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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니 스콧의 투신자살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쓰겠다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잠깐 놀라고 애도의 마음을 가졌을 뿐 곧 잊었다. 하지만 방향은 엉뚱한 순간에 휘었다.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전철을 타야 하고 그 전철을 타면 철교를 한번 건너야 한다. 내려다보니 흙탕물이었다. 토니 스콧이 뛰어내렸다는 LA 산페드로의 빈센트 토머스 다리 사진을 보고 생의 자의적 최후를 맞이하기에는 다소 황량하고 허름한 곳이 아닌가 생각했던 게 그 흙탕물 때문에 떠올랐다. 그는 왜 뛰어내렸을까, 나이 예순여덟살의 노인이 알려진 것처럼 불치의 뇌종양 때문에 낙담하여 그러한 것도 아니라면 혹시 사랑 때문이었을까, 하고 밥 먹는 도중에 동료에게 말했다가 쓸데없이 군다고 면박만 당했다.
2.
2003년 8월경 <4인용 식탁> 개봉 즈음에 <씨네21>은 ‘영화 속 영화 밖 자살’에 대한 글들을 실었는데 그때 남재일 선배가 자살의 유형에 관하여 쓴 인상 깊었던
[신 전영객잔] 송신과 수신의 액션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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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필모그래피
1986 <카라바지오>
1988 <대영제국의 몰락>
1989 <전쟁 레퀴엠>
1990 <정원>
1991 <에드워드 2세>
1992 <올란도>
1996 <여성의 도착(倒錯)>
1998 <러브 이즈 더 데블: 프랜시스 베이컨의 초상을 위한 스케치>
2000 <비치>
2001 <딥 엔드> <바닐라 스카이>
2002 <어댑테이션> <테크노러스트>
2003 <영 아담>
2005 <콘스탄틴> <브로큰 플라워>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2006 <스테파니 댈레이>
2007 <마이클 클레이튼>
2008 <줄리아>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번 애프터 리딩>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9 <
[신 전영객잔] 그/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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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에게
친구, 네가 그토록 열광하는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나도 드디어 보았어. 주말 아침 9시에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간편한 옷을 입고 집 근처 멀티플렉스 상영관으로 달려가 몇장 남지 않은 티켓 중 하나를 겨우 구해 보았어. 물론 나도 영화를 보기 전날에는 무슨 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흥에 겨워 전작 <다크 나이트>를 보며 복습했지만, 스포일러가 두려워 며칠 동안이나 인터넷조차 끊었다는 너 정도의 설렘은 아니어서인지 하여간에 엄청난 흥분보다는 약간의 기대를 안고 극장에 들어갔어.
사실 좀 싱겁게 들릴 게 빤하지만, 영화에 관한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나는 <다크 나이트라이즈>가 <다크 나이트>를 뛰어넘지 못했을뿐 아니라 훨씬 못 미치는 영화라는 평가에 공감하는 편이야. 이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배트맨 비긴즈>를 본 이후에 <다크 나이트>를 보았을 때 어떻게 전자의 그 엉성했던 영화가 이토록 흥미진진한 영
[신 전영객잔] 아이맥스가 시네마를 구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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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도 세상의 아이들은 이불을 덮어주는 부모에게 이야기를 조를 것이다. 어제 들려주고 읽어준 동화와 똑같은 얘기라도 아이들은 개의치 않는다. 아니, 도리어 숙지하고 있는 클라이 맥스에 이르면 신이 나서 “그래서 악어가 해적을 삼켰어!”라고 나서서 마무리 짓고 뿌듯하게 잠을 청하기도 한다. 과하지 않은 변주도 환영 받는다. 부모가 다정히 베드타임 스토리를 읽어주는 광경을 뒷날 미국영화에서나 본 세대인 나는, 누워서 동화를 읽다 눈치껏 전등을 끄는 아 이였는데 어둠 속에선 책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뒤채며 중얼중얼 이야기를 지어 내다 잠이 들곤 했다. 나는 내 자작 엉터리 픽션이 좋았는데, 독창적이어서가 아니라 책에 나오 는 진짜 동화를 그럴싸하게 표절하면서도 등장 인물의 외모와 말투를 내 취향에 맞게 갈아치울 수 있었기에 만족스러웠다. 아득히 잊었던 수십 년 전 잠버릇을 떠올린 건 <어메이징 스파이더 맨>이 절반쯤 흘러갔을 때였다. 앤드루 가필드가 분한 피터 파
[신 전영객잔] 네버엔딩 스토리의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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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헤이와이어>를 보며 어린 시절 본 액션영화들이 마구 섞이며 업그레이드되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주인공이 매력적이고 액션이 인상적이어서 상투적인 스토리 전개도 다 용서가 된 채로 몇몇 이미지들이 마음에 남아 가슴이 슬쩍 뛰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는 영화들 말이다. 절대적으로 이는 여주인공 말로리 케인을 연기한 지나 카라노의 신체 연기와 스티븐 소더버그의 능란한 연출 덕분이다. 미국 영화평론가 피터 트래비스의 표현대로 이 영화는 ‘앨프리드 히치콕이 만든 팸 그리어 영화’라는, 일급의 서스펜스 기교로 B영화를 만들고자 한 소더버그의 창작목표를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그것이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을 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다소 길게 말하고 싶은 이유이다.
날것 그대로의 액션
<헤이와이어>의 첫 장면, 말로리 케인은 한적한 시골 레스토랑에서 차를 따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밤을 새워 피곤하다고 투덜대는 건장한 청년이 그녀
[신 전영객잔] 순수 액션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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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학살에 관한 클로드 란츠만의 기념비적 다큐멘터리 <쇼아>가 개봉했을 때 이 영화에 가차없는 비난을 던진 건 장 뤽 고다르였다. “이 영화는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다르는 그렇게 비난했다. 고다르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학살이 이뤄졌던 가스실의 바로 그 순간의 현장이 독일군의 영화 카메라에 찍혔으며 그것이 세상 어딘가의 기록보관소에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기록물이라고 자처하는 <쇼아>가 그 이미지들을 보여주지도 않고 찾으려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다르는 힐난했다. 고다르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쇼아> 옹호론자 마르그리트 뒤라스와의 논쟁도 불사했다. 훗날 한 평자는 그것이 경험적인 검토와 무관하게 그의 유죄의식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세기의 매체인 영화가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해내지 못했으므로, 혹은 기록했다 하더라도 사실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에
[신 전영객잔] <두 개의 문>은 어떻게 빨간 잉크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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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은 절대 안 하겠다고 떠들고 다니더니, 결국 <폭풍의 언덕>을 하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당했어요.” 지난 1월 열린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폭풍의 언덕> 상영 전 공개토크에 나선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은 청중을 여러 번 웃겼다. 그녀는 관습적인 대답을 체질적으로 못 견디는 사람으로 보였다. 아놀드는 대뜸 이 영화가 싫다고 말했고 그럼 다른 전작들은 마음에 드느냐는 사 회자의 질문에, 기본적으로 본인의 작품을 다 싫어하는데 <폭풍의 언덕>을 제일 싫어한다고 대답했다. 완성도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 영화로 인해 2, 3년 동안 고통, 폭력, 사도마조히즘의 그늘 속에 살아야 했던 스트레스의 표현이었다. 극장의 불이 꺼지기 직전 안드레아 아놀드는 남말하듯 짓궂게 경고했다. “화면을 보고 얼마나 실망하시건 현실 풍경은 그것보다 훨씬 추레했어요. 여러분은 객석에서 두 시간 보면 그만이지만 난 몇주 동안이나 하루에 10시간씩 저기 있었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 전영객잔] 코스튬 드라마가 옷을 벗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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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다른나라에서>에 관해선, 늘 그랬듯이, 정한석 기자가 이미 훌륭한 글을 썼다. 나는 그의 도저한 구조적 분석을 따라갈 눈이 없다. 정한석이 그렇게 섬세하게 작품의 결을 음미하며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에 관해 내 식으로 써보고 싶어졌다. 반복과 차이, 중첩과 미끄러짐 등과 같은 그의 영화의 구조를 경유하여 읽는 방식과는 좀 다르게 나는 그냥 몇몇 뇌리에 남는 이 영화의 이미지만 갖고 쓰려고 한다.
우선, 이자벨 위페르. 그녀는 이 영화에서 안느라는 이름의 프랑스 여성으로 나와 1인3역을 한다. 내가 프랑스영화에서 본 그녀의 이미지, 또는 그녀가 젊었을 적 출연한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과 같은 영화에서 본 그녀의 이미지는 세고 차가우며 그만큼 불같은 여자였다. 여기서는 그런 이미지들이 다양하게 나열되면서 전반적으로 귀엽다는 인상을 주는 여인으로 나온다. 다른 나라 관객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관객은
[신 전영객잔] 우리는 모두 Nobody 아니면 Any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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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라는 이름의 세 여인이 각자 한번씩 다른 이유로 모항이라는 작은 해변을 찾는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홍상수의 영화 <다른나라에서> 중에서 3부에 등장하는 안느는 인근의 통찰력 깊은 스님을 만나 인생 상담을 하다 말고 갑자기 엉뚱한 부탁을 한다. 스님이 안느의 얼굴을 그려주겠다며 꺼낸 만년필을 보더니 그녀는 무턱대고 자기에게 그걸 선물로 달라고 한다. 스님도 좀 놀라고 스님을 안느에게 소개 해준 민속학자는 더 놀라서, 그건 이상한 행동이라며 민속학자가 안느를 나무라지만 그녀는 물러설 기색이 없다. 왜 그 만년필이 필요하냐고 이유를 묻자 안느는 그것으로 무언가 (글을) 쓸 것이라고도 하고 그냥 자기가 원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의 행동은 결국 “저분(스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님은 결국 만년필을 안느에게 준다. 그게 언젠가 민속학자가 스님에게 주었던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느가 해변으로 홀로 나갔을 때 펜션에 남은 스님과 민
[신 전영객잔] 나라는 나라와 당신이라는 나라의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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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업이 평론가니까 임상수의 <돈의 맛>을 봤다. 평일 조조 상영을 보는데 다른 관객은 뭘 기대하고 보는 것일까 궁금했다. 주부 관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개 서너 사람씩 동네 주민들끼리 온 것 같았다. 수다로 시끄럽던 객석은 영화가 시작되자 이내 조용해졌다. <돈의 맛>의 첫 장면, 주인공 주영작(김강우)이 윤 회장(백윤식)의 지시로 비밀금고에 들어가 돈뭉치를 담을 때 굉장한 스펙터클이 나오기 때문이다. 영작은 돈다발 더미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카메라가 그의 넋나간 모습에서 뒤로 빠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엄청난 돈다발들이 쌓여있다. 관객이 보고 싶은 스펙터클의 기대치를 처음부터 만족시키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윤 회장은 영작에게 몇 다발 넣어두라고 충고한다. 맛 좀 보라고, 다들 그렇게 한다고 말이다. 영작은 돈다발의 냄새만 맡고 주머니에 넣지는 않는다.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관객은 그저 눈요기만 한다. 우리의 관음증은 이런 천문학적
[신 전영객잔] 돈의 맛도 결국 관념이고 허상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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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딜로>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 헬만드에 나토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된 덴마크 병사들의 8개월을 촬영해 편집한 기록영화다. <디스커버리 채널> 다큐멘터리로 오인되기 십상인 영화 제목은 덴마크 군인들이 탈레반과 대치해 주둔하는 전진 작전기지 이름에서 나왔는데, 최첨단무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있음에도 적군 소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유사 감금 상태에 처해 있는 나토군의 상황은 궁지에 몰리면 갑피 속에 웅크려드는 동물 아르마딜로의 생태와 비슷하기도 하다.
야누스 메츠 페데르센 감독의 <아르마딜로> 는 이중의 의미에서 전방(前方)의 영화다. 그리 고 이 두 가지 전위성은 두개의 불안을 낳는다.
우선 페데르센 감독과 라스 스크리 촬영기사가 이끄는 팀은 반년간 목숨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 전장에 머물며 영화를 찍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린 페데르센은 당초 30분 길이 방송프로그램으로 기획된 <아르마딜로&g
[신전영객잔] 매끄러운 표면 뒤 다큐멘터리의 근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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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원래 잘 안되라고 첫사랑이지, 잘 되면 그게 첫사랑이냐, 마지막 사랑이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아 연애에 관한 한 만물박사로 행세한 <건축학개론>의 재수생 납뜩이는 정작 연애가 아닌 사랑에 관해서는 무지했던 것 같다. 마지막 사랑이라고 해서 다 잘되는 것이 아니다. 첫사랑에 관한 영화 <건축학개론>에 뒤이어 개봉한 마지막 사랑에 관한 영화 <은교>가 그걸 여실히 보여준다. <은교>의 70살 노시인 이적요는 17살 소녀 은교를 사랑하였으나 그 사랑은 잘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이적요는 그 사랑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그를 따랐던 제자 서지우를 죽음에 빠뜨렸으며 결국 은교도 얻지 못했다. <은교>의 마지막 장면을 보건대 은교는 이승에서 꿋꿋하게 자라날 것이지만 이적요는 저승으로 쓸쓸히 돌아갈 것이다.
<은교>는 그렇게 늙음과 젊음 혹은 유한적 삶과 육체적 쇠락 또는 실패한 사랑에 관한
[신전영객잔] 깨달음에 관한 슬픈 시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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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배우가 분장을 하고 영화에서 노역을 맡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박해일이 주연한 <은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 영화의 주제는 늙음과 관련이 있고 적어도 한국의 관객은 아무리 발달한 분장기술의 덕을 봤다고 해도 <은교>의 늙은 소설가 이적요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가 처음으로 입을 뗄 때 나는 연기 잘하는 배우 박해일도 고전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건 누가 봐도 젊은 박해일이 늙은 이적요를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영화가 텍스트의 논리를 충실히 따라가는 입장에서 매혹을 준다기보다는 텍스트 바깥의 관객 입장에서 다른 매혹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영화 중반에 늙은 이적요가 환상 속에서 청순하고 풋풋한 소녀 은교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이 나올 때 그것은 늙은 이적요의 환상이라기보다 배우 박해일이 본모습으로 나온다는 인상이 더 강했다. 실제로 함께 영
[신전영객잔] 이 육체성, 혹여 관념적이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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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해야겠다. 한두해 전부터 꾸준히 내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초조함이다. 쫓기고 있다는 이 감각은, 무선 통신망과 스마트폰으로 활성화된 소셜 미디어의 그물에 내 일상이 포섭됐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매일 밤 나는 오늘 보고 들었어야 마땅하나 미처 따라잡지 못한 뉴스와 지식의 양을 가늠하며 삿포로의 눈 치우는 인부처럼 망연자실하다. 때로는 희미한 자책마저 따른다. 어째서 책망까지 하는 걸까? 문제의 정보가 어디 먼 곳이 아닌 지척에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취하라고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좋은 노동자가 못 되어 불안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누리고 바람직하게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애석해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호강스런 스트레스라고 해도 행복하지 않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자진해서 가입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멤버에게 (은연중에) 요구하는 매너는 동시성과 즉각성이다. 뉴스채널 하단에나 흐르는 줄 알았던 속보의 띠가 머릿속에서 24시간 돌아가고
[신 전영객잔] ‘피로사회’로부터의 도피