영화제 CGV 무비꼴라쥬상을 받은 그의 신화적인 저예산 코미디 <뽕똘>이 지난해 8월 조용히 극장 개봉하고 사라질 때 나는 ‘감독과의 대화’(GV) 사회를 맡으면서 그를 처음 봤다. 어떻게 찍어냈는지 신기할 만큼 <뽕똘>은 홈무비 수준의 예산으로 만든 최저 수준의 만듦새를 감추지 못한 영화였는데 그 지역의 아우라가 짙게 서려 적당히 낄낄대며 난센스 코미디 같은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슬픔만 남게 되는 기묘한 영화였다.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오멸 감독은 경쾌한 외피를 두른 영화의 인상과 달리 진중한 사람이었다. 그와 나눈 대화 중에 내가 <뽕똘>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제주도를 담은 영화라 좋았다”고 한 대목에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이 ‘내부자’의 정체성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제주도 사람의 처지를 슬퍼하고 있었다. 올레길 개발로 관광객이 물밀듯이 밀려오
[신 전영객잔] 응시하라, 패배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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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아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너에게.
네가 이 비밀을 알까? 모든 영화는 각기 다른 종류의 글을 쓰고 싶게 해. 어떤 영화는 귓전에 격문을 불러줘서 받아쓰게 되고, 또 다른 영화는 기도문을 짓고 싶게 만들어. <늑대아이>를 처음으로 본 저녁에 나는 아직 작곡되지 않은 노래의 가사 같은 걸 끄적이고 싶었어. 그리고 두번째로 <늑대아이>를 보러 간 날 밤에는,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네가 옆자리에 있고 극장엔 오직 우리뿐이어서 네게 “아! 이 부분은 마치…”라고 토를 달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했어. 바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유야.
<늑대아이>는 10대 소녀 유키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 영화의 초반은 유키의 엄마인 하나가 대학에서 수업을 청강하던 아빠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얼마 뒤 그가 늑대인간임을 알게 되고, 그래도 상관없이 계속 사랑하고, 남매를 낳아 홀로 기르게 된 역사를 들려주지. 그래, 폴린
[신 전영객잔] 그러니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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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병헌이 연기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잘생긴 스타지만 연기도 잘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김지운의 영화를 통해 완성된 페르소나는 특히 거북살스러웠다. 촉촉한 눈망울로 관객을 대하며 자기 자신을 연민하는 듯한, <달콤한 인생>과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복수를 집행하는 인물도 그렇고 순도 높은 악을 응결해 머금고 있는 듯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의 악인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뱀을 보는 것 같았다. 뱀이지만 아름다운 뱀이다, 이러면 안되는가라고 시위하는 듯한 나르시시즘이 이물감을 주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이병헌의 다른 색깔이 떠올랐다. 겉은 단단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연약하고 치명적인 실수로 자신을 망치면서도 그걸 감당하지 못하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수혁, 시골학교에 갓 부임한 잘생긴 선생으로 나온 <내 마음의 풍금>에
[신 전영객잔] 현대판 광대인 배우가 벌이는 난장의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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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람>을 보고, 올이 여기저기 풀려 있지만 추위를 막는 데에는 지장없는 목도리를 떠올렸다. 이 영화에서 연쇄살인범(김성균)의 행동 동기와 연관된 디테일은 군데군데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거나 뭉그러져 있다. 그래서 영화와 합을 맞춰가며 사건의 전말에 동행하고 싶은 관객의 발목을 잡는다. 거친 장면 전환은 편집실에서 이 영화가 홍역을 앓았으리라는 추측을 부추기며, 장면 이행에 가세한 CG 효과가 조야해 흥을 깨는 대목도 있다. 치밀한 스릴러가 되기엔 거멀못이 한참 헐겁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스릴러 장르에서 플롯의 구멍은 치명적이다. 일단 “사실적 스릴러에서 설득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려준다”는 평론가 이동진의 20자평에 전적으로 공감한 다음, 나는 김휘 감독의 <이웃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상당한 쾌감을 안기는- 치명적 결함을 못 본 체할 용의를 갖게 하는- 이유를, 강풀 원작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서 보려고 한다.
복도식 아파
[신 전영객잔] 문제는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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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휘의 영화 <이웃사람>을 먼저 보고 강풀의 원작 만화를 나중에 봤다.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했다. 중간에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 리듬이 불안한 대목이 있지만 이 정도면 원작의 각색 영화로는 준수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 들어 있던 호러영화의 요소를 감했다거나, 누락되거나 변형된 몇개의 디테일들이 영화를 원작만 못하게 만들었다는 강풀 원작 팬들의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수긍할 만한 것도 있다. 연쇄살인범 류수혁이 경비원 황씨를 자신의 아파트 문 앞에서 살해한 뒤에 바닥에 흥건히 퍼진 핏자국을 와인병을 깨트린 흔적으로 위장하면서 위기를 넘기는 설정 같은 것이 그렇다.
마동석이 연기한 안혁모 캐릭터의 중요성
개별 인물들의 사연이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따로 논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건 웹툰을 읽는 독자의 호흡을 제한된 상영시간 안에 봐야 하는 관객의 호흡으로 바꿔야 하는 매체의 다른 특성상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게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 중반 대
[신 전영객잔] 악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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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니 스콧의 투신자살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쓰겠다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잠깐 놀라고 애도의 마음을 가졌을 뿐 곧 잊었다. 하지만 방향은 엉뚱한 순간에 휘었다.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전철을 타야 하고 그 전철을 타면 철교를 한번 건너야 한다. 내려다보니 흙탕물이었다. 토니 스콧이 뛰어내렸다는 LA 산페드로의 빈센트 토머스 다리 사진을 보고 생의 자의적 최후를 맞이하기에는 다소 황량하고 허름한 곳이 아닌가 생각했던 게 그 흙탕물 때문에 떠올랐다. 그는 왜 뛰어내렸을까, 나이 예순여덟살의 노인이 알려진 것처럼 불치의 뇌종양 때문에 낙담하여 그러한 것도 아니라면 혹시 사랑 때문이었을까, 하고 밥 먹는 도중에 동료에게 말했다가 쓸데없이 군다고 면박만 당했다.
2.
2003년 8월경 <4인용 식탁> 개봉 즈음에 <씨네21>은 ‘영화 속 영화 밖 자살’에 대한 글들을 실었는데 그때 남재일 선배가 자살의 유형에 관하여 쓴 인상 깊었던
[신 전영객잔] 송신과 수신의 액션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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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필모그래피
1986 <카라바지오>
1988 <대영제국의 몰락>
1989 <전쟁 레퀴엠>
1990 <정원>
1991 <에드워드 2세>
1992 <올란도>
1996 <여성의 도착(倒錯)>
1998 <러브 이즈 더 데블: 프랜시스 베이컨의 초상을 위한 스케치>
2000 <비치>
2001 <딥 엔드> <바닐라 스카이>
2002 <어댑테이션> <테크노러스트>
2003 <영 아담>
2005 <콘스탄틴> <브로큰 플라워>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2006 <스테파니 댈레이>
2007 <마이클 클레이튼>
2008 <줄리아>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번 애프터 리딩>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9 <
[신 전영객잔] 그/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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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에게
친구, 네가 그토록 열광하는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나도 드디어 보았어. 주말 아침 9시에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간편한 옷을 입고 집 근처 멀티플렉스 상영관으로 달려가 몇장 남지 않은 티켓 중 하나를 겨우 구해 보았어. 물론 나도 영화를 보기 전날에는 무슨 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흥에 겨워 전작 <다크 나이트>를 보며 복습했지만, 스포일러가 두려워 며칠 동안이나 인터넷조차 끊었다는 너 정도의 설렘은 아니어서인지 하여간에 엄청난 흥분보다는 약간의 기대를 안고 극장에 들어갔어.
사실 좀 싱겁게 들릴 게 빤하지만, 영화에 관한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나는 <다크 나이트라이즈>가 <다크 나이트>를 뛰어넘지 못했을뿐 아니라 훨씬 못 미치는 영화라는 평가에 공감하는 편이야. 이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배트맨 비긴즈>를 본 이후에 <다크 나이트>를 보았을 때 어떻게 전자의 그 엉성했던 영화가 이토록 흥미진진한 영
[신 전영객잔] 아이맥스가 시네마를 구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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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도 세상의 아이들은 이불을 덮어주는 부모에게 이야기를 조를 것이다. 어제 들려주고 읽어준 동화와 똑같은 얘기라도 아이들은 개의치 않는다. 아니, 도리어 숙지하고 있는 클라이 맥스에 이르면 신이 나서 “그래서 악어가 해적을 삼켰어!”라고 나서서 마무리 짓고 뿌듯하게 잠을 청하기도 한다. 과하지 않은 변주도 환영 받는다. 부모가 다정히 베드타임 스토리를 읽어주는 광경을 뒷날 미국영화에서나 본 세대인 나는, 누워서 동화를 읽다 눈치껏 전등을 끄는 아 이였는데 어둠 속에선 책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뒤채며 중얼중얼 이야기를 지어 내다 잠이 들곤 했다. 나는 내 자작 엉터리 픽션이 좋았는데, 독창적이어서가 아니라 책에 나오 는 진짜 동화를 그럴싸하게 표절하면서도 등장 인물의 외모와 말투를 내 취향에 맞게 갈아치울 수 있었기에 만족스러웠다. 아득히 잊었던 수십 년 전 잠버릇을 떠올린 건 <어메이징 스파이더 맨>이 절반쯤 흘러갔을 때였다. 앤드루 가필드가 분한 피터 파
[신 전영객잔] 네버엔딩 스토리의 위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