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두 이야기는 결국 만나지 못했는데

<설국열차>는 왜 머뭇거리는가에 관한 또 하나의 가설

<설국열차>에서 남궁민수(송강호)가 등장하는 순간은 예상과 달리 영화의 첫 번째 클라이맥스가 지나간 뒤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와 꼬리칸 반란자들이 꼬리칸을 탈출하며 이 영화에서 가장 역동적인 질주의 쾌감을 불러일으킨 다음, 열차의 감옥에 이르러 마침내 남궁민수의 정체가 드러난다. 반란 지도자 커티스와 비밀스러운 열차의 열쇠가 되어줄 남궁민수가 처음 대면하는 이 순간이 앞으로의 서사적 전개를 책임져줄 중요한 전환시점이 될 것으로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영화는 이 장면에 기대되는 긴장감을 뜬금없는 말장난이나 행동들로 분산시키며 앞선 탈출 시퀀스의 흥을 단절시킨다. 물론 그것이 서사적, 장르적 기대를 배반하는 봉준호 특유의 스타일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그냥 지나치기에는 좀 이상한 점이 있다.

크로놀 냄새를 맡고 깨어난 남궁민수는 부스스한 얼굴로 커티스와 그의 일행을 쳐다본다. 잠시 어색한 순간이 지나간 뒤, 남궁민수와 커티스의 대화가 이어지는데, 카메라는 이 장면을 남궁민수와 커티스를 오가며 찍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남궁민수의 말과 표정, 시선이 담긴 숏과 커티스(일행)의 숏이 서로 마주보며 반응하는 게 아니라, 마치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에 속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남궁민수와 커티스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마치 둘이 존재하는 각각의 숏의 시선은 어긋나는 것 같다는 인상이 여기 있다. 단지 한국어와 영어라는 언어적 차이 혹은 인종적 차이에서 기인한 낯섦 때문일까. 표면적으로는 그런 것 같지만, 커티스의 숏들에 대한 반응에서 한 걸음 비껴난 듯 보이는 남궁민수의 클로즈업은 그런 표피적인 차이로만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응시가 아닌, 정념도 없는

물론 봉준호는 클로즈업을 낯설게 쓰는 감독이다. 특히 그의 클로즈업은 인물이 화면 정면을 바라보는 숏들에서 서사적 맥락이나 인과관계를 넘어서는 시선의 불가해함을 담아낼 때 그 파급력이 있었다. 이를테면 <마더>는 엄마와 도준이 서로를 응시하는 순간을 그들 각각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숏들의 교차로 형상화하는데, 인물들이 같은 시공간에 존재함에도 이들은 서로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 숏을 가득 채운 이들 각각의 얼굴은 소통을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텅 비거나 홀로 충만하고 불안한 초상이며 광기와 히스테리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각각 다른 차원에 고립되어 서로에게 온전히 반응하지 못하는 각각의 클로즈업들은 엄마와 아들 사이를 잇는 시선의 무력한 실패를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남궁민수의 클로즈업 숏들도 그러한 맥락에 있는 걸까. 이에 대답하기에 앞서 <설국열차>의 후반으로 건너뛰어,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엔진칸 앞에서 서로 마주하는 대화 장면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커티스는 열차 꼬리칸의 비극적인 역사를 회상하며 인육을 먹었던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남궁민수는 자신은 커티스가 열고 싶어 하는 윌포드의 문이 아니라, 열차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 싶다고 말한다. 지나온 칸들에서 종종 느꼈던 서사적 미진함을 상쇄하듯 목적지 바로 직전에 설명조로 방출되는 커티스의 고백이나 그저 마약 중독자로 보였던 남궁민수의 갑작스러운 철학적인 견해가 다소 의아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나는 과한 대사의 내용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이 장면을 어색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카메라는 이들의 마지막 대화 장면 역시 남궁민수와 커티스의 정면 클로즈업을 오가며 찍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역시 한쪽이 다른 한쪽에 반응하고 있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맥락에 놓여 있는 세계가 불균형적으로 붙어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전체 영화상 어쩌면 가장 극적인 감흥을 불러일으켜야 할 이 장면에서 커티스에게 몰아치는 신파조의 감정 나열과 그걸 쳐다보고 있지만 무언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남궁민수의 표정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어떤 거리가 있다. 말하자면 남궁민수의 첫 등장과 후반부의 이 장면을 보는 동안 우리는 남궁민수가 커티스의 응시를 되돌려주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 명백한 영화적 사실임을 알지만, 여기에는 그가 바라보는 곳이 정말 그쪽일까 의심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더>에서 인물들의 서로 닿지 않는 클로즈업들이 인물의 내면을 설명하며 서사적으로 기능하는 감정의 표현이기보다는 그 모든 확실한 것들을 모호하게 만드는 정념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설국열차> 속 위의 숏들 사이의 거리도 그런 맥락에서 받아들여야 할까. 그 거리는 과연 의도된 것일까. 분명한 건, 남궁민수와 커티스의 클로즈업 숏 사이의 거리감은 봉준호의 전작들에서와 같은 정념을 작동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정념을 단념시킨다고 말해야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뭔가 다른 종류의 실패가 진행 중인 걸까.

미리 말하자면 그런 것 같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한 특정 숏들의 어색한 결합, 아니 어딘지 단절된 채 이루어지는 교차는 비단 특정 시퀀스에만 국한된, 혹은 어떤 영화적 감흥을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 아니라 영화 전반에 걸쳐 지속된 문제이자, 끝내 영화가 풀지 못한 문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설국열차>를 즐기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앞칸으로의 이동만을 목적으로 삼는 커티스(일행)의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가 지나치게 명징하고 심심하다는 점을 언급하는데, 나는 그들이 받은 느낌에는 공감하지만 그게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 때문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내 생각에 <설국열차>에는 두개의 이야기, 다시 말해 커티스의 이야기와 남궁민수의 이야기가 있으며, 이들이 각기 따로 진행되고 있다는 걸 보는 게 중요하다.

마약 중독자이자 더 많은 크로놀을 얻기 위해 커티스의 제안에 동참하는 남궁민수가 속한 세계는 환각의 세계다. 우리는 그가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 있었고, 행색이 허름하며, 인종적 타자라는 이유 때문에, 무엇보다 그가 커티스 일행에게 열차의 문을 여는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를 꼬리칸 하층계급의 일부로 당연시한다. 게다가 영화의 말미에 열차를 폭파해서 밖으로 나가자는 그의 말에 근거해 우리는 그가 커티스보다 급진적인 혁명가일지 모른다는 데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표피적인 대사나 그의 외관이 주는 편견을 제거하고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에게는 커티스 일행과의 계급적 친연성을 느끼게 할 만한 무엇도 없다. 그는 열차 앞칸의 기득권에 대한 적대가 없으며, 그 자신이나 딸 요나의 목숨이 위협에 처한 순간을 제외하고 꼬리칸 생존자들과 함께 싸움에 동참하는 장면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그는 차라리 윌포드의 엔진칸에 도달하기 직전 통과해야 하는 술과 마약과 섹스로 점철된 광란과 퇴폐의 열차칸에, 그러니까 그 칸에 널브러진 최상층 계급의 기질에 더 가까이 있다.

그런 남궁민수가 갑자기 크로놀로 만든 폭탄을 꺼내어 열차 밖으로 향하는 문을 폭파하려고 할 때, 그를 커티스보다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존재로, 한갓 마약쟁이가 아니라 실은 시스템의 파괴를 꿈꾸는 진짜 혁명가라고 말하는 게 과연 타당한 일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의 환각에 우리도 홀린 것이다. 남궁민수가 이 지점에서 보여준 과격한 대사나 행동은 갑작스러운 정치적 깨달음도, 그의 잠재된 정치의식의 발현도, 나아가 이 영화가 끝내 말하고자 하는 진실도 아니다. 남궁민수는 지금 크로놀 한알이 아니라 몇 십개의 덩어리가 데려다줄 수 있는 환각 지평의 확장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더 광대한 불가능의 심연, 상징계와 완전히 분리된 실재의 차원에 닿고자 하는 욕망 말이다. 그 지평이 지금 그에게는 열차 밖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열차 밖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가 찾는 건 물리적인 조건의 변화가 아니라 심신 어딘가에 잠재된 감각의 끊임없는 갱신을 가능하게 할 수단이기 때문이다. 반면 과거를 반성하며 하층계급의 리더가 되어 열차 꼬리칸에서 앞칸까지 내달려온 커티스가 속한 세계는 (실패한) 혁명의 세계다. 이 세계는 탈출과 공격과 방어, 폭력과 죽음을 반복하며 나아가는 급박한 세계인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내달림이 종종 제어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두 번째 클라이맥스라고 할 만한 터널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요나의 때늦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남궁민수에 의해 열차 다음 칸으로의 문이 열리자, 윌포드의 진압군 한 무리가 커티스 일행을 향해 서 있다. 그렇게 잠시 대치하던 두 집단은 도끼를 휘두르며 싸우기 시작하는데, 저항하는 커티스의 행동이 난데없이 슬로모션으로 전환되고 그 위에 서정적인 음악이 깔린다. 얼마간 그런 식으로 진행되던 싸움은 열차가 예카테리나 다리를 건넌다는 윌포드 수하의 외침에 의해 중단되고 갑자기 한해가 지나감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다음, 철로를 가로막은 얼음덩어리들과 충돌한다. 그런데 이 모든 사태가 지나간 뒤, 바로 다시 싸움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가 등장해서 예의 그 지루한 연설을 이어가고 피터지게 싸우던 반군들은 의아하게도 그 자리에 멈춰서 그걸 듣는다. 그리고 횃불의 스펙터클로 점철된 터널 장면이 뒤를 잇는다.

말하자면 커티스 일행의 질주와 액션의 흐름이 단지 안타고니스트들에 의해 멈춰 세워지는 게 아니라, 영화가 의도적으로 그 시간을 머뭇거리며 지연시킨다는 인상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이 처절한 싸움의 현장에서 커티스의 액션을 슬로모션으로 늘어뜨리고 그가 물고기에 미끄러지는 동작을 펼쳐낼 때, 우리는 궁금해진다. 영화는 행동의 목적을 확신할 수 없으므로 행동의 시간을 최대한 연장시키는 것인가. 이 슬로모션은 장엄함에 더 가까이 있는가, 자기 조롱에 더 가까이 있는가. 분명한 건 여기서 영화는 우리를 구경의 자리로 초대한다는 점이다. 장르적 쾌감이 중요한 싸움 시퀀스에서 그게 무슨 문제냐고 반문한다면, 이 장면의 당혹스러움은 적어도 봉준호의 영화를 보는 동안,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는 세계와 철저히 거리를 두고 이미지를 즐기는 구경꾼의 자리에 우리가 서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관련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커티스와 일행들이 꼬리칸을 탈출하고 앞칸으로 나아가며 산 자의 수가 점점 줄어들수록 영화는 이들을 움직이는 동력을 보여주는 일보다 그 구경의 시간을 늘리는 데 더 골몰하는 것처럼 보인다. 메이슨 총리를 앞세우고 본격적으로 상류층의 칸들로 이동하면서부터 카메라는 커티스 일행에 밀착하는 대신, 그 무리에서 빠져나와 그 무리보다 먼저 그 칸들의 스펙터클을 구경하고 있는 것 같다. 윌포드는 커티스의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나열하지만, 그건 사후적으로 설득력을 얻는 설명일 뿐이다. 대신 나는 좀 엉뚱한 물음을 던지고 싶다. 커티스의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엔진칸까지 도달해야 하는 인물들의 심정과 상황의 구체적인 당위성이, 멈춰서 구경하려는 (카메라의 혹은 커티스의) 욕망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희망이냐 파국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남궁민수의 이야기와 커티스의 이야기. 환각의 세계와 혁명의 세계. 실재계와 상징계. <설국열차>는 이 두 세계를 충돌시키지 않는다. 이 점이 중요하다. 영화에서 둘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은 끝내 서로에게 연루되지 않는다. 그러니 아들을 찾아야 한다는 강력한 동력을 가진 인물들이 모두 죽고 난 뒤, 공유할 수 있는 동력을 갖지 못한 남궁민수와 커티스의 분리된 세계를 함께 앞칸으로 움직이려면, 달리 말해 두 이야기를 어쨌든 영화의 결말까지 붙들고 가려면 프랑코 같은 인물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죽은 줄 알았으나 신기하게도 매번 살아나서 남궁민수와 커티스를 뒤쫓는 이 남자는 이들이 유일하게 공유하는 적이다. 이 영화를 통틀어 그는 그 자체로는 가장 설득력이 약한, 그야말로 장르적으로 세공된 과한 존재로 종종 실소를 불러일으키지만, 실은 서사의 추진이 불가능해지는 지점마다 살아나 두개의 이야기를 앞으로 밀어붙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에 두개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영화가 그 둘의 간극을 내버려두고 있다는 점, 만나게 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게 중요하다. 엔진칸 앞에서의 남궁민수와 커티스의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혼잣말에 가깝고 그렇게 찍혔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엔딩은 갑작스럽고 당혹스럽다. 충돌 없이 나열되던 두개의 이야기가 열차가 폭발한 뒤, 갑작스럽게, 그러나 너무 자연스럽게 ‘생존자’라는 테두리 안에서 결합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두 세계의 충돌이 일으키는 모호함과 불안의 파편들을 대면하고 그 과정으로 열차를 달리게 하는 일이 지배자들을 물리치는 것이나 환각을 혁명으로 전환하는 것(남궁민수의 마지막 대사)이나 시스템 안에서의 혁명의 필연적인 실패를 냉정하게 체념하는 것(커티스와 윌포드의 만남)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어야 할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설국열차’는 확장된 환각과 실패한 환각, 시스템을 부순 혁명과 실패한 혁명, 감각의 혁명과 체제의 혁명 사이의 어딘가에서 불길한 얼룩으로 숨 쉬며 우리를 건드렸을 것이다. 남궁민수의 딸과 꼬리칸(커티스로 대변되는 세계)의 아들이 열차의 유일한 생존자로 손을 잡고 설원에 서 있는 장면이 희망의 시작인지 파국의 시작인지의 여부에 나는 솔직히 별 관심이 가지 않는다. 다만 충돌 없이 얻은 이 결말의 결합이 그 속이 텅 빈 가상처럼, 혹은 너무 때늦게 대면한 이야기의 시작처럼 보일 뿐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